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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 이 시대의 사랑/ 최승자
시너먼 추천 0 조회 22 23.08.16 21:25 댓글 5
게시글 본문내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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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 작성자 23.08.16 21:43

    첫댓글 일찌기 나는/ 최승자

    일찌기 나는 아무것도 아니었다
    마른 땅에 핀 곰팡이
    벽에다 누고 또 지린 오줌자국
    아직도 구더기에 뒤덮인
    천 년 전에 죽은 시체

    아무 부모도 나를 키워 주지 않았다
    쥐구멍에서 잠들고 벼룩의 간을 내먹고
    아무데서나 하염없이 죽어가면서
    일찌기 나는 아무것도 아니었다

    떨어지는 유성처럼 우리가
    잠시 스쳐갈 때 그러므로
    나를 안다고 말하지 말라
    나는 너를 모른다
    나는 너를 모른다
    너, 당신, 그대, 행복
    너, 당신, 그대, 사랑

    내가 살아 있다는 것
    그것은 영원한 루머에 지나지 않는다.

  • 작성자 23.08.16 21:51

    자화상/ 최승자

    나는 아무의 제자도 아니며
    누구의 친구도 못된다
    잡초나 늪 속에서 나쁜 꿈을 꾸는
    어둠의 자손, 암시에 걸린 육신.

    "어머니 나는 어둠이에요..."

    그 옛날 아담과 이브가
    풀섶에서 일어난 어느 아침부터
    긴 몸뚱어리의 슬픔이에요.

    밝은 거리에서 아이들은
    새처럼 지저귀며
    꽃처럼 피어나며

    햇빗 속에 저 눈부신 천성의 사람들
    저이들이 마시는 순순한 술은
    갈라진 이 혀 끝에는 맞지 않는구나.

    잡초나 늪 속에 온 몸을 사려감고
    내 슬픔의 독이
    전신에 발효하길 기다릴 뿐

    뱃속의 아이가 어머니의 사랑을 구하듯
    하늘 향해 몰래몰래 울면서
    나는 태양에의 사악한 꿈을 꾸고 있다.

  • 작성자 23.08.16 21:59

    봄밤/ 최승자

    적막히 녹아드는 햇빛 소리만
    굴러다니는 비인 바람 소리만
    실은 겨우내 말라붙은 꿈을 적시며
    오늘 밤 어질머리 푸는 비의 관능을
    떠도는 발들의 아픔을

    어둠 속 잇몸들의 덧없는 입맞춤 사이
    밤새 홀로 사무치는 머리칼 사이
    실은 고적한 곳으로 흘러가는 마음을
    조금씩 서걱이며 부서지며
    아직도 남아 있는 부끄러운 뼈를

    묻지는 말고 그대여
    눈물처럼 애욕처럼
    그대의 혀끝으로 적셔주려나
    깊게, 잘망보다 깊게.

  • 작성자 23.08.16 22:06

    비 오는 날의 재회/ 최승자

    하늘과 방 사이로
    빗줄기는 슬픔의 악보를 옮긴다
    외로이 울고 있는 커피잔
    무위를 마시고 있는 꽃 두 송이
    누가 내 머릿속에서 오래 멈춰 있던
    현을 고르고 있다
    가만히 비집고 들어갈 수 있을까
    흙 위에 괴는 빗물처럼
    다시 네 속으로 스며들 수 있을까
    투명한 유리벽 너머로
    너는 생생히 웃는데
    지나간 시간을 나는 증명할 수 없다
    네 입맞춤 속에 녹아 있던 모든 것을
    다시 만져 볼 수 없다
    젖은 창 밖으로
    비행기 한 대가 기울고 있다
    이제 결코 닿을 수 없는 시간 속으로.

  • 작성자 23.08.16 22:12

    부끄러움/ 최승자

    그대 익숙한 슬픔의 외투를 걸치고
    한낮의 햇빛 속을 걸어갈 때에
    그대를 가로막는 부끄러움은
    떨리는 그대 잠 속에서
    갈증 난 꽃잎으로 타들어가고
    그대와 내가 온밤 내 뒹굴어도
    그대 뼈 속에 비가 내리는데
    그대 부끄러움의 머리칼
    어둠의 발바닥을 돌아
    마주치는 것은 무엇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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