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초도 아닌 것이 부추도 아닌 것이 사시사철 좁다란 푸른 잎을 내밀고 있다.
맥문동 잎은 따뜻한 봄날 들판에서 솟아나는 파란 보리 잎사귀를 닮았다. 추운 겨울 눈 속과 모진 가뭄에도 결코 시들지 아니한다. 끈질긴 인내심과 강인한 생명력이 부럽기만 하다..아침 햇살에 이슬 머금은 영롱한 파란 잎은 사람들의 발걸음을 붙잡는다. 맑고 환하게 빛나는 아침을 위하여 이슬은 밤새워 잎을 닦고 또 닦는다.
무더운 여름을 알리는 보랏빛 맥문동꽃이 활짝 피었다.
숲속 그늘진 응달을 아름답게 장식하는 맥문동꽃의 향연은 황홀한 세계로 나를 인도한다. 짧고 곧은 파란 잎 사이에서 뻗은 가느다란 줄기의 위쪽에서 신비한 보랏빛 꽃들이 올망졸망 매달려 피어난다. 크고 화려하지 않아도 귀엽고 아기자기하다. 자그마한 꽃들이 모여 한줄기 꽃대를 이룬다.
산골짝 응달에서 무리 지어 자생하는 약초이며 야생화인 보랏빛 맥문동꽃이 문득 어느 날 내 곁으로 다가왔다. 내가 살고 있는 아파트 앞 공원 숲속 그늘에서 피어났다. 여름날이 점점 짙어 질수록 맥문동꽃은 정열을 쏟아낸다.
한줄기 시원한 소나기가 쏟아지면 더욱 찬란하고 싱그러운 꽃을 피워낸다. 청초하면서도 다소곳하다. 숲속 초록 물결 속에 보랏빛 꽃이 바람에 흩날리면, 피로한 영혼이 맑고 깨끗하게 정화된다. 초록빛과 보랏빛이 함께 어울려 아름다운 하모니의 세계가 펼쳐진다.
매일 아침 산책로를 따라 걸으면 마음은 어느덧 보랏빛으로 물든다. "기쁨의 연속"이란 맥문동 꽃말 때문인지, 기쁨과 즐거움이 깃털처럼 날아오른다.
보랏빛은 어쩐지 고귀하고 우아하며 숭고하고 신비한 영감으로 다가온다. 그러기에 로마시대에는 황실의 전용 색깔이 되었는지 모른다.
맥문동꽃은 연보라, 진보라, 붉은보라, 파란보라로 예쁜 자태를 살짝 내민다. 보랏빛 미소로 그리운 얼굴 그대처럼 웃으며 나를 반긴다. 보랏빛은 미지의 세계로 빠져들게 하는 이상야릇한 힘이 있다. 아름다운 무지개 속에도 보랏빛은 살포시 숨어 있다. 순수하고 깨끗한 사랑을 전하는 천사인지 모른다. 아마도 천국은 온통 보랏빛으로 장식되어 있지 않을까 싶다. 요즈음은 보랏빛 채소와 과일이 선풍을 일으키며 식탁 위에도 오른다.
지난 여름날, 나는 아름다운 수원화성을 둘러보고 성곽을 쌓는 데 온갖 정성을 기울인 정조 임금과 다산 정약용 선생을 생각한 적이 있다. 성곽을 돌아보다 우연히 성곽 안쪽 동북포루 가까이에서 잘 가꾸어진 보랏빛 맥문동꽃을 보고 기쁨을 금치 못했다. 불볕더위를 아랑곳하지 않고 피어나는 맥문동꽃이 더욱 아름답게 다가왔다.
여름날이 물러서고 단풍이 곱게 물드는 가을이 다가오면, 보랏빛 맥문동꽃은 떨어지고 그 자리에 동그랗고 조그만 열매를 맺기 시작한다. 추운 겨울을 맞으면 새까만 알로 변신한다. 아롱아롱 맺힌 곱다란 맥문동 열매는 예쁘고 귀엽다. 여인들이 목걸이로 장식해도 손색이 없을 것 같다.
맥문동이 땅 위에서 세월을 새기며 꽃과 열매를 맺는 동안, 땅속에선 담황색의 뿌리를 주렁주렁 일구어낸다. 조그마한 덩이뿌리가 귀한 한약재로 사용되는 맥문동이다.
지난 여름날, 나는 생맥산 덕분으로 찌는 무더위를 이겨냈다. 3대가 한의사였던 다정다감한 처남이 생전에 나를 위해 처방해 준것이었다. 생맥산은 여름철에 면역력을 증진시켜 호흡기나 당뇨에 효과가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맥문동과 인삼, 오미자의 세 가지 약제를 넣고 달이는 탕약이다. 생맥산의 핵심은 역시 맥문동에 있다. 맥문동에는 놀랍고 신비한 효능이 숨어 있는가 보다.
맥문동이 자라난 인고의 세월을 생각해 본다.
엄동설한에도 막문동 잎은 푸르고도 푸르다. 무더운 여름에는 아름다운 보랏빛 꽃을 피우면서 예쁜 열매를 맺고, 어두운 땅속에서는 덩이뿌리를 맺는다. 그것도 식물이 쉽게 자라날 수 없는 숲속 응달이다.
보랏빛 맥문동꽃이 자꾸만 눈앞에 다가온다. 비바람 모진 된서리 이겨내며 꽃을 피우는 그 맑고 깨끗한 영혼을 가슴속에 간직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