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결가부좌를 하고서 한 철 공부합니다.
잘 모르는 사람들은
이렇게 하는 것이 무슨 큰 도움이 될 것인가?
무슨 공덕이 될 것인가? 의심을 할 것입니다.
맨 처음 참선을 시작하면
굉장히 아프기도 하고 괴롭습니다.
참선을 많이 하신 운수납자(雲水衲子)는 다 경험하신 것 아닙니까?
맨 처음 앉으면 이 몸을 조복 받느라고 큰 탈입니다.
조금 덜 먹으면 배가 고프고,
조금 더 먹으면 소화도 안 되고 뱃속에서 콜콜 하고 말입니다.
그러나 좋은 환경에서
적당히 먹고 오랫동안 앉아 수행한다면
자기도 모르는 가운데 차근차근 맑아 옵니다.
앞서 말씀드린 바와 같이 가장 중요한 것은
본래 부처라는 소식을
우리가 딱 믿어야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보조국사 어록》에도,
규봉(圭峰) 종밀선사(宗密禪師)의《도서(都序)》에도
"본래시불"이라 했고,
《육조단경》에서도 본래 부처라고 했습니다.
우리는 이 말을 믿어야 합니다.
우리가 본래 부처라는 소식을 믿고 나아가야
공부가 빠른 것입니다.
길을 간다 하더라도 목적지를 분명히 알아야
갈등하거나 헤매지 않지 않습니까?
어디로 가야 할지 모른다고 생각할 때는
좀 괴로우면 괴로움 때문에 중단하게 됩니다.
그러나 성불이라고 하는 목적지가 분명하고
동시에 '나한테도 부처가 본래 갖추어져 있다'는 것을 굳게 믿는다면,
설사 괴로움이 좀 있다 하더라도
별 문제가 안 되는 것입니다.
따라서 참선 공부는
우리가 보는 것은 다 헛것이고,
만법유식(萬法唯識)이라는 것을 관조하는 것입니다.
즉 일체가 오직 마음이란 말입니다.
일체가 모두 마음뿐입니다.
《육조단경》에서 혜능스님도
"본래무일물(本來無一物) 하처야진애(何處惹塵埃)"라고 했습니다.
본래 한 물건도 없는데 어느 곳에 티끌이 있느냐는 것입니다.
즉 물질이라 할 것은 아무것도 없다는 말입니다.
우리 불자님들은 이 소식을 분명히 느껴야 하는 것입니다.
본래 물질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분석과학이 발달하지 못했던 시대에도 도인들은
물질이라는 것도 다 법성(法性)을 지녔으므로
그대로 부처일 뿐이라고 백 퍼센트 믿었겠습니다만,
지금은 상당히 공부한 분들도
도인이 미처 못 된 분들은
물질은 물질로 보이고
나는 나로 보이고,
너는 너로 보입니다.
'본래무일물'이란 것도,
도인들이 우리한테 물질에 집착하지 말라고
그렇게 말씀하셨거니 생각합니다.
그러나 다행히도 분석과학,
이른바 양자역학(量子力學) 같은 현대물리학이 나온 뒤로는
물리학에서도 '본래무일물'임이 밝혀지고 있습니다.
분석하면 결국은 다 비어 버리기 때문입니다.
원소로 분석하고, 원자로 분석하고,
또 원자를 소립자로 분석하면 그렇습니다.
물리학적인 고찰로 소립자도 물질이 아니라
에너지의 파동이라는 사실을 알아냈습니다.
따라서 현대물리학은
모두가 다 공(空)으로 돌아간다는
제법공 도리를 증명한 것입니다.
고전물리학은 미처 증명하지 못하고
물질은 물질, 마음은 마음,
이렇게 이원론으로 보았으나,
현대물리학은 물질이든 뭐든
일체가 다 비어 있다는 소식을 증명했습니다.
얼마나 다행스러운 일입니까?
따라서 현대물리학은
차근차근 우리 불교로 가까이 다가오고 있다 할 수 있습니다.
현대물리학은 차근차근 우리 불교를 증명해 오고 있습니다.
실존철학이든 뭐든 현대학문은
모두가 다 부처님 법에 가까워 오는 것입니다.
그러나 현대 실존철학도 제아무리 연구해 봐도
아직은 우리 마음이 무엇인가는 모릅니다.
그러나 설사 우리가 지금
철학도 모르고 물리학도 모르고 아무것도 모른다 하더라도,
부처님의 가르침인 반야의 도리를 믿고 알 때는,
그 가운데에 가장 오묘한 철학,
가장 궁극적인 과학이 있기 때문에
모든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우리가 이렇게 반야의 도리를 믿고 알게 될 때라야
비로소 "백천만겁난조우(百千萬劫難遭遇)라!",
즉 백천만겁을 지나도록 만나기 어려운 부처님 법을
어쩌다가 나 같은 존재가 만났을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우리가 스스로의 행복을 되새기지 않을 수가 없게 된다는 말입니다.
나무아미타불, 나무마하반야바라밀.
<불기 2535년 11월, 동안거 결제중인 스님들께 설하신 소참법문(小參法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