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수성 훈련을 읽고서 수업에 참여했다면 훨씬 혼란스러움이 적었을 것 같다는 생각을 하며 읽었다.
읽으면 읽을수록 저자인 유동수님에 대한 호기심이 올라와 여기저기 기웃거려 보기도 했다.
느낌이 나의 것이 아니며 스쳐 지나가는 것이라는 것을 알고 느낌의 노예가 되지 않도록 늘 깨어있어라.
내 존재 자체는 즐겁거나 괴롭지 않다. 단지 내 마음속에 괴로운 느낌이 일어나고 즐거움이 일어나고 기쁨이 일어난 것일 뿐 내가 괴롭고 즐겁고 기쁜 것은 아니라. 그저 흘러가는 느낌일 뿐이다.
늘 깨어있으면 다양한 느낌들이 들고 나는 지점을 정확히 인식하고 크기와 강도도 알게된다. 그저 흘러갈 뿐이다.
일생 동안 다양하고 많은 감정들을 느끼게 되지만, 그 감정들은 지금 어디에 있는가
감수성 훈련은 진정한 사람이 되는 것, 참자아를 만나는 과정이라 생각한다.
그리고 상대를 알아주는 것은 그만큼 내가 즐길 기쁨과 즐거움이 풍부해진다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말’을 바꿔야 한다.
‘말’을 바꾼다는 것. 그동안 내 신체 일부와도 같은 내 말의 순서와 표현과 방향을 바꿔야 함을 뜻한다.
즉 의사소통 방식을 완전히 뜯어고쳐야 하는 과정이다.
내가 느끼는 것에서 상대가 상대에게, 상대가 나에게 느끼는 감정을 표현하고 받아들이는 방향으로 나아가야 한다. 성품과 의도 그리고 노력, 본심까지.
처음 접한 감수성 훈련의 '말'은 너무 어색하고 불편하고, 이상하고, 생경스럽고, 미식거렸다.
하지만 또 더 깊이 들어가니 일단은 잘 해내고 싶은 내 마음이 삐죽 얼굴을 내밀고 있다. 익숙해지면 좀 더 나아지겠지 하는 기대감과 감수성 훈련을 제대로 알고 적용하고 녹아져 나오기를 바라는 마음이 깊이 깔려있다.
이해와 공감의 종류가 이렇게 많다는 것도 놀랍고 이것을 구분해서 할 수 있을까 걱정반, 호기심반 올라온다.
구분되는 것을 다 외우지도 못해 뭐가 어떻게 어느 지점에서 갈리는지 체험을 통해 알고싶은 마음도 올라온다.
감수성 훈련에서 내 눈에 들어온 단어는 불편함과 사랑이다.
항상 기쁘고 편안하고 행복한 기분을 추구했다. 마음도 평화롭고 긍정적이고 따듯하고 좋은 감정만 취하려 했다. 그래야 행복해질 수 있을 것 같았다. 조금의 괴로움도 용납하기 싫었고 빨리 그 마음을 떨쳐내고 외면하고 긍정적인 감정으로 채우려 마음은 늘 바빴고 나는 서둘렀다.
괴로운 마음 쓰레기를 치우지 않고 덮어버린다고 집안이 깨끗해지는 것은 아니다. 라는 글귀가 눈에 들어온다. 괴롭고 부정적인 감정이 외면한다고 존재하지 않는 것은 아니다. 그 감정을 오롯이 알아봐 주고 들여다 봐주고, 머물러 줘서 그 내면에 깊숙이 존재하고 있는 진짜 내 속마음, 욕구를 알아봐 주고 그것을 행하는 것이 진정 내가 원하는 것이다.
사람의 성장을 위해 현재까지 연구된 그 어떤 효과적인 방법도 ‘사랑’보다 더 효과적인 방법은 없었다.
책에 나오는 이 문장을 나는 껴안고 싶다.
인간관계의 가장 기저에는 ‘사랑’이 있어야 한다.
감수성 훈련의 궁극적인 목적도 결국에는 자신과 타인에 대한‘사랑’의 실현이 아닐까.
그래서 누군가를 사랑한다는 게 어렵고 무거운 책임이 따르고 때로는 고통스러운 일이겠지만 나는 ‘사랑’을 포기할 수 없다.
질문: 가끔 타인에게 들키고 싶지 않은 마음이 있다. 그냥 들키지 않았으면.. 설혹 들켰다 하더라도 모르는 척해줬으면 하는... 그런 마음이 있다.
타인의 마음을 어느 정도로 어떤 마음까지만 알아봐 주는 게 좋을까? 사람의 마음을 모두 알아봐주고 표현해주는 게 과연 다 좋기만 할까? 그건 각자의 눈치에 맡겨야 하는 걸까?
첫댓글 인간관계의 가장 기저에는 ‘사랑’이 있어야 한다. 진심으로 공감합니다. 미야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