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렇게 계속 기도실에서 새벽예배를 드리다가 하나님 댁 뒷마당을 메워 구제단을 지었는데, 80명으로 시작한 수가 금방 500명으로 늘어났다. 몇 달 후인 1956년 3월에는 주일학교를 처음으로 시작, 내가 주일학교 총무로 임명받아 일을 하게 되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주일학교 학생 수만 1200명, 반사가 130명이 되었다. 구제단에서는 도저히 그 많은 인원을 수용할 수 없어서 터를 마련하여 이만제단을 짓기 시작하였다. 그 터에 천막을 치고 철야 기도를 드렸는데, 추운 겨울 아침에 일어나면 천막에 서리가 하얗고, 땅바닥에는 단지 가마니 하나밖에 깔려 있지 않았었는데도 모두가 추운 줄을 모르고 철야를 계속했었다. 감리교 목사가 "전도관 가지 말라."고 자꾸 집으로 찾아오는 바람에 피해 다니기도 하고, 아예 집에 가지 않고 밥을 날라다 먹기도 했다.
이만제단이 개관된 후, 하나님께서 특별 권사 10명과 구역별 전도사를 뽑으시게 되었다. 나는 그때 겨우 30대라 전도사는 생각지도 않았는데, 안찰하실 때 하나님께서 "전도하라."하셨고, 시켜주시지 않아서 못 할 때인지라 감사히 하게 되었다. 내가 맡은 구역을 을지로였는데, 하루 11~12집을 심방할 수 있었다.
어느 날 30대 여자가 폐병으로 사망을 해 처음으로 생수를 가지고 시체를 씻게 되었다. 굳은 시체가 노긋노긋해지고, 향취가 나며, 얼굴에 이슬이 맺히고, 뺨에서부터 이마로 살아나는 핏줄을 보면서 나는 자신이 생기는 것이었다. 이토록 확실한 생수가 있으니 어디든지 전도할 수 있다는 분명한 생각을 가지게 된 것이다.
또 한번은 주일날인데, 어느 권사님 딸이 죽어 구역장들과 2시간 동안 예배로 예쁘게 피어 놓은 다음, 그 어머니에게 "잘 지켜라.아무나 들어오지 못하게 하라." 당부를 해 놓고 낮예배 참석 후 가 보니, 현관에서부터 송장 썩는 냄새가 진동을 하는 것이었다. 전에 다니던 영락교회 목사와 집사들이 와서 웬일로 죽었느냐며 손목을 잡는 순간 썩기 시작하고, 입에서 새까만 피가 나왔다는 것이다. 우리는 다시 간절히 예배를 드렸지만, 처음처럼 그렇게 잘 피지는 못했다.
또 한번은 미쳐 버린 30대 여자가 있다 하여 생수를 가지고 그 집에 갔는데, 생수를 보자마자 저것은 피라며 아예 그 여자가 얼굴을 돌려 버리는 것이었다. 그런데 어떤 늙은 노인이 찾아오니 "내 친구가 왔다."고 웃으며 몹시 좋아하는 것이었다. 예배를 마치고 돌아와서 그 할머니의 생활 상태를 알아보니, 밤에 여자를 소개해 주는 조건으로 금전을 갈취하는 좋지 않은 일을 했던 사람이었다. 3,4일간 예배를 계속 드린 다음 생수를 먹이자, 서서히 제정신으로 돌아오더니 전도관에도 나오는 것이었다.
또 어느 날인가 한 대학 교수 집에서 "박 장로님과 식사를 하고 싶다."하여 하나님께 말씀드렸더니 승낙하시게 돼 그 집을 방문하였는데 진수성찬이 차려져 있었다. 하나님과 여러 권사님들이 앉아서 수저를 드는 순간, 하나님께서 "빨리 일어서라."고 재촉하시며 밖으로 나가셔서 먼저 차에 타시는 것이었다. 당황할 새도 없이 얼떨결에 따라 나온 우리들에게 "음식에 구렁이가 칭칭 감겼으니 가정상태를 알아보라."고 하셨다. 대학 교수라는 직책을 믿고 의심 없이 갔었는데, 놀랍게도 그 지저분한 방언패였던 것이다. "지옥 가는 것도 모르고 은혜를 꺾으려고 한다."시며 "음식을 잘못 먹어도 받은 은혜가 더러워진다."고 하셨다.
<5회 1994. 2. 27. 게재>
첫댓글 놀라워요
잘 봤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