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년 11월 8일(월)
생명의 삶 Q.T. 묵상 - [말]
●성경본문 : 욥기 20:12~29
소발은 욥을 위로하기보다 추측에 불과한 빈약한 근거를 바탕으로 욥을 정죄하고 비난합니다.
본문에 “그”라고 지칭하는 자는 ‘악인’을 말합니다.
그리고 그 악인은 ‘욥’이라는 것입니다.
소발은 자기만의 논리와 주장을 펴는 듯하지만 단지 욥을 향한 분노와 저주로 비난에 급급한 어리석음을 보이고 있습니다.
이는 욥이 죄를 고백하게 만들려는 시도였지만 아무 효과가 없었습니다.
오히려 친구 사이만 멀어졌을 뿐입니다.
소발은 화만 내고 저주했을 뿐 자비와 은혜를 보이지 못했습니다.
우리는 진리, 옳은 말일지라도 사랑으로 해야 합니다.
소발은 악인이 맛있는 음식을 입에 물고 그 맛을 음미하는 식도락가처럼 죄의 달콤함을 오래 음미하지만 결국에는 파멸을 자초할 것이라고 말합니다(12~14절).
그러나 이런 습성이 어찌 악인에게만 있겠습니까?
사람은 누구나 죄를 사랑하고 악을 즐기려는 본성이 있습니다.
그렇기에 우리는 죄의 본능을 버리고 새 사람을 입어야 합니다.
“너희는 유혹의 욕심을 따라 썩어져 가는 구습을 따르는 옛 사람을 벗어 버리고, 오직 너희의 심령이 새롭게 되어, 하나님을 따라 의와 진리의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은 새 사람을 입으라”(엡4:22~24).
소발은 악인이 부당하게 쌓은 재물을 다 토해 낼 수밖에 없고 치명적인 독사의 독을 빠는 것 같은 인생을 산다고 지적합니다(15~16절).
또 악인이 번영을 보지 못하고 수고하고 얻은 재물로 즐거움을 얻지 못할 것이라고 말합니다(17~18절).
이는 악인이 가난한 자를 학대하고 본인이 세우지 않은 집을 빼앗은 결과라고 합니다(19절).
소발은 죄가 주는 쾌락이 치명적인 독이 되어 결국 멸망에 이르게 한다는 사실을 욥이 알기를 바랍니다.
그러나 상대가 죄를 지었다는 사실이 확실하지도 않은 상태에서 이렇게까지 강한 표현으로 회개를 강요하는 것은 결코 옳지 않습니다.
소발은 악인이 마음에 평안을 알지 못하고, 그가 기뻐하는 것을 보존하지 못해서 행복이 오래가지 않을 것이라고 확신합니다(20~21절).
악인이 재산을 많이 모은다 해도 예상치 못한 순간에 괴로움과 재난이 그를 덮칠 것입니다.
또 음식을 먹을 때에는 하나님이 맹렬한 진노를 비같이 내리실 것입니다(22~23절).
하지만 욥은 이런 경우에 해당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상대방을 정죄하기 위해 진리를 오용해서는 안 됩니다.
소발은 악인을 응징하시는 하나님의 모습을 전장에서 싸우는 전사에 비유하며 생생히 묘사합니다(24~25절).
또 큰 어둠이 악인을 위해 예비되어 있고, 하나님의 불이 그와 그 장막에 남은 것을 해칠 것이라고 말합니다(26절).
소발은 악인이 하나님의 심판으로 비극적인 최후를 맞을 것이라고 말합니다.
이는 욥의 자식들이 사고를 당해 죽은 일을 암시하는 말입니다.
이 말을 들은 욥의 심정은 얼마나 참담했을까요?
진리의 말이 무자비하고 잔인하게 적용되면 사람을 죽이는 칼이 됩니다.
욥은 하늘의 변론자가 그의 결백을 변호하고, 땅이 그의 피를 가리지 않기를 원한다고 말한 적이 있습니다(16:18~19).
이에 소발은 하늘이 악인의 죄악을 드러낼 것이고, 땅이 일어나 그를 칠 것이라고 주장합니다(27절).
하나님은 홍수처럼 진노를 쏟아 악인의 가산을 흘러가게 하실 것인데, 이것이 하나님이 악인에게 정해 주신 분깃과 산업이라고 합니다(28~29절).
친구들에게 저주를 선언한 욥에 맞서 소발 역시 욥을 저주한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저주하는 자를 위해서 축복하며 모욕하는 자를 위해서 기도해야 합니다.
“너희를 저주하는 자를 위하여 축복하며 너희를 모욕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눅 6:28)
소발은 욥에 대한 편견과 오해로 분노에 불타서 욥을 위협하고 비난하며 저주합니다.
말이란 인간과 세상을 연결하는 다리라고 할 수 있고, 인간과 인간 사이의 소통의 수단이기도합니다. 말은 단순히 의미만을 전달하는 수단이 아니라 사람의 감정을 자극하기도 하고, 설득을 하는 도구이기도 합니다. 그러므로 자신이 처한 상황과 상대방의 입장을 고려해서 상황에 맞는 말을 조리 있게 하거나 설득력 있게 잘 하는 것은 원만한 사회생활을 영위하기 위한 필수 요건입니다.
말이 없었다면 인류도 다른 동물의 세계를 크게 벗어나지 못했을 것입니다. 말에는 영묘(靈妙)한 힘이 있다는 믿음은 오랜 옛날부터 이어져 왔습니다. ‘말이라고 다 말이 아니다’라는 격언이 있듯 말에도 사람이나 사물에 있는 품격(品格)이 있습니다. 품격은 수준을 뜻하는 ‘품(品)’자와 주위의 분수나 품위를 뜻하는 ‘격(格)’으로 이뤄져있습니다. 특히 ‘품(品)’은 입 ‘구(口)’ 세 개가 모여 이루어집니다. 말이 쌓이면 한 사람의 품성이 된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말을 들어보면 그 사람의 인격을 알 수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공감과 배려가 느껴지는 말을 하는가 하면, 어떤 사람은 갈등과 증오를 부르는 말을 합니다. 설혹 상대방에게 작은 허물이 있다고 해서 그를 거친 말로 공격하는 것은 말하는 이의 천박함을 드러낼 뿐입니다.
말에도 등급이 있습니다. 말투, 말씀, 말씨가 그것입니다. 말을 던지듯 하는 사람의 말은 말투고, 존경하는 분이나 귀담아 들을 만한 말은 말씀입니다. ‘말이 씨가 된다’는 속담에서 보듯 씨를 뿌리듯 하는 사람의 말은 말씨입니다. 좋은 언어 습관은 말씨를 잘 뿌리는 것에서 시작됩니다.
사람은 살아가면서 말 한마디가 사람의 마음을 기쁘게도 하고, 상처를 주기도 한다는 말의 중요성을 누구나 다 경험을 했을 것입니다. 우리 조상들은 ‘말은 보이지 않는 칼’이라거나 ‘혀 밑에 도끼가 들었다’는 속담을 들어 경계(警戒)로 삼았습니다.
말로 받은 마음의 상처는 몸에 난 상처보다 훨씬 깊게 새겨져 더욱 오래 간다는 말도 있습니다. 인간관계는 유리그릇과 같아서 조금만 잘못해도 깨지고, 말 한마디에 상처받고 원수가 되어버리기도 합니다. 좋은 인연을 맺는 데는 수년이 걸리지만 그것을 무너뜨리는 데는 단 1분이면 족합니다. 가시 돋친 농담이나 신체나 처지를 빗댄 표현, 비아냥거리는 눈빛이나 표정 등으로 우리는 상처를 받습니다. 다른 사람의 입장과 처지를 조금만이라도 헤아려주는 범절과 배려가 있어야 하는 이유입니다.
말 한마디가 바로 당신입니다. 좋은 말을 하면 좋은 사람이 되고, 아름다운 말을 하면 아름다운 사람이 된다는 사실을 잊지 맙시다.
믿음의 말이 가득한 하루가 되기를 바랍니다.
참고 : 정관소식 『따뜻한 말 한마디로 인간애가 넘쳐나는 사회가 되기를』 하종덕(전 부산광역시 서구 부구청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