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람의 수첩 / 이명희
바람의 수첩을 넘기니
사계절 바람이 적혀 있다
샛바람 마파람 하늬바람 삭풍
지난번 다녀간 산과 다녀갈 산이 적혀 있다
사명산 줄기 아래 파로호, 그 옆 꽃섬에서 피고 지는
꽃양귀비 붓꽃 꽃창포 도라지꽃
들판에서 자라는 어린 소나무 버드나무 옥수수 콩 벼
마을 사람들과 밤나무집 이장님 이름도 적혀 있다
지금 대추나무를 흔드는 저 바람은
지구를 몇 바퀴나 돌고 왔을까
월명산 아래 작은 골짝 마을
잊지 않고 때맞추어 찾아와
바람 날개로 곡식 키우고 익혀 함께 한다
삼월로 접어들자
살랑살랑 실바람으로 민들레꽃 피우고
곰치 곤드레 머위싹 새 힘 불어넣는다
바람 안에 바람을 기록한 두툼한 수첩
사람 마음까지 파고드는 바람
내게 찾아올 적당한 시간도 기록하고 있을까
내게도 바람을 기록할 수첩이 있는데
― 시집 『바람의 수첩』 (시산맥, 2022)
* 이명희 시인
강원도 양구 출생.
2018년 『월간문학』 신인문학상 동시 당선.
2021년 『시와소금』 신인문학상 시 당선.
2021년 『아동문학사조』 동화당선.
동시집 『노래연습 꼬끼오!』 『웃는 샘물』 『환한 우리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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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명희 시인이 넘겨본 “바람의 수첩”엔 자연의 순리와 세상을 움직이는 “창조주의 힘”이 빼곡히 적혀 있다.
이런 상상력은 시인의 “기독교적 종교관”과 이어진다.
“바람의 수첩”과 “시인의 수첩”, 두 개의 수첩이 똑같은 방식으로 움직이고 있다.
보이지 않는 바람을 통해 사계절의 변화를 한눈에 볼 수 있도록 배치한 매뉴얼이 돋보이는 작품이다.
시인은 이렇듯 무심히 지나칠 만한 사소한 것들의 “감춰진 의미”를 찾아낸다.
기압의 변화에 의한 “공기의 흐름”이 ‘바람’이다.
‘바람’은 두 지점간의 기압차가 생길 때 그 차이에 의한 힘으로 ‘공기’가 움직여서 발생한다.
바람의 실체는 ‘공기’이기 때문에 눈에 보이지 않는다.
‘바람’의 역할은 무엇일까. 밀도가 높은 곳에서 낮은 곳으로 흐르며 대기의 균형을 이루는 것이다.
밀도 차가 클수록 ‘바람’의 세기도 강해진다.
11∼3월 사이에는 풍력이 강하고 차고 건조한 북서 계절풍이 불고,
5∼9월 사이에는 풍력이 약하고 고온다습한 남동 계절풍이 불어 기온의 차이를 확연히 느낄 수 있다.
이명희 시인이 펼쳐본 “바람의 수첩”엔 무엇이 적혀 있을까.
바람이 “한 일과 해야 할 일과표” 속에 “키워야 할 꽃과 곡식의 목록” 과 마을 사람들 이름까지 소상히 기록되어 있다.
바람의 역할은 “살랑살랑 실바람으로 민들레꽃 피우고 곰치 곤드레 머위싹에 새 힘 불어넣는” 일이다.
철에 맞는 바람의 힘으로 자연은 균형을 이루고 있다.
시인에게도 사람의 마음까지 파고 드는 “바람을 기록할 수첩”이 있다고 한다.
아무 때나 간단히 메모할 수 있는 “마음의 공책”은 “시인의 수첩”이다.
이 “마음의 수첩”은 써도 써도 해지지 않고 페이지도 제한이 없다.
이런 수첩은 시인만이 가질 수 있는 “특별한 수첩”일 것이다.
별다른 감흥 없이 당연시되는 주변의 익숙한 것들의 “의미를 되짚어 보게 하는” 작품이다.
- 마경덕 (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