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연과 악연
인연이란 참으로 묘한 것이다. 세상을 살아가며 만나는 수많은 사람들 가운데 어떤 이는 스쳐 지나가는 바람처럼 잊히고,
어떤 이는 평생의 벗이 되기도 한다. 불가에서는 사람과 사람의 만남을 결코 우연이라 하지 않는다. 전생에 옷깃만 스쳐도
수백 번의 인연이 있어야 한다고 하니, 지금 내 앞에 나타난 사람 또한 오래전부터 이어져 온 보이지 않는 실로 연결된
존재인지도 모른다.
며칠 전 나는 그런 인연의 신비를 다시 한번 생각하게 만드는 일을 겪었다.
저녁 무렵 손자와 통화하고 있는데 모르는 번호로 전화가 여러 차례 걸려왔다. 통화를 마친 뒤 확인해 보니, "휴대폰 배터리
가 다 되어 더 이상 통화할 수 없습니다."라는 문자와 함께 다급한 사연이 적혀 있었다. 지갑을 잃어버려 가진 돈이 한 푼도
없고, 밥도 먹지 못한 채 잘 곳조차 없으니 제발 15만 원만 빌려 달라는 간절한 부탁이었다. 한 번만 살려 달라는 호소가
마음을 무겁게 했다.
사실 그에게 돈을 보내준 것이 처음은 아니었다. 하루 전에도 그는 차량 탁송 일을 하다가 진주에서 지갑을 잃어버렸다며
부산으로 돌아올 차비 10만 원만 보내 달라고 부탁했다. 그때도 망설이다가 돈을 보냈다. 그런데 하루 만에 다시 연락이
온 것이다.
객관적으로 보면 전형적인 사기 수법처럼 보였다. 연이어 돈을 요구하고, 절박한 사정을 앞세우는 모습은 누구라도 의심할
만했다. 나 역시 마음 한구석에서는 '혹시 속는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떠나지 않았다.
그를 처음 만난 것은 두어 달 전이었다. 동생이 중고차를 구입하면서 차량 탁송을 맡겼고, 그는 용인에서 부산까지 직접 차를
몰고 내려왔다. 마침 점심시간이라 그냥 돌려보내기가 미안해 근처 보쌈집으로 데려가 식사를 함께했다. 그것이 인연의 시작
이었다.
그 뒤로 그는 가끔 안부 전화를 했고, 두어 번 더 만나 함께 식사를 했다. 마흔여섯 살의 독신인 그는 태국에서 여행사를 운영
한다고 했다. 한국에는 뇌경색 수술과 치료 때문에 들어왔고, 시간이 남아 차량 탁송 아르바이트를 하고 있다는 이야기였다.
어렵게 자라 공업고등학교를 졸업한 뒤 지인의 도움으로 태국에 건너가 자수성가했다는 그의 삶도 들려주었다. 언젠가 태국
에 오면 자신이 직접 안내해 주겠다며 환하게 웃던 모습도 기억난다.
집사람은 단호했다.
"사기꾼일지도 모르니 당장 관계를 끊으세요."
그 말이 틀렸다고 할 수도 없었다. 세상에는 선한 얼굴을 하고도 남을 속이는 사람이 적지 않다. 오히려 낯선 사람보다 어느
정도 친분이 생긴 뒤 신뢰를 이용하는 경우가 더 많다. 얼마 전 신문에서는 자신을 도와준 젊은 부부에게 빈 아파트를 자기
집인 것처럼 속여 거액을 가로챈 사건이 소개되기도 했다. 악연은 대개 믿음이라는 틈을 비집고 들어온다.
그럼에도 나는 끝내 외면하지 못했다.
혹시 그의 말이 사실이라면, 배고픔과 추위 속에서 도움을 청하는 사람을 모른 척하는 것이 더 큰 후회로 남을 것 같았기 때문
이다. 마침 내게도 여유가 없어 아들에게 부탁해 급히 15만 원을 보내주었다.
오늘 그는 내가 소개해 준 병원에서 뇌경색 진료를 받을 예정이다. 태국에서 돈이 들어오는 대로 반드시 갚겠다고 약속했다.
과연 그 약속은 지켜질까. 아니면 이 모든 것이 처음부터 치밀하게 짜인 사기극이었을까.
그 답은 아마 오늘 오후쯤이면 알게 될 것이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생각해 본다. 설령 그가 나를 속였다고 해도, 그것이 내 선의를 부끄럽게 만들 수는 없다는 것을 말이다.
사람을 속인 사람은 자신의 양심을 잃는 것이고, 어려운 이를 믿고 도운 사람은 비록 돈을 잃을 수는 있어도 사람에 대한 믿음
까지 잃어서는 안 된다.
물론 세상을 살면서 무조건 남을 믿는 것은 어리석을 수 있다. 경계할 것은 경계해야 하고, 확인할 것은 확인해야 한다. 그러나
의심만으로 세상을 바라본다면 따뜻한 인연도 싹틀 수 없다. 결국 인연과 악연은 같은 문으로 들어온다. 처음에는 둘 다 인연의
얼굴을 하고 다가오지만, 시간이 지나서야 비로소 좋은 인연인지 악연인지 드러나는 것이다.
인생은 어쩌면 그런 시험의 연속인지도 모른다.
좋은 사람을 만나면 감사할 일이고, 나쁜 사람을 만나면 사람을 보는 지혜를 배우게 된다. 어느 쪽이든 삶은 우리에게 교훈을
남긴다. 그래서 인연은 소중하고, 악연조차도 헛된 만남은 아니다.
오늘 나는 한 사람의 약속을 기다리고 있다.
그가 다시 찾아와 웃으며 "고맙습니다."라고 말한다면 아름다운 인연 하나를 얻게 될 것이다. 만약 끝내 연락이 끊긴다면 그것
또한 인생이 내게 가르쳐 준 값비싼 수업으로 남을 것이다.
인연은 하늘이 맺어 주지만, 악연은 사람의 선택이 만든다. 그리고 그 모든 만남을 품고 살아가는 것이 결국 우리네 인생이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