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유와 상징
언어의 표현에는 비유와 상징을 나타내는 문학적 수사법을 이용하기도 한다. 성경이 그러하다. 성경은 문학적 가치가 있는 수준 높은 책으로 그리스도인뿐만 아니라 많은 사람에게 읽히고 있다. 그러나 성경을 함부로 자의적으로 해석해서는 안 되며, 독성죄(瀆聖罪)를 짓게 된다.
성경을 읽다가 성경 저자에 따라 다르게 표현함을 접한다. ‘사흗날’과 ‘사흘 만에’는 같은 의미일까 다른 의미일까? 사흗날은 셋째 날이며 사흘은 3일을 의미한다. 그리스도교 성경에서 그 말을 찾아볼 수 있다. 개신교의 「사도신경」에는 예수께서 돌아가신 지 사흘 만에 부활했다고 하며, 가톨릭에서는 사흗날에 부활했다고 한다. 예수는 금요일 오후 3시쯤에 돌아가시어 안식일이 지난 주간 첫날 일요일 새벽에 부활하셨다고 한다. 금요일에 돌아가시어 일요일에 되살아났으니 사흗날이며, 사흘은 3일로 72시간인데 예수의 부활은 약 40시간밖에 되지 않는다.
그런가 하면 복음서 저자에 따라 다르게 표현하고 있다. 마태오 저자는 예수의 부활을 ‘사흗날’로 기록하고 있지만, 마르코나 루카 저자는 ‘사흘 만에’로 기록하고 있다. 마태오 저자의 표현은 옳은 표현이다. 하지만 마르코나 루카의 사흘 만에는 틀린다고 할 수 있을까. 아마도 다른 의미가 담겨 있지 않을까.
히브리어의 숫자 3은 완전함의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성경에서 ‘거룩하시도다’를 세 번 반복하거나 ‘내 탓이요’, ‘자비를 베푸소서’, ‘알렐루야’ 등 세 번을 연속적으로 반복하고 있음은 완전함을 의미한다. 따라서 예수의 부활도 사흘(3일)은 시간의 3일(72시간)이 아니라 완전하고 거룩한 부활의 의미를 상징하는 표현이라는 생각이 든다.
히브리어의 나쁜 것을 상징하는 수가 6이다. ‘666’은 6이 세 번이나 있으니 매우 나쁨을 의미한다. 요한묵시록에 ‘666’은 적그리스도 즉 예수와 맞서 적대 관계에 있는 자를 의미하고 상징한다. 또 ‘144,000’이라는 숫자가 있다. 이는 12지파와 12사도의 곱이 144이며 여기에 아주 많고 많다는 1,000을 곱한 숫자다. 이 숫자는 당시의 그리스도교를 믿는 모든 사람을 상징적으로 표현하는 말이다.
그런데 어떤 사이비 종교는 요한묵시록의 144,000을 인용하여 십사만사천 명만이 구원받을 수 있다며 교리로 내세우고 있다. 그들의 교세가 30만 명이 넘었다고 하니 거짓임을 드러내고 있다. 이처럼 숫자나 동물이나 색깔로 어떤 존재를 상징적으로 나타내었으며 일종의 그들만이 통하는 은어였다. 당시에 로마로부터 지배를 받았기에 그들만이 통하는 언어로써 소통하였다.
예수께서 그렇게 사랑했던 ‘나자로’를 죽도록 놔두었을까? 또 죽은 뒤에 무덤에 찾아가 죽은 이를 살리심은 무엇일까? 이는 단순히 라자로를 가엾이 여겨 살리시는 기적이 아니라 자신이 죽어 부활하심을 미리 보여주신 상징적 의미를 담고 있다. 오늘날의 부활은 하루하루를 새롭게 변화하는 삶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