휘(諱) 이행리(李行里)를 낳았으니, 이 분이 익조(翼祖)이다. 지원(至元) 12년(1275) 을해 3월에 아버지의 관직을 이어받았다. 18년(1281) 신사에 세조(世祖)가 일본(日本)을 정벌하니, 천하의 병선(兵船)이 합포(合浦)에 모였다. 익조(翼祖)가 상사(上司)의 문자(文字)를 받아, 본소(本所)의 인호(人戶)에 군인(軍人)을 기명하여 뽑아서 쌍성 총관부(雙城摠管府)의 삼살 천호(三撒千戶)와 몽고(蒙古)의 대탑실(大塔失) 등과 함께 정벌에 나아갔다.
마침내 고려의 충렬왕(忠烈王)을 뵈옵고 두세 번에 이르러 더욱 공손하고 더욱 삼가하면서 매양 사과(謝過)하기를,
“선신(先臣) 목조 이안사) 께서 북방으로 달아난 것은 실로 호랑(虎狼)의 아가리를 벗어나고자 한 것이고, 감히 군부(君父)를 배반한 것은 아니오니, 원하옵건대, 성상께서는 그 죄를 용서하옵소서.”
하니, 왕이 말하기를,
“경(卿)은 본디 사족(士族)이니 어찌 근본을 잊겠는가. 지금 경의 거지(擧止)를 보니 마음이 있는 바를 알겠다.”
하였다.
처음에 목조(穆祖)가 때때로 현성(峴城)에 가니, 여러 여진(女眞)의 천호(千戶)와 다루가치(達魯花赤)들이 모두 교제(交際)하기를 원하므로, 마침내 그들과 함께 놀았다.
여러 천호(千戶)들이 예절을 갖추어 대접하기를 매우 후하게 하고, 반드시 소와 말을 잡아서 연회를 베풀고는 문득 수일(數日)을 유련(留連)하였으며, 여러 천호들로서 알동(斡東)에 이른 사람이 있으면 목조도 또한 이같이 접대하였다. 익조(翼祖) 때에 이르러서도 이대로 따라 행하고 고치지 않았다.
익조의 위엄과 덕망이 점차 강성(强盛)하니, 여러 천호(千戶)의 수하(手下) 사람들이 진심으로 사모하여 좇는 사람이 많았다. 여러 천호들이 꺼려서 모해(謀害)하기를,
“이행리(李行里) 【익조.】는 본디 우리의 동류(同類)가 아니며, 지금 그 형세를 보건대 마침내 반드시 우리에게 이롭지 못할 것이니, 어찌 깊은 곳의 사람에게 군사를 청하여 이를 제거하고, 또 그 재산을 분배하지 않겠는가?”
하였다. 이에 거짓으로 고(告)하기를,
“우리들이 장차 북쪽 땅에서 사냥하고 오겠으니 20일 동안 정회(停會)하기를 청합니다.”
하니, 익조가 이를 허락하였다.
기일이 지나서도 오지 않으므로, 익조가 친히 현성(峴城)에 가니, 다만 노약(老弱)과 부녀(婦女)들만이 있고 장정(壯丁)은 한 사람도 없었다. 한 여자에게 물으니, 대답하기를,
“그 짐승이 많은 것을 탐내서 지금까지 돌아오지 않습니다.”
하였다.
익조가 이에 돌아오다가 길에서 한 할멈[老嫗]이 머리에 물동이[水桶]를 이고 손에는 한 개의 주발[椀]을 가지고 있는 것을 보고서, 익조가 갑자기 목이 말라 물을 마시고자 하니, 할멈이 그 주발을 깨끗이 씻어 물을 떠서 바치고, 이내 말하기를,
“공(公)은 알지 못합니까? 이곳 사람들이 공을 꺼려하여 장차 도모하려고 군사를 청하러 간 것이고, 사냥하려고 간 것은 아닙니다. 3일 후에는 반드시 올 것인데, 귀관(貴官)의 위엄과 덕망이 애석하므로, 감히 이 사실을 알리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하였다.
익조는 황급히 돌아와서 가인(家人)들로 하여금 가산(家産)을 배에 싣고 두만강(豆滿江)의 흐름을 따라 내려가서 적도(赤島)에서 만나기로 약속하고, 자기는 손 부인(孫夫人)과 함께 가양탄(加陽灘)을 건너 높은 곳에 올라가서 바라보니, 알동(斡東)의 들에 적병이 가득히 차서 오고, 선봉(先鋒) 3백여 명은 거의 뒤를 따라왔다.
익조는 부인과 함께 말을 달려서 적도(赤島)의 북쪽 언덕에 이르렀는데, 물의 넓이는 6백 보(步)나 될 만하고, 깊이는 헤아릴 수도 없으며, 약속한 배도 또한 이르지 않았으므로 어찌할 수가 없었다.
북해(北海)는 본디 조수(潮水)가 없었는데, 물이 갑자기 약 백여 보(步) 가량이나 줄어들어 얕아져서 건널 만하므로, 익조는 드디어 부인과 함께 한 마리의 백마(白馬)를 같이 타고 건너가고, 종자(從者)들이 다 건너자 물이 다시 크게 이르니, 적병이 이르러도 건너지 못하였다.
북방 사람이 지금까지 이를 일컬어 말하기를, “하늘이 도운 것이고 사람의 힘은 아니다.” 하였다.
익조는 이에 움을 만들어 거주하였는데, 그 터가 지금까지 남아 있다. 알동(斡東)의 백성들이 익조의 있는 곳을 알고, 그를 따라오는 사람이 장꾼과 같이 많았다. 모두 섬 가운데 오랫동안 거주하다가, 직도(稷島)·추도(楸島)·초도(草島)의 재목을 베어 배 10척을 만들어 지원(至元) 27년(1290) 경인에 다시 수로(水路)로 해서 의주(宜州)에 돌아와 거주하니, 공주(孔州)의 백성들이 모두 그를 따라왔다. 그들이 거주하던 땅을 지금도 적전(赤田)이라 일컬으니, 그들이 적도(赤島)에서 온 때문이다.
손 부인(孫夫人)이 두 아들을 낳았으니, 맏아들은 규수(嬀水)이고, 다음 아들은 복(福)이다.
부인이 돌아가자 두 번째로 장가든 배위(配位) 정비(貞妃) 최씨(崔氏)는 등주(登州) 【곧 안변(安邊)이다.】 호장(戶長) 최기열(崔基烈)의 딸이다.
드디어 등주(登州)의 협촌(脥村)에 영업전(永業田)을 두고 거주했으며, 또 백성 30호(戶)를 등주(登州) 서쪽 15리(里)에 거처하게 하였는데, 뒤에 그 땅을 일컬어 삼십호평(三十戶平)이라 하였다.
이곳에 거주한 지 수년(數年)만에 아들이 없으므로 최씨(崔氏)와 함께 낙산(洛山)의 관음굴(觀音窟)에 기도했더니, 밤의 꿈에 한 승복(僧服)을 입은 중이 와서 고(告)하기를,
“반드시 귀한 아들을 낳을 것이니 마땅히 이름은 선래(善來)라고 하십시오”
하였다.
얼마 안 가서 아이를 배어 과연 의주(宜州)에서 아들을 낳았으므로, 마침내 이름을 선래(善來)라고 했으니, 이 분이 도조(度祖)이다.
관음굴(觀音窟)은 지금 강원도(江原道) 양양부(襄陽府)에 있다. 이때 익조가 안변(安邊)에 왕래하였는데, 또한 간혹 화주(和州)와 함주(咸州)에도 왕래하였다.
원나라〉 성종(成宗) 대덕(大德) 4년(1300) 10월에 칙명(勅命)으로 승사랑(承仕郞)을 제수(除授)하여, 쌍성 등지의 고려(高麗) 군민(軍民)을 다스리는 다루가치(達魯花赤)의 일을 맡게 하였다.
모년(某年) 9월 10일에 익조가 훙(薨)하였다. 안변부(安邊府)의 서곡현(瑞谷縣) 봉룡역(奉龍驛) 북동(北洞)에 장사지냈으니, 곧 지릉(智陵)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