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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313. 묵상글 ( 사순 제3주간 월요일. - 믿음의 회개. 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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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313. 사순 제3주간 월요일.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 믿음의 회개
“엘리사 예언자 시대에 이스라엘에는 나병 환자가 많이 있었다.
그러나 그들 가운데 아무도 깨끗해지지 않고 시리아 사람 나아만만 깨끗해졌다.”
오늘 주님께서는 엘리야와 엘리사 예언자가 이스라엘 사람이 아닌
이방 사람들만 고쳐 주셨다고 고향 사람 곧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말씀하십니다.
이 말은 사실을 말씀하신 것이지만,
이 말을 들은 이스라엘 사람은 고향 사람일지라도 듣고 가만 있을 수 없습니다.
오늘 복음에서도 볼 수 있듯이 그래서 사람들은 주님을 죽이려고까지 하는데
아무리 사실이라도 이런 얘기하지 않을 수도 있었는데 왜 굳이 말씀하셨을까요?
왜 이런 도발적인 말씀을 하셨을까요?
고향 사람들을 사랑하지 않으셔서일까요?
고향 사람 입맛에 맞는 말은 하지 않으려 하신 것은 분명하지만
그것은 고향 사람들을 사랑치 않아서가 아니라 오히려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아첨꾼이 아니라 사랑꾼이시기 때문입니다.
아첨꾼은 결코, 사랑하는 자가 아닙니다.
아첨하여 그에게서 자기가 목적하는 바를 얻어내거나
이루려는 자지 그를 사랑하는 사람이 아닙니다.
반대로 진정 사랑하는 사람은 그에게 진정 유익한 말,
곧 바른말을 하여 그를 진리와 진실에로 돌아서게,
다시 말해서 거짓과 잘못에서 그를 회개케 합니다.
오늘 주님께서는 고향 사람들이 진실한 믿음으로 돌아서도록 도발하십니다.
왜냐면 고향 사람들은 자기들이 믿고 싶은 것을 믿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듣고 싶은 것만 듣는 것과 진배없습니다.
이런 사람들에게 적당히 얘기하면 또 듣고 싶은 대로 듣고
믿고 싶은 대로 믿기에 폐부를 찌르는 도발적인 말을 해야만 똑바로 알아듣습니다.
그렇다고 그 말을 수긍하는 것은 또 다른 문제입니다.
오늘 주님의 고향 사람들이 바로 그런 경우인데
주님의 말뜻을 제대로 알아듣기는 했지만,
그 말을 받아들일 수 없어 분노하고 주님을 죽이려고 합니다.
배척하는 것입니다.
그 말의 뜻은 알아들었지만, 배척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말만 배척하는 것이 아니라, 그 말을 하는 주님도 배척합니다.
이제 이들에겐 주님이 고향 사람도 예언자도 구세주도 아니고 원수입니다.
그래서 주님을 죽이는 것에 거리낌이 없습니다.
이는 믿음으로 무장하기에 보통 확신범과 같습니다.
나쁜 짓을 하면서도 자기 생각이나 믿음이 옳다는 확신에서 하기에
거리낌이 없는데 그 생각과 믿음이 잘못된 것을 모르고 그러하지요.
요즘도 이스라엘 사람들처럼 잘못된 믿음으로
확신에 차 행동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사이비 종교를 믿는 사람들 가운데 그런 사람이 많고
천주교 신자들은 다행히도 그리 많지 않은데
그것이 꼭 다행이라고 해야 할지는 모르겠습니다.
확신범이 될 만큼 자기 믿음이 강하지 않기 때문인 경우도 많기 때문입니다.
아무튼, 고향 사람들에게 회개를 바라신 주님께서는
오늘 우리에게도 회개를 바라시는데, 그것은 믿음의 회개입니다.
잘못된 확신은 강할수록 더 큰 죄이고, 더 회개가 필요한데
자기가 믿는 종교만 옳다는 믿음,
하느님을 자기가 믿는 종교 안에 가두는 믿음,
곧 자기 종교가 가르치는 하느님만 하느님이라는 믿음,
하느님께서는 자기 교회의 신자만 사랑하시고 구원하신다는 믿음,
그래서 오늘 주님의 고향 사람들처럼 자기들이 믿는 하느님이 다른 사람도
사랑하시고 구원하신다는 것을 도저히 받아들이지 못하고 질투하는 믿음은
하느님을 왜곡하고 타인을 배제하는 정말로 잘못된 믿음이기에
우리에게 이런 믿음의 경향성이 조금이라도 있으면 빨리 회개해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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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313. 사순 제3주간 월요일.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님.
“예수님께서는 그들 한가운데를 가로질러 떠나가셨습니다.”(루카 4,30)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어떠한 예언자도 자기 고향에서는 환영을 받지 못한다.”(루카 4,24)
예수님께서는 스스로를 ‘예언자’로 자처하시면서, 예언자가 자기 고향에서 환영받지 못한다고 말씀하십니다. 이에, 나자렛 사람들은 예수님을 환영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배척하고 죽이려고까지 합니다.
“그들은 들고 일어나 예수님을 고을 밖으로 내몰았습니다.”(루카 4,29)
이는 예수님의 전 생애 동안 이스라엘 백성들로부터 받으실 배척을 예고해줍니다. 결국, 예수님께서는 또 다시 성문 밖으로 내몰리어 죽임을 당하게 될 것입니다. 동시에, 이 사실은 이스라엘 밖, 이방인지역들에게로 당신 구원이 퍼져나가게 될 것을 예시해줍니다. 곧 완고한 이스라엘 대신 장차 당신을 맞아들이게 될 다른 민족들의 교회를 미리 가리켜줍니다.
그러나 그분을 죽이려는 그들의 음모는 성사되지 않았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들 한가운데를 가로질러 떠나가셨습니다.”(루카 4,30)
이는 당신이 수난을 거절하신 것이 아니라, 다만 당신이 고난을 받으실 때가 아직 오지 않은 까닭입니다. 때가 되면, 당신께서는 수난을 스스로 받으시게 될 것입니다. 유대인들에게 강제로 끌려가시는 것이 아니라, 몸소 당신을 내어주실 것입니다. 실로 당신은 원하시면 붙잡히시고, 나무에 달리실 것입니다. 사람들은 언덕 위 벼랑에까지 그분을 떨어뜨리려 내몰아갔지만, 그들 한가운데를 유유히 가로질러 가시는 그분을 그 누구도 어찌할 수는 없었습니다. 아직 수난의 때가 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완고하여 예수님을 받아들이지 않았고 거역하였던 것입니다.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말씀을 따르지 않고 고집부리는 사울을 꾸짖을 때, 사무엘의 입을 통해 이렇게 말했습니다,
“거역하는 것은 점치는 죄와 같고,
고집을 부리는 것은 우상을 섬기는 것과 같습니다.”(1사무 15,23)
그러기에, 우리는 명심해야 할 일입니다. 우리가 자기 자신의 의견이나 주장을 고집할 때, 자신이 만들어 놓은 자신의 피조물인 자신의 생각을 섬기고 따르는 우상숭배에 빠지게 된다는 사실을 말입니다. 사실, 우리는 이 우상을 벗어나야, 예수님을 진정으로 만나게 됩니다. 믿음은 자기에게서 빠져나와 하느님께로 가는 것이지, 하느님을 자기의 좁은 지식 안으로 끌어들이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완고함이야말로 불신의 씨요, 믿음이야말로 하느님을 끌어당기는 자석이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완고함과 고집으로 형제를 불신하고, 주님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일이 없도록 해야 할 일입니다. 아멘.
오늘의 말·샘기도(기도나눔터)
“예언자는 어디에서나 존경받지만 고향과 집안에서만은 존경받지 못한다.”(루카 4,24)
주님!
스승을 곁에 두고도 존경하지 않은 저는
수술을 받아야 살 수 있는 데도 의사를 믿지 않아 수술을 받지 않는
어리석은 환자입니다.
제 앎을 뛰어넘는 당신을 믿지 못함은
안다는 제 생각을 섬기고 따르는 우상숭배자입니다.
이제는 제 자신을 내려놓고 겸손함으로 존경하고,
응답으로 믿음을 드러내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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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313. 사순 제3주간 월요일.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첫발이 중요하다
현대를 지식 정보화시대라고 합니다. 쏟아지는 정보의 홍수 속에서 많은 부작용을 낳기도 합니다. 저도 많은 정보를 접하면서 긍정적인 것도 있지만, 마음이 흔들리기도 합니다. 특히 어떤 사람에 대해서 좋은 이미지를 가지고 있는데 난데없이 몰라도 되는 사실을 알게 됨으로써 그 사람에 대한 인식을 다르게 할 때가 있습니다. ‘과거 없는 성인 없고, 미래 없는 죄인 없다.’는 말을 하면서도 좋지 않은 기억을 지우기란 쉽지 않은 일입니다. 주님의 은총으로 마음을 넓혀서 모두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일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예수님의 고향 사람들은 선입견과 고정관념에 가득 차 예수님을 바라보았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전해 주시는 복음을 귀담아 들을 수 없었고, 그들은 마음이 딱딱하게 굳어있었기 때문에 예수님의 어떤 말씀도 제대로 들을 수가 없었습니다. 듣고 싶은 대로 듣고, 듣고 싶은 만큼 듣고, 보고 싶은 만큼만 볼 수밖에 없는 처지가 되었습니다. 자기의 틀이 너무 강해 갈 길이 멀었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마음은 나자렛 사람들만의 이야기가 아닙니다. 우리도 그러한 오류에 빠질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에 나를 비추어보기보다는 나의 잣대로 예수님의 말씀을 판단할 때가 많습니다. 내 입맛에 맞게 선택하고 맞지 않으면 흘려버립니다. 주님의 말씀은 언제나 진리이고 능력이 넘치지만, 그 능력을 간과하고 사는 것이 현실입니다. 사실 하느님에 대한 알량한 지식과 편견이 그분과의 만남을 가로막습니다. 그러므로 내가 안다는 것이 장애가 되지 않을 수 있는 겸손을 청해야 합니다. 그리고 하느님의 말씀에 귀 기울일 수 있도록 부드러운 마음을 달라고 청하면 좋겠습니다. 주님께서 돌같이 강한 마음을 살 같이 부드러운 마음으로 변화시켜 주시길 희망합니다.
우리의 이웃을 대하는 태도도 마찬가지입니다. 어떤 사람에게 정보를 먼저 접하느냐에 따라 달리보입니다. 신뢰하지 않는 사람을 통해 얻게 된 정보는 흘려버릴 수 있지만 내가 신뢰하는 사람을 통해 정보를 얻으면 그만큼 선입견에 자유로울 수 없습니다. 진실과는 먼 정보에 상관없이 흔들리는 연약함을 지녔으니 정신을 바짝 차려야 합니다. 그리고 품을 키워야 합니다.
회당에 있는 사람들은 예수님께서 그들의 무지를 일깨워 주실 때 오히려 화를 내고 들고 일어나 예수님을 벼랑까지 끌고 가 거기에서 떨어뜨리려고 하였습니다. 자기들의 기득권과 자존심을 지키려 취한 방법이 예수님을 죽이는 것이었습니다. 오히려 기득권을 포기하고 진리를 받아들이면 더 큰 존경과 권위가 살아날 것인데 눈앞의 이익을 위해 악을 선택하였습니다. 그러니 첫발이 중요합니다. 선을 택할 수 있는 첫발이 그의 미래를 열어줍니다. 예수님께서는 사람들이 어떤 태도를 취하든 “그들 한가운데를 가로질러 떠나가셨습니다”(루카4,30). 결코, 어둠이 빛을 이길 수는 없는 법입니다(요한1,5-9).
우리는 살아가면서 현실과 타협하고 싶은 충동을 받습니다. 그리하면 이득을 얻을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왜 나만 바보처럼 손해를 보아야 하나?’ 하는 생각을 할 때가 한두 번이 아닙니다. 적당히 눈 감으면 편하게 살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의심과 배척, 심지어 죽음 앞에서도 당신의 가실 길을 가시는 예수님을 바라봅니다. 넘어지시고 또 일어서시는 십자가 길의 예수님을 바라보며 우리에 대한 사랑을 일깨웁니다. 진정 “사랑은 크면 클수록 행동치 않을 수 없고, 진실 될수록 님의 사랑을 드러냅니다”(박병해 신부).
생각해 봅니다. 주님의 가르침 뿐 아니라 이웃의 충고를 수용하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지요? 좋은 충고를 받아들여 현명하게 판단하고 수행하면 충고는 하느님의 소리요, 하느님의 뜻이 됩니다. 그러나 ‘꿀도 약이라면 쓰다.’고 합니다. 충고는 현명한 사람일수록 마음속 깊이 스며들지만, 우둔한 사람의 귀에는 스치고 지나갈 뿐입니다. 충고를 들을 줄 아는 귀를 가졌으면 좋겠습니다. 그리고 충고를 하려거든 먼저 자신에게 충고해서 바꾸고 변화시키는 일부터 해야 하겠습니다. 무엇보다 주님의 말씀을 가슴에 새겨 진리 안에서 자유를 누릴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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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313. 사순 제3주간 월요일.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영어로 ‘이해’는 ‘understand’입니다. 아래에 서 있으면 이해하기 쉽다는 뜻입니다. 아래에 서 있는 사람은 다른 사람의 의견을 경청하기 마련입니다. 새로운 방법을 받아들이기 마련입니다. 근대의 문을 열었던 유럽의 르네상스는 문학, 예술, 과학, 의학에서 새로운 것들을 받아들였습니다. 1000년 동안 이어오던 중세의 ‘규범과 틀’을 과감하게 벗어버렸습니다. 이슬람 문명이 번역한 고대의 학문과 철학을 받아들였습니다. 인간중심의 새로운 사상이 시작되었고, 산업혁명과 자본주의는 새로운 시대의 여명을 밝혔습니다. 반면에 ‘오해’는 ‘misunderstand’입니다. 아래에 서 있지 않으면 이해하기 어렵다는 뜻입니다. ‘내가 왕년에 다 해 봐서 안다.’라는 말을 자주 하던 분이 있었습니다. 다른 사람의 의견을 경청하지 않습니다. 새로운 방법을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조선은 서양의 학문과 과학을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오랑캐의 학문이라고 천하게 생각하였습니다. 서양에서 들어온 천주교인 서학을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유교의 가르침이 유일한 통치기반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천주교를 박해하였고, 급변하는 세계정세를 외면하였습니다. 우물 안의 개구리처럼 또 다른 세상이 있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자초지종(自初至終)’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한국말은 끝까지 들어봐야 안다고도 합니다. 영어는 주어 다음에 동사가 나오기 때문에 처음 들어도 대충 이해할 수 있지만 한국어는 동사가 맨 나중에 나오기 때문 끝까지 들어야 제대로 이해 할 수 있습니다. 저 역시도 끝까지 말을 듣지 않고 판단한 적이 많았습니다. 예전에 본당에 있을 때입니다. 노인대학 미사가 화요일에 있었습니다. 제대회에서는 소성당에 미사 준비를 해 놓았습니다. 저는 착각하고 성당에서 미사를 드리려고 하였습니다. 아무런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아서 기분이 좋지 않았습니다. 제대회 자매님께 먼저 묻지도 않고 미사 준비를 하지 않았다고 짜증을 냈습니다. 자매님은 소성당에 모든 준비를 해 놓았는데 제가 짜증을 냈으니 무척 난감하였습니다. 그래도 저의 이야기를 다 들어 주었고,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습니다. 나중에 제가 착각하였다는 것을 알았고, 자매님께 사과하였습니다. 자매님도 저의 사과를 받아 주었고, 제대회 봉사를 계속하였습니다. 삼국지의 적벽대전에서도 조조는 자초지종을 듣지 않고 충실한 부하를 전쟁터에서 죽였습니다. 적벽대전의 패배는 자초지종을 듣지 않았던 조조의 성급함에 있었습니다.
오늘 성서 말씀에는 자초지종을 듣지 않았던 사람들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이스라엘 왕은 아람 왕이 보낸 나아만의 이야기를 잘 듣지 않았습니다. 아람 왕이 전쟁을 벌이기 위해서 나아만을 보냈다고 생각했습니다. 엘리사는 자초지종을 잘 알았습니다. 그리고 이스라엘 왕에게 나아만을 보내 달라고 하였습니다. 나병환자였던 나아만은 엘리사를 만났습니다. 엘리사는 나아만에게 요르단 강에서 일곱 번 몸을 담그라고 하였습니다. 나아만은 엘리사의 이야기를 끝까지 듣지 않았습니다. 시리아에도 요르단 강 보다 좋은 강이 많다고 생각하였습니다. 그리고 엘리사의 말을 듣지 않으려고 하였습니다. 중요한 것은 강의 수질이 아니었습니다. 중요한 것은 하느님의 말씀에 순명하는 것이었습니다. 나아만은 자초지종을 듣고 자신의 교만함을 내려놓았습니다. 엘리사의 말을 들었던 나아만은 요르단 강에 몸을 일곱 번 담그었고, 그의 나병은 깨끗해 졌습니다. 예수님의 고향 사람들도 자초지종을 듣기 보다는 자신들의 판단을 먼저 믿었습니다. 예수님의 말씀과 표징을 보기 보다는 예수님의 가족과 친지를 먼저 보았습니다. 색안경을 쓰면 세상은 그 색안경의 색깔대도 보이기 마련입니다.
엘리사는 나아만에게 ‘나병’이 치유될 수 있는 ‘길’을 알려주었습니다. 나아만은 그 길이 너무 쉽다는 이유로 가려하지 않았습니다. 나아만은 결국 그 길로 갔기 때문에 나병이 치유될 수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도 하느님께로 가는 길을 보여주었습니다. ‘희생, 순명, 사랑, 헌신, 봉사’의 길입니다. 사람들은 편한 길을 가고 싶어 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보여 주신 길을 가려하지 않았습니다. 길은 목적이 아닙니다. 길은 목적지를 가기위한 도구입니다. 날아다닐 수 있는 사람에게는 ‘길’은 굳이 필요 없을 것입니다. 아직 날지 못하는 사람들에게는 분명 길이 필요합니다. 길을 가는 사람들에게는 ‘이정표, 지도, 내비게이션’이 필요합니다. 깨달은 사람들에게는 계명과 율법이 필요 없을지 모릅니다. 그들은 계명과 율법을 초월해서 살기 때문입니다. 하늘을 나는 새에게 굳이 땅위의 길이 필요 없는 것과 같습니다. 여러분은 어떠신지요? 하느님께로 가는 계명, 율법, 규정이 필요 없으신가요? 아니면 사랑의 계명, 봉사의 율법이 아직은 필요하신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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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313. 사순 제3주간 월요일.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A와 B 두 사람이 있습니다. 차례로 동전을 던져서 두 사람 모두 앞면 또는 뒷면처럼 같은 면이 나오면 둘은 100만 원씩을 받습니다. 하지만 서로 다른 면이 나오면 두 사람은 단 한 푼도 받지 못합니다. 이제 A가 먼저 동전을 던졌습니다. 앞면이 나왔습니다. 이제 B가 동전을 던질 차례입니다. 지금의 경우 앞면이면 100만 원을 받고, 뒷면이면 한 푼도 받지 못합니다. 드디어 B가 동전을 던졌습니다. A, B 모두 “제발 앞면”을 외쳤습니다. 하지만 결과는 뒷면이 나왔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비난받아야 할 사람은 누구일까요? 그리고 누가 죄책감을 더 느끼게 될까요? 거의 모두가 B가 잘못했다고 지적하고, 죄책감도 더 느낄 것으로 생각합니다. 그 수치가 자그마치 92%입니다. 심지어 A로부터도 “앞면을 던졌어야지.”라는 비난을 들어야 했습니다. 그런데 A가 비난하는 것은 말도 안 됩니다. 자신이 처음에 뒷면을 던졌더라면 100만 원을 획득할 수 있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자기에게도 50%의 잘못이 있음을 잊은 것입니다.
우리는 남 탓을 먼저 하곤 합니다. 그러나 남 탓하기 전에 자기 탓은 어떤지를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도 ‘남을 판단하지 마라.’라고 강력하게 이야기하신 것이 아닐까요? 남 탓하면서 옳고 그르다고 판단하는 어리석음에서 벗어나기를 원하신 것입니다.
지금도 그렇지만 예수님 시대에서도 마찬가지였던 것 같습니다. 심지어 하느님이신 예수님을 향해서도 그들은 탓을 외칩니다. 분명히 많은 기적을 행하셨고 하느님 나라의 기쁜 소식을 전해주셨지만, 예수님 탓을 하고 있습니다. 고향 사람들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깜짝 놀랄만한 기적을 보여주셔도 의심하면서 또 다른 표징만을 요구합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어떠한 예언자도 자기 고향에서는 환영을 받지 못한다.”라고 말씀하시면서, 엘리야와 엘리사 예언자 시대에 있었던 일을 말씀하셨습니다.
이렇게 말씀하셨던 이유는 무엇일까요? 고향 사람들의 믿음 없음을 꾸짖는 것이었습니다. 하느님 나라의 신비를 보지 못하는 자신만의 고정관념에서 벗어나기를 바라시는 것입니다. 하지만 그들은 자기들에게 문제 있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예수님 탓을 하고, 예수님의 말씀에 화가 잔뜩 나 있습니다. 예수님을 고을 밖으로 내몰면서 산 벼랑에서 떨어뜨리려고까지 합니다.
남 탓을 더 이상 해서는 안 됩니다. 하나의 잘못된 습관에서 벗어나기란 쉽지 않다고 하지요. 남 탓하는 것도 분명히 잘못된 습관입니다. 습관적으로 남을 먼저 탓하는 모습을 취하게 됩니다. 이런 잘못된 습관에서 벗어나기 위해, 자기 자신을 먼저 바라볼 수 있는 겸손이 필요합니다. 예수님의 사랑을 받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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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 말을 남에게 베푸는 것은 비단옷을 입히는 것보다 따뜻하다(순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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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313. 사순 제3주간 월요일.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참되고 멋진 믿음
-선입견, 편견이 없는, 겸손하고 순수한 믿음-
“암사슴이 시냇물을 그리워하듯,
하느님, 제 영혼이 당신을 그리나이다.
제 영혼이 하느님을, 생명의 하느님을 목말라 하나이다.”(시편42,2-3ㄱ)
끊임없는 기도가, 끊임없는 회개가 인간 무지와 허무에 대한, 참된 믿음에 대한 궁극의 답입니다. 이와 더불어 참되고 멋진 믿음, 선입견과 편견이 없는, 겸손하고 순수한 믿음입니다. 이런 믿음은 절대 혼자의 믿음이 아닙니다. 더불어의 믿음, 더불어의 여정입니다.
섬같은 고립된 믿음이 아니라 하느님 중심에 자리잡은 활짝 열린 믿음이요 하느님 향한 순례 도상(途上)중의 믿음입니다. 이런 믿음의 도반들을 만나면 힘이 나고 기분이 좋습니다. 일기를 쓰듯 하루를 여는 강론입니다. 여러 일화로 강론을 시작합니다.
1.“아무 걱정 마시고 지극한 인내의 믿음과 희망을 지니고 치료에 전념하시기 바랍니다. 최고의 명의(名醫)이신 주님께서 늘 함께 하십니다. 저의 평생 절친(切親)이신 주님께 특별히 제가 당부해놨습니다.”
“신부님께서 특별히 주님께 당부해놨다는 말씀에 빵 터지는 웃음꽃이었습니다. 신나게 웃었습니다. 당부해주셨다는 말씀에 힘이 납니다.”
이또한 믿음의 표현입니다. 주님이 흡사 수십년동안 제 절친이란 생각에 아픈 자매님께 힘이 되고자 드린 덕담입니다.
2.강론집이 지체되었다는 소식에 어느 순수한 믿음의 자매님이 답을 주었습니다.
“신부님, 혹시 제가 그 자매님 나으실때까지 제본해 드릴까요?”
“너무 감사합니다. 자매님답습니다. 당분간 보류하고 쉴까합니다. 하게 되면 그 자매님이 하게 될 때까지 자매님께 부탁하겠습니다. 청하는 마음이 너무 곱고 아름다워 감사합니다. 봄꽃 감사 선물로 드립니다.”
“와 꽃이 폈군요!!! 신비롭습니다.”
“매화꽃 수수하고 맑기가 자매님 영혼같아요, 순수하고 겸손한 믿음의 영혼!”
3.“매화꽃이 아름답고 우아하네요. 우아한 자태가 울 신부님의 거룩함을 닮았습니다!”
“자매님도 파스카의 봄꽃을 닮았지요! 겸손한 사랑!”
4.“예고치 못했던 병마와 싸우려니 지칩니다. 체력이 고갈상태라 고통스럽습니다. 너무 힘들고 괴로워 다 내려놓고 싶은 심정이들었다 바로 참회와 회개했습니다. 신부님 아프지 마세요. 신부님 편찮으시면 저희 모두 무너집니다. 제사랑드립니다.”
정말 감동적인 믿음입니다. ‘신부님 아프면 저희 모두 무너진다’라는 말이 마음깊이 새겨졌습니다. 참으로 혼자의 고립된 섬같은 믿음이 아니라 주님과 이웃에 활짝 열려있는 믿음임을 깨닫습니다. 더불어의 믿음, 더불어의 여정, 더불어의 도반들입니다.
5.어제 베네딕도 규칙을 공부하면서 “다함께(All together)”란 대목의 해설에 적극 공감했습니다.
“그리스도는 영원한 생명에로 각자 개별적으로 인도하지 않는다. 우리는 각자 1등으로 목적지에 도착하려 노력하는 경주자가 아니다. 성 아우구스티노 말처럼 어느 사람이 다른 이의 월계관이 될 수 있도록 함께 달린다. 수도자는 다른 이들에 대한 배려없이 더 이상 혼자 목표에 도달하려고 노력해선 안된다.”
6.조선시대 중기 대학자 화담 서경덕에 대한 소개도 잊지 못합니다. 정말 믿음의 삶에 “신독(愼獨)”이 얼마나 중요한지 공감했습니다.
‘서경덕은 제자들을 가르칠 때 가장 강조한 것이 여색(女色)을 멀리하라는 것이었다. 그것이 바로 격물치지(格物致知)의 시작이라고 강조했다. 모든 의리의 출발은 혼자 있을 때 행동에 어긋남이 없어야 하는데, 이를 신독(愼獨)이라했다. 여색을 탐하는 것은 바로 신독을 못한다는 것이고, 신독을 못하는 사람은 다른 일도 옳게 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우리는 오늘 복음 말씀과 제1독서 열왕기 하권에서 참 멋진 믿음의 사람들을 만납니다. 다음 복음의 서두 예수님 말씀은 고향 사람들에 대한 주님의 실망을 반영합니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어떠한 예언자도 자기 고향에서는 환영을 받지 못한다.” 편견과 선입견에서 벗어나기가 거의 불가능하다는 이야기입니다. 예수님 고향 사람들은 질투와 편견, 선입견에 눈이 멀어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했습니다.
참으로 순수한 믿음의 사람들은 선입견과 편견에서 많이 자유로운 사람들입니다. 하느님께는 이런 편견과 선입견이 없습니다. 그리하여 하느님은 삼년 육개월 동안 하늘이 닫혀 온 땅에 큰 기근이 들었을 때 엘리야를 시돈 지방 믿음 좋은 사렙타의 과부에게만 파견됩니다.
또 하느님은 엘리사 예언자 시대에 이스라엘에는 나병환자가 많이 있었지만 그들 가운데 아무도 깨끗해지지 않고 시리아 사람 나아만만 깨끗해졌습니다. 하느님께는 모든 경계와 벽이 철폐됩니다. 하느님이 보시는 것은, 감동하시는 것은 인종도, 국적도, 성별도 아닌 순수하고 겸손한 믿음뿐입니다.
오늘 제1독서 엘리사와 나아만의 만남이 멋집니다. 아람 임금의 군대 장수인 나아만은 그의 주군이 아끼는 큰인물이었습니다. 나아만은 힘센 용사였으나 나병환자였습니다. 전화위복입니다. 나병덕분에 겸손하고 순수한 믿음을 지닐 수 있었고 마침내 엘리사를 통해 하느님을 만남으로 치유되었기 때문입니다.
바로 여기 혜성처럼 등장한 이스라엘의 포로 소녀가 있습니다. 하느님은 어떻게 역사할지 모릅니다. 깨어있는 믿음의 사람에게 계시되는 하느님의 작은 손길입니다. 소녀의 말에 귀를 기울여 응답한 여주인은 나아만에게 엘리사를 찾도록 합니다. 나아만의 등장에 믿음이 없는 이스라엘 임금은 두려워 옷을 찢엊지만 믿음의 예언자, 엘리사의 대응이 참으로 신속하고 기민합니다.
엘리사에게는 편견도 선입견도 두려움도 없습니다. 참 순수하고 참된 믿음의 예언자 엘리사입니다. 엘리사의 처신이 얼마나 의연하고 당당한지요. 심부름꾼을 시켜 나아만에게 요르단강에 가서 일곱 번 몸을 씻으면 깨끗해질 거라 말씀하십니다. 나아만의 믿음을 시험하신 것입니다. 요르단강물의 효험이 아니라 믿음의 효험, 하느님 힘의 효험이기 때문입니다.
열화같이 성을 내던 나아만은 부하들의 충고에 즉시 회개하여 교만을 내려놓고 겸손히 엘리사의 명령에 순종하여 요르단강에 내려가서 일곱 번 몸을 담갔다 나오니 그는 어린아이 살처럼 새살이 돋아 깨끗해졌습니다. 나아만의 겸손한 믿음에 하느님은 치유로 응답하신 것입니다. 엘리사도 믿음도 멋지고 회개한 나아만의 믿음도 멋집니다. 참으로 하느님 안에서 멋진 사람들의 만남입니다. 나아만의 하느님 믿음의 고백을 통해 그는 나병뿐만 아니라 영혼의 치유까지, 전인적 치유의 축복을 받았음을 봅니다.
“이제 저는 알았습니다. 온 세상에서 이스라엘 밖에는 하느님께서 계시지 않습니다.”
정말 탓할 것은 하느님도 아닌 내 믿음 부족뿐이요 유일하게 청할 것은 믿음 하나뿐임을 깨닫습니다. 순수하고 겸손한 믿음, 편견과 선입견이 없는 참된 믿음입니다. 나아만과 복음의 예수님의 고향 사람들의 믿음이 너무나 극명한 대조를 이룹니다.
엘리사를 만나 회개와 더불어 치유받은 겸손한 믿음의 나아만과는 달리 예수님에 대한 고향사람들의 반응이 완고하기가 무지의 절정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에 회개는커녕 화가 잔뜩난 이들은 예수님을 고을 밖으로 내몰은후 벼랑까지 끌고 가 거기에서 밀어뜨려 죽이고자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유유히, 홀연히, 미련없이, 홀가분하게 그들 한가운데를 가로질러 떠나시니 믿음의 승리, 믿음의 자유입니다.
새삼 우리의 믿음을 돌아보게 합니다. 끊임없는 기도와 회개를 통한 순수하고 겸손한 믿음이, 편견과 선입견, 두려움이 사라진 눈밝은 믿음이 얼마나 귀한지 깨닫습니다. 주님은 복된 사순시기, 날마다의 이 거룩한 미사은총으로 우리 모두 회개와 더불어 겸손하고 순수한 믿음을 선사하십니다.
“주님, 당신의 빛과 진리를 보내시어, 저를 인도하게 하소서,
당신의 거룩한 산, 당신의 거처로 데려가게 하소서.”(시편43,3.).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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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313. 사순 제3주간 월요일. 민동규 다니엘 신부님.
찬미 예수님
오늘 주님께서는 이스라엘 사람들을 화나게 하십니다. 화날 말들을 골라서 하고 계신 것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이스라엘에는 예언자들이 파견되지 않고 이민족에게 파견된 이야기들을 회당에서 하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이런 말씀에 회당에 있던 사람들은 화가 잔뜩 났습니다. 주님을 고을 밖으로 내몰고는 급기야 벼랑에서 떨어뜨리려 합니다. 얼마나 화가 났는지 짐작할 수 있는 부분입니다. 그런데 더 이해하기 어려운 일이 벌어집니다. 그렇게 화가 머리 끝까지 난 사람들 가운데로 주님께서는 가로질러 걸어가십니다.
이게 말이 되나요? 회당에서 하신 말씀도 그렇고 주님께서 무슨 초능력을 쓰신 걸까요?
이해가 어려운 오늘 복음에 ‘하느님의 뜻’이라는 글자를 넣어 읽으면 조금 이해하기 쉬워질 것입니다.
예언자들은 모두 하느님의 뜻을 실천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니 그들이 시돈 지방으로 갔던 일과 나아만 만이 깨끗하게 된 것은 모두 하느님의 뜻이었습니다.
주님께서 메시아로서 모든 사람을 하느님 품으로 인도하시는 것 또한 하느님 아버지 뜻이었습니다. 이는 이스라엘 민족만을 위한 일이 아닌 모든 사람에게 전해진 복음입니다.
한가운데를 가로질러 갈 수 있었던 이유도 바로 ‘하느님의 뜻’에 있습니다. 아직 주님께서 잡히시거나 피로서 고통받으실 때가 아니었다는 뜻입니다. 하느님의 뜻이 거기 있지 않았으니 이루어지지 않은 것입니다.
우리 신앙인들 각자에게도 ‘하느님의 뜻’은 존재합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삶의 중심에 그 뜻은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오늘도 우리 마음과 발걸음 안에서 하느님의 뜻을 이루어질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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꿈은 포기했을 때 끝나는 것이다.
꿈을 꾸다 보면 많은 실패를 경험합니다. 좌절하기도 하고 주저앉기도 합니다. 그러나 포기하지 않는다면 꿈은 끝난 것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2002년 월드컵의 구호를 기억하실 것입니다.
‘꿈은 이루어진다.’
맞습니다. 우리는 꿈이 이루어지는 것을 두 눈으로 봤습니다. 그리고 꿈이 이루어졌을 때 얼마나 큰 기쁨이 찾아오는지도 봤습니다.
그리고 그 꿈 뒤에 무수한 노력과 좌절과 실패가 있었음도 알고 있습니다.
어쩌면 실패해야 꿈이 이루어지는 것은 아닐까요?
우리 신앙인들의 꿈, 희망은 무엇일까요?
그건 바로
예수님 만나기입니다.
포기하지 마세요. 꾸준히 계속, 마음과 영혼과 힘을 다해 예수님을 만나고자 청원하십시오.
우리의 꿈도 이루어질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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