버트란트 러셀의 ‘미소 짓는 살인자’
고등동물은 모두 기쁨을 표현하는 수단을 갖고 있지만 기쁘지 않을 때도 기쁨을 표현하는 것은 인간밖에 없다. 이것은 예의라 불리며, 미덕의 하나로 꼽힌다.
어린아이에게 보이는 가장 당혹스러운 사실 중의 하나는 그들이 기쁠 때만이 웃는다는 것이다. 손님들이 오면 아이들은 동그랗게 눈을 뜨고 불안해하면 바라본다. 손님이 재미있게 해주려 하면 아이들은 어른들의 바보같은 익살에 깜짝 놀라곤 한다. 그러나 조만간 부모가 그들에게 전혀 관심이 없는 사람들과 함께 있을 때도 즐거워하는 척하라고 가르친다.
예의상 웃음을 달고 다닌다는 점에서는 우리보다 동양의 나라들이 훨씬 더 심하다. 1868년까지 일본에서는 사회적 계급이 높은 사람은 위대한 인물의 면전에서 한 순간이라도 미소를 잃은 하급자를 죽일 수 있는 권한이 있었다. 가정에서는, 아내는 남편 앞에서 자식은 부모 앞에서 웃는 얼굴을 하여야 했다. 서구 여행객들이 일본인을 아주 쾌활한 민족으로 보게 된 것도 이 때문이었다. 사실은 적자생존의 보기라고 하겠다.
그러나 사회적 상급자 앞에서 지켜야 할 예의로 언제나 미소만 요구되는 것은 아니다. 예를 들어 한국에서는 임금을 알현하는 신하는 인금의 눈길이 자신에게 머무는 동안 몸을 떠는 모습을 보여야 했다. 임금이 마음만 먹으면 언제든지 자신을 처형할 수 있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음을 보여주기 위한 몸짓이었다.
미슷한 매너로 영국에서도 제대로 교육받은 집사는 주인과 함께 있을 때면 아무리 우스꽝스러운 일이 벌어져도 절대로 웃지 않는다. 하지만 영국의 예의는 모든 면에서 극동 지역의 예의와는 다르다. 중국에서는 연회에 참석한 사람들이 식사를 하면서 요란스럽게 쩝쩝거리고, 잔치가 끝날 때는 배불리 먹었다는 표시를 확실하게 하는 것이 예의였다.
사교상 예의 중에서도 가장 당혹스러운 형태의 하나는 남미 인디언들이 보여주는 것이다. 한 추장이 다른 추장을 방문하면 주인은 손님이 한 말을 반복한다. 손님이 한 말은 완벽함으로 다른 말을 덧붙일 것이 없다는 뜻이다. 손님이 ‘저는 서쪽에서 왔습니다.’라고 말하면 주인은 그 말을 받아서 ‘당신은 서쪽에서 왔습니다.’라고 화답하는 것이 예의이다. 손님이 저는 ‘강물을 따라 왔습니다.’라고 말하면 주인은 ‘당신은 강물을 따라 왔습니다.’라고 화답한다.
잠시 후면 이 불운한 손님은 더 이상 할 말이 떠오르지 않는다. 불편한 침묵이 한참 동안 흐르고 난 뒤에서야 일상적인 대화가 이루어 진다. 방문한 추장이 떠나기 전 30분 쯤 동안은 또 이와 같은 의례적인 대화를 되풀이 한다. 백인들이 이 정도로 높은 예의 관념을 가졌던 점은 결코 없었다. 그러나 지루한 파티에서도 내내 미소를 지어야 한다는 인식은 여전하다. 파티가 끝나고 집에 오면 턱 근육이 얼얼해질 정도이다.
미소로 지루함을 감출 수 있다는 사실을 터득한 사람은 다소 순수하지 못한 감정을 숨길 때도 미소를 짓는 경향이 있다. 햄릿은 숙부가 살인자라는 사실을 숨기기 위해 미소를 짓는 습관이 있다는 사실을 알고 충격을 받았다. 나는 살인자를 많이 알지 못한다. 그러나 지금껏 내가 알았던 사람들은 다소간이지만 미소에 중독되어 있었다. 햄릿의 숙부도 특별한 사람이 아니었고, 그냥 사람들이 보여주는 일반적인 사례에 불과하였을 것이다.
그러나 설영 모든 살인자들이 미소를 짓는다 하더라도 미소짓는 모든 사람이 살인자라고 추론해서는 안 된다. 세상은 이미 충분히 암울한데 나쁜 논리를 끌어와서 세상을 더 나쁘게 만들 필요는 없다.
(1932. 8. 17)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