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효기간
며칠 전 에어컨 수리기사가 온다고 해서 방 안을 뒤집었다. 사람은 청소를 하려고 마음먹으면 잃어버린 물건을 하나쯤
찾게 마련이다. 나는 초록매실 한 박스를 찾았다.
몇 달 전 지인에게 선물 받은 것이었다. 집사람도 나도 물 외에는 다른 음료를 거의 마시지 않는다. 그러니 초록매실은
방구석에서 조용히 세월을 마시고 있었던 셈이다.
"버리긴 아깝네."
집사람은 두 병을 꺼내 아파트 경비실에 가져다 놓았다. 마침 경비원이 안 계셔서 책상 위에 올려두고 왔다.
잠시 뒤 경비실 앞을 지나면서 물었다.
"아까 놓고 간 초록매실 보셨나요?"
경비원은 아무 일도 아니라는 듯 말했다.
"유효기간이 지나서 버렸습니다."
그 말을 듣는 순간 내 얼굴의 유효기간도 끝난 것 같았다.
우리는 날짜를 확인하지 못했고, 경비원은 원칙대로 처리했을 뿐이다. 잘못한 사람은 없는데 괜히 민망했다. 혹시 속으로
'자기들은 못 먹으니까 우리를 주는 건가?' 하고 생각하지는 않았을까 싶어 더욱 그랬다. 집사람은 미안하다고 사과까지
했다.
안 주느니만 못한 선물도 있다는 것을 그날 처음 배웠다.
요즘은 무엇이든 유효기간이 적혀 있다. 우유도, 약도, 빵도 그렇다. 우리는 그 날짜를 참 잘 믿는다. 하루 전까지는 멀쩡하던
것이 하루 지나면 갑자기 위험한 존재가 된다.
그런데 내가 어릴 적에는 유효기간이라는 말을 들어본 적이 없다.
감은 홍시가 되면 먹었고, 더 두었다가 쉬면 닭에게 던져 주었다. 막걸리는 오래 두면 식초가 되었다. 지금처럼 '폐기'가 아니라
'변신'이었다. 시골 부엌에는 그렇게 태어난 식초가 늘 한 병씩 있었다.
우리 집 냉장고에도 젓갈이 여럿 있다. 가끔 날짜를 보면 나도 놀란다. 몇 년 전 유효기간이 적힌 것도 있다. 그러나 젓갈은 원래
오래 살라고 소금 옷을 입은 음식이다. 냄새를 맡아 보고, 색을 보고, 조금 맛을 보면 아직 현역인 경우가 적지 않다.
아마 우리 세대는 날짜보다 감각을 더 믿고 자란 사람들인지도 모르겠다.
물론 그렇다고 유효기간을 무시하자는 이야기는 아니다. 다만 날짜는 참고사항이고, 사람은 생각하는 존재라는 말을 하고 싶을
뿐이다.
이번 일을 겪고 보니 유효기간보다 더 중요한 것이 하나 있었다.
선물을 하기 전에는 날짜를 확인하는 일이다.
그 뒤부터 우리 부부는 남에게 무엇을 드릴 일이 생기면 먼저 바닥을 본다. 가격표도 아니고 상표도 아니다. 유효기간이다.
초록매실 덕분에 새 버릇이 하나 생겼다.
사람은 나이가 들수록 안경을 쓰는 이유가 글씨를 읽기 위해서만은 아닌 모양이다. 남에게 드릴 물건의 유효기간을 확인하기
위해서도 필요한 것 같다.
그날 버려진 것은 초록매실 두 병뿐이었다.
대신 우리는 웃음거리 하나를 얻었고, 다음부터는 같은 실수를 하지 않을 기억 하나를 얻었다. 나이 들면 물건은 자꾸 잃어
버리지만, 이런 기억은 오래 남는다. 유효기간도 없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