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점프볼·한국체육언론인회 공동선정
한국농구 100년 빛낸 얼굴 100인
2007년은 이 땅에 농구가 도입된 지 100주년이 되는 해이다.
한국 농구는 일제치하에서 -모든 스포츠가 그러했듯이- 항일운동의 하나로 일본팀들을 꺾는 쾌감을 누렸고 해방 후엔 아시아 정상을 정복하는 기쁨을 맛보기도 했다. 신체조건의 불리함에도 불구, 우리의 여전사들은 세계선수권대회와 올림픽에서 2위의 쾌거를 이루기도 했다. 80년대 들어 농구대잔치를 탄생시켜 겨울철 스포츠로 뿌리내리며 인기스포츠로 각광받았고 야구, 축구에 이어 구기종목 사상 3번째로 프로를 출범시키기도 했다.
농구전문지 점프볼은 한국 농구 100주년을 맞아 한국 농구의 역사를 되돌아보는 특집을 연중기획으로 기획하여 게재하고자 한다. 그 첫 번째로 한국농구를 빛내고 발전시킨 선수와 지도자, 그리고 그늘에서 그들을 뒷바라지하고 후원해준 분들을 한국체육언론회(회장 노진호)와 공동으로 선정하여 소개한다.
선정기준으론 국내외서 두드러진 성적을 거두었거나 탁월한 실력을 갖춘 선수, 훌륭한 선수들을 많이 길러낸 지도자, 농구보급에 공헌이 큰 분, 농구행정에 업적이 많은 분들을 우선 250여명 골라내었다. 이들을 대상으로 10년이상 농구를 취재해온 베테랑 농구기자들이 투표를 통해 100인을 선정하였다.
[선정위원]
조동표 (스포츠 평론가/전 일간스포츠 논설위원) | 오도광 (전 일간스포츠 편집국장) | 조광식 (한국 체육언론인회 부회장/전 MBC 스포츠 국장) | 이민우 (명지대 체육부장/전 중앙일보 체육부장) | 최화경 (동아일보 사업국장/ 전 동아일보 체육부장) | 박진환 (점프볼 편집인/전 경향신문 체육부장) |허진석 (중알일보 체육부 차장) | 손대범 (점프볼 취재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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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이성구(1911년~2002년) '한국농구의 아버지'
‘한국농구의 아버지’로 불리는 이성구는 한국농구 근대화에 누구보다도 힘써왔던 인물이다.
1911년 충남 천안출생으로 휘문고보와 연희전문(현 연세대)를 거쳤으며, 초창기 농구가 성공적으로 자리를 잡는 데 백방으로 노력했다. 1936년에는 염은현, 장이진과 함께 베를린 올림픽에 출전했다. 한국농구선수로서는 사상 최초였다.
45년에는 대한농구협회를 창립해 초대 이사장으로 취임했으며, 60년대말에는 외국인코치(찰스 마콘 주한미8군 소령) 영입을 강력하게 추진하면서 대표팀의 기량을 한 단계 끌어올리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84년 한국농구코치협회 회장, 98년 WKBL 초대총재를 지낸 것을 비롯, 대한체육회 이사, 연세체육회 부회장 등 체육행정가로도 활발히 활동했던 이성구 선생은 문화포장, 국민훈장 목련장, 대한민국체육상 공로상 등을 수상했다. 또, 고령의 나이에도 농구를 향한 한결같은 사랑과 관심을 보이며 농구전술서 「농구의 기본적 배경. Winner Basketball」을 99년에 펴냈다.
(2) 필립 질레트·Phillip Gilett(1872년~1939년) '한국체육의 전도사'
질레트는 ‘한국 체육의 전도사’로 불린다.
1905년에는 야구를, 1907년에는 농구를 처음 전파해 오늘날 한국 스포츠의 기틀을 마련했던 그는 1901년 황성YMCA 초대총무로 부임, ‘길례태(吉禮泰)’라는 한국이름까지 지을 만큼 한국을 사랑하며 일제에 항거했던 민족주의자들을 도운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미국 일리노이주에서 태어났고, 콜로라도 대학과 예일 대학에서 종교학을 공부한 후 예일대 YMCA 부목사로 재직 중에 1901년 한국에 건너왔다.
한편 그는 1908년 12월 3일 현재 종로에 있는 YMCA 회관 준공에 앞장서기도 했다. 이곳은 한국농구가 최초로 치러졌던 곳으로도 알려졌다.
(3) 윤덕주(1921년~2005년) '한국농구의 어머니'
‘한국농구의 대모’ 윤덕주는 21년 대구에서 태어나 숙명여고를 다니며 농구선수 생활을 시작하여 일제 강점기 최고 스타로 이름을 날렸다. 그는 공주사범학교를 졸업한 후 1남7녀를 낳아 기르며 교사생활을 하기도 했다.
해방이후 농구협회에 관여하기 시작, 농구협회 부회장, 초등연맹 회장, 대한체육회 부회장, 어머니농구회 회장 등을 역임했고 각종 국제대회에 단장을 도맡아 선수들의 뒷바라지에 심혈을 기울였다.
여장부로 불릴 만큼 배포가 컸고 남자 못지 않은 주량을 과시하기도 했다. IOC 공로훈장을 비롯 서울시 문화상, 아산체육상, 조정순 체육상 등 수많은 훈장과 공로상을 받았으며 대한농구협회 명예회장을 지냈다. 타계 하루전에도 여자 프로농구 개막전을 관람하는 등 생의 마지막 순간까지 농구에 대한 애정을 과시했다.
(4) 냇 홀먼·Nat Holman(1896~1995) 'Mr. Basketball'
1960년 한국을 찾았던 냇 홀먼은 ‘Mr. Basketball’이라 불린 인물로서, 64년 미국 농구 명예의 전당에 헌액된 초창기 프로농구의 거장이다.
1920년대 오리지널 셀틱스에서 선수와 지도자로 활동했고, 현역시절에는 패스와 드리블 능력에 있어 혁신을 가져온 인물 중 하나였다. 그는 자신이 현역시절 사용했던 - 그러나 국내에서는 당시 금기시되어있던 - 비하인드 백 드리블 등의 화려한 개인기를 전수하기도 했으며, 기브-앤-고, 시져스 플레이, 박스-아웃 등을 전파하며 한국농구가 한 걸음 더 발을 내딛는데 기여했다.
(5) 존 번·John Bunn(1898~1979) '미국농구계의 거장'
존 번은 미국농구계의 거장이다. 64년 미 농구 명예의 전당에 이름을 올린 존 번은 55년 9월 한국에 입국해 우리나라 농구가 한 단계 발전하는데 기여했다. 기술적인 면에서는 한 손으로 던지는 슛을 전파했고, 전술적으로는 풀코트 프레스를 비롯한 지역방어 전술을 전수했다. 미국에서 그는 1921년 캔자스 대학을 졸업한 후 모교의 코치로 부임했으며 30년에는 스탠포드 대학의 지휘봉을 잡은 뒤 36년부터 38년까지 퍼시픽 코스트 컨퍼런스 우승을 이끌었다. 또 대외적으로 ‘미국 농구대사’로 불리며 한국뿐 아니라 일본, 하와이, 프랑스, 독일 등에서도 그 당시 선진기술을 전수하며 명성을 떨쳤다.
(6) 김영구(1897년~작고) '한국 농구의 기틀을 잡다'
김영구는 YMCA에서 반하트에게 농구를 배워 우리나라 농구 제1의 지도자, 이론가, 기고가(寄稿家)로 명성을 떨쳤던 한국 농구의 대부(代父)적 인물이다.
전주에서 교편을 잡다 농구에 매료되어 상경, 평생을 농구와 함께 하면서 YMCA농구팀 감독으로 수차례 해외 원정을 이끌었고 1931년 조선농구협회를 창설, YMCA에 의해 움직이던 농구행정을 협회란 조직으로 옮긴 장본인이다.
(7) 전성진(1906년~작고) '한국 최초 농구 선수'
전성진은 YMCA에서 농구를 배운 우리나라 최초의 농구 선수다. 1920년 우리 농구사상 최초 해외 원정(일본)을 했던 YMCA농구팀 일원이었다.
대한농구협회 제4대, 제9대 집행부에서 이사장(전무이사), 제12대 집행부에서는 부회장에 선임되어 우리나라 농구행정 일선에서 큰 활약을 하면서 YMCA회원으로 농구 지도에도 헌신했다.
(8) 정상윤(1908년~작고) '체육행정의 달인'
정상윤은 우리나라 농구 제1의 이론가며 체육행정의 달인이다. 농구협회는 물론 대한체육회에서 행정 책임자로 활약, 1948년 런던 올림픽에 선수단 단장 겸 농구 감독을 맡기도 했다.
경성제1고보를 졸업, 경성제대 법문학부에 합격했지만 농구가 좋아 연희전문으로 옮겨 농구선수로 활약, 화제를 모았고 일본 호세이대학에 다니면서 틈틈이 현해탄을 건너와 연희전문 농구팀을 지도했던 농구 마니아였다.
(9) 이상백(1904~1966) '대학농구 창설자'
이상백은 한국뿐 아니라 일본의 농구 발전에도 크게 이바지한 인물이다.
대구 출생의 이상백 박사는 대구고보를 거쳐 일본 와세다대학교 부속 제일고등학원을 졸업, 1924년 와세다대학교 사회철학과에 입학했다.
그가 농구와 본격적으로 연을 맺은 건 같은 해 일본에서 대학농구연맹이 결성되면서부터였다. 와세다대학 농구단 감독으로 올라선 이상백 박사는 36년 베를린 올림픽에 농구가 채택되도록 노력하는 한편, 이성구, 장이진, 염은현이 36년 베를린 올림픽에 출전할 수 있도록 이들을 적극적으로 알렸다.
또, 그 역시 농구심판으로 뽑혀 일본 국제심판 1호로 등재됐다. 매년 봄, 한국과 일본에서는 그의 업적을 추모하기 위해 ‘이상백배 대학농구대회’가 개최되고 있다.
(10) 염은현(1914~1999) '베를린 올림픽 도전'
염은현은 이성구, 장이진과 함께 36년 베를린 올림픽에 출전, 한국 농구인의 기상을 널리 알린 바 있다.
서울 배재고보를 거쳐 1933년, 연희전문에 입학한 그는 골 밑에서 누구보다도 악착 같이 활약했던 선수로 알려졌다. 올림픽이 치러진 36년 1월에는 전 일본 농구선수권대회에 출전해 연희전문의 우승을 이끌었다. 당시 핵심멤버 역시 염은현, 이성구, 장이진이었고, 그들이 꺾은 팀 중에는 대회 3연패에 도전하던 당시 일본 최강팀, 도쿄제국대학도 있었다.
연희전문의 이 우승 덕분에 세 선수는 대한민국을 대표하여 베를린 올림픽에 나설 수 있었다.
산업은행팀의 중요멤버가 된 안병석은 1954년의 제2회 아시아경기대회(마닐라)와 56년의 제16회 올림픽(멜버른)에 출전한 다음 은행에 재직하면서 성신여고 농구부를 지도, 한국이 자랑하는 가드 김추자를 길러냈다 김추자는 1967년 세계여자농구선수권대회 한국 준우승의 주역이었다. 조흥은행 중견간부로 정년퇴직후 1984년에 별세했다.
(11) 전규삼(1915~2003) '스타 가드 양성한 농구계의 마에스트로'
전규삼은 ‘송도’를 가드 명문으로 탄생시킨 주역이다.
1915년 개성 태생으로, 엄격한 지도자상보다는 따뜻하고 인간미 넘치는 가르침으로, 감독보다는 ‘할아버지’란 호칭으로 제자들에게 다가갔으며, 유희형, 김동광, 이충희, 강동희, 홍사붕, 신기성, 김승현 등 수많은 국가대표 가드를 배출해 한국농구의 발전을 도왔다.
그는 당시로는 드물게 일본 동경의 법정대학에 유학을 다녀온 후, 개성 송도고의 교사로 재직하며 농구지도자로서의 길을 걸어왔다. 이후 전옹은 한국전쟁을 피해 월남, 61년 인천에 송도중·고를 개교해 다시 학생들을 가르치기 시작했다. 송도중고에서 본격적으로 농구코치로 나선 것은 66년의 일이었다.
(12) 변승목(1920~) '70여년 고락을 함께한 농구의 산증인'
변승목은 20년 평양에서 태어나 평양 숭인상업학교와 연희전문학교를 졸업했다. 이미 중학시절부터 농구선수로 활약한 그는 대학 졸업후 조흥은행에 입사하여 선수생활을 계속했으며 은퇴후엔 대한통운 감독을 지냈다. 60년 제1회 ABC대회에 총무로 참가한 이후 각종 국제대회에 코치, 감독, 단장으로 참가하는 등 70여년을 농구와 고락을 함께했다.
86년부터 10여년동안 여자실업연맹 회장을 지내며 여자농구의 전성기를 이끌었고 71년부터 농구협회 전무-부회장으로 25년을 봉사하는 등 한국농구의 산증인이기도 하다.
(13) 신재숙(1916~) '한국농구인 동우회 창설자'
신재숙은 16년 서울태생으로 중동학교와 보성전문에서 농구선수로 활약했다.
39년 일제시대에 직우농구클럽을 조직하는 등 운동을 계속하다 해방 이후 대한농구협회 재건 준비위원으로 참여하여 농구협회 초대이사를 지냈다. 58년 국제심판 자격을 획득했으며 62년 자카르타 아시안게임땐 농구국가대표 감독으로 참가하여 동메달을 따냈다.
한국농구인 동우회를 창설하여 초대 부회장을 지냈으며 농구협회 경기위원장, 고문을 역임했다.
현존하는 최고령 농구인으로 지금도 KBL 자문위원으로 활약하고 있다.
(14) 강재권(1917년~작고) '농구행정 근대화를 앞당기다'
강재권은 농구 선수 출신이 아닌 사람으로 무려 17년이란 긴 기간 농구행정을 이끌었다. 1964년 도쿄 올림픽 이후 대한농구협회가 이병희(李秉禧)회장 체제로 재편되면서 서울고등검찰청 사무국장 신분으로 전무이사에 발탁, 5년 동안 전무이사, 그 뒤 10년을 부회장으로 농구행정 총수 노릇을 했다. 특유 카리스마 때문에 농구인들과 마찰도 간혹 있었지만 농구행정을 근대화하는데 크게 기여한 것은 자타가 공인하고 있다.
(15) 안태경(1910~작고) '보성전문 전성기 주역'
안태경은 1910년 평안도 신의주에서 태어났으며 일찍부터 서울로 유학, 보성중학과 보성전문을 다니며 운동했다. 31년 대학에 입학후 당시 최고 권위의 전조선농구선수권대회서 우승하는 등 보성전문의 전성기를 이끌었으며 당시 국가대표격인 전조선 농구단에 발탁되기도 했다.
그는 만능 스포츠맨으로 축구, 럭비선수로도 활약했다. 대학 졸업후엔 당시 실업팀이 없어 철도청에서 일반 직원으로 근무했으며 80년대 고대농우회 회장으로 고대농구 60년사를 펴내기도 했다.
(16) 임동수(1909~1956) '보성전문의 든든한 후원자'
1909년 충북 진천생. 서울의 중동학교를 졸업, 농구부 창단 3년째인 1931년 보성전문에 입교, 농구부에 몸담았다. 동기에는 송기우, 김학주, 안태경, 김진악, 손피득 등 보전 초기의 황금시대를 구축한 쟁쟁한 멤버들이 있어 그들 틈 바구니에서 임동수의 농구기술은 돋보이지 않았다.
선수보다는 주무격으로 팀을 보살피다 이론가로 성장하여 1936년부터 보전팀의 코치를 맡아 1937년에 조득준, 오수철 등 평양 5인방을 스카우트하는데 성공, 8.15전의 보전농구 황금기를 구축하였다. 이론가로서 편협하지 않아 1930년대 전반, 평양 중등농구의 리더 강진구의 이론이 뛰어나다고 깨닫자 37년 여름, 팀을 그에게 맡겨 풀코트 프레싱과 매치업존을 터득케하여 1938년부터 40년까지 보전이 3회 연속 전일본 종합선수권을 차지하는데 결정적으로 기여하였다. 1940년 숙명여고 교사이며 코치로 취임한 이래 여러 여고와 실업팀을 지도한 끝에 1956년에 별세했다.
(17) 장이진(1917년~작고) '여자농구를 세계정상으로 이끈 지도자'
장이진은 우리 여자농구를 세계정상으로 이끄는데 선봉에 섰던 농구 지도자. 그는 60년대 초반에서 70년대 중반까지 상업은행, 제일은행의 사령탑을 맡아 여자 농구의 황금기를 열었다. 그는 또한 평양 광신상업학교, 연희전문, 일본릿쿄대학을 거치면서 뛰어난 농구 선수로 명성을 떨쳤다.
1936년 전일본농구선수권대회를 제패한 연희전문 주축선수. 같은 해 베를린 올림픽에 이성구. 염은현과 함께 일본 대표로 출전한 바 있다.
(18) 안병석(1923~1984) '런던올림픽 유일의 대학선발 선수'
1923년 충남 서산 출생. 1936년 휘문고에 입학, 허약체질을 강화하기 위해 농구를 시작하여 명 포워드로 자라났다. 휘문때 신장이 커지면서(180cm), 본인의 노력이 더해져 그의 농구기량은 일취월장하였다.
좌우코너에서 던지는 사이드 슛이 특히 정확하였는데, 진면목을 발휘한 것은 1946년에 고려대학에 입학하면서 부터. 이혜재(포워드), 고세태(센터), 이인성(가드), 김성태(가드)로 이뤄진 무적 고대팀의 일각을 차지하면서 1947년의 전국종합선수권대회 우승을 필두로 50년의 6.25로 인한 중도 휴학때까지 숱한 경기를 승리로 이끈 주역이었다.
1948년의 런던올림픽에는 대학 재학 선수 중 유일하게 대표로 선발되어 출전했다. 6.25와중에 창단된 산업은행팀의 중요멤버가 된 안병석은 1954년의 제2회 아시아경기대회(마닐라)와 56년의 제16회 올림픽(멜버른)에 출전한 다음 은행에 재직하면서 성신여고 농구부를 지도, 한국이 자랑하는 가드 김추자를 길러냈다 김추자는 1967년 세계여자농구선수권대회 한국 준우승의 주역이었다. 조흥은행 중견간부로 정년퇴직후 1984년에 별세했다.
(19) 오수철(1917~작고) '보전농구 황금기 구축'
1917년 전북군산 출생. 평양 숭실중학을 졸업하고 1937년 평양출신 5인방 중의 한 명으로 보성전문에 입학, 보전농구 황금기를 구축하였다. 숭실중학에서는 강진구 교사의 지도로 센터로 활약, 1936년 전일본 실업중등농구를 제패한 조득준의 평양숭인상업과 쌍벽을 이루는 강팀의 주역이었다.
170cm의 단신이었지만 탄력이 좋아 센터를 맡았는데, 숭실중학의 동료에는 보전과 함께 진학하는 가드 오중궐이 있었고 1960년대 초반 한때 박신자의 상업은행팀의 감독을 맡은 김광일이 있었다. 김광일의 원명은 김일성이었으나 1946년에 개명을 강요당하여 김광일로 바꾸었다.
오수철은 보전진학 후 조득준이 센터가 되면서 포워드로 자리를 옮겨 38년~40년에 걸쳐 전일본 종합농구를 3연패하는 주역으로 활약하였고 보전졸업 후 경성부청팀을 거쳐 1948년의 런던올림픽에 대표로 출전하였다.
(20) 이상훈(1920~작고) '테크닉 뛰어난 명포워드'
1920년 개성출생. 서울의 경기상업 재학중 농구부에 적을 두어 선배들의 아마추어적인 지도를 받으며 농구의 모든 테크닉을 터득, 명 포워드로 성장하였다.
연희전문 상과에 진학해서는 학업과 농구를 양립시하는 성실한 학생생활을 보냈으며 8.15전에는 조흥은행원으로 근무하다 해방 후 이화여고 지도자 겸 선수로 활약하였다. 1948년 런던올림픽에는 대표팀의 임원으로 출전하였고, 6.25 와중의 1952년에는 조선운수팀의 코치 겸 선수로 분전하였다.
54년 부산지검팀이 출범하자 전업 코치생활에 돌입, 공군(남자), 국민은행(여자), 상업은행(여자)팀을 지도하다가 67년 세계여자선수권 준우승때의 코치를 맡았고, 이듬해 박신자 등 한국농구를 지탱하던 일선 선수들이 모두 은퇴한 뒤의 대표팀의 코치를 맡아 제2회 아시아 선수권대회에 출전해서는 슬기롭게 대처하여 우승을 일구어냈다.
73년 모스크바에서 열린 유니버시아드 출전한 여자팀의 감독을 맡아 3위 입상의 수훈을 세웠으나 그 후 중동지역에 감독으로 부임하여 객사하였다.
(21) 윤환섭(1917~작고) '농구가족의 탄생'
윤환섭은 17년 서울 출생으로 휘문고와 보성전문에서 선수로 활약했다.
그는 보성전문 재학중 소속팀을 2년 연속 전국 최강으로 이끈 베스트 멤버였으며 해방이후에는 이화여대, 동덕여대, 한양공고, 경복고 등에서 코치로 활약했고 국제심판으로 20여년 코트를 누볐다.
그는 특히 선로-평로 두 아들을 비롯 외손녀 오세자, 여동생 딸과 손녀 정미라-김영선 모녀 등 아들 딸 손주 사위 등 20여 명을 농구가족으로 길러내 화제를 모으기도 했다.
<농구부자> (22) 김정신(1919~2001) '한국은행 농구단의 산파'
김정신은 1919년 평양에서 태어나 평양 광성고등학교와 서울 연희전문대학을 다니며 농구선수생활을 했다.
그는 일제시대에도 전조선 대표선수로 뽑힐 만큼 두드러진 실력을 과시했으며 해방후 48년 런던 올림픽과 52년 아시안게임땐 당당히 태극마크를 달고 출전했다.
그는 이미 49년 한국은행 남자팀 창단멤버로 은퇴 후엔 감독을 역임했으며 56년엔 한국은행 여자농구팀을 창단하여 초대 감독을 맡는 등 한국은행 농구단의 산파역할을 하기도 했다.
또 56년 멜버른 올림픽때는 37세의 나이로 대표팀 사령탑을 맡아 지도력을 인정받았다. 그는 농구협회 이사를 지내기도 했다. 그의 아들인 KBL 김인건 경기본부장은 연세대와 한국은행에서 선수생활을 하는 등 아버지의 전철을 그대로 밟아 부자 농구선수로도 유명하다.
<농구부자> (23) 김인건(1944~) '포인트가드의 효시'
한국 최초의 포인트가드로 평가되고 있는 김인건은 경복고와 연세대를 거쳤고, 66년 한국은행에 입단했다. 태극마크는 처음 단 것은 62년 제4회 아시안게임부터였다.
이후 국가대표로 10년(62~71년), 국가대표 감독으로 14년(77~90년)간 활약하며 한국농구의 발전을 이끌었다. 그동안 69년 아시아선수권대회, 70년 아시안게임의 우승을 이끌었다.
77년 삼성전자 감독을 맡은 김인건 본부장은 임정명, 진효준, 김현준 등을 이끌고 정상에 올랐으며, 84년과 87년에 농구대잔치 지도상을 수상했다. 이후 안양 SBS 감독을 맡은 바 있는 그는 태릉선수촌 촌장, 대한농구연맹 부회장을 거쳐 KBL 경기본부장직에 올랐다.
<농구부자> (24) 조득준(1915~1958) '한일농구 장악한 당대 최고의 센터'
조득준은 숭인상업을 졸업한 당대 최고의 센터였다.
국내에서뿐 아니라 일본과 캐나다 등을 상대하면서도 대단한 기량을 발휘했다. 특히 40년에는 조선농구대표팀의 일원으로 출전한 캐나다 농구대표팀 초청경기에서 맹활약하며 팀의 29-27, 역사적인 승리를 이끌었다.
또, 1938년부터 1940년까지 3대회 연속 전일본종합농구선수권대회를 평정하는 보전농구부의 주력센터였다. 더 대단했던 건 그 이후 일본 릿쿄대학으로 유학을 가서도 같은 대회에서 3년간 또 우승을 시킨 것이다.
그러나 조득준의 농구인생은 애석하게도 큰 업적만큼이나 짧았다. 58년 택시로 귀가하다 불의의 교통사고로 세상을 떠났다. 84년 올림픽에서 여자대표팀을 은메달로 이끌었으며, 현재 서울 삼성 단장을 맡고 있는 조승연씨의 부친이기도 하다.
<농구부자> (25) 조승연(1944~) '미다스의 손'
1940년대 농구스타였던 조득준의 아들인 조승연은 서울고와 고려대를 거쳤고, 기업은행에서 선수생활을 했다. 1967년부터 69년까지 국가대표 가드로 활약하며 김인건, 신동파 등 당대 스타들과 한솥밥을 먹었다.
1977년 삼성 여자농구단 창단코치로 지도자로 발을 들여놓은 뒤 이듬해 감독에 올라 20년 가까이 삼성 벤치를 지키며 농구대잔치 6회 우승을 이끌었다. 86년부터 88년, 91년과 95년, 97년에는 농구대잔치 지도자상을 수상했다. 또, 84년 LA올림픽에 대표팀 감독으로 한국여자농구팀을 이끌고 나가 한국여자농구 최고 성적인 은메달의 쾌거를 이뤄냈다.97년에는 고사직전에 놓인 한국 여자농구의 프로 출범(WKBL)에 앞장서며 소생의 발판을 마련했고, 이후 전무이사와 부총재를 역임하며 한국여자농구를 한 단계 끌어올려 놓았다. 2005년 한국남자프로농구(KBL) 서울 삼성 단장으로 취임, 2005-2006시즌 팀의 우승을 도우며 경영인으로도 이름을 날렸다.
(26) 김영기(1936~) '한국농구계에 큰 획을 긋다'
배재고와 고려대 법대를 졸업했다. 국가대표로 56년 멜버른 올림픽과 64년 도쿄 올림픽에 출전했다.
현역생활은 농업은행과 기업은행에서 보냈고, 빼어난 농구 센스와 개인기를 앞세워 대표팀의 에이스 역할을 맡았다. 비록 국가대표 시절에는 우승과 연이 닿지 않았지만, 국가대표 감독으로서의 김영기는 우승뿐 아니라 대한민국 농구역사에 큰 획을 그은 인물로 이름을 남겼다.
69년 한국남자농구 역사상 최초로 아시안게임 우승을 이끈 것이다. 또, 70년에도 아시아선수권대회에서 대표팀에 금메달을 안겼다.
한국 프로농구 출범의 주역으로 KBL전무이사와 부총재를 거쳐 2002년부터 2004년까지 KBL 총재로서 농구 발전에 크게 이바지했다.
(27) 조동재(1921~작고) '아시아농구연맹 사무총장 역임한 국제통'
조동재는 21년 서울에서 태어나 40년 경성제국대학에 입학했으나 학병지원을 거부하다 제적당하는 아픔을 겪었다. 하지만 뛰어난 어학실력 덕분에 해방후 정부의 국외홍보업무를 담당했고 54년 아시아재단 한국지부 창설때 초대총무를 맡아 각분야의 후원사업을 전개했다.
그는 특히 체육계를 위해 55년 저명한 농구지도자 존 번 박사를 초청하여 젊은 대학생 위주의 학생군을 조직하여 한국 농구의 근대화에 크게 이바지했다. 이를 계기로 그는 농구협회 이사로 취임 국제 섭외업무를 담당했으며 68년-84년 약 16년 동안 아시아 농구연맹 사무총장을 역임하면서 한국 농구 발전에 크게 이바지했다. 그는 84 LA올림픽과 88서울올림픽 당시 경기운영 전반을 책임지는 등 체육계에 남긴 공적이 지대하다.
(28) 이병희(1926~1997) '농구를 사랑했던 정치인'
이병희는 26년 경기도 용인에서 태어나 삼일중학- 육사-경희대를 졸업하고 정계에 투신하여 제6대부터 무려 7차에 걸쳐 수원에서 국회의원을 지낸 정치인이다.
그는 64년 농구협회장을 맡아 뒤늦게 농구에 심취한 뒤 무려 16년 동안 4대에 걸쳐 회장을 연임하며 71년부터 아시아농구연맹회장과 세계연맹 부회장을 지내는 등 농구와 깊은 인연을 맺었고 농구에 대한 후원을 아끼지 않았다.
군출신으로 다혈질의 성격을 지닌 그는 70년 세계선수권대회에 단장으로 나가 브라질과의 경기도중 심판의 오심에 흥분하여 VIP석에서 코트로 돌진하며 욕설을 퍼부어 경비원이 출동하는 촌극을 연출하기도 했다.
(29) 한경택(1922~1999) '죽음도 초월한 농구 열정'
1999년 8월, 한 농구원로가 대한농구협회에 한통의 유서와 1천만원의 성금을 보내고 타계했다.
유서엔 열악한 환경의 농구선수에 대한 장학금으로 써달라는 내용이 적혀 있었다.유족은 장례를 치른 후 고인의 뜻에 따라 1천만원을 보태 2천만원의 꿈나무 농구 장학금을 만들었다. 고 한경택 농구협회 보급위원장. 그는 41년 일제시대때 경기상고를 졸업하고 상업은행에 입행한 후 59년부터 상업은행 농구단을 지도했다. 그는 63년 제4회 세계여자농구선수권대회에 상업은행 단일팀을 이끌고 참가, 13개국 중 8위를 차지했다.
감사로 퇴임하기까지 40여년을 상업은행에서 근무하며 농구협회 재무이사, 상벌위원, 보급위원장을 맡아 농구발전에 힘을 보탰다. 97년 75세의 나이로 존스컵 단장을 지내기도 했다.
(30) 이경재(1927~작고) '현대농구단 초대 감독'
1925년 서울 출생. 휘문고에서 농구를 시작하였다. 포지션은 슈팅가드. 1945년에 연희전문에 진학, 강력 연전팀의 한 축을 이루면서 국내 성인농구계에 화려하게 등장하였다. 투지 좋고 플레이가 과감하고 민첩해 주목을 받았으며, 졸업 후에는 조선운수 부산지검 팀의 선발멤버로 1956년까지 활악하였다.
현역 은퇴 후에는 모교인 연세대 코치를 맡아 수많은 우수선수들을 육성, 배출하였고, 1960년대 후반에서 70년대 초반에 걸쳐 호남비료, 조흥은행 등의 여자산업팀 감독을 맡아 수완을 발휘하였다. 그 사이 1967년의 도쿄 유니버시아드에는 여자대표팀을 이끌어 우승하였고, 68년의 멕시코 올림픽에는 남자농구팀 감독을 맡았다.
1971년 및 75년 제6, 7회 세계여자선수권대회에서 잇달아 대표팀 감독을 맡아 팀을 이끌었고 1978년 현대그룹이 남자실업팀을 창단하자 초대 감독에 취임하여 팀 강화에 힘썼다.
(31) 고세태(1925~작고) '한국 제1의 파워 센터'
1925년 개성 출생. 개성 송도고교 재학 중 농구를 시작하여 40~50년대에 걸쳐 한국 제1의 센터로 활약했다. 182cm의 신장에 90kg의 체중을 가진 우람한 체격은 당시 한국농구계로서는 누구도 비길 수 없는 거구였다. 그 몸집을 이용한 포스트 플레이는 정확하고 출중하였다.
1946년 초, 보성전문에 입학, 이혜재, 안병석, 이인성, 김성태와 함께 구성된 강력한 농구팀의 중심에 서면서 그의 플레이는 더욱 돋보여 대학으로 승격한 고대팀이 47년의 종합선수권을 차지하면서부터 부동의 한국 제1의 센터 자리를 차지하였다.
1948년의 런던올림픽에도 고대동기생인 안병석과 함께 대표로 선발되었으나 독감을 앓아 불행하게도 탈락하였다. 그러나 52년 산업은행에 입행, 창단된 팀의 중심에 서면서 능력은 더욱 빛나 54년이 제2회 아시아대회와 56년의 멜버른 올림픽에 대표로 선발되어 활약하였다.
(32) 김상하(1926~) '농구 르네상스 연 수장'
김상하는 26년 출생으로 경복고와 서울대 정치학과를 졸업한 후 49년 합자회사 삼양사에 입사한 이래 줄곧 (주)삼양사에 몸담아 현재 회장으로 재직 중이다. 그사이 12년이나 대한상의 회장을 역임했고 산업연구원 이사장, 한일경제협회 회장등을 지낸 기업인이다.
하지만 그는 경복고 재학시절 농구선수로 활약했고 85년부터 3대에 걸쳐 12년 동안 대한농구협회 회장으로 재임하며 농구계에 커다란 영향을 끼쳤다. 특히 농구대잔치를 성공적으로 이끌며 해마다 3억원이상 출연하여 협회 기금을 50억여원이나 조성하였으며 프로농구 출범당시엔 설립준비위원장을 맡아 KBL 탄생의 한몫을 담당했다.
(33) 강병건(1929~)' 한국농구인 동우회 회장'
강병건은 29년 서울에서 태어나 대동상고와 홍익대를 다니며 농구선수로 활약하다 한국은행에 입사하여 선수생활을 계속하였다.
58년 도쿄 아시안게임땐 국가대표로 선발되어 태극마크를 달기도 했으나 은퇴 후엔 금융인으로 명성을 날렸다. 한국은행 지점장을 지내다가 강원은행으로 옮겨 강원은행 상무, 감사, 전무를 거쳐 강원은행장 등을 역임했다.
춘천가정법률 상담소 이사장과 국제 키피탄 한국본부 총재를 지내며 사회활동을 하다 최근엔 한국농구인 동우회 회장과 이성구 기념사업회 회장을 맡아 꿈나무 장학금을 조성하는 일에 앞장서고 있다.
(34) 이우재(1931~) '황혼의 투혼'
1931년 서울출생의 이우재 선생은 경복고와 고려대를 졸업, 이후 지도자로서 한국농구 발전에 이바지해왔다. 56년부터 2003년까지 지도자로서 활발히 활동했으며, 85년부터 87년까지 말레이시아 국가대표팀 감독 및 기술 고문을 역임했고, 93년부터 95년에는 일본 여자농구 국가대표팀의 기술 고문을 맡았다.
국내에서는 현대 프로농구단 기술 고문을 맡았으며, 2002년에는 울산 모비스 프로농구단 코치를 맡아 국내 최고령 코치(72세)로 이름을 올렸다. 또한 전술연구 활동에도 깊은 관심을 두어 국내와 일본에서 많은 전술집을 출간해왔다.
(35) 황태석(1931~작고) '구수한 입담꾼'
31년 서울에서 태어나 배재고와 고려대를 졸업했다. 54년 마닐라 아시안게임에 국가대표로 출전하는 등 각종 국제대회에 태극마크를 달고 참가했다.
산업은행 감독과 서울 신탁은행 코치 감독을 지내기도 했으나 국제심판으로도 활약했다. 하지만 그는 64년 도쿄올림픽때 농구중계 해설위원으로 마이크를 잡은 이후 프로농구에 이르기까지 40여년을 방송해설위원으로 대활약을 펼쳤다.
그는 또 한국코치협회를 창설하여 초대 회장을 지냈으며 한국농구인 동우회 회장과 WKBL 상벌위원장을 역임했다.
(36) 김희(1931~작고) '공군 사령탑'
김희는 31년 서울에서 태어나 배재고와 연세대를 졸업했다. 고교시절부터 농구선수로 활약한 그는 공군장교로 입대하여 공군 농구단 감독으로 일찌감치 지도자 생활을 시작했다.그는 덕성여고, 성균관대학, 숙명여대 등에서 코치생활을 하다가 능력을 인정받아 64년 도쿄 올림픽때 국가대표 감독으로 발탁되기도 했다. 이후 코오롱에서 지도자 생활을 계속했고 78년엔 사우디 아라비아 클럽팀 코치로 해외생활을 하기도 했다.
(37) 조병현(1932~) '후진양성에 매진'
조병현은 32년 서울에서 태어나 경복고와 연세대, 한국은행서 선수생활을 했으며 중학선발군, 대학 선발군에 뽑힐만큼 기량이 뛰어났다. 그는 특히 56년 멜버른 올림픽에 태극마크를 달고 출전했으며 은행업무에도 능력을 인정받아 건축본부장, 발권부장, 마산 지점장을 역임했다. 그는 한미은행으로 옮겨 상임감사를 지냈고 한미리스 부사장을 지내기도 했다.그러면서도 틈틈이 경기여고, 진명여고, 공군과 한국은행 남녀팀 지도를 맡아 후진 양성에 힘을 보탰다.
(38) 임영보(1932~) '한일농구 모두 제패한 카리스마'
임영보는 32년 황해도에서 태어나 반공포로로 잡혔다가 농구 마니아 출신의 사단장 눈에 띄어 농구를 시작했다. 전역 후 대한통운 실업팀에서 선수로 활약했고 은퇴후 신광여고 코치를 시작으로 동신화학, 제일은행, 호남화학을 거쳐 국민은행에서 28연승의 대기록을 작성하며 지도자로서 능력을 인정받았다.
특유의 스파르타 훈련과 카리스마로 선수들을 장악하는 힘이 남달랐다. 선경-현대산업 감독을 거쳐 98년 일본으로 건너가 일본항공팀을 맡아 부임 당시 3부 리그였던 팀을 이듬해 2부로 끌어올렸고 2000년에는 1부로 승격시켰다. 지난해에는 일본 최고 권위의 제71회 전국종합선수권대회에서 사상 처음으로 정상에 올랐다.
(39) 백남정(1936~2005) '부부, 한국 농구발전에 일생을 받치다'
백남정은 양정고와 연세대를 거쳐 한국은행에서 선수로 활약했다. 56년 멜버른 올림픽을 비롯 58년 도쿄 아시안게임과 62년 자카르타 아시안게임서 국가대표 주전센터로 맹위를 떨쳤다.
현역 은퇴후에는 한국은행 목포지점장을 거쳐 금융결제원 상무이사를 겸임하며 행정수완을 발휘하기도 했다.
한국 프로농구 출범시에는 KBL 초대 심판위원장을 지내는 등 프로출범의 주역 중 한명으로 힘을 보탰고 03년 KBL패밀리를 만들어 초대 회장을 역임하는 등 아마-프로에 걸쳐 한국 농구발전을 위해 헌신하였다.부인 최인자씨도 한국은행에서 농구선수로 활약한 농구커플로 슬하에 두 아들을 두었다.
(40) 최인자(1941~)
1941년생인 최인자는 경기여고와 한국은행에서 선수생활을 하다가 63년 현역에서 은퇴했다. 은퇴 후에도 어머니 농구를 창설해 운영하는 등 농구계 관련 일을 계속적으로 해오고 있다. 2006년 3월에는 제5대 어머니 농구회 회장으로 추대돼 활약하고 있다.
(41) 정주현(1935~) '일본열도 휩쓴 농구 부부'
정주현은 광신상고를 나와 경희대에서 선수생활을 했다. 그 후 여자농구 제일은행 등에서 지도자 생활을 계속했고 여자농구 대표팀을 이끌고 94년 히로시마 아시안게임에서 금메달을 땄다.
정주현은 코오롱 감독으로 활약하다가 1998년 불어 닥친 외환위기 한파로 팀이 해체되자 일본리그로 진출했다. 샹송화장품의 고문으로 일해오던 정 총감독은 지난 2002년 정식 감독 제의를 수락하며 팀의 지휘봉을 본격적으로 잡게 된 것이다. 정주현은 2006년에도 샹송화장품 총감독으로 팀을 이끌고 있다.
(42) 이옥자(1952~)
숭의여고 출신의 이옥자는 1973년 국가대표팀에 선발되며 국제무대 경험을 쌓았다. 국내 대회에서도 상업은행(현 우리은행)의 명 포인트가드로 활약했다. 현역 은퇴 후에는 숭의여고, 용인대학교에서 지도자 생활을 하다가 2001년 일본으로 진출했다. 이옥자는 일본 후지쯔 팀 감독으로 일본무대에 지도자로 첫 발을 내디뎠다가 2005년 샹송화장품으로 자리를 옮겼다. 이옥자는 한국에서 현역 은퇴 후 3년간 샹송화장품에서 선수로 뛴 적도 있어 샹송화장품과의 각별한 인연을 자랑하기도 했다. 부진에 빠져있던 샹송화장품은 이옥자가 감독으로 부임한 뒤 5년 만에 우승을 차지하는 등 전혀 다른 팀으로 거듭났다.
(43) 김평옥(1935- ) '한국농구, 일본에 전수'
김평옥은 35년 전남 목포에서 태어나 목포상고와 중앙대-전매청에서 선수로 활약했다.
은퇴후 전매청에서 일반직으로 근무하다 신광여고 코치를 거쳐 한국화장품 감독을 역임했다. 온화한 성품으로 줄곧 여자팀만을 지도해온 그는 97년 일찌감치 일본으로 건너가 일본공동석유(저팬에너지) 팀을 맡아 10년동안 상위성적을 거두며 능력을 인정받았다.
그는 06년 2부리그 아이신 감독으로 옮겨 팀을 2부리그 우승으로 이끌었으며 1부리그 승격을 눈앞에 두고 있다.
(44) 박신자(1941~) '한국인 첫 세계대회 MVP·美 ‘농구 명예의 전당’에 헌액'
박신자는 미국 테네시주 ‘농구 명예의 전당’에 헌액된 유일한 아시아 선수로 60년대 한국여자 농구의 대명사로 불린다.
그는 41년 서울에서 태어나 숙명여고-숙명여대를 나와 이화여대 대학원, 미국 스프링필드대학 체육학과를 나온 석사학위 소지자이기도 하다. 숙명여고 2학년때 국가대표로 선발된 이후 상업은행에서 은퇴할 때까지 12년간 아시아 농구여왕으로 군림하면서 63페루 세계선수권대회 4위, 67체코 프라하세계선수권 준우승, 67도쿄 유니버시아드 우승 등 화려한 성적을 거뒀다.
특히 11개국이 출전한 67세계선수권대회땐 한국을 2위로 이끌었으며, 인상적인 활약을 펼쳐 이례적으로 준우승팀에서 대회 MVP를 수상하는 영광을 누리기도 했다.
68년 결혼후 코트를 떠났던 그는 70년대말 지도자로 변신, 신용보증기금 창단감독으로 복귀하였고 88서울올림픽땐 한국 여성 유일의 농구 담당관으로 행정과 외교분야에서 탁월한 솜씨를 발휘하기도 했다.그는 이러한 공로로 농구선수론 드물게 국민훈장 석류장과 5.16 민족상을 수상했다.
(45) 김추자(1943~) '짜릿한 역전 버저비터'
김추자는 1943년 서울에서 태어나 성신여고와 조흥은행에서 선수로 활약했다. 67세계선수권대회에 출전한 그는 특히 체코와의 서전에서 경기 종료직전 주희봉의 패스를 받아 짜릿한 역전 버저비터를 터뜨려 승리의 수훈갑이 됐다. 그는 이 대회에서 베스트 5로 선발돼 또한차례의 영광을 누렸다. 조흥은행의 해체로 상업은행으로 옮겨 선수생활을 계속한 그는 결혼후 미국으로 이민을 떠나 현재 LA에 거주하고 있다.
(46) 김명자(1945~) '상업은행 명 포워드'
김명자는 45년 서울에서 태어나 정신여중고와 상업은행에서 명포워드로 이름을 날렸다. 67프라하 세계선수권대회에 연속 출전한 그는 박신자, 김추자와 함께 트리오를 형성하며 준우승의 감격을 누렸다. 그는 은퇴후 미국인과 결혼하여 코트를 떠났고 지금은 하와이에서 거주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47) 주희봉(1946~) '세계선수권대회의 추억'
주희봉은 46년 서울에서 태어나 숭의여고에서 선수로 활약했다. 그는 66년부터 국가대표를 지내며 67, 71세계선수권대회에 거푸 출전했고 뒤늦게 한양대에 진학한 후 대만 사범대학 체육대학원에서 석사학위를 93년 고려대서 박사과정을 수료한 학구파이기도 하다. 81년 신용보증기금 코치를 지냈고 한때 대만 여자실업팀을 지도하기도 했다.
94년부터 태릉선수촌 지도위원을 역임했고 각종 국제대회 한국선수단 본부임원으로 활약했으며 대한농구협회 부회장과 경기대학 체육학과 겸임교수를 맡고 있다.
(48) 신항대(1942~) '프라하의 여인'
신항대는 42년 서울에서 태어나 서울여상과 상업은행에서 선수로 활약했다. 67년 체코 프라하에서 열린 세계여자선수권대회에 박신자, 김추자, 김명자 등과 함게 참가하여 이태리, 체코, 동독, 유고 등 유럽 강호등을 연파하고 은메달을 획득하는데 큰 공을 세웠다.
67유니버시아드 우승을 끝으로 은퇴한 뒤 코트를 떠났다가 WKBL 재정위원, 농구인 동우회 임원으로 최근 활동하고 있다.
(49) 방열(1941~) '농구이론 겸비한 지략가'
방열은 1941년 출생해 경복고와 연세대, 연세대 대학원을 졸업했으며 1962년 자카르타 아시안게임 등에 선수로 참가했다.
조흥은행 여자농구단 코치와 쿠웨이트 남자국가대표, 청소년대표 감독을 거쳐 남자농구 현대와 기아에서 지도자 생활을 하며 명장으로 이름을 떨쳤다. 1982년 뉴델리 아시안게임에 이충희, 박수교, 신동찬, 신선우 임정명, 안준호 등을 이끌고 나가 중국을 꺾고 금메달을 따냈으며 1988년 서울올림픽 남자농구국가대표 감독, 아시아농구연맹 중앙이사회 이사, 세계농구코치협회 아시아지역 회장, 올림픽성화회 회장, 한국운동지도사학회 회장 등을 지냈다. 1990년부터 경원대 객원교수를 맡았고 2003년부터 경원대 사회체육대학원 원장으로 취임해 교육자이자 이론가로서 수많은 저서를 남겼다.
(50) 나정선(1941~) '농구인 첫 체육학 박사'
나정선은 41년 서울에서 출생하여 경기여고를 졸업했다. 여고시절 농구선수로 활약한 그는 61년 여고 졸업후 상업은행 농구팀에 스카우트되어 선수생활을 계속했다. 하지만 그는 뒤늦게 숙명여대에 입학하여 만학의 길을 걸었고 대학 졸업 후엔 선일여중을 비롯 여러 중학을 전전하며 농구코치와 교사생활을 병행했다.
97년 마침내 숙명여대 강단에 서서 강의를 시작했고 초등학교농구연맹 이사를 비롯 대학농구연맹 부회장, 서울시 체육회 이사, 여성체육학회 부회장, 유니버시아드대회 부단장, 대한체육회 이사, 농구협회 상벌위원 등 체육계 각종 단체에서 여성 파워를 과시했다. 그는 특히 틈틈이 학업을 계속하여 92년 농구인으론 처음으로 국민대에서 체육학 박사학위를 받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