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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창골산 봉서방 원문보기 글쓴이: 지원이아빠
푸른 감람나무같은 인생
시편 52편 1~9
허준이 쓴 동의보감에 감초에 대해서 이렇게 기술하고 있습니다.
"감초는 5장 6부의 한열(寒熱)과 사기(邪氣)를 다스리며 눈, 코, 입, 귀와 대,소변의 생리를 정상으로 되게 하고 모든 혈맥을 소통시키며 근육과 뼈를 튼튼하게 하고 영양 상태를 좋게 할 뿐만 아니라, 모든 약의 독성을 해독하고 72가지 석약(石藥)과 1200가지 초약(草藥)을 서로 조화하여 약효를 잘 나타나게 하므로 별명을 국노(國老)라 한다."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국노’라는 말은 ‘나라의 원로’라는 뜻입니다. 그러니까 약제중에서 원로, 교회로 말하면 ‘장로’정도로 표현할 수 있을 겁니다. 감초는 한약에서 결코 빠질 수 없는 필요하고 아주 중요한 약제중의 약제임을 밝혀 주고 있습니다.
약방에 감초가 있다면, 광야에는 감람나무가 있습니다. 오늘 말씀의 제목이 푸른 감람나무와 같은 인생! 이라는 제목인데요. 이 제목은 8절 말씀에 다윗의 고백에서 따온 제목입니다. 8절 말씀 함께 읽어보실까요? 8 그러나 나는 하나님의 집에 있는 푸른 감람나무 같음이여 하나님의 인자하심을 영원히 의지하리로다
감람나무는 팔레스타인 전역에서 볼 수 있는 아주 평범한 나무입니다(사진1,2).
유독 아름답거나 희소성이 있는 나무가 아닙니다. 그러나 이 감람나무에게는 특별함이 있었습니다. 광야의 다른 나무와는 다르게 넓고 푸른 이파리를 가지고 있어서 사람들에게 그늘을 제공해 주는 나무였습니다. 또한 때가 되면 많은 열매를 맺어서 맛있는 과일을 제공해 주기도 하고, 또 열매의 기름은 등불을 밝히는 데 주로 사용하였고, 최상품의 기름은 왕들에게 안수할 때 붓는 용도로 사용되었습니다. 병자들의 병 치료를 위해서도 바르는 기름이었습니다. 그리고 감람나무는 결이 좋고, 단단해서 집을 지을 때 기둥이나 널판으로 주로 사용되는 나무였습니다.
감람나무는 특별히 아름답거나 희소가치가 있는 나무는 아니었지만, 이스라엘 사람들과 팔레스타인 지역에 사는 사람들에게는 수천년 세월동안 그들과 함께 하면서, 그들의 필요를 채워주는 그런 존재였던 것입니다. 마치 한약의 감초’와 같은 그런 존재였습니다.
저는 감초의 효능과 효과와 감람나무의 역할을 보면서, 이 세상을 살아가는 그리스도인들의 감초와 같은 감람나무와 같은 역할을 해야 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또한 오늘 우리와 또 우리 교회가 지향해야 하는 모습은, 바로 감초와 같은 모습, 감람나무와 같은 역할이 아닌가 싶습니다,
지금 한국 사회 안에는요. 교회의 수가요 약방의 감초만큼이나, 이스라엘에서 서식하는 감람나무 만큼이나 수를 셀수 없이 많이 있습니다. 당장 우리 교회가 있는 라인만 봐도 교회가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동암교회, 정릉중앙교회, 서명교회, 순복음 교회등등, 중국의 쌍끌어 어선처럼 늘어선게 바로 교회들 아닙니까? 목사들도 얼마나 많습니까? 여러분 한번 시험해 보세요. 사람이 많이 다니는 길에서 “목사님”하고 소리치시면, 아마 그중에 몇몇분들은 고개를 돌려서 두리번 거리실 겁니다.
교회가 참 많습니다. 목사들이요. 약방의 감초만큼이나 이스라엘의 감람나무 만큼이나 참 많습니다. 그런데요. 사람들에게 ‘교회가 꼭 필요합니까?’라고 물으면 ‘네 꼭 필요합니다’라고 대답하시는 분은, 아마 거의 없을 겁니다. 그러니까 교회와 신앙인들이 감초와 같은 감람나무와 같은 역할을 하고 있지 못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사람들의 반응과 평가와는 관계없이, 사실 교회는요, 약방의 감초보다 광야의 감람나무보다 훨씬 더 중요하고 필요한 존재입니다. 다만 교회 스스로가 그 가치를 스스로 잃어 버린 거죠. 그래서 이제 우리는 다시 회복 해야 합니다. 교회가 세상에게 필요 없는 존재가 아니라, 우리의 영혼 구원을 위해서, 우리가 사는 세상을 사람 사는 세상으로 아름답게 만들어 가기 위해서 교회가 꼭 필요한 것임을 회복할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이를 위해서 오늘 다윗의 고백했던 ‘푸른 감람나무’의 역할을 살펴보면서 우리가 회복해야 할 부분들을 살펴 보겠습니다.
첫째, 감람나무는 생명체들에게 그늘을 제공해 주는 나무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들은요 시원한 그늘이 되어야 합니다.
감람나무는요. 번식력이 강해서 물이 없는 자갈밭이나 바위 틈새에서도 잘 자라는 나무입니다. 재배 또한 간단합니다. 나무를 심고 흙만 뿌려주고 특별히 신경을 쓰지 않아도, 대부분은 제 스스로 잘 자라면서, 그것도 수백년을 생존해 갑니다. 이와같은 강인한 생명력과 번식력을 가진 나무가 바로 감람나무입니다. 그런데 감람나무의 가장 큰 장점은 뭐니뭐니해도 그 잎이 활엽수이면서 사철나무과에 속한 나무라는 것입니다.
왜 이것이 가장 큰 장점이 될 수 있겠습니까? 이스라엘 땅의 대부분은 척박한 광야 아닙니까? 거기에다 한낮의 온도는 섭씨 40도를 육박하는 불볕이 내려쬐는 지역입니다. 있는 나무들은 대부분 생존하기 위해서 선인장과 같은 모습만 가지고 있을 뿐입니다.
그런데 그 광야 한 가운데, 푸르른 잎사귀를 펄럭거리며 유유히 서있는 나무가 있습니다. 바로 감람나무입니다. 광야에 이러한 나무가 있다는 것은 생명체들에게는 큰 축복일 수밖에 없습니다. 저는 감람나무를 묵상하면서요. 교회가요.// 그리고 그리스도인들이요// 광야와 같은 이 세상 속에서, 사람들에게 그늘과 쉼을 제공해 주는 그런 존재가 되어 주었으면 좋겠다 라는 생각을 해봅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이 세상을 빗대어서 많은 분들이 ‘광야와 같다’라고 비유하는데요. 광야와 같다!라고 비유하는 것은, 우리가 사는 세상이 너무 메마르고, 너무 각박하고, 정도 없고, 인간미도 없기 때문 아닙니까? 사방을 돌아봐도 편안하게 안식할 만한 곳이 없습니다. 심지어는 우리의 안식처인 가정도 때로는 광야와 같을 때가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5월은 가정의 달이고, 어제는 또 부부의 날이었는데요. 여러분에게 묻겠습니다. 여러분들은 가정에서 어떤 존재들입니까? 시원한 그늘과 같은 존재입니까? 아니면 메마른 광야와 같은 존재입니까? 사실 우리는 가정에서 서로서로에게 시원한 그늘과 같은 존재들이 되어야 하는데요. 이게 쉽지 않죠.
지난 주에요. 아주 흥미로운 기사를 하나 봤는데요. 모 방송국에서 최근 몇 년간 인터넷 자료 3억 5천개의 글을 바탕으로 다음과 같은 두 가지를 조사 해봤습니다.
첫 번째, 세상에서 제일 의심되는 사람은 누구인가?
두 번째, 누가 거짓말을 제일 잘 하는가? 이 두 가지를 조사했는데요.
먼저 첫 번째 ‘세상에서 제일 의심되는 사람은 누구인가?라는 항목 1위~10위를 조사했는데요.
영광스러운 1위는 당당하게도 남편이었구요. 2위가 친구 3위 직원 4위 엄마 5위 아이 6위 의사 7위 아들 8위 아빠 9위 가족 10위 남자친구로 밝혀졌습니다. 그런데요. 1위에서 10위까지에서 가족에 해당하는 존재들이 무려 6자리나 차지하고 있었습니다.
두 번째, ‘누가 거짓말을 제일 잘하는가?’라는 항목에서 역시 10위까지 선정했는데요. 1위 친구 2위 엄마 3위 아빠 4위 남자친구 5위 아이 6위 부모님 7위 대통령 8위 아빠 9위 자식 10위 가족, 공교롭게도요. 거짓말 제일 잘하는 사람 중에 ‘가족’으로 분류되는 사람들이 여기서도 무려 7자리나 차지하고 있을 정도입니다.
이게 무엇을 반증합니까? 가족간의 신뢰가 많이 깨져 있다는 겁니다. 가족간의 관계가 건강하지 않다는 거에요. 가정이 평안하지 않다는 거구요. 광야와 같다는 거에요. 가장 가까운 가족들이요. 서로가 서로에게 그늘과 같은 존재가 되지 못하고, 척박한 땅과 같이 까칠하고, 뜨거운 열기와 같이 가족을 지치게 하는 그런 존재로 살아가고 있다는 겁니다. 누가요? 바로 내가요. 내 배우자나, 내 자녀들이 아니라 바로 아빠인 제가 그렇게 살고 있다구요.
여러분! 세상도 광야인데, 세상은 우리에게 쉼을 주지 못하는데요, 가장 행복하고, 쉼을 주어야 하는 가정까지 광야와 같아서 되겠습니까? 여러분! 부디 가정만큼은 광야로 만들지 마십시다. 가정만큼은 시원한 그늘이 되게 하십시다. 방법은 간단합니다. 입에 칼을 물지 말고, 꿀을 바르십시오. 한 번 더 이해하구요. 한 번 더 칭찬하구요. 한 번 더 긍정적인 언어로 응원해 주시고 격려해 주십시오. 여러분 그게 바로 감람나무구요. 시원한 그늘이 되어 주는 겁니다.
다시 말하지만 누가 그래야 된다구요? 예수를 믿는 내가 먼저, 어른인 내가 먼저 가정에서 시원한 그늘이 되십시오. 그러면 우리의 가정들이 지금보다는 더 평안하지 않을까요?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교회는 광야와 같은 세상 속에서, 지치고 힘들 삶을 사는 성도들에게 감람나무와 같은 시원한 그늘이 되어야 합니다. 쉼을 주고, 평안함을 주고, 마음의 시원함을 주는 그런 공동체가 될 수 있어야 합니다. 이를 위해서 교회를 이루어가는 구성원들이요.
서로를 이해하고, 배려하고, 관심을 갖고, 기도해 주는 일에 힘써야 합니다.
그런데 말씀을 준비하면서 씁쓸한 자료를 하나 찾았습니다.
성도들이 교회에서 피곤함을 느끼는 가장 큰 이유에 대해서 조사한 내용인데요. 성도들이 교회에서 피곤함을 느끼는 가장 큰 이유에 대해서 뭐라고 대답하신 줄 아십니까? 객관식으로 문제를 낼께요. 1번 사역이 많아서, 2번 예배가 많아서, 3번 설교가 길어서, 4번 행사가 많아서, 5번 ‘목회자들 때문에 정답은 5번입니다. ‘설교 삶이 다른 목회자들 때문에’, ‘인간적인 냄새를 너무 많이 풍기는 목회자들 때문에’, ‘인격적이지 못한 목회자들 때문에’ 성도들이 피곤함을 느낀다는 거에요. 이 자료를 보면서 얼마나 마음이 아프든지요. 여러분 좋아하지 마십시오, 2등은요. ‘성도들 때문에’였습니다.
여러분! 교회가 광야가 아닌 시원한 그늘이 되는 것은요. 저와 여러분의 손에 달려 있습니다. 우리가 각자의 자리에서 믿음의 사람으로, 더 큰 그릇과 더 넓은 사람으로 살아 갈 때, 성도들이, 그리고 사람들이 시원함을 느낄 수 있고, 쉼을 누릴 수 있게 되는 겁니다. 여러분 부디 저와 여러분 모두가 푸른 감람나무와 같이 누군가에게 푸르름을 보여주고, 쉼이 되어주고, 시원함을 제공해주고, 평안함을 줄 수 있는 성도들이 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둘째, 감람나무는 생명체들에게 열매를 주는 나무입니다.
그러므로 교회는요. 열매와 같은 존재가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감람나무는 열매를 맺는 과실수인데요. 나무를 심은 지 7년이 지난 후부터 열매를 맺게 되는데요. 그렇게 열매를 맺기 시작한 이후부터는 나무의 수명이 다하는 날까지 지속적으로 열매를 맺는 나무입니다. 그러니까 중간에 누가 베지 않는 이상, 수백년 동안 열매를 맺는 나무가 바로 감람나무라는 것입니다, 이 감람나무의 열매를 보면요. 약간 길쭉한 달걀 모양의 짙은 암청색의 다육질의 열매를 맺습니다. 사진을 한번 보시죠(사진 3,4)
이 감람나무 열매는 식용으로 먹기도 하고, 소금에 절여서 먹기도 하는데요. 그런데 가장 대표적인 열매의 쓰임새는요. 열매의 기름을 짜내서 그 기름을 등불을 태울 때도 사용하구요. 가장 좋은 기름은 왕이나 제사장 선지자에게 안수할 때 머리에 붓는 용도로 사용되었습니다.
그러니까 감람나무 열매는 가난한 사람들의 배를 채우는 것에서부터 신분이 가장 높은 왕과 제사장에게까지 사용되는 폭넓은 용도로 사용하는 열매였던 겁니다.
감람나무 열매는 이처럼 모든 계층에게, 수많은 용도로 사용되었지만 정작 나무 자신을 위해서는 사용되지 않았습니다. 그러니까 열매의 존재 목적은 자신이 아닌, 타인에게 있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교회의 존재 목적을 생각해봅시다. 교회의 존재 목적은 철저하게 교회 자신을 위해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이 땅을 살아가는 사람들의 영혼 구원을 위해서 존재하고 있음을 감람나무 열매를 통해서 기억해야합니다. 교회는 감람나무 열매가 모든 계층을 위해 사용되었듯이, 교회는 모든 계층을 위해서 존재해야합니다. 감람나무 열매가 폭 넓은 모양으로 쓰였듯이 교회도 폭 넓은 모양으로 사역을 해야 한다는 것이지요.
과거에 기독교인들이 불가의 대표적은 스님들을 두고 이렇게 말했습니다.
‘스님들의 수행이나 종교성은 참으로 탁월하고 존경스럽습니다’
그런데 돌아보면 이 분들이 진정 남을 위해 한 일은 무엇입니까?
스님들은 자신들 수행을 위해서는 몇 날 몇 일을 바닥에 눕지 않고 심지어 잠도 자지 않았습니다. 추운 눈 덮힌 산속 동굴 속에서 오로지 수행에만 전념하면 사는 사람도 있었고 속세와는 단절된 정갈한 삶을 사신 분들도 있습니다. 그러나 진정 이웃을 위해 남을 위해 이 역사와 민족을 위해 그분들이 과연 어떤 일을 했습니까?라고 이 사회에 유익을 주지 못하는 것에 대한 비난의 말을 하곤 했습니다.
그런데 이제 이런 비난은 한국의 기독교를 향해 부메랑처럼 돌아와서 내리 꽂힙니다. 도대체 오늘날 한국교회가 이 민족과 역사를 위해 하는 일은 무엇입니까? 자기 교회, 자기 교인들, 자기 자신을 위해서만 살려고 하지, 이웃을 위해 가난한 사람들을 위해, 이 민족과 역사를 위해, 건강한 사회를 만들어 가는 것에 대해서는 전혀 관심이 없다고 말합니다.
심지어 교회를 오래 다닌 사람들도 교회가 도대체 무엇을 하는 곳인지 교회의 존재이유가 무엇인지를 완전히 망각해 버린 사람도 있습니다. 그저 자신의 종교적인 수양을 위해서, 그리고 자기 남편, 자기 아내, 자녀들의 출세만을 위해서 기도하는 곳이 교회라는 정도로 생각하는 사람들도 많이 있습니다.
교회가 존재의 목적을 잃어 버렸구요. 방향을 잃어 버렸다는 겁니다. 그렇다면 교회의 정체성은 무엇이며, 세상에게 교회는 어떤 모습이어야 합니까? 여러분! 교회는 열매입니다. 교회는 열매와 같다는 겁니다. 가난한 사람들 소외된 사람들이 교회를 통해서, 드디어 힘을 내고, 원기를 회복하고, 살 힘을 공급해주는 열매와 같은 존재입니다.
힘을 가진 자들이 교회를 보면서, 하나님을 두려워하여 불의와 부정을 저지르지 못하도록 하는 열매와 같은 존재입니다. 건강한 사람을 세우고, 사람의 가치를 알고, 하나님의 의를 이루어 가는 사람을 세우는 거룩한 기름과 같은 존재입니다.
이현주 씨가 우화집 <모퉁이 돌>이라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교회가 이 세상에서 어떤 존재로 살아가야 하는지 발견할 수 있습니다.
평화로운 토끼 나라에 커다란 뱀이 나타났습니다. 토끼 나라의 평화가 깨졌습니다. 뱀은 매일 매일 토끼를 잡아먹었습니다. 토끼들은 너무나 무서웠기 때문에 집 밖으로 나갈 엄두를 내지 못하고, 문을 닫아걸고 공포 속에 살았습니다. 그 때 이미 뱀에게 그 사랑하는 짝을 잃고, 그 자신의 왼 쪽 발 하나도 뜯긴 절름발이 토끼 한 마리가 있었습니다. 이 토끼는 곰곰이 생각하였습니다. 이 건 도무지 사는 것이라 할 수 없다. 어떻게 하면 예전의 평화로운 토끼나라를 회복 할 수 있을까?. 절름발이 토끼는 하나의 결론에 도달하였습니다. 토끼나라의 평화를 되찾으려면 저 흉악한 뱀을 없애는 길 밖에 없다. 결국, 토끼도 이솝우화의 저 쥐들처럼 어떻게 고양이 목에 방울을 달 것인가 하는 문제에 도달하였습니다. 절름발이 토끼는 오래 고뇌하였습니다. 그리고 오직 한 길 밖에 없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토끼는 문을 열고 집밖으로 나갔습니다. 토끼는 울긋불긋한 버섯이 많이 피어 있는 숲으로 갔습니다. 토끼는 그 아름다운 버섯을 마구 마구 뜯어먹었습니다. 머리가 어찔어찔하였습니다. 토끼는 절름거리며 뱀 굴로 갔습니다. 토끼는 뱀 굴 앞에 서서 “이 못된 뱀아, 나와 봐라, 이 나쁜 놈아!” 하고 소리쳤습니다. 뱀이 슬- 슬- 슬- 기어 나와 절름거리는 토끼 모양새를 보고는 아니 이놈이 미쳤나! 생각했습니다. 마침 배도 출출한 판인데 어쨌든 잘 됐다 하고 덥석 한 입에 절름발이 토끼를 삼키고, 제 굴로 도로 들어가 엎드렸습니다. 그리고 뱀은 그 굴에서 영원히 나오지 못하였습니다. 토끼 나라에는 다시 활기찬 자유와 넘치는 평화가 찾아왔습니다.
‘모퉁이 돌’이라는 글에서 절름발이 토끼는 교회의 사명을, 교회의 존재 목적을 정확하게 보여줍니다. 어떠한 경우에라도 열매가 다른 생명체를 위해서 존재하는 것처럼, 교회는 교회만을 위해서만 존재하는 것이 아닙니다. 또한 세사잉 교회를 위해서 존재하는 것도 아닙니다. 교회는 세상을 위해서 존재하는 것입니다.
예수께서 세상에 오신 이유도 교회의 존재 목적과 같습니다.
예수께서는 결코 자신을 위해서 이 땅에 오지 않으셨습니다. 오직 세상과 사람을 위해서 오셨고, 세상과 사람들에게 평화를 선포하기 위해서 오셨습니다. 그래서 그의 삶을 보면, 결코 자신을 위해서 살지 않고, 오직사람을 위해 살아온 족적만 남아 있을 뿐입니다.
사랑하는 함께가는 교우 여러분! 제발 이것을 잊지 맙시다.
그래서 오늘 함께가는 교회로 모인 저와 여러분들은 우리가 가진 것을 세상에게 나누어주고(물론 그런 교회로 성장해야 겠지요), 우리가 받은 은혜를 아낌 없이 세상에게 나누어 줄 수 있는, 그런 열매와 같은 교회가 되기를 소원합니다. 열매만 맺는 교회가 아니라, 열매를 맺어서 나누어 주는 그런 교회가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셋째, 감람나무는 성전의 재료로 사용되었습니다.
성전의 일부가 된 것이죠. 이제 사람들은 감람나무를 통해서 성전의 일부를 보게 되는 겁니다. 이와같이 오늘 우리도 이제는 복음의 일부가 되어야 하고, 그리스도를 보여주는 창이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감람나무는 그 재질이 단단해서 성전의 문짝이나, 문설주, 그리고 그룹들을 만드는데 사용되는 나무였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여기서 재미있는 것은요. 감람나무가 도끼로 잘리고, 대패로 밀리고, 무늬가 새겨지고, 성전의 문짝으로, 성전의 문설주와 혹은 그룹들로 사용 될 때, 사람들은 더 이상 그 나무를 감람나무라고 하지 않습니다, 감람나무를 향해서 성전 문짝, 성전 문설주, 그룹이라고 부릅니다. 본래의 정체성인 감람나무인 나는 사라지고, 나를 통해서 하나님의 집인 성전이 드러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성전의 재료로 사용되는 감람나무는요 오늘 우리에게 중요한 한 가지 사실을 말해 줍니다. 광야에서 베여져서 성전의 재료로 사용되는 감람나무를 통해서 성전이 아름다움과 위용이 드러나듯, 이제 세상에서 베임바 되어 그리스도인들이 된 우리들을 통해서 우리가 드러나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사랑과 섬김과 능력이 드러나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제 내가 그리스도인이라면 사람들이 나를 통해서 예수그리스도를 볼 수 있도록 예수그리스도를 드러내는 삶을 살 수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서두에 말씀드렸지만 사람들이 교회를 보면서 실망하는 이유, 더 이상 기대하지 않는 이유, 목회자들을 보면서 성직자로 인정하지 않고, 전혀 존경하지 않는 이유가 어디에 있습니까? 교회가 교회인줄 몰라서가 아닙니다. 그 사람이 목사인지 몰라서가 아닙니다. 교회에서 예수그리스도의 섬김과 희생이 드러나지 않기 때문입니다. 목사에게서 그리스도의 겸손과 희생이 드러나지 않고, 오직 인간적인 욕심과 인간적인 성공만을 이루고자하는 욕심만을 보기 때문입니다.
이런 맥락으로 여러분들이 만일 오늘 말씀을 전하는 저에게서 예수그리스도의 냄새와 예수그리스도의 정신과 예수그리스도의 가르침을 보지 못한다면, 저는 지금 결코 목사로서 바로 살고 있지 못한 겁니다. 그래서 어제 이 말씀 준비하면서 마음이 정말 어려웠습니다. 그리고 여러분들 앞에서, 내가 사는 삶의 자리에서 예수그리스도의 정신과 가르침을 비춰주지 못하는 제자신이 한 없이 부끄러웠고, 하나님 앞에 죄송하고, 여러분들 앞에 너무너무 죄송한 마음이 들었습니다. 그리고 다시 한 번 삶을 추르스며, 신앙을 돌아보면서 바울의 고백을 떠올려 봅니다.
20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가 정말 그리스도인이라면, 우리 교회가 정말 ‘교회’라고 한다면, 나에게서 그리스도가 드러나도록, 우리 교회를 통해서 예수의 사랑과 섬김만이 드러나도록 함께 힘쓰고, 도울 수 있는 저와 여러분이 되십시다. 그리스도인다운 그리스도인을 찾기 어려운 이 시대에, 교회다운 교회 찾기 너무 너무 어려운 이 시대에, 오늘 우리가 그리스도의 정신과 가르침과 섬김의 모습을 보여줄 수 있는 그런 교회와 성도들이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이제 말씀 맺습니다.
푸른 감람나무와 같은 인생이라는 제목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나누었습니다. 교회다운 교회가 없고, 그리스도인다운 그리스도인이 없는 이 시대에, 오늘 저와 여러분이 교회다운 교회, 그리스도인다운 그리스도인, 하나님의 집에 있는 푸른 감람나무와 같은 인생들이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말씀을 마치면서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