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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호와의 구원 사역
출 6: 1-9
미국의 유명한 구약신약 교수 Elmev A. Mastena는 구약성경의 초점이 무엇이냐고 하는 문제에서 그것은 하나님의 계획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계획이라는 책을 써서 출판하기도 했습니다. 그는 그 하나님의 계획이라는 책에서 출5:22-6:8까지를 중심으로 여호와는 백성을 구원하시고 또 언약 공동체를 통하여서 자기의 백성을 구별하시며 백성들과 긴밀한 관계를 가짐으로 여호와에 대한 온전한 지식을 갖게 하고 끝으로 약속 성취로서의 땅을 허락함으로써 그의 백성에 대한 여호와의 계획은 그들이 좋은 삶을 즐기는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흔히들 말하듯이 나무도 보고 숲은 못 보는 수가 많습니다. 우리 성도들이 성경의 어떤 요절들을 잘 외우면서도 전체적인 성경의 흐름을 이해하지 못하는 수가 있습니다. 그러다가는 신앙의 곁길로 빠져나갈 가능성이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잘 믿고 교회를 잘 섬기다가도 중간에 타락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혹은 이단에 빠져가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것도 역시 성경의 맥락과 하나님의 계획을 이해하지 못한데서 일어나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하룻길을 갈 때에도 계획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타락한 백성들을 구원하기 위하여 당신에 계획을 가지고 계셨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그 계획을 실천하십니다. 그것이 곧 여호와의 영원한 구원 사역입니다. 출애굽기에 여기에는 특별히 여호와 하나님이 애굽에서 종노릇하고 있던 이스라엘 백성들을 구원해 주시던 역사적인 인 사건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이 인간을 구원하시려는 하나의 예표라고 볼 수가 있습니다.
우리 성도들이 이웃을 전도하고 문화권이 다른 외국사람들에게 선교하려면 먼저 사람을 구원하시려는 하나님의 계획부터 잘 알아야 합니다. 그래서 오늘은 여호와의 구원 사역이라는 제목으로 본문을 강론하면서 하나님께서 내리는 은혜를 우리 함께 나누어 받고자 합니다.
1. 죄악에서의 구원입니다.
하나님께서 구원하시는 모든 계획이 3단계인데 첫째로는 죄악에서 우리들을 구원하신다는 겁니다. 출애굽기 3장에 보면 모세는 장인 이드의 양무리를 칠 때 호렙산에서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그는 애굽에서 종노릇하고 있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구원하라는 명령을 받은 겁니다. 하나님께서는 모세에게 지팡이로 하여금 뱀이 되게도 하고 다시 지팡이도 되게 하고 그의 손으로 하여금 문둥병도 들게 하고 다시 고침도 받게 하는 이적을 보여주시면서 일꾼으로 삼아 주셨습니다.
모세는 그의 형 아론과 함께 애굽에 있는 백성들을 모아놓고 하나님께서 나를 보내어서 우리 하나님의 백성들을 애굽에서 해방시키도록 하신다고 하면서 이적과 기사를 보여주었습니다. 그랬더니 이스라엘의 장로들과 모든 백성들이 다 기뻐하면서 하나님께 경배를 했습니다. 이제 모세와 아론은 당당히 바로왕 앞에 나아가서 여호와의 말씀을 전했습니다.
'여호와는 말씀하십니다 이스라엘 백성 하나님의 백성들이니 이들을 내어 보내 주십시요.그래서 하나님을 섬기게 하십시오'라는 것이었습니다.바로왕은 모세의 그러한 말 조금도 듣지 아니하고 오히려 이스라엘 백성들이 게을러서 그러니 더 일을 시켜라하고 혹독하게 일을 시키기 시작했던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스라엘 백성들은 모세와 아론을 이제는 원망하면서 불평을 하였습니다.
그때에 모세가 하나님 앞에 나와 기도하는 장면이 있습니다 그것이 오늘 출5:22-23에 기록되어 있는 내용입니다. 모세가 여호와께 돌아와서 고하되 주여 어찌하여 이 백성으로 학대를 당케 하셨나이까 어찌 하여 나를 보내셨나이까 내가 바로에게 와서 주의 이름으로 말함으로부터 그가 이 백성을 더 학대하며 주께서도 주의 백성을 구원치 아니하시나이다. 그랬더니 하나님께서 대답을 해 주셨습니다.
그 말씀이 출6:1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이제 내가 바로에게 하는 일을 네가 보리라 강한 손을 더하므로 바로가 그들을 보내리라 강한 손을 더하므로 바로가 그들을 그 땅에서 쫓아내리라.바로왕이 이스라엘 백성들을 애굽에서 쫓아 낼 날이 있을 것이다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해방을 받게 되리라고 하는 것입니다. 생각해보면 오늘날 우리 성도들을 저 죄악의 세상에서 하나님께서 구원해 주신 것도 믿으시기를 바랍니다.
1)이스라엘을 구원하신 근거는 어디 있습니까?
여호와의 사랑의 언약의 근거한 것입니다.
출6:에서 보면 여호와라는 말이 많습니다. 여호와라는 말이 무려 14번이나 됩니다. 출6:1-9에까지만 보아도 여호와라는 말이 6번이나 있습니다. 하나님이라고 할 때에는 능력자를 뜻합니다. 그러므로 창1:에는 하나님이 이 세상을 능력으로 창조하셨기에 여호와라는 말은 한번도 없고 오직 하나님 하나님이라는 말이 나옵니다. 창조 이후에 하나님의 언약을 성취하시는 일이 있으니까 여호와라는 말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여호와라는 말은 무슨 뜻이라고 하면 스스로 계신다는 뜻인데 어느 때에 사용이 되는가 하면 언약을 세우시고 언약을 성취하실 때에 여호와라는 말을 사용하고 있습니다.
오늘의 본문 3절에서 봅시다.'내가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전능의 하나님으로 나타났으나 나의 이름을 여호와로는 그들에게 알리지 아니하였고' 그랬습니다.
창17:에 보면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에게 나는 전능한 하나님이다. 그러므로 너에게 앞으로 아들을 주겠다. 100세나된 아브라함에게 아들을 주시는 분은 전능하신 하나님이십니다. 물론 아브라함도, 이삭도, 야곱도 여호와라는 말을 사용한 적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때는 아직 그 언약이 성취되지를 아니했습니다. 즉 창15:에 보면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에게 말씀하십니다. 너의 자손이 400년 동안 이방나라에서 학대를 받으며 어려움을 받을 것이다. 그러나 다시 돌아와서 바로 가나안 땅에 와서 살게 되겠다. 하나님께서 언약을 하셨습니다. 그 언약을 맺으셨지만 은 이로워지는 것은 지금 모세를 통하여서 이루어 주시는 겁니다. 그러므로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는 아직 여호와 하나님으로는 완전히 나타나주지를 않았다는 말입니다.
언약이란 하나님이 사람을 구속하신 그리고 계획하시고 그 계획을 인간에게 약속하시는 것을 뜻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람을 구원하시려고 하는 것은 하나님이 일방적인 사랑에 근거한 것입니다. 성경은 말씀합니다. 요일4:10에도 말씀하기를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오직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위하여 화목제로 그 아들을 보내셨다'고 했습니다. 우리가 잘 아는 요3:16을 외워봅시다.'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할렐루야!
이스라엘 백성을 구원하셨는데 왜 또 구원하십니까? 그 이유는 저들이 불쌍해서 그랬습니다. 오늘의 본문:6을 봅시다.'그러므로 이스라엘 자손에게 말하기를 나는 여호와라 내가 애굽 사람의 무거운 짐 밑에서 너희를 빼어 내며 그 고역에서 너희를 건지며 편 팔과 큰 재앙으로 너희를 구속하여' 그렇게 말씀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약 400년 동안 애굽 땅에서 종노릇하고 있었습니다. 특별히 애굽의 구고성 비돔과 라암셋을 짓기 위하여 이스라엘 백성들은 모두 종이 되어서 그 노력에 동원해야 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무거운 흙을 날러 다가 벽돌을 굽고 그것을 가져다가 성을 쌓느라고 심한 고역에 육신이 시달렸고 간역자들의 학대에 정신적으로 괴로웠습니다. 그래서 심히 어려움을 당해서 신음을 하고 있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을 애굽에서 이렇게 종노릇을 한 것입니다. 여러분 종이라는 것은 없는 것이 있습니다. 무엇보다도 자유가 없습니다. 자기 마음대로 한 걸음도 오갈 수가 없습니다. 종에게는 인격조차도 없습니다. 인격이라고 하는 것은 어떤 것을 계획하고 판단하고 실행할 수 있는 인간의 능력을 뜻합니다. 종들은 그러한 능력도 부여되지 않았습니다. 종에게는 소유물도 없습니다. 자기의 손도 발도 자기의 것이 아닙니다. 다 주인을 위해서 사용해야 합니다. 여러분 물어 봅시다. 종이 예쁜 아들을 낳았습니다. 그 아들은 누구의 것입니까? 종의 것이 아닙니다. 주인의 것입니다. 종에게는 이렇게 자기의 소유물이 없습니다. 종은 심지어 자기의 생명도 자기의 것이 아닙니다. 언제 주인이 죽여도 죽게 되는 것입니다. 주인이 팔아버리면 팔리는 것이 자기의 생명인 것입니다. 이와 같이 주인은 종에 모든 것을 마음대로 사용할 수가 있는 것이어서 종은 주인의 농기구와 같이 사용 당할 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백성들이 애굽 땅에서 그렇게 고생하고 심음 하는 것을 불쌍히 보시어서 그들을 구원해 주신 줄 믿으시기를 바랍니다. 오늘날 하나님께서는 왜 우리 성도들을 죄의 세상에서 구원해 주셨습니까? 따라서 합시다. 우리가 심히도 불쌍하니까 하나님이 구원해 주셨습니다. 믿습니까? 그렇습니다.
하나님을 떠난 인생은 모두 불쌍한 것입니다. 하기야 암병에 걸려 곧 죽을 것을 자기도 모르면서 태연하게 살고 있는 것처럼 오늘날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영적으로 죽어가고 있는데 스스로 모르고 그 비극을 모르고 있습니다. 지옥갈 것도 모릅답니다. 때로는 돈이 있어서 좋아 하지만 그러나 그 돈은 언제 없어질지 누가 압니까? 지위가 높다고 좋아할지는 모르지만 언제 그 지위에서 떨어질지 모릅니다. 건강한 것도 자랑이 못됩니다. 언제 그 건강을 잃어버릴지 누가 압니까? 생명 그것도 우리들은 살아오는 것 언제까지 살아갈지 모르는 것입니다. 분명히 하나님을 알지 못하고 살아가는 사람들은 그러다가 죽으면 가는 곳은 지옥이니 얼마나 불쌍합니까?
눅16:에서 예수님께서는 부자와 나사로에 대해서 이야기를 해주셨습니다. 부자는 이 세상에서 먹고 마시고 날마다 놀고 살았습니다. 그러나 그가 죽은 다음에는 음부 지옥에 들어가서 물 한 방울이 없어서 쩔쩔매고 괴로움을 당하지 않았습니까? 오히려 이 세상에서는 가난하게 살았던 나사로 일망정 그러나 죽은 다음에는 저 낙원 아브라함의 품에 들어가서 편안하게 즐겁게 살게 되었다는 것을 믿으시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허사가에 그런 노래가 있죠.
세상만사 살피니 참 헛되구나 부귀공명 장수는 바람잡이요 아무런 보잘것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것뿐입니까? 토지가 많다고 해서 무엇이 자랑이 되는냐 내가 죽은 다음에 3평땅 묘하나 쓸만한 땅이 넉넉하고 또 옷이 많다고 해서 자랑이 무엇이냐 내가 떠날 때에는 수위 한벌, 관 한개가 족하지 않는가? 땀흘리며 애를 써 모아 논 재물을 안고가나 지고가나 헛수고로다 빈손들고 왔으니 또한 이와 같이 빈손 들고 갈 것이 명백하지 않는가 ? 믿습니까?
그러므로 사랑하는 성도들이여 죄악에서 구원받은 것이 가장 행복된 것인 줄 믿으시기 바랍니다. 과연 아직도 죄악 가운데 있는 사람은 하나님께서 보실 때에 영적으로 볼 때 가장 불쌍한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그들을 구원하시기를 하나님께서 그렇게 원하고 계시는 일입니다.
2. 하나님의 백성이 됨(:7)
하나님의 계획은 하나님의 백성들이 되게 하는 일입니다.
첫째로는 타락한 인간을 구원하는 것이요, 구원해서는 하나님의 백성이 되게 하는 일입니다.
오늘의 본문:7에서 봅시다.'너희로 내 백성을 삼고 나는 너희 하나님이 되리니' 그랬습니다. 하나님 나라의 왕국을 건설하는 것입니다. 구원의 목적은 하나님 왕국 백성 되게 하는 일입니다. 그러므로 내가 늘 가끔 이런 이야기를 하지요. 예수님이 이 땅에 무엇을 하기 위해서 오셨냐고 하면 일반적으로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서 오셨다고 말합니다. 그것은 예수님이 오신 방법이지 목적은 아닙니다.
목적은 하나님 나라의 건설이요 방법은 우리들을 죄악 가운데 있으닌까 건져내어 하나님의 백성이 되어 하나님 나라를 이룩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마치 저 강가에 가서 모래알을 건져옵니다. 산에 가서 나무을 베어 옵니다. 건져오고 베어오는 것이 목적은 아닙니다. 집을 건축하기 위한 방법인 것입니다. 죄악에 빠져있는 사람들 이곳에서 건져오고 저곳에서 불러왔습니다. 그래서 하나님 나라를 이룩하려는 것이 예수님의 목적인줄 믿으시기 바랍니다. 과연 우리들은 누구의 백성이 되느냐 그것은 아주 중요한 일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 땅에서 애굽의 그 백성이 되어 종노릇하는 것은 얼마나 비극이었습니까? 우리나라가 일제시대 36년 동안 일본 사람의 지배를 받을 때에는 얼마나 괴로운 일이었습니까? 그러나 해방을 맞이해서 오늘날 떳떳하게 살고 있는 것은 얼마나 다행인지 모릅니다. 마귀의 백성이 되는 것은 얼마나 불행한 일입니까? 마귀의 앞잡이가 되어서 살다가 결국은 마귀가 가는 지옥에 가서 마귀와 함께 살게 되니 얼마나 불쌍하냐 말입니다. 그와 반대로 하나님의 백성이 되는 것은 하나님 우리 아버지의 사랑과 보호를 받으면서 살게 되니 얼마나 행복한 일입니까?
그러기에 시23:에 다윗은 말하기를 '여호와는 나의 목자 시니 내가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부족한 것이 하나도 없다 그러기에 나는 항상 만족하고 기쁘다는 겁니다. 그러다구 다윗이 일평생 고통을 한번도 당하지 않았다는 것은 아닙니다. 다윗은 사울 왕에게 쫓기어서 피난할 때 사울 왕은 몇 번이나 죽이려고 했습니다. 때로는 참으로 던져죽일려고 했고 군대들을 몰고 가서 업습해 가지고 포위해서 죽이려 했고 얼마나 죽이려고 했지만은 그러나 여호와께서 다윗의 목자가 되어 주시어서 다윗을 늘 피할 길을 인도해 주셨고 죽을 고비 고비마다 하나님께서 다윗을 살려 주신 것을 믿으시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다윗은 마침내 당당히 이스라엘 통일왕국에 왕이 되어 통치하며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던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 한국에 태어난 것도 상당히 참 좋다 하는 느낌을 많이 갔습니다. 물론 기후도 좋은 그러한 한국일 뿐만 아니라 이제는 위상도 상당히 좋아졌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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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인이 된 것도 자랑스럽다면 우리들은 하나님 나 백성된 것을 더욱 자랑스러운 것을 믿으시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의 백성은 그러므로 우리들은 더 자랑스러운 마음으로 긍지를 가지고 떳떳하게 살아가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뿐만 아니라 우리들은 하나님을 잘 섬겨야99 합니다. 오늘 :7절하반절에 보면 '나는 애굽 사람의 무거운 짐 밑에서 너희를 빼어낸 너희 하나님 여호와인줄 너희가 알찌라' 알아야 한다는 겁니다. 이스라엘 백성들 애굽 땅에서 그 무거운 짐을 지고 노역에 시달리던 그들을 구원해 주신 줄로 하나님이 알아라!
하나님이 구원해 주신 것 저들로 하여금 알게 해야한다는 겁니다.
오늘날 마찬가지로 우리들도 영적의 죄악에 힘을 주고 괴로워서 그대로 살다가는 또 지옥갈 수밖에 없는데 우리 하나님께서 우리들을 거기에서 건져주신줄로 우리들도 알아야 하는 것을 믿으시길 바랍니다. 그러나 이것은 지식적으로만 알아야 하는 것은 아닙니다. 체험적으로 알며 하나님을 섬겨야 할 것을 요구하고 계십니다. 그런데 여러분 이스라엘 백성들은 애굽에서도 해방되어 나온 다음에 늘 기뻐했습니까? 조금만 어려움을 당하면 원망하고 불평하고 그렇게 하다가 결국은 하나님의 말씀을 제대로 믿지 못할 턴인데 두 사람을 제외하고는 40년 동안의 광야에서 죽게 되었다는 것을 성경은 말해 조고 있습니다. 오직 하나님의 사람 모세의 말을 잘 믿고 순종했던 여호수아와 갈렙만이 하나님의 약속의 땅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에 들어갈 수가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이여! 우리들도 하나님의 중요한 말씀을 잘 믿고 9잘 섬기고 또 잘 순종함으로 말미암아 하늘나라에 가는데 한 사람도 낙오됨이 없이 다 들어갈 수 있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3. 하나님의 백성들로 하여금 안정된 생활을 하는 것(:8)
오늘의 본문 :8을 다 함께 읽어봅시다. '내가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주기로 맹세한 땅으로 너희를 인도하고 그 땅을 너희에게 주어 기업을 삼게 하리라 나는 여호와로라 하셨다 하라'아멘.
언약의 땅에서 안정된 생활을 하게 하려는 것 이것이 하나님이 원하시는 일찍이 하나님은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그들이 우거하던 가나안 땅을 그들의 자자손손에게 주시기로 약속을 하셨습니다. 우거라는 말은 더부살이를 한다는 말입니다. 아브라함과 야곱은 가나안 땅에서 우거를 했습니다. 남의 땅에서 더부살이처럼 살았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언약하시기를 너의 자손들이 앞으로 이 땅에 와서 살게 된다 이렇게 언약을 하셨는데 이제 그 언약을 이루어서 이스라엘 백성들로 하여금 그 젖과 꿀이 흐르는 곳에 가서 편안히 살 수 있도록 해 주시겠다는 약속입니다.
하나님은 우리 아버지이십니다. 그래서 사도신경에서도 '전능하사 천지를 만드신 하나님 아버지를 내가 믿사오며' 그렇게 고백을 합니다. 우리 예수님께서는 너희는 이렇게 기9도하라 말씀하시고 하늘의 계신 우리 아버지여 라고 했습니다. 참 얼마나 좋은지 모릅니다. 그렇습니다. 아버지들은 자녀들을 다 낳아서 길러 줍니다. 그리고 자녀들이 잘 되도록 애써 수고합니다. 자녀들을 위해서 준비하고 일을 하는 것입니다. 아버지는 자녀들이 잘 되기를 바라고 노력을 합니다.
눅 15:에 보면 심지어 방탕한 아들 자기의 상속받을 것을 몽땅 가지고 아버지 꼴도 보기 싫다고 먼 나라에 가서 허랑 방탕하게 다 써 버리고 알거지처럼 돌아오는 방탕한 아들마저도 아버지는 버선발로 뛰어가서 얼싸 안고 좋은 옷을 내어다 입히고 가락지를 끼우고 신을 신기고 살진 송아지를 잡게 하고 풍악을 갖추어서 잔치를 베푼 것이 아닙니까?
오늘날도 우리 사랑 많으신 하나님 아버지는 그러하다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마 11:28-30에 '수고하고 짐진 자들아 다 네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러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이는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벼움이라 하시니라' 말씀하셨습니다. 요 10:10b에 '내가 온 것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는 것이라' 그러므로 우리 성도들은 겨우 구원받은 것만 만족하지 말고 영육간에 더 풍성하고 완전한 가운데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수 있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이 그렇게 원하십니다. 여러분! 여러분의 자녀들이 못 살고 어려우면 부모가 딱하게 생각을 하면서 이들이 잘 살기를 원하는 것처럼 우리 하나님은 우리 성도들이 육신 적으로도 영적으로도 그렇게 안정되고 풍성한 가운데 살기를 원하는 줄로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러므로 이 시간도 성령께서 이곳에 인제 오시어서 우리의 가난도 다 물러가게 해 주시기를 바랍니다. 모든 질병도 다 물러가게 해 주시기를 바랍니다. 사업의 불경기도 실패도 모두 물러가게 하시기를 바랍니다. 가정의 우환, 질고도 물러가게 해 주시기를 바랍니다.
부디 우리 성도들, 인생의 나그네길에서 영육간에 안정된 가장 보람 있는 일을 많이 하다가 영원한 하늘나라에 다 들어가는 성도들이 될 수 있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오늘의 :9을 봅시다. '모세가 이와 같이 이스라엘 자손에게 전하나 그들이 마음의 상함과 역사의 혹독함을 인하여 모세를 듣지 아니하였더라' 그것이 비극입니다. 마음이 상했다고 빨리 하나님이 구원해 주시지 않는다고 그만 그들은 원망하고 듣지를 않았습니다. 믿음이 없었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그들은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을 들어가지 못했던 불행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성도들이여! 하나님의 구원계획을 분명히 깨달으시기 바랍니다.
첫 단계는 죄악에서 구원해 주시는 것입니다. 아직도 죄악에 괴로움을 당하고 계십니까? 죄악의 사슬들을 다 끊어 버리시기 바랍니다. 죄악에서 해방을 맞아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두 번째 단계는 하나님의 백성이 되어 하나님을 잘 섬기고 하나님의 보호를 받으시기 바랍니다. 마지막 셋째 단계로 영육간에 안정되고 풍성한 가운데 세상 사람들의 빛이 되며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생활을 계속할 수 있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여호와 하나님을 힘써 알라
출 6: 1-9
관상을 잘 보는 여인이 있었습니다. 그녀는 타의 추종을 불허할 만큼 관상을 잘 봤습니다. 길을 가다 지나가는 사람을 보고 저 사람은 고아원 출신이겠다느니, 저 사람은 부모가 없겠다느니, 저 사람은 남편을 일찍 잃었겠다고 던지는 말이 척척 맞아 떨어졌습니다. 그래서 별명이 쪽집게였고 항상 손님이 문전성시를 이루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분이 관상을 보다가 의문점이 생기기 시작하였습니다. 관상대로 되지 않은 예외를 보기 시작하였습니다. 벌써 죽었어야 할 관상인데 건강하게 지나가는 사람도 보았습니다. 거지상이 틀림없는데 양복입고 회사에 버젓이 다니는 사람도 보았습니다. 하루는 지나가는 사람을 보니 벼락맞아 죽을 상이었습니다. 그런데 아무 일 벗이 행복한 얼굴로 지나가길래 따라가 보았습니다. 숨어서 엿보다가 그 사람이 들어간 집에 가까이 가보니 대문에 00교회 성도의 집이라는 교패가 달려있는 것을 보게 되었습니다.
그녀는 더욱 궁금하였습니다. 웬일일까? 사람마다 운명을 타고 나는 법인데! 태어날 때 팔자가 정해지는 법인데! 에수 믿는 사람들은 어떻게 된 것인가? 이상하기도 하고 궁금하기도 해서 그 분이 교회를 찾아가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만나 뵙고 지금은 어느 감리교회의 권사님으로 신앙생활 잘 하고 있답니다. 그녀는 발견했던 것입니다. 관상을 초월하시는 하나님, 관상도 초월하게 하시는 믿음의 능력을 발견했습니다.
오늘 봉독한 본문은 하나님의 자기 계시입니다. 여기서 하나님은 자신을 전능하신 분으로 소개하고 계십니다. 또한 하나님은 구원의 여호와이심을 말씀하십니다. 이스라엘의 고통을 보시고 저들의 신음소리를 들으셨다고 하십니다. 그래서 아브라함과 하셨던 언약을 기억하고 이 백성을 구원하시겠다고 말씀하십니다. 이 말씀은 모세에게는 용기를 주고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는 희망을 주는 메시지입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이스라엘은 이 말씀에 귀기울이지 않았습니다. 모세가 이 말을 전했으나 듣지 않았습니다. 저들이 너무 힘든 상황에 처한 나머지 하나님께 희망을 두지 못했습니다. 환경을 초월할 수 있는 하나님의 능력을 믿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오늘은 봉독한 말씀을 중심해서 <여호와 하나님을 힘써 알자>라는 제목으로 말씀드리겠습니다. 하나님을 바로 알아야 믿음을 가질 수 있습니다.
전능하신 하나님
하나님은 전능하십니다. 하나님은 여호와로 자신을 계시하시기 전에 먼저 전능의 하나님으로 나타나셨었습니다. 2절의 말씀에 "내가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전능의 하나님으로 나타났으나"라고 하였습니다. 하나님은 자신을 여호와로 계시하시기에 앞에 그 여호와는 전능의 하나님이심을 강조하셨습니다. 여기서 전능의 하나님은 '엘 샤파이'입니다. 헬라어로는 전능은 '판토크라토오로'라고 합니다. 이 말은 만능 즉 " 온 세상의 힘을 다 합쳐도 당해낼 수 없는, 부가늘이 없는"이라는 뜻입니다. 하나님께서 천지를 찬조하셨고, 모든 것을 지배하시며 모든 것을 통솔하시고 모든 것을 장악하고 계신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신앙고백의 첫머리에 "전능하사 천지를 만드신 하나님 아버지를 내가 믿사오며"라고 전능하신 하나님을 고백하고 있습니다.
여호와 하나님
그러나 오늘 봉독한 본문에서는 하나님에서 자신을 여호와로 소개합니다. 이전에는 전능의 하나님으로 나타내셨으나 이제 여호와로 계시하시는 것입니다. 애굽에서 고통당하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구원의 하나님으로 나타나십니다. 하나님이 모세에게 자신을 여호와(야웨)라고 소개하였습니다. 이를 사람들이 "스스로 있는 자"라고 번역하였습니다. 이것도 좋은 해석입니다. 하나님은 스스로 게시는 분 즉 자존자이십니다. 그는 피조물이 아니라 창조주이십니다. 세상의 모든 것은 다 창조된 피조물입니다. 오직 하나님만이 스스로 계십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스스로 있는 자라고 해석한 것은 철학적이고 관념적입니다. 좀 더 좋은 해석은 "나 여기 있다"입니다. "너희 아버지 하나님이 여기 있다"라는 뜻입니다. 칡흙같이 어두운 밤, 아들이 길을 잃고 낙심하고 있을 때, 어디로 가야 할 지 몰라 애태우고 있을 때 "나 여기 있다"라고 찾아오신 아버지와 같습니다.
당시 이스라엘은 어두움 속에 있었습니다. 고통 당하고 있었습니다. 입에서 나오는 것은 탄식이요 아우성이었습니다. 온통 신음소리가 이스라엘 진영에 가득찼었습니다. 희망이 보이지 않았습니다. 어디 길이 보여야 할텐데 도무지 샛길도 보이지 않았습니다. 낙심하다 못해 절망하고 있었습니다. 자포자기하고 되는대로 살고 있었습니다. 그때 하나님이 나타나셨습니다. 그리고 말씀하십니다. "나 여기 있다" 할렐루야, 좋으신 하나님을 찬양하십시다(박수도). 그러면 이제는 '나 여기 있다'라고 말씀하시며 찾아오신 여호와 하나님이 어떠한 분이신지 본문을 중심하여 살펴 보겠습니다.
첫째, 여호와는 백성들의 고통과 신음을 아십니다.
5절 말씀에서 "이제 애굽 사람이 종으로 삼은 이스라엘 자손의 신음소리를 내가 듣고"라고 하였습니다. "출애굽기 3장 7절에 보면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내가 애굽에 있는 내 백성의 고통을 분명히 보고 그들이 그들의 감독자로 말미암아 부르짖음을 듣고 그 근심을 알고"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고통을 아십니다. 우리의 슬픔도 아십니다. 우리가 당한 어려움을 알고 계십니다. 우리가 탄식하는 소리를 들으십니다. 근심하고 있는 것을 알고 계십니다. 뿐만 아니라 우리의 아픔에 같이 아파하십니다.
엘리 위젤은 그의 책 밤(Night)에서 죽음의 수용소 아우쉬비츠의 일화를 이렇게 소개하고 있습니다. 한번은 어린 소년이 사소한 수용소 규칙을 어겼다는 이유로 모든 수용자들 앞에서 교수형에 처해졌습니다. 그의 몸이 밧줄에 매달렸을 때 위젤은 누군가가 묻는 소리를 들었습니다. "하나님은 지금 어디에 계십니까?" 그런데 그때 위젤의 마음속에는 이러한 소리가 들려왔습니다. 그가 어디에 게시냐고? 그는 바로 여기에, 지금 이 교수대에 저 소년과 함께 매달려 계신다" 하나님은 어디에 계시는가? 그분은 고통당하는 하나님의 자녀들과 함께 고통당하고 계신다는 영감의 소리를 들은 것입니다. 여호와 하나님은 우리의 고통을 아십니다. 함께 고통을 당하고 계십니다.
둘째, 여호와 하나님은 언약을 지키십니다.
4∼5절의 말씀을 보십시오. "가나안 땅, 곧 그들이 거룩한 땅을 기억하노라"고 하십니다. 이 약속은 아브라함과 했던 약속입니다. 창세기17장에서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시기를 "내가 너와 네 후손에게 이 땅 곧 가나안 온 땅을 주어 영원한 기업이 되게 하고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리라"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많은 시간이 지났지만 하나님은 그 언약을 기억하시고 성취하셨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미 잊었을 것입니다. 그런 기대도 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기억하시고 언약을 이루셨습니다.
하나님의 언약의 말씀을 믿으십시오. 하나님은 언약하신대로 이루십니다. 하나님은 이 언약을 약 4∼5백년 후에 이루셨습니다. 그러면 어떤 분은 의아하게 생각하실 지 모르겠습니다. 무슨 약속을 400년간에 이루시냐고요! 그러나 여기에는 다 그럴만한 이유가 있습니다. 그동안 가나안에 살고 있던 가나안 족속들은 죄악이 관영하여 하나님의 심판을 받아야 할 때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이스라엘은 애굽이라는 곳에서 큰 민족으로 성장하여 가나안 땅을 인수할 수 있는 능력을 키웠습니다. 그렇게 되기까지 시간이 걸린 것입니다. 하나님은 길던 짧던 그의 언약을 이루십니다.
셋째, 여호와 하나님은 그의 백성을 구원하십니다.
하나님은 모세를 그의 일군으로 삼고 그의 백성 이스라엘의 애굽의 속박에서 구원하셨습니다. 애굽 사람들은 무모하고 잔인합니다. 수많은 사람들은 희생시키면서 피라밑을 완성시킨 사람들입니다. 거대한 스핑크스를 만든 사람들입니다. 올바른 정신으로는 할 수 없습니다. 그러자니 수많은 노동자 노예들이 희생되었습니다. 그러한 사람들에게 이스라엘도 시달렸습니다. 고통을 당했는데 하나님이 구원하셨습니다(6∼7절 참조).
여호와 하나님은 구원하시는 분이십니다. 하나님은 10가지 재앙으로 바로의 콧대를 꺽으시고 이스라엘을 건져내셨습니다. 그러나 능력이 모자라서 10번씩이나 재앙을 내리신 것이 아닙니다. 10번의 재앙을 통해서 애굽사람이나 이스라엘 사람들이 믿고 있던 우상들을 한가지씩 깨뜨리신 것입니다. 저들이 믿고 섬기던 나일강도, 해와 달도, 소도 다 하나님의 능력의 재앙앞에 무릎을 꿇었습니다. 그리고 오직 하나님이 구원의 하나님이요, 능력이심을 알게 하셨습니다. 드디어는 10가지 재앙으로도 깨닫지 못하고 뒤따라오는 애굽의 군사를 홍해를 가르고 수장시키셨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무사히 홍해를 건너게 하시고 애굽의 군사는 수장시켰습니다. 이로써 다시 한번 여호와만이 구원의 주님인 것을 알게 하셨습니다.
여호와가 전능의 하나님이시다
이제는 구원의 주 여호와가 전능의 하나님이라는 것을 말씀드리고 마치겠습니다. 우리를 구원하시는 여호와는 전능하사 천지를 만드시고 주관하시고 다스리시는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은 백성들이 이것을 알기를 원하십니다. 7절을 보십시오. "너희를 내 백성으로 삼고 나는 너희의 하나님이 되리니 나는 애굽 사람의 무거운 짐 밑에서 너희를 빼낸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 인줄 너희가 알지라"고 하셨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뜻입니다. 이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런데 안타까운 일은 심하게 고통 당하고 있던 이스라엘 사람들의 귀에는 이러한 말씀이 들어오질 않았습니다. 9절에서 말씀하듯이 "모세가 이와같이 이스라엘 자손에게 전하나 그들이 마음의 상함과 가혹한 노역으로 말미암아 모세의 말을 듣지 아니하였더라 "고 하였습니다. 오죽했으면 그 지경이 되었겠습니까? 그러나 당연하게 생각해서는 안됩니다. 아무리 상황이 어려워도 그 상황보다 크신 하나님을 믿어야 합니다. 아무리 형편이 힘들어도 능력의 하나님을 믿고 하나님을 찾아야 합니다.
풍랑속으로 걸어오시는 예수님을 보고 베드로도 물위로 걷기 원하였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을 바라볼 때는 물위로 걸을 수 있었으나 풍랑이 눈에 들어왔을 때는 물에 빠져들어갔습니다. 풍랑보다 크시고 능력있으신 주님을 바라볼 때만 풍랑을 이길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풍랑보다 크십니다. 하나님은 어떤 환경도 초월하십니다. 하나님은 관상도 초월한다고 말씀드렸습니다. 크신 하나님을 믿고 찾고 기도하셔서 승리하시기를 바랍니다.
믿음이 연약한 사람일수록 문제를 크게 봅니다. 그러나 우리 믿음의 성도들은 문제보다 크신 하나님의 능력을 보아야 합니다. 물론 하나님께서 모든 것을 우리 뜻대로 이루시지는 않습니다. 하나님은 나름대로의 뜻과 계획을 갖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낙심해서는 안됩니다. 그분은 합동하여 유익하게 하시는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문제는 이것입니다. 크신 하나님, 능력의 하나님을 보지 못하여 쉽게 낙심하고 자포자기하는 것입니다. 이제 다시 한번 말씀드립니다. 하나님은 어떤 환경과 조건도 초월하십니다. 크신 하나님을 찾고 믿고 기도하시면서 삶에서 승리하시기를 기원합니다.
하나님이 이루시는 구원
출 6: 1-9
찰톤 헤스톤과 율부리너가 주연했던 ‘십계’라는 영화에서 애굽에서 종살이하던 이스라엘 백성들이 벽돌을 구우면서 감독들에게 채찍에 맞고 쓰러지고 넘어지는 장면이나 지푸라기도 주기 않고 직접 풀을 주어서 이전의 양과 같이 벽돌을 구우라고 하면서 재찍에 맞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고통스런 모습이 생생합니다. 모세가 바로를 찾아가서 내 백성을 보내라고 외치다가 더 힘든 종살이의 고역을 당하는 모습을 보는 것은 종살이의 고통이 너무나 힘들고 견디기 어려운 것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에서 종살이 하면서 당했던 무거운 고통은 바로 우리가 예수 믿기 전에 죄악에 종노릇 하면서 당했던 고통을 상상하게 합니다. 죄 아래서 종노릇하면서 고통당하며 죽어가면서도 그 사실을 알지 못하고 사망과 심판에 빠져 죽어갔던 우리의 옛사람이 생각납니다.
창세기의 주제가 하나님이 자기 백성을 선택한 것이라면 출애굽기는 하나님이 자기 백성을 구원해 내신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오늘 우리의 구원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출애굽기에서 하나님이 자기 백성의 구원을 이루어 가시는 하나님의 구원해 대해서 먼저 잘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오늘 이 시간 하나님께서 모세를 통하여 자기 백성들의 구원해 가시는 그 구원에 대해서 몇 가지로 살펴보면서 오늘 하나님께서 이루어가고 계시는 우리의 구원이 무엇인가를 살펴보려고 합니다.
첫째로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애굽의 종살이에서 구속하는 것이었습니다(1-6)
하나님께서 모세를 불러 애굽에서 종살이하던 이스라엘 백성들을 구원하러 해방자로 보내셨을 때 이스라엘 백성들은 애굽에서 종살이하고 있었습니다. 하나님이 모세를 바로왕에게 보내서 “내 백성을 보내서 그들이 하나님을 섬기게 하라”는 하나님의 명령을 바로왕에게 전하면서 이스라엘 백성들의 종살이 고통을 더욱 심해졌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을 애굽의 총리였던 요셉의 초청을 받아 애굽에 영주권을 받아서 거주한 애굽의 영주권자들이었는데 요셉을 알지 못하는 새로운 애굽왕이 등장하면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자신의 종으로 부려서 국고성 비솜과 라암셋을 건축하고 있었습니다. 이 애굽왕은 이스라엘 백성들을 자신의 종으로 삼고 자신의 왕국 건설을 위하여 이스라엘 백성을 종으로 부리고 있었고 모세를 통하여 이스라엘 백성들을 하나님을 섬기도록 보내라는 말씀을 듣고 더 견디기 어려운 고역을 시켰습니다. 이 때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에서 당하는 종살이의 고통을 세 가지로 정리할 수 있습니다. 먼저는 영주권자였던 이스라엘 백성들을 바로왕은 애굽에서 강제로 노예를 삼아서 노역을 시켰습니다. 그리고 이스라엘 백성들 위에 애굽 사람과 이스라엘 감독을 세워서 지푸라기도 주지 않고 이전과 동일한 양의 벽돌을 구우라고 하면서 고통을 더하는 것이었습니다. 마지막으로 이스라엘 남아 살해정책을 시행해서 이스라엘 백성들의 부모에게 고통을 더하고 숫자 증가를 막아보려는 것이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에서의 종살이는 정말 견디기 어려운 고통과 시련을 맞이하고 있었습니다. 사내아이를 나을 때 산파에게 죽이라고 했다가 두 산파가 바로왕의 명령을 듣지 않자 사내아이를 나일강물에 던져 죽이라는 것이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의 종살이 고통은 애굽의 바로왕에 의해서 조직적이고 계획적으로 시행되고 있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종살이하면서 견디기 어려운 강제노역을 날마다 계속하는 것도 힘든데 아들을 낳아서 강물에 던져 죽여야 하는 부모들의 고통과 아픔은 이루 말로 표현할 수 없었습니다. 이시기에 하나님을 두려워하여 히브리인들의 아들을 살린 두 산파와 모세의 어머니 요게벳의 믿음은 어두운 밤에 떠오르는 샛별과도 같은 한 줄기 빛이었고 소망이었습니다. 바로 이러한 믿음의 어머니 아래서 모세는 태어나서 자랐고 이스라엘 백성들의 해방자로 자랐습니다. 모세를 자신의 아들을 입양하여 키운 바로왕의 공주는 투트 모세 1세의 무남독녀 하세프세트입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복의 근원이 될 것을 약속하셨고 이것은 모든 족속이 아브라함에게서 나는 그 아들로 구원함을 얻게 될 것을 약속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하셨던 이 약속은 그 후손이 하늘의 별과 같이 많아지는 것이었고 아브라함과 그 후손들에게 가나안 땅을 주시겠다는 언약이었습니다. 그러나 아직 가나안땅의 죄악이 가득 차지 아니하여 아브라함의 후손들이 애굽에 400년간 종살이하다가 해방되어 와서 그 땅을 차지할 것도 이미 말씀해 주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찾아오셔서 언약을 맺어주시면서 가나안땅을 그들에게 주시겠다는 것과 그 아들로 인하여 모든 민족을 구원하시겠다는 약속은 놀라운 하나님의 축복이 아닐 수 없습니다. 아브라함의 아들 이삭과 그 후손이 야곱과 요셉도 다 약속의 가나안 땅이 하나님의 의해서 그들에게 주어질 것을 믿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애굽에서 종살이 하면서 종살이의 고통과 아픔이 너무나 커서 하나님께 부르짖었을 때 하나님은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가나안 땅을 그들에게 주시겠다는 하나님의 언약을 기억하였다고 했습니다.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찾아오셔서 언약을 하셨다는 것 자체가 놀라운 은혜이고 축복입니다. 창조주 하나님이 피조물인 사람에게 찾아오셔서 약속을 해주신 것 자체가 참으로 놀라운 하나님의 은혜인데 이 언약을 하나님께 반드시 이루어 주신다는 사실이 얼마나 놀라운 약속인가 이 말입니다.
언약의 하나님은 여호와 하나님이라고 말씀하시면서 강한 손과 편 팔로 애굽의 종살이의 무거운 고역에서 이스라엘 백성을 구속하시겠다고 했습니다. 이것은 언약의 하나님이 전능하신 능력으로 자기 백성을 죄악의 종살이하는데서 구원하시겠다는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박윤선 박사님은 구약에서 구속하다(카알)는 말은 “다른 생명을 희생시켜서 구원하다”는 뜻으로 해석했는데 구속사적인 의미를 담은 해석입니다. 신약에서 바울사도가 구속하다는 말은 사용할 때는 당시의 노예제도를 염두에 두면서“종을 값을 지불하고 사서 자유인이 되게 한다”는 의미로 사용했는데 구약과 신약의 구속하다는 말은 서로 일맥상통하는 의미가 담겨 있음을 보게 됩니다. 하나님이 애굽에서 무거운 고역으로 종살이하던 이스라엘 백성들을 어린양의 피를 지불하여 애굽에서 구원하여 자유인으로 약속의 땅 가나안에서 하나님을 섬기게 했습니다.
(적용) 하나님은 자기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피 흘려 죽게 해서 다시 살리셨는데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으심을 믿은 사람은 죄를 다 용서받고 죄악에서 구원을 받았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으심을 믿는 사람을 죄의 종에서 해방되어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구원을 이미 받았습니다. 출애굽의 구원은 죄의 종노릇이 너무나 고통스럽고 무거운 것이라는 사실을 우리에게 알게 해줍니다. 무서운 죄의 종으로 영원한 사망에 빠져 죽을 수밖에 없었던 우리를 예수님의 피로 구원하여 하나님의 자녀로 삼아주신 우리의 구원에 대해서 감사하고 감격하고 기뻐하는 우리 모든 성도들이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둘째로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하나님의 백성으로 삼아주신 것입니다(7)
여호와 하나님은 종살이하던 이스라엘 백성을 하나님의 백성으로 삼아주시고 이스라엘 백성의 하나님이 되어 주셨습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과 인격적인 관계를 맺어주신 것을 말합니다. 아브라함에게 찾아오셔서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과 더불어 언약을 맺어주시고 그들과 언약을 기억하시고 지키시는 언약의 하나님 여호와는 전능하신 하나님이십니다. 이 언약의 하나님이 아브라함과 맺은 언약을 기억하시고 그들을 애굽에서 구원하여 내서 언약의 백성으로 삼아주신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애굽에서 해방되어 하나님의 백성이 되었다고 하는 것은 애굽의 종살이에서 자유해졌고, 하나님의 언약이 성취되는 것을 믿었고, 전적으로 이 모든 것이 하나님의 주권에 의해서 이루어지는 것을 믿었습니다.
예수님은 유월절 만찬을 잡수시면서 잔을 나누어 주시면서 자신의 피로 세우신 새 언약이라고 말씀하시면 주의 죽으심을 예수께서 다시 오실 때가지 증거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오늘 우리는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으심을 믿고 새 언약의 백성이 되었습니다. 새 언약의 백성은 하나님의 법을 마음에 새겨져 있고 작은 자에서부터 큰 자에게 이르기까지 다 하나님을 알고 하나님께서 그들의 죄를 기억조차 하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7절 마지막에 이스라엘이 여호와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알게 되었다는 것은 참으로 놀라운 구원의 의미를 말해주고 있습니다. 이사야 선지자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을 알지 못해서 망한다고 했습니다. 사도요한은 요한복음 17장 3절에서 하나님을 유일한 참 신으로 아는 것이 영생이라고 했습니다. 애굽에서 여러 신들을 섬기는 혼합적 무속상황에서 살았습니다. 애굽에서 태양이나, 나일강이나, 소를 신으로 섬기는 다신교 문화권에서 계속해서 살다가 여호와 하나님이 유일한 참 신으로 알게 된다는 것은 참으로 놀라운 일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열 가지의 재앙을 통하여 그들이 알게 된 언약의 하나님의 유일한 참 신으로 알게 되었습니다.
(적용) 삼위일체 하나님을 우리의 유일한 참 신으로 알고 섬기는 것이 바로 영생입니다. 하나님의 백성으로 하나님을 유일한 참 신으로 섬기는 우리 모든 성도들이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셋째로 하나님이 약속의 땅을 이스라엘에게 기업으로 주신 것입니다(8-9)
오늘 우리들에게 고향이라는 말은 자연 그대로의 시골을 말하기도 하고 부모님이 계시는 곳이라는 의미도 있습니다. 왠지 전원적이고 풍성하고 포근한 의미가 담겨져 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고향을 좋아하고 명절이면 찾아가서 따뜻한 정을 나누어 가지고 갑니다. 제가 처음 미국에 가서 시카고에 살다가 나중에 뉴욕으로 이사 가서 살았습니다. 시카고에서 불스 농구팀을 열심히 응원하다가 뉴욕에 가서 살면서 닉스팀이 응원될 줄 알았는데 놀랍게도 뉴욕에서도 시카고 불스팀을 응원하는 제 자신을 보고 제 자신도 놀랐습니다. 사람이 처음에 정착하고 산 데가 고향처럼 느껴지고 정이 더 가는 것은 어쩔 수가 없었습니다.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가나안으로 향하여 가라고 말씀하셨고 가나안에 사는 아브라함에게 찾아오셔서 가나안땅을 아브라함과 그의 후손들에게 수시겠다고 약속해 주셨습니다. 아브라함과 이삭이 다 가나안 땅에 대한 약속을 믿고 살다가 죽으면서 막벨라 굴에 묻혔습니다. 야곱은 애굽에 내려가서 살면서도 요셉에게 가나안의 막벨라 굴에 장사지내겠다고 서약을 하게 해서 막벨라 굴에 묻혔습니다. 요셉도 후손들에게 출애굽할 때 자신으 시신을 가나안으로 가져가서 묻으라고 유언을 했고 실제로 그들은 출애굽 때 요셉의 시신은 가나안으로 가져가서 세겜에 묻었습니다. 아브라함을 비롯한 족장들은 다 가나안 땅에 대한 약속을 그대로 믿고 살았던 믿음의 사람들입니다.
하나님은 애굽에서 종살이 하고 있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가나안 땅을 그들의 기업으로 주시겠다고 분명하게 말씀해 주셨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 땅을 차지하고 사는 것이 바로 영생입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족장들에게 있어 본향은 땅 위에 있는 본향이 아니라 하늘에 있는 본향이라고 했습니다. 요한계시록 21장 3절에서 하나님의 장막에 하나님의 백성들이 거하게 될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약속의 땅 가나안은 오늘 우리들에게는 하늘에 있는 영원한 본향이고 하나님이 거하시는 새 하늘과 새 땅의 하나님의 장막입니다. 새 하늘과 새 땅이 도래할 때 우리 성도들은 하나님의 백성이 되어 하나님의 장막에 영원히 거하게 될 것인데 이것이 바로 하나님이 이루시는 구원의 완성입니다.
그런데 모세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하나님이 이루실 구원에 대해서 전했을 때 그들은 모세가 전하는 구원의 말씀 듣기를 거절했습니다. 오늘 우리가 놀라운 구원의 복음을 전하더라도 사람들은 우리의 복음 듣기를 거절할 경우가 많이 있을 것을 말해 줍니다. 그럼에도 낙심하지 말고 계속해서 우리는 구원의 복음을 전해야 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이여!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향하여 계획하신 구원을 이루어 내신 것처럼 오늘 우리를 향하여 세우신 구원계획도 이루어 내실 것입니다. 하나님이 오늘 우리를 위해서 이루실 구원은 죄에서 건져 내 주시는 구원이고, 하나님의 백성으로 삼아주시는 구원이고,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게 해주시는 구원입니다. 하나님이 이루시는 우리의 구원을 그대로 믿고 순종하여 나아가서 온전하게 구원받는 우리 모든 성도들이 될 수 있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마음을 상하게 하지 마라
출 6:1-9
송영태 목사
맥추감사주일입니다. 말 그대로 보리를 추수하고 감사를 드리는 절기입니다. 그런데 서울에 복잡함 속에 살면서 우리는 맥추감사주일이라는 말이 별로 실감이 나지 않습니다. 보리를 추수하기는커녕 보리 구경을 한지도 얼마인지도 모릅니다. 보리에 대해 아는 것이라고는 "보리밭 사잇길로 걸어가면"이라는 노래가사 뿐입니다. 그래서 맥추감사주일이라고 하는 것이 별로 실감이 나지 않습니다.
그런데 맥추감사주일은 단순히 보리를 추수한 것에 대해 감사를 드리는 것보다 더 깊은 뜻이 있습니다.
신26:1-3절 말씀에 보면 맥추절을 지키는 자세에 대해서 말씀하셨는데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기업으로 주사 얻게 하시는 땅에 네가 들어가서 거기 거할 때에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주시는 땅에서 그 토지 모든 소산의 만물을 거둔 후에 그것을 취하여 광주리에 담고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그 이름을 두시려고 택하신 곳으로 그것을 가지고 가서 당시 제사장에게 나아가서 그에게 이르기를 내가 오늘날 당신의 하나님 여호와께 고하나이다 내가 여호와께서 우리에게 주리라고 우리 열조에게 맹세하신 땅에 이르렀나이다 할 것이요"
이 말씀에서 관심 있게 읽어야할 단어가 있는데 "땅"이란 단어입니다. "기업으로 주사 얻게 하시는 땅", "여호와께서 네게 주시는 땅", "우리 열조에게 맹세하신 땅" 이렇게 땅을 강조하고 있는데, 바로 이것이 맥추절의 의미입니다. 단순히 보리를 추수하게 되어서 감사를 드리는 것이 아니라 이렇게 심고 거둘 수 있는 땅을 주신 것을 감사하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본래 자기 소유의 땅이 없던 사람들입니다. 애굽에서 노예생활을 할 때는 열심히 땅을 일구고 가꾸었지만 내 것이 아니었습니다. 더욱이 애굽을 떠나 40년 동안은 정처 없는 광야생활을 하였습니다. 한번도 내 땅과 내 집을 가져 본적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이제는 비옥한 가나안 땅의 소유자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그 땅에서 거둔 작물을 하나님께 바친다는 것은 수확에 대한 감사가 아니라 수확할 수 있는 땅을 주신데에 대한 감사입니다.
오늘 우리들이 맥추절을 맞이하는 자세도 이것입니다. 지금까지 무엇 무엇을 주셔서 감사합니다. 해서는 하는 것이 아닙니다. 지금 내가 서있는 그 자리에 대해 감사하는 것입니다. 아무 자격 없는 우리를 하나님의 자녀로 삼아 주시고 자녀로 대접해 주시는 것에 대해 감사해야합니다. 할줄 아는 것이라고는 죄 짓는 것밖에 없는데도 불구하고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로 씻겨 주시고 의인의 자리에 세워주신 것에 대해 감사해야합니다.
늘 하나님의 속을 썩혀드리는데도 불구하고 언제나 은혜를 베풀어주시는 그 자리에 서게된 것을 감사해야 합니다. 이것이 오늘 우리들이 지키는 맥추감사절의 의미입니다.
아무리 맛있는 음식을 먹어도 위가 상한 사람은 속이 아프고 쓰릴 뿐입니다. 아무리 깨끗한 물이라 해도 몸에 상처를 가진 사람이 물 속에 들어가면 아프고 상처만 더할 뿐입니다.
또한 아무리 귀하고 보배 같은 소식이 들려와도 마음이 상한 사람에게는 즐겁기는커녕 오히려 분모와 슬픔이 더할 뿐입니다.
정원의 우거진 숲에서 지저귀는 새소리를 듣고 마음에 눈물이 있는 사람은 새가 처량하게 울고 있는 소리로 들립니다. 그러나 마음에 기쁨과 즐거움으로 가득차 있는 사람은 새가 지저귀는 소리가 즐거운 노래로 들려오는 법입니다.
정말 시대가 아무리 변해도 그래서 세상이 인격과 인물됨을 평가할 때 재산의 소유로 할지라도 우리 성도들은 그래서는 안되며, 세상이 학벌이나 가문을 중요하게 볼 때에도 우리 성도들까지도 거기에 따라가면 안됩니다. 중요한 것은 그 사람의 신앙의 인격이요 믿음이여, 그 사람의 마음 바탕입니다. 그 사람의 마음 씀씀이가 어떠한가, 큰 사람이냐, 작은 사람이냐를 판단할 때 몸집의 크고 작음으로 말하지 않습니다. 대인이냐, 소인이냐는 그 사람의 마음이 크냐, 작느냐에 달려 있습니다.
훌륭한 사람이란 훌륭한 마음을 가진 자요, 깨끗한 사람이란 마음 상태가 깨끗한 사람을 일컬어 말하는 것입니다. 또한 좋은 사람으로 불려지는 것은 마음이 부드럽고 너그러운 사람을 일컬어 말하는 것입니다. 외모로 보면 잘 생겼다고 말할 수 있을지 모르지만 인간다움은 속마음의 상태를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잠23:7절에는 "대저 그 마음의 생각이 어떠하면 그 위인도 그러한즉"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즉 그 사람됨은 "마음의 상태"요, "마음"이 그 사람이라는 말씀입니다.
잠4:23절에 "무릇 지킬만한 것보다 더욱 네 마음을 지키라 생명의 근원이 이에서 남이니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죽고 사는 것이 마음에 달려 있다는 것입니다.
결국 재산을 지키려고 애쓰는 일보다, 명예와 부귀를 지키려고 안달하지 말고 마음부터 지켜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마음이 행복하면 그는 행복한 사람입니다. 반대로 마음이 불행하면 그는 불행한 사람입니다. 그러므로 무엇보다도 네 마음을 지키라고 성경은 말씀하십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오늘 본문의 내용은 430년 동안 노예생활에서 출애굽하여 약속의 땅을 가는 이스라엘 백성들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그 이스라엘 백성들이 마음을 제대로 지키지 못하여 하나님의 복된 말씀을 거절한 불신앙의 사건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출3장에 보면 하나님의 선민 이스라엘민족이 애굽 종살로 430년의 고역으로 인하여 하나님께 탄식하며 부르짖어 기도할 때에 하나님께서 들으십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모세를 부르시고 능력으로 함께 하셔서 그를 애굽 땅으로 들어가게 하셨습니다. 이제 모세와 아론은 바로 왕 앞에 가서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였습니다.
출5:1절말씀에 보면 "그 후에 모세와 아론이 가서 바로에게 이르되 이스라엘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에 내 백성을 보내라 그들이 광야에서 내 앞에 절기를 지킬 것이니라 하셨나이다"
그러나 바로의 마음은 더욱 강퍅하여져서 하나님의 말씀을 대적합니다. 뿐만 아니라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더욱 혹독한 사역을 부과시킵니다. 벽돌을 굽는데 필요한 짚을 주지 않으면서 벽돌을 굽게 하고 일할 분량을 더 많이 배당하여 그 학대와 고통이 더욱 심하여졌던 것입니다.
이때 모세는 하나님께 돌아와 엎드려 눈물로 호소합니다.
출5:22절 "주여 어찌하여 이 백성으로 학대를 당케 하셨나이까 어찌하여 나를 보내셨나이까" 그러자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나타나셔서 말씀하시길 "내가 바로에게 하는 일을 네가 보리라 강한 손을 더하므로 바로가 그들을 보내리라"고 출6:1절에 말씀하셨으며, 계속해서 출6:6-7절 말씀에 보면 "나는 여호와라 내가 애굽 사람의 무거운 짐 밑에서 너희를 빼어 내며 그 고역에서 너희를 건지며 편 팔과 큰 재앙으로 너희를 구속하여 너희로 내 백성을 삼고 나는 너희 하나님이 되리니 나는 애굽 사람의 무거운 짐 밑에서 너희를 빼어낸 너희 하나님 여호와인줄 너희가 알지라"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이 말씀은 애굽 땅에서 종살이하며 학대받는 이스라엘 민족들에게는 복음이요, 살리는 말씀이요, 구원의 말씀입니다. 이 말씀보다 더 귀한 말씀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이 소식보다 더 좋은 소식은 없습니다. 이 약속보다 더 복된 약속은 없습니다. 그 심한 고통에서 건져 주시겠다는 말씀입니다. 그 눈물에서 구원해 주시겠다는 말씀입니다. 하나님의 자녀가 되어 하나님의 축복 안에서 살게 해주시겠다는 말씀입니다. 얼마나 시원한 말씀이며, 그야말로 한이 풀리고, 설움이 걷히는 말씀이며, 하늘이 열리는 역사인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이 귀한 축복의 말씀을 이스라엘 민족이 듣지 아니했다는 것입니다. 이 복음을 받아들이지 않았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의 약속을 거절했습니다. 하나님의 구원의 역사를 외면한 것입니다. 참으로 답답하고 안타까운 일입니다. 가슴을 치며 통곡할 노릇입니다.
출6:9절에 보면 "모세가 이와 같이 이스라엘 자손에게 전하나 그들이 마음의 상함과 역사의 혹독함을 인하여 모세를 듣지 아니하였더라"고 말씀합니다. 이유가 무엇이냐 하면 마음이 상해서 하나님의 구원의 말씀을 듣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마음이 상해서 생명의 말씀을 외면했다는 것입니다. 마음이 상해서 살리는 말씀을 거절했다는 것입니다.
아무리 귀중한 말씀이요, 복된 구원의 말씀이라도 마음이 상한 자에게는 그것이 들리지 않음을 알아야합니다.
천하에 없는 말씀이요, 반드시 들어야할 말씀이요, 죽지 않고 살아나는 생명의 말씀이라고 해도 마음이 상한 사람에는 들리지 않는 것입니다. 즉 감사를 잃어버린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감격을 잃어 버렸기에 형식만 남았습니다.
신앙의 본질을 잃어버린 모습입니다. 왜! 은혜를 못 받습니까? 상한 마음으로 와서 앉아 있기 때문입니다. 왜! 하나님의 사랑에 감사하지 못합니까? 마음이 상해서 그런 것입니다. 말씀이 와도 왜 가슴 깊이 들려오지 않습니까? 그것도 마음이 상해서 그렇습니다.
마음이 상한 사람은 말씀이 들려 오지 않습니다. 때문에 감사와 감격과 기쁨도 없고 소망도 가질 수 없는 것입니다. 분노만 더할 뿐이며, 원망과 불평만 쌓여 갈 뿐입니다. 마음이 상한 사람은 환경이 주는 상처 때문에 삶이 괴로운 것이 아니라 마음의 상처 때문에 인생이 고통스러운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마음을 상하게 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이것이 말씀을 듣는 비결이요, 은혜 받는 비결이요, 행복한 마음과 평안을 유지하는 비결이며 진정 감사하는 비결이며, 더 큰 감사를 드리는 축복의 비결입니다.
마음이 상해 있으면 좋은 것도 좋게 보이지 않습니다. 마음이 상해 있으면 소망도 소망으로 여겨지지 않습니다. 마음이 상하면 행복도 행복으로 여겨지지 않습니다. 여기에 무슨 감사가 있고 기쁨과 은혜가 있겠습니까?
보세요!
마음은 누가 상하라고 해서 상하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상하는 것입니다. 환경 때문이 아닙니다. 문제는 자기 스스로에게 있는 것입니다. 문제 자체의 원인이 있습니다. 그게 바로 자신입니다. 믿음의 사람들이 왜 마음을 상합니까?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와 축복은 어떻게 된 것입니까? 마음을 다스려야 합니다. 마음을 은혜로 바꾸어야합니다. 감사의 마음으로 철저하게 바꿔야 합니다.
잠15:13절 보세요!
"마음이 즐거움은 얼굴을 빛나게 하여도 마음의 근심은 심령을 상하게 하느니라"고 말씀합니다. 행복과 감사는 결국 마음의 즐거움에서 나오는 것이며 불행은 심령의 상함이라는 말씀입니다.
잠21:9절에 보면 "다투며 성내는 여인과 함께 사는 것보다 광야에서 혼자 사는 것이 나으니라" 말씀합니다.
성도여러분!
어떻게 해야 마음을 상하지 않게 할 수 있을까요? 문제를 문제삼아 괴로워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나에게 일어나는 사건과 문제는 나에게만 특별히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이미 있었던 문제였고, 다른 사람도 당하고 있는 문제이며, 이것이 나에게 잠깐 나타난 것뿐이라고 생각하시면 됩니다. 문제를 만나면 너그럽게 부드러운 마음으로 대해야 합니다.
결코 문제 때문에 죽거나 망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아무리 힘들고 분하고 못 견디는 문제라도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는 롬8:28절의 말씀만 의지하면 되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믿음의 사람이 하나님의 자녀이며 감사하는 자의 표상입니다.
이러한 감사의 마음으로 문제를 대하고 말씀에 의지한 믿음으로 문제를 대할 때 나에게 일어나는 사건과 문제는 나에게 있어야할 사건이요, 문제이며, 이것은 나에게 유익한 것이며, 하나님이 섭리요, 하나님의 계획이요, 하나님의 역사와 하나님의 큰 뜻에 따라 나타난 것임을 알아야 합니다.
그러므로 사건과 문제가 다가올 때 이것을 마음에 품고 괴로워하지 마십시다. 마음 상하지 마시고 지나가는 소낙비처럼 그냥 받아들이시기 바랍니다. 답답하고 고통스럽다해도, 어두운 터널을 통과하여 목적지를 향하여 달려가는 기차처럼 어두우면 어두운 대로 밝으면 밝은 대로 좁으면 좁은 대로 통과하시면 됩니다.
이스라엘 민족은 모세의 인도를 따라 애굽에서 나와 홍해라는 오도가도 못할 절망의 순간에 봉착하게 됩니다. 이에 이스라엘 백성은 마음이 상하여 원망하고 불평하기 시작합니다. 그러나 보세요! 마음이 상하여 분을 품고 소리치고 저주한다고 해서 홍해가 갈라지는 것은 아닙니다. 오직 하나님께서 역사 하셔야 홍해를 갈라 통과하게 되는 것입니다.
만약 이 고난을 통과하고 애굽의 군대가 홍해에 다 수장되는 역사가 일어나지 않으면 애굽 군대가 가나안까지 쫓아와서 이스라엘 백성을 계속 괴롭혔을 것입니다.
고난과 괴로움이 있습니까? 피하거나 그 일로 마음 상하여 원망하거나 탄식하지 마시고 통과하시기 바랍니다.(통과) "이것이 바로 가나안 땅에 들어가는데 필요한 과정이구나", "올 일이 왔구나!" 이렇게 받아들이시고 감사하시기 바랍니다.
다니엘의 시련과 감사를 보세요!
다니엘은 이스라엘 사람으로 바벨론의 포로가 되어 끌려간 소년이었습니다. 다니엘은 어린 나이에 학문과 지식이 뛰어나 바벨론 왕의 총애를 받게 됩니다.
어느날 바벨론 왕이 꿈을 꾸었는데 도무지 생각이 나질 않습니다. 매우 중요하고 꼭 알아야하는 꿈이었습니다. 그런데 생각이 안 납니다. 왕이 신하들을 불러 놓고 말합니다. "지금부터 내가 어젯밤에 무슨 꿈을 꾸었는지 알아 내어라. 만약 알아내지 못한다면 너희 몸을 두 동강을 내겠다"
예나 지금이나 왕이라고 하는 자리는 대단한 자리입니다. 뭐든지 우기면 됩니다. 자기가 꿈꾸고 자기가 생각이 안나는데 다른 사람이 그것을 어떻게 압니까?
이 때 다니엘이 나서서 그 꿈을 해석해주고 왕의 마음을 시원하게 풀어줍니다. 여기서 문제가 생깁니다. 왕의 총애를 받은 다니엘을 총리로 임명하게 되니까 여기 저기서 와글 와글 합니다. 포로로 잡혀온 주제에 나라를 다스리고 자기들 머리 위에서 명령하는 것이 견딜 수 없는 것입니다. 꼬투리를 잡으려고 합니다.
"이제 30일 동안 왕 아닌 다른 신에게 기도하는 사람이 있으면 무조건 사자 밥을 만들어야 합니다." 결국 왕도 동의하고 전국에 조서를 내리게 됩니다.
그런데 다니엘은 이 조서에 "어인이 찍힌 것을 알고도 자기 집에 돌아가서는 그 방의 예루살렘으로 향하여 열린 창에서 전에 행하던 대로 하루 세 번씩 무릎을 꿇고 기도하며 그 하나님께 감사하였더라"
도대체 무엇을 감사했을까요? 나라가 망해서 포로가 되었고, 어찌 어찌해서 성공해서 총리가 되었는데 기도하면 안 된다는 형편이 되었으며, 모함을 받아 사자밥이 될 판국인데 무슨 감사가 있겠습니까?
보세요!
다니엘은 사자밥이 되는 것을 피하지 않았습니다. 다니엘이 사자밥이 되는 길을 피했다면 바벨론의 신하들은 다른 방법으로 기어코 다니엘을 죽이고 말았을 것입니다.
때문에 다니엘은 시험과 고난이 다가왔을 때 마음하나 상하지 않고 얼굴빛 하나 변하지 않고 그대로 사자굴을 통과합니다. 하나님께 기도하며 감사했습니다. 그러자 하나님께서 사자굴을 통과할 수있게 역사하시고, 모함하던 자들이 사자밥이 됩니다.
감사에는 몇 가지 단계가 있습니다.
첫 번째는 감사가 무엇인지 모르는 단계입니다.
고마운 줄을 모르는 사람입니다. 어린 아이들의 모습입니다. 교회학교 어린이가 식사를 하면서 감사기도를 드렸습니다. 그 아버지는 교회 안 나오시는 분이십니다.
아버지 왈 "내가 열심히 일해서 돈 벌어 먹고사는데 언제 하나님께서 너에게 밥을 주었다고 하나님께 감사해 임마! 나한테 감사해야지!" 감사를 모르면 "내가한다"고 모든 것을 그렇게 생각합니다. 감사가 없는 자리에는 원망과 불평이 들어와 자리를 잡는다는 사실입니다.
두 번째는 나에게 초점이 맞추어진 감사입니다.
이것은 누군가가 내게 무엇을 주었기 때문에 드리는 감사입니다. 가장 기초적인 단계의 감사입니다.
세 번째는 하나님께 초점이 맞추어진 감사입니다.
다니엘은 하나님께 기도를 하는 것이 곧 죽음을 의미하는 것을 알면서도 하나님께 감사기도를 드렸습니다. 내가 살든지 죽든지 내 곁에는 하나님이 함께 계심을 믿습니다. 내가 어떤 일을 당한다해도 내 곁에 하나님이 계신다면 그것으로 감사합니다.
마음 상하지 않고 늘 감사하며 살아가는 사람이 큰 인물입니다. 큰 인물은 마음 상하지 않습니다. 분한 마음이나 억울한 마음을 깨끗이 버리십시오. 나만 못살고 불행한 것처럼 생각되는 것은 마귀가 주는 마음입니다. 섭섭한 마음을 버리십시오.
예수님 앞에서 성질을 부리고 낙심하고 마음 상할 일이 도대체 무엇입니까? 항상 기뻐하시고 범사에 감사하십시다. 사랑하며 살고, 감사하며 살아도 부족한 세상입니다.
안이숙 씨의 "그럴 수 있잖아요"라는 시입니다.
"못 생기고 모양 없어도 흉보지 마세요.
그를 지으신 분이 그렇게 만드신 것일테니까 그럴 수도 있잖아요,
화 잘 낸다고 나무라지 마세요.
일 때문에 피곤하고 신경 늘어지면 그럴 수도 있잖아요.
늘상 늦는다고 수군거리지 마세요.
일이 많아 바쁘고 전화통화를 하다보면 그럴 수도 있잖아요.
눈치 없고 염치없다고 시비하지 마세요.
다 나름대로 생각이 있을 테니까 그럴 수도 있잖아요.
이해하세요. 우리 이해하기로 해요.
내가 나를 싸매고 가라고 변호하듯 그럴 수도 있다는 생각을 밥먹듯 하기로 해요.
그러면 기쁨이 생겨요.
세상사는 것이 재미있어져요.
오나가나 즐겁고 감사하기만 해요.
세상 만사는 모두 이유가 있게 마련이지요.
그럴 수도 있지 이해하는 습관은 행복을 만드는 신호랍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처럼 상한 마음으로 불평하며 살지 말고 다니엘의 감사처럼 "하나님만 내 곁에 계시면 됩니다." 라는 차원 높은 감사로 우리의 위기를 극복하고 진정한 감사를 발견하며 살아가시는 여러분들이 되시길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