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 없는 길에서 배운 하루
8월의 첫 산행이었다. 이번 달부터 새롭게 산대장을 맡은 박대장의 안내로 금정산 청소년수련원 계곡을 찾아가기로 했다
. 오전 10시 30분, 지하철 1호선 온천장역에 아홉 명이 모였다. 203번 버스를 타고 종점에 내리니, 시원한 냉방 속에 익숙
해졌던 몸은 곧바로 한여름의 뜨거운 공기를 맞이했다. 땅에서는 열기가 아지랑이처럼 피어오르고 있었다.
100년이 넘는 역사를 간직한 금성동교회 뒤편을 지나 마을을 벗어나자, 대천천 상류로 이어지는 오솔길이 시작되었다.
예전에 화명수목원을 갈 때 두어 번 걸었던 길이라 낯설지는 않았다. 한낮의 햇볕은 뜨거웠지만 숲속으로 들어서자 짙은
그늘이 반겨 주었다. 간간이 불어오는 바람은 마치 자연이 건네는 선물 같았다. 그 바람 한 줄기에 모두가 잠시 더위를
잊었다.
한참을 걸어 도착한 계곡은 예상과는 조금 달랐다. 커다란 바위들은 장관을 이루고 있었지만, 오랜 가뭄 때문인지 계곡물
은 거의 말라 있었다. 겨우 물이 고여 있는 곳마다 먼저 온 사람들이 자리를 잡고 있었다. 우리도 빈 바위 하나를 찾아 배낭
을 내려놓고, 미리 준비해 온 수박과 자두를 나누어 먹으며 목을 축였다. 시원한 과일 한 조각이 그 어떤 별미보다 달게
느껴졌다.
잠시 쉬고 있는데 박대장이 시계를 보더니 아직 11시 반밖에 되지 않았다며 미륵암 방향으로 조금 더 올라가 보자고 제안
했다. 새 산대장의 첫 산행이니 누구 하나 토를 달지 않았다. 다시 배낭을 메고 숲속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문제는 그때부터 시작되었다. '어딘가 길이 있겠지.' 하는 막연한 생각으로 앞으로만 나아갔지만, 아무리 둘러봐도 길은 보이
지 않았다. 숲은 점점 깊어지고 시계는 어느새 정오를 넘겼다. 결국 더 이상의 탐색은 접고 널찍한 바위를 찾아 점심을 먹기로
했다.
'금강산도 식후경'이라는 말처럼, 나무 그늘 아래 마당바위에 둘러앉아 각자 준비해 온 도시락과 먹거리를 꺼냈다. 그런데
이번 산행에는 예전과 다른 풍경이 하나 있었다. 국립공원 지정 이후 술 반입이 금지되었다는 박대장의 엄명에 따라 아무도
술을 가져오지 않은 것이다.
사실 야외에서 친구들과 나누는 술 한잔은 단순히 술이 아니라 정을 나누는 매개였다. 잔이 오가다 보면 실없는 농담도 피어
나고 웃음도 커지기 마련이다. 요즘은 'JOMO(Joy of Missing Out)'라 하여 무언가를 하지 않는 즐거움을 이야기하지만,
우리 같은 애주가들에게는 술이 빠진 산행이 조금은 허전하게 느껴졌다. 물론 자연을 더 맑은 정신으로 즐기자는 취지는
충분히 이해하면서도, 오래된 산행 문화 하나가 사라진 듯한 아쉬움은 감출 수 없었다.
식사를 마친 뒤 가장 큰 과제는 하산길을 찾는 일이었다. 동파가 휴대전화 지도를 살펴보더니 조금만 더 가면 도로가 나온다
고 자신 있게 말했다. 우리는 그 말을 믿고 다시 숲속으로 들어갔다. 그러나 길은 끝내 나타나지 않았다. 오히려 앞에는 수십
미터의 낭떠러지가 버티고 서 있었다. 더 이상 나아갈 수도, 되돌아가기도 쉽지 않은 난감한 상황이었다.
할 수 없이 방향을 바꾸어 조심스럽게 이동했다. 얼마나 헤맸을까. 멀리 경비실처럼 보이는 건물 하나가 눈에 들어왔다. 마지
막 희망이라 생각하며 그쪽으로 향했다. 철조망 사이를 조심스레 빠져나와 언덕을 오르니 드디어 포장도로가 나타났다. 그제
야 모두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알고 보니 그곳은 국궁장 옆 부산교육청 학생인성교육원이었다. "이제야 살았다."라는 말
이 절로 나왔다.
그날 금정산 산행은 예정했던 코스를 완주하지도 못했고, 길을 잃어 진땀을 빼기도 했다. 그러나 시간이 흐를수록 기억 속에
선명하게 남는 것은 빼어난 풍경이 아니라, 길 없는 숲속에서 길을 찾아 헤매던 그 순간들이었다.
생각해 보면 세상에 처음부터 길은 없다. 수많은 사람과 짐승의 발걸음이 쌓이고 또 쌓여 비로소 길이 된다. 그래서 이미 난
길을 걷는 것은 쉽지만, 길 없는 곳에서 길을 찾는 일은 언제나 두려움과 용기를 함께 요구한다.
인생 또한 그러하다. 우리는 때로는 환하게 닦인 길을 만나기도 하지만, 어느 날 갑자기 지도에도 없는 숲속에 홀로 서기도
한다. 그럴 때 길을 만들어 주는 것은 나침반도, 휴대전화 지도도 아니다. 끝내 포기하지 않는 마음과 함께 걷는 사람들의 따뜻
한 발걸음이 결국 새로운 길을 만든다.
그날 우리는 숲속에서 길을 잃었지만, 길의 소중함을 되찾았다. 뜨거운 햇살도, 메마른 계곡도, 철조망을 빠져나오던 아찔한
순간도 이제는 웃으며 꺼내는 추억이 되었다. 인생이란 어쩌면 목적지에 무사히 도착한 날보다 길을 잃었다가 다시 길을 찾은
날이 더 오래 마음속에 남는 법이다.
금정산의 여름 숲은 그날 우리에게 조용히 일러주었다. 길은 발견하는 것이 아니라, 함께 걸어가며 만들어 가는 것이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