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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06년 3월 13일
칠원 장날, 전도사 유경화 씨가 칠원 장터에서 전도 강연을 하였는데, 남경오 씨와 김연이 씨가 예수를 영접하여 칠원면 지역 최초의 성도가 되다.
● 1906년 4월
최초의 예배처소 – 남경오 성도 가정집
● 1908년 4월 19일
칠원현 상리면 남구리 이현에 두 칸 짜리 초가 구입, 구성리교회 간판을 걸고 첫 예배당으로 사용하다.
● 1910년 7월 10일
덕산리 693번지의 네 칸짜리 초가로 이전하다.
● 1919년 3월 23일 ~ 4월 3일
손종일, 엄주신 박순익, 박경천 등 칠원교회 성도들이 칠원 장날에 만세운동을 주도하다.년대
● 1924년 4월 13일
구성리 908번지에서 새 예배당 기공식을 갖다.
● 1925년 4월 26일
구성리 908번지에 목조 예배당을 짓고 입당예배를 드리다.
● 1926년 3월 14일
새 예배당 헌당예배를 드리다
● 2011년 5월 24일
순교자 기념교회 지정식을 갖다(고신총회 지정).
● 2013년 6월 24일
새 예배당 부지를 매입하다(덕산1길 28).
● 2013년 12월 27일
김영한 전도사가 토지를 증여하다(창원시 용호동 25-11).
● 2014년 10월 5일
새 예배당 신축 기공 감사예배를 드리다.
● 2015년 10월 20일
손양원 목사 생가복원 및 기념관 개관식을 갖고 새 예배당에서 오페라 손양원 갈라쇼를 열다.
● 2015년 11월 1일
새 예배당에서 첫 예배를 드리다.
● 2015년 11월 21일
입당 감사예배를 드리다.
가장 귀한 유산은 재물의 유산이 아니라 신앙의 유산이다.
손종일씨는 1908년경 이웃에 사는 형뻘 되는 사람으로부터 전도를 받아 예수 믿고,
상투도 자르고, 술과 담배도 끊고, 밤새워 성경을 읽고, 만나는 사람들에게 전도를 했다.
설날 아침 문중의 일가가 다 모여 조상의 묘에 절하는 도중
제사상을 뒤엎어 버리기까지 했다.
가족들을 전도하여 예수 믿게 한 후에는 매일 아침 교회에 가서 새벽기도를 드렸고,
집에서는 가정예배를 드렸고, 십일조와 주일성수를 철저하게 했다.
손종일씨는 장로로 김은순씨는 집사로 칠원교회를 열심히 섬겼다.
한번은 칠원교회에서 길선주 목사를 모시고 부흥회를 했는데
은혜를 받은 손 장로는 집에 돌아와 기뻐하면서
아내에게 논 다섯 마지기 중 세 마지기를 바쳤다는 이야기를 했다.
아내는 비 새는 교회당을 짓는다는데 두 마지기만 남겨 두어서 무엇 하겠느냐 면서
남은 두 마지기를 다 바치자고 해서 결국 다섯 마지기를 다 바쳤다.
손 장로는 자녀들에게 논 밭이나 재물보다는 믿음의 유산을 물려주었다.
후에 그의 세 아들은 모두 목사가 되었고
두 명의 손자는 순교자가 되었고 두 명의 손자는 목사가 되었다.
큰 아들이었던 손양원은 어려서부터 부모를 따라 새벽 기도회에 다니며
신앙생활을 힘썼다.
손양원은 11살 때 칠원 보통학교에 입학하였는데
일본인 교장은 매일 일본 왕을 향하여 절하는 동방요배를 하고 수업을 시작했다.
그러나 손양원은 동방요배를 거절했다.
어느날 손양원은 동방요배 거부로 교장으로부터
뺨을 맞고 코피를 흘리면서 집으로 돌아왔다. 그때 아버지 손종일 장로는 이렇게 기도하며 아들을 격려했습니다.
"주님, 이 부족한 것의 미천한 아들에게 이런 시련을 주시니 감사합니다.
쇠는 두드릴수록 강해진다고 했습니다.
앞으로 더 큰 일에 사용하시기 위해 제 아들을 더 큰 망치로,
더 강한 힘으로 두드려 주십시오."
손양원은 아버지의 기도를 들으면서 하나님을 바로 섬기기 위해서 라면
그까짓 학교 안 다녀도 그만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손양원은 동방요배 거부는 물론
주일성수를 위해 주일날 학교에 가는 것을 거부하므로 학교에서 벌을 받곤 했다.
보통학교를 졸업하고 17살 때 서울에 가서 중동중학교에 입학하여
고학을 하면서도 주일성수를 엄격하게 했다.
주일날 일 안 한다고 만두가계로부터 쫓겨나면서도 그는 주일을 지켰다.
“굶어도, 못 배워도 주일에는 일을 하지 않고 교회에 나가 예배를 드려야 한다”는 것이
그의 신앙이었다.
그는 어릴 때부터 십일조 생활을 철저하게 했다.
그는 만두가계에서 쫓겨나서 이리 저리 일자리를 찾아 다니면서
그간 모아 두었던 돈도 다 써 버리고 삼일을 굶어야 했다.
막다른 골목에 선 손양원은 호주머니에 남아 있는 돈 70전을 생각해 냈다.
그러나 그 돈은 십일조였습니다.
"굶어 죽으면 죽었지 십일조 도둑은 안 돼" 하며
그 돈을 당시 그가 다니던 안국동교회에 바쳤다.
손양원은 19살 때인 1921년 일본으로 건너가
동경의 스가모중학교 야간부에 진학하여 낮에는 우유와 신문을 배달하고
밤에는 공부하여 1923년에 졸업하였다.
그는 일본에서 공부하면서도 산 기도와 노방전도에 열심이었다.
그는 22살 때인 1924년 귀국하여 19살의 정양순양과 결혼을 했고
칠원교회의 집사로 교회 봉사를 열심히 했다.
1926년 3월에는 진주에 있는 경남 성경학교에 입학하였는데
여기서 성경학교의 강사였던 주기철 목사를 만났다.
손양원은 3년 동안 경남 성경학교에 다니면서 주기철 목사에게서 순교신앙을 배웠다.
그는 성경학교 졸업 후 여러 교회를 개척하며 복음을 전했습니다.
손양원 전도사는 1935년 4월 33세에 평양신학교에 입학하여 1939년 7월에 졸업했습니다. 졸업하자마자 경상도 사람으로서 전라도 여수에 있는 나병원 교회인 애양원 교회에
전도사로 부임했다.
손양원 전도사는 1939년 7월부터 사랑과 정성을 쏟으며
애양원 교회에서 나환자들을 섬기기 시작했다.
그러나 일본 경찰은 1940년 9월 25일
수요예배를 마치고 집으로 가는 손양원 전도사를 연행해 갔다.
신사참배를 반대했기 때문이었습니다.
손양원 전도사는 일경들에 의해 체포되어 여수 경찰서, 광주 형무소, 경성 구치소,
청주 구치소 등에서 8. 15 해방까지 5년 간의 옥고를 치르며 갖은 고문을 다 당했으나
주님을 향한 일편 단심의 신앙을 결코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손양원 전도사가 하나님을 향한 순교적 신앙을 가지게 된 데는
정양순 사모의 기도와 격려가 큰 역할을 했다.
정양순 사모는 남편에게는 위대한 신앙의 아내였고
자식들에게는 위대한 신앙의 어머니였다.
여수 경찰서에 수감된 지 10개월 후 손양원 전도사는 광주 형무소로 이송되었는데
이송되던 날 정양순 사모는 자녀들을 데리고 여수 경찰서 앞에서 잠시 남편을 만났다.
그 짧은 만남의 순간 정양순 사모는
남편의 신앙을 격려하는 단 한 마디의 말을 전했을 뿐이었다.
그의 딸 손동희 권사는 그 당시의 상황을 이렇게 기록했습니다.
" '어디로 가십니까?' '광주로 ...' 채 대답을 다 듣지도 않고
어머니는 숨겨 가지고 온 성경책을 펼쳤다.
반갑다고 인사나 나누고 안부나 물을 때가 아니라는 생각에
어머니의 마음은 조급하기만 했던 것 같다.
어머니는 성경 한 구절을 손으로 가리키며 울음 섞인 목소리로 속삭였다.
'여보! 여기 이말 아시지요? 신사참배에 응하면 내 남편 될 자격 없습니다.
영혼 구원도 못 받습니다.' '염려 마오. 걱정 말고 기도나 해 주구려.'
형사가 걸어와 아버지를 데리고 갔다.
잠간 동안의 상면, 그리고 또 다시 긴 이별 .... 아버지는 광주로 가는 기차에 올랐다.
그때 어머니가 펼쳐 보인 말씀은 요한계시록 2장 10절이었다.
'네가 죽도록 충성하라 그리하면 내가 생명의 면류관을 네게 주리라.'
그때는 내 나이 어리고 생각이 짧아 그 상황의 의미를 확실하게 깨달을 수 없었지만,
어른이 되어 그때 일을 찬찬히 되짚어 볼 때마다 어머니에 대한 존경심이 절로 들곤 한다. 어머니는 보통의 어머니들처럼 남편의 육신의 삶을 염려하지 않았다.
어머니가 가장 많이 걱정한 것은 아버지가 당할 고초가 아니라
혹시 아버지가 마음이 약해져서 우상숭배하는 죄를 범하게 되지나 않을까 하는 것이었다." 손양원 목사도 후에 그 사실을 자녀들에게 이렇게 증언했다.
"네 어머니 신앙이 오늘날 나를 있게 했단다.
감옥에 있을 때도 네 어머니가 신앙의 보조를 맞춰 주었기에
이기고 돌아 올 수 있었던 거야.
신앙도 손발이 맞고 호흡이 맞아야 함께 정진할 수 있는 거지.
혼자서는 어렵단다.
아무렴, 대학 열 군데 나오면 뭐해. 믿음이 중요하지."
손양원 전도사가 감옥에 있던
1945년 4월 13일 부친 손종일 장로가 별세했다는 소식을 듣고
그는 “불효자식”이라면서 통곡을 했다.
또한 평소 존경하던 주기철 목사와 최봉석 목사와 박관준 장로가 순교했다는 소식을 듣고 통곡하며 이렇게 기도했다.
“주님, 이 부족한 종도 신앙의 진리를 굳게 지켜
그들의 뒤를 따라 순교할 수 있는 믿음을 더하여 주옵소서.”
1945년 8월 15일 해방이 되어 이틀 뒤인 17일 청주교도소에서 손양원 전도사가 석방되어 애양원 교회로 돌아왔을 때 1 천 여명의 나병환자들이 뛰어나와 손양원 전도사를 부둥켜안고 눈물을 흘리며 환영했다.
그러나 그 후로부터 5년 뒤인 1950년 9월 28일 손양원 목사는
공산군들에게 끌려가며 갖은 고초를 당하다가
여수 미평 과수원에서 총살을 당하므로 결국 순교자의 반열에 들어갔다.
손양원 목사는 죽도록 충성하며 믿음을 지킨 믿음의 사람이었습니다.
둘째 손양원 목사는 사랑의 사람이었다.
손양원 목사의 믿음은 사랑으로 나타났다.
그의 믿음은 나환자 사랑과 원수 사랑으로 나타났다.
여수 애양원 교회의 양원과 손양원 목사의 양원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지만 결과적으로는 뗄 내야 뗄 수 없는 밀접한 관계를 가지게 되었다.
애양원 교회는 손양원 목사와 뗄 수 없게 되었고 손양원 목사는 애양원교회와 뗄 수 없는 관계를 가지게 되었다.
애양원은 윌슨 박사가 1909년 설립한 나환자 병원이었다.
손양원 전도사는 1945년 8월 해방 후 다시 애양원 교회로 돌아와
그의 남은 생애를 애양원 나환자들과 동고동락하며
그들에게 모든 정성과 사랑을 쏟아 부었다.
출옥 후인 1946년 3월에야 비로서 경남노회에서 목사 안수를 받았다.
한 번은 박옥선이란 여 환자가 발 밑에 난 종기 때문에 다리를 절단해야 할 만큼 심각하였습니다. 손 목사는 입으로 악취 나는 피고름을 빨아 주었다.
나병의 환부에는 사람의 침이 좋은 약이 된다고 했기 때문이었다.
손양원 목사는 나환자들에게 모든 사랑과 정성을 다 쏟아 부은 한국의 프랜시스였다.
그의 딸은 이렇게 기록했다. “아버지는 이들을 너무나 사랑했다.
아버지는 분명 우리 남매의 아버지인데
내가 볼 땐 나환자들의 아버지인 것만 같아 보였다.
아버지는 병든 육신일지언정 저 바깥의 표리부동한 자들보다 몇 배 순수한 영혼의 소유자들이라 하며 그들의 정신적 상처를 아물게 하는 데 최선을 다하였다.
다음과 같은 아버지의 노래도 그런 심정의 한 표현이다.”
“주여 애양원을 사랑하게 하여 주시옵소서.
주여 나로 하여금 애양원을 참으로 사랑할 수 있는 사랑을 주시옵소서.
주께서 이들을 사랑하심 같은 사랑을 주시옵소서.
오 주여, 나는 이들을 사랑하되 나의 부모와 형제와 처자보다도 더 사랑하게 하여 주시옵소서. 차라리 내 몸이 저들과 같이 추한 지경에 빠질지라도 사랑하게 하여 주시옵소서.
주여, 만약 저들이 나를 싫어하여 나를 배반할지라도 나는 여전히 저들을 참으로 사랑하여 종말까지 싫어 버리지 않게 하여 주시옵소서. 오 주여, 내가 이들을 사랑한다 하오나 인위적 사랑, 인간적 사랑이 되지 않게 하여 주시옵소서. 사람을 위하여 사랑하는 사랑이 되지 않게 하여 주시고 주를 위하여 이들을 사랑하게 하여 주시옵소서. 주보다는 더 사랑치 않게 하여 주시옵소서. 주여, 내가 또한 세상의 무슨 명예심으로 사랑하거나 말세의 무슨 상급을 위하여 사랑하는 욕망적 사랑도 되지 말게 하여 주시옵소서. 다만 그리스도의 사랑의 내용에서 되는 사랑으로서 이 불쌍한 영육들만을 위한 단순한 사랑이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오 주여, 나의 남은 생이 몇 해 일지는 알 수 없으나 이 몸과 맘 주께 맡긴 그대로 이 애양원을 위하여 충심으로 사랑케 하여 주시옵소서. 아멘.”
애양원 나환자들에 대한 손양원 목사의 사랑은 노래에 그친 것이 아니라 그의 삶에 그대로 나타났습니다. 딸은 나환자들에 대한 아버지의 순수하고 뜨거운 사랑을 다음과 같이 기술했습니다. “아버지는 하루의 거의 대부분을 나환자들과 함께 보냈다. 틈만 나면 집집마다 심방을 다니는 것이 일이었다. 당연히 가족들에게는 소홀할 수밖에 없었다. 어린 우리 형제들은 늘 가슴 한 구석이 빈 듯한 허전함을 느끼며 지낼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아버지에게 불평을 늘어 놓거나 원망한 적이 없었다. 보통의 나환자들보다 훨씬 병이 중한 사람들이 모여 있는 곳이 14호실이다. 아버지는 14호실 환자들에게 관심과 애정을 더욱 많이 쏟았다. 환자들이 거부하는데도 그들의 손을 잡고 식사를 같이 하곤 했다. 아버지는 그들의 피고름 나는 손을 거침없이 부여잡고 장시간 대화를 나누곤 했다. 나병의 환부에는 사람의 침이 좋은 약이 된다며 입으로 피고름을 빨아내는 일도 마다하지 않았다. 너무 자주 스스럼없이 나환자들과 어울리는 아버지였기에 결국 나병에 걸렸다는 헛소문이 나돌기도 했다. 극구 사양하는 아버지를 설득하여 피 검사를 했다. 그러나 결과는 보통 사람보다 오히려 피가 더 맑다는 것이다. 검사 결과를 전해 들은 아버지는 그저 담담한 어조로, '그래? 그러면 이번에도 틀린 건가?' 할 뿐이었다. 자신의 나병 감염을 전혀 두려워하지 않은 아버지였다.”
그의 사랑의 극치는 1948년 10월 19일 여수 순천 반란 사건 때 나타나 보였다.
사랑하던 믿음의 두 아들 동인군과 동신군이 공산 폭도들에게 붙잡혀 10월 21일 순천 경찰서 뒷 마당에서 총살을 당했다.
예수를 부인하라고 했지만 오히려 예수를 증거하다가 총살을 당해 순교했다.
10월 25일 반란군에 의해 두 아들이 죽었다는 소식을 전해들은
손 목사 내외는 엄청난 충격에 쌓여 비통해 했다.
반란 사건이 진압되고 두 아들을 죽인 안재선이 잡혔다는 소식을 들은
손 목사는 밤을 새워 통곡하고 기도하고 교회를 나오면서 이렇게 말했다.
“저 영혼이 불쌍해서 어쩌나, 내 아들들은 죽어서 천국에 갔지만,
안재선은 죽으면 지옥 갈텐데, 저 영혼이 불쌍해서 어쩌나."
결국 손양원 목사의 마음에는 커다란 사랑의 폭풍이 일어나고 있었다. “그를 살려야 한다. 그를 용서해야 한다. 그를 사랑해야 한다.” 10월 26일 두 아들의 시체를 담은 관이 애양원 뜰에 도착했을 때 손양원 목사와 정양순 사모는 관 위에 엎어져 울부짖으며 비통해 했다.
그런데 아들을 잃은 비통함이 그렇게 컸었는데도 불구하고 손양원 목사는 두 아들을 총살한 그 좌익 학생을 용서하고 사랑하기로 결심한 것이었다.
두 아들을 죽인 안재선이 체포되어 총살을 당하게 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손 목사는 계엄 사령관에게 딸을 보내어 그를 사면할 것을 간청했다.
그를 양자로 삼아 교육시키겠다고 약속했다.
손양원 목사는 안 가겠다고 반항하며 대드는 딸 동희를 설득하여 용서의 메시지를 전달하게 했다. 아버지는 듣지 않으려는 딸을 설득했다.
“동희야 내 말 잘 들어 봐라. 내가 무엇 때문에 5년 동안이나 너희들을 고생시키면서 감옥 생활을 견뎌 냈겠니?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기 위함이 아니었겠느냐.
제 1,2 계명과 함께 원수를 사랑하라는 말씀도 똑같은 하나님의 명령인데
내 어찌 이 명령은 순종치 않는단 말이냐. 원수를 사랑하라는 명령에 순종치 않는다면 과거 5년 간의 감옥살이가 모두 헛수고요,
너희를 고생시킨 것도 헛고생만 시킨 꼴이 되고 만다.
그러니 동희야, 가만히 생각해 보아라. 그 학생을 죽여서 우리에게 무슨 이득이 되겠느냐?” 딸은 몇 번이나 반항하며 아버지에게 소리를 지르며 대들었다.
혹 용서는 할 수 있을지 모르나 아들을 삼는다는 것은 무엇이냐고 악을 쓰며 달려들었다.
“동희야, 용서만 가지고는 안 된다. 원수를 사랑하라 했으니 사랑하기 위해 아들을 삼으려는 것이다." 딸은 자기 의지에 반해 아버지의 하나님 절대 신앙에 굴복하고 말았다.
“아버지, 아버지 말씀대로 따르겠습니다.”
결국 딸은 아버지의 용서와 사랑의 메시지를 국군 심문자에게 그대로 전하므로
처형되기 10여분 전에 원수를 살려냈다.
동희양은 취조 군인에게 달려가서 이렇게 아버지의 메시지를 전했다.
“아버지가 두 오빠를 죽인 자를 잡았거든 매 한 대도 때리지 말고, 죽이지도 말라 하셨어요. 그를 구해 아들 삼겠다고요. 성경말씀에 원수를 사랑하라 했기 때문이래요.”
그는 숨도 쉬지 않고 단숨에 말을 토해 놓고는 책상에 엎드려 소리 내어 울었다.
동희양의 말이 끝나고, 동희양이 울음을 터뜨리자 방에 있는 사람들은 모두 충격을 받은 듯했습니다. 취조를 하던 군인은 입에 물고 있던 담배가 떨어진 줄도 모르고 손수건을 꺼내 눈물을 닦으며 '위대하시다' 하고 감탄의 소리를 토해 냈다.
안재선까지도 고개를 숙인 채 흐느껴 울고 있었다. 손동희 권사는 그 때를 이렇게 회상했습니다. “이 광경이야말로 오늘까지 내 눈 앞에 잊혀지지 않는 역사적인 장면의 한 토막이었다.” 사랑의 원자탄이 떨어진 장면이었습니다.
안재선은 살아났다. 안재선은 석방이 되었다.
손목사는 그를 자기의 양 아들로 삼아 부산 고려 성경 고등학교에 보냈다.
1950년 10월 13일 애양원에서 손양원 목사의 영결식이 거행되었을 때
옷을 찢으며 통곡하는 1천여명 애양원 식구들 중 더욱 더 슬피 통곡하는 이가 있었는데
그가 바로 안재선이었다.
그는 결혼하여 4남매를 두었는데 장남은 대한신학교에 다녔다고 한다.
그는 후에 서울 이태원 외국인 아파트 경비의 일을 하며 가난한 삶을 살았는데
평생 죄책감에 사로잡혀 어둡게 살다가 1979년 12월에 암으로 세상을 떠났다고 한다.
그는 세상을 떠나기 보름 전 손동희씨를 찾았다.
두 사람은 손을 잡고 울었다.
“이젠 이런 것, 저런 것, 슬픔도, 미움도 한갖 꿈에 본 듯 잊어버리는 순간이었다.
떠나려는 그의 옷자락 붙들고 우리는 목을 놓아 소리 높여 울었다.
한이라도 풀듯이 .... 미움이 애처러움으로 변하는 순간이었다.
그는 떠나면서 여전히 울음 섞인 음성으로 나에게 자기의 진실을 말했다.
'동희야, 나 지금 집으로 돌아가면 곧 하늘 나라로 간다.
내가 죽어서 천당에 가면 네 두 오빠에게 무릎꿇고 사죄하련다.'
그 말을 남기고 내 곁을 떠난 그는 정확히 보름 만에 세상을 떠났다. 아마 지금쯤 저 천국에선 내 어머니, 아버지, 그리고 두 오빠와 재선 오빠가 손에 손을 잡고 이 시간 집필하는 내 모습을 지켜 보며 우리 여호와 하나님을 영원히 찬양하고 있을 것이다.”
저는 지난 2003년 2월 18일 여수 손양원 목사 순교기념관에 걸려 있는 사진 한 장을 바라보면서 가슴에 뜨거운 눈물을 흘린 일이 있었다.
여수 바닷가에 떠 있는 배 한 척의 사진이었습니다.
6.25 전쟁이 일어나자 선교사들이 1950년 7월경 손 목사님과 가족이 피난을 갈 수 있도록 배 한 척을 마련했습니다. 손 목사님의 짐을 다 실었다.
부흥 집회에서 돌아온 손 목사는 그 사실을 알고 자기는 피난을 갈 수 없다고 했다.
자기는 마지막까지 애양원의 나환자들과 함께 남아 있겠다고 했다.
그리고 가족들에게 배에 올라 피난을 가라고 말했다.
그 말을 들은 가족들은 자기들도 다 손 목사님과 함께 애양원에 남아 있겠다고 했다.
할 수 없이 짐을 다시 내려 놓았습니다. 손 목사는 마지막까지 나환자들을 사랑하며 그들과 함께 있었습니다. 그는 사랑을 마지막까지 몸으로 실천한 사랑의 사도였다.
셋째 손양원 목사는 소망의 사람이었다.
손양원 목사의 삶은 천국과 종말신앙에 의해 지배된 소망의 삶이었다.
그의 가슴과 의지와 시선은 세상이나 세상의 안일에 매이지 않았고
오직 천국과 내세에 붙잡혀 있었다.
손양원 목사는 이 세상의 재물이나 평안이나 명예에는 티끌만큼의 관심도
기울이지 않았다.
그는 “가난을 애처로 삼고 고난을 선생으로” 삼으며 천국을 바라보면서 하루하루를 살다. 손 목사는 옥중 생활을 하면서 힘들고 지칠 때마다 손수 지은 "주님 고대가"를 불렀습니다. 이 가사를 보면 그가 얼마나 간절히 재림의 소망 가운데 살았는지 알 수 있다.
“낮에나 밤에나 눈물 머금고, 내 주님 오시기만 고대합니다.
가실 때 다시 오마 하신 예수님, 오 주여 언제나 오시렵니까?
고적하고 쓸쓸한 빈 들판에서, 희미한 등불만 밝히어 놓고
오실 줄만 고대하고 기다리오니, 오 주여 언제나 오시렵니까?
먼 하늘 이상한 구름만 떠도, 행여나 내 주님 오시는가 해 주님 계신 그 곳에 가고 싶어요. 오 주여 언제나 오시렵니까? 천 년을 하루같이 기다린 주님, 내 영혼 당하는 것 볼 수 없어서 이 시간도 기다리고 계신 내 주님, 오 주여 이 시간에 오시 옵소서.”
손동희 권사는 손양원 목사의 천국 신앙을 이렇게 묘사했다.
“아버지는 하늘 나라의 복음을 전할 뿐, 현세의 안락과 풍요를 약속한 적이 한 번도 없다. 가끔 안수 기도를 해 달라고 찾아오는 병자가 있었지만, 아버지는 특별히 병 고침을 위한 안수기도를 한 적이 없다.
‘나는 영혼을 중요하게 생각하지 육신을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병들면 어떻습니까? 병신이면 또 어떻습니까?
잠깐인 나그네 세상에서 병신으로 살다가 천국 가면 그보다 더 좋은 일이 어디 있다구요.’
이런 말로 병자를 돌려보낼 뿐이다. 나병환자들과 평생을 같이 보내며 그들을 사랑으로 돌보았지만, 그들의 병든 상태를 나쁘다거나 부자연스러운 것으로 보지 않았다.”
손양원 목사는 결국 1950년 9월 13일 공산군에게 체포되어 2주일간 온갖 수모를 다 당하고 9월 28일 밤 11시쯤 미평 과수원에서 총살당하여 48세에 순교했다.
손 목사는 자기를 죽이려는 자들에게 복음을 전하다 총 개머리 판으로 입을 얻어맞아 피투성이가 되었지만 마지막 순간까지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 드리면서 하늘 나라로 갔습니다. 그가 그렇게도 그리고 사모하던 천국으로 갔습니다.
이튿날 아침 남편의 순교 소식을 접한 정양순 사모는 남편의 시신 앞에서
지난 밤에 갓 태어난 아기를 안고서 비통해 하면서도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오! 당신 소원대로 됐군요. 평소 주기철 목사님을 그렇게도 부러워했는데 ....
하나님, 감사합니다. 평생 동안 주의 일을 하게 하시고,
손양원 목사가 소원하던 순교를 허락해 주신 은혜, 감사하고 또 감사합니다.”
그의 눈에서는 눈물이 하염없이 흘러내리고 있었다.
정양순 사모는 마지막까지 나환자들의 친구로 살다가
1977년 11월 26일 사랑하는 남편과 두 아들이 있는 천국으로 옮겨다.
그가 운명하기 전 가슴에 꼬깃꼬깃 간직했던 돈을 꺼내어 딸에게 전하며 이렇게 말했다. “이 돈을 밀양교회에 전해 주어라.” 밀양교회는 건축 중에 있던 나환자 교회였습니다.
그의 시신은 남편의 무덤과 합장되었습니다.
손양원 목사와 정양순 사모는 순교적 믿음을 지킨 믿음의 사람들이었고,
생명을 다 바쳐 나환자들과 원수를 사랑한 사랑의 성자들이었으며,
천국을 바라보며 산 소망의 사람들이었다.
주님을 따르는 크리스토인의 삶은 믿음과 사랑과 소망의 삶이어야 하는 것을 보여주고
우리 곁을 떠나 하늘로 올라갔다. 오늘 아침 우리는 이 땅에 떨어진 사랑의 원자탄 손양원 목사님의 믿음과 사랑과 소망의 삶과 죽음을 살펴보았습니다. 너무나 귀하고 보배로운 삶과 죽음 앞에 우리는 무릎을 꿇고 부끄럽고 뜨거운 눈물을 흘릴 수 밖에 없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기도합니다. 주여 우리들에게도 믿음과 사랑과 소망의 부스러기를 주시옵소서.
8. “약함과 착함과 겸손의 목회자 한경직 목사”
목회자는 하늘에서 내려오지 않고 이 땅의 역사 안에서 만들어진다고 생각합니다.
수 많은 고난과 약함과 실패와 좌절을 경험하면서, 하나님의 은혜의 손길 안에서,
그리고 한 인간의 진솔한 참회와 자기 부정과 헌신의 과정 안에서 하나의 목회자로 만들어진다고 생각합니다.
목회자는 재능도 기술도 학문도 아닙니다.
목회자는 역사 안에서 하나님의 손길 안에서
그리고 자기 부정과 헌신의 결단 안에서 만들어진 하나의 인간이요 하나의 인격이다.
인간 됨과 인격 됨이 없는 목회자는 참된 목회자는 아닙니다.
종교인이나 연설가는 될 수 있고 사업가나 연출가는 될 수 있지만
진정한 목회자는 될 수 없다.
여기서 20세기 한국의 가장 위대한 목회자요 설교자인
한경직 목사의 인간의 면모와 목회자의 면모를 살펴본다.
한경직은 1902년 평안남도 평원군 공덕면 간리에서 농부의 아들로 태어났다.
목회자로서의 소명과 헌신은 22세의 청년 한경직이 1924년
여름 황해도 구미포 해변을 혼자 걷고 있을 때 주어졌고,
철저한 항복과 재 헌신은 27세의 청년 한경직이 1929년 미국 프린스턴에서 폐결핵 3기라는 진단을 받았을 때 주어졌지만, 실제로 목회의 길을 걷기 시작한 것은 귀국 1년 후
한경직이 31세 되던 1933년 신의주 제2교회의 전도사로 부임 함으로부터 시작했다.
그는 학문에 대한 꿈을 품기도 했었고 교수에 대한 꿈을 품기도 했었습니다.
그러나 모든 것이 좌절되었습니다.
후에 한경직 목사는 이것을 "좋은 기회"였다고 긍정적으로 표현했다.
모든 것이 좌절되고 있을 무렵 한경직은 신의주 제2교회의 김기범 장로로부터
교역자 청빙을 받았습니다.
결국 한경직은 한 평생 목회의 길을 가기로 결심했다.
가난과 좌절 중에 있던 수 많은 평민들과 청년들의 힘과 소망이 되고자 하는 일념으로
목회의 길에 뛰어든 것이었다.
신의주 제2교회 부임 후 첫 예배의 소감을 한경직 목사는 이렇게 회고했습니다. "이 때 저는 평민의 한 사람으로 가난한 무리 중에 끼어 있다는 행복감으로 가득했습니다." 한경직 전도사는 심혈을 기울여 기도하고 설교하고 봉사하며 목회에 전념했다.
한경직은 행복했습니다.
1년 후 의산노회에서 목사 안수를 받았고 부임 후 2년 만에
건평 365평의 2층 붉은 벽돌 교회당 건물을 건축했다.
고아원 양로원도 세웠다.
가난한 사람들과 청년들이 모여들어 신도 수는 300에서 1,000으로 증가했다.
그러나 한경직 목사는 1937년경부터 일본의 신사참배와 동방요배 강요에 시달리다가 1938년에는 총회 총대로 평양 서문밖교회에서 열린 제27회 장로회 총회에 참석하여
신사참배결의에 참여하고 말았다.
교회로 돌아와서는 교회 차원의 신사참배나 동방요배에는 참여하지 않았고
이에 반대했다. 결국 한경직 목사는 오산학교 출신이라는 것과 미국 유학생이었다는 이유 등등으로 일본 경찰에 의해 1942년 신의주 제2교회에서 추방당하고 말았다.
교회를 사임한 한경직 목사는 1945년까지 보린원 원장으로 고아와 노인들을 돌보다가 1945년 10월 월남하여 그 해 12월 2일 월남 피난민들과 함께 서울 저동에서 베다니 전도교회를 설립했다. 이듬 해인 1946년 11월 영락교회로 교회의 이름을 바꾸고 영락교회의 목회자로 아니 한국교회의 목자로 한 평생을 바치다가 2000년 4월 19일 고난절에 주님의 부르심을 받아 98세를 살고 천국으로 옮겨졌다.
그러면 이제부터 약함과 착함과 겸손의 목회자 한경직 목사의 인간의 면모와
목회자의 면모를 살펴본다.
첫째, 인간 한경직은 고난과 약함의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젊은 시절부터 한 평생 수 많은 고난을 겪으면서 인간의 연약함과 무력함을 절감한 분이었고 또 자기 자신이 얼마나 연약하고 무력한 존재임을 체험한 분이었다.
그는 두려워하고 절망했으며 때로는 넘어지기도 했다.
그러나 그의 연약함이 오히려 그를 진정한 목회자로 만든 비결이었는지도 모른다.
한경직이 17세 되던 1919년 평양 영성소학교 교사로 봉직하고 있던 때
일본 고등계 형사들의 혹독한 고문을 받은 일이 있었다.
그는 고문 당한 후 두려움과 무서움에 떨었다고 고백했다.
자신의 무력함을 비관하기도 했다.
한경직이 27세 되던 1929년 프린스턴 신학교를 졸업하고
예일 대학 박사과정에 진학할 준비를 하고 있었는데
그 때 폐결핵 3기라는 진단을 받고 그는 또 한번 인간의 연약함과 무력함을 절감했다.
진학은 물론 인생 자체를 포기해야 할 지도 모른다는 절망감과 위기감을 느꼈다.
그는 자신의 의지도 건강도 아무 것도 믿을 것이 되지 못한다는 절망감을 경험한 것이다. 한경직이 1932년 귀국 후 모든 좌절을 딛고 1933년부터 목회의 길로 매진하기로 헌신했으나 1938년 일제의 강요에 무릎을 꿇는 연약함을 드러내기도 했다.
한경직 목사는 일본 경찰의 강요에 의해 1942년 신의주 제2교회를 사임하고 3년 동안 보린원 원장으로 봉사하다가 1945년 8월 15일 해방을 맞았다.
그런데 해방 후 얼마 안되어 평북지사를 맡았던 일본인이 그를 찾아왔다.
일본인들이 무사히 본국으로 돌아갈 수 있도록 한 목사가 치안을 맡아 달라는 것이었다. 한경직 목사는 일본인의 딱한 처지를 이해하고 그들을 도와주기로 했다.
결국 일본인의 요청을 수락하고 평안북도 치안의 책임자가 되었다.
앞으로도 한경직 목사는 누구의 요청도 거절하지 못하는
"연약한" 사람 또는 선량한 사람으로 한 평생을 살게 된다.
최창근 장로가 한경직 목사의 유일한 약점은 어떤 사람의 요청도 거절하지 못하는 것이라고 지적했는데 한경직 목사는 평생 이와 같은 "약점"을 지니고 살게 되었다.
한경직 목사가 자신의 약함을 드러낸 적이 여러 번 있었는데
그것은 군사독재정권 시절이었다.
그는 군사독재정권을 비판하고 반대하는 시위나 서명을 반대했을 뿐 아니라
군사독재 지도자들을 위해서 기도하며 후원까지 했다.
그것을 그의 약함이라고 평할 수도 있지만 그것은 그의 평소의 나라 사랑과 반공주의와
복음전파의 소신과 입장에서 비롯한 것이었다고 하겠다.
한경직 목사는 그의 생애의 마지막 2년 동안 노환으로 많은 고난과 약함을 체험했습니다. 아니 한 평생 폐 하나를 도려낸 장애인으로 약하게 살았다.
한경직 목사는 어느 대담에서 괴로운 일이 무엇이었느냐는 질문에
"일생을 연약한 몸으로 살아온 것이 제일 괴로움이었지요." 라고 대답한 일이 있습니다.
마지막 2년 동안 두 다리를 수술하는 고통도 겪었고 말을 잘 하지 못하는 답답함도 당했습니다. 특히 마지막 6개월 동안은 가래가 너무 끓어서 목에 구멍을 뚫고 지내는 극심한 괴로움도 겪었습니다. 그는 나의 손을 붙잡고 "늙는 것이 재미 없어!" 라고 그의 노약의 서글픈 심정을 토로하기도 했다. 그는 한 평생 약하고 아프게 살았다.
그는 몸뿐 아니라 인간 자체는 약한 존재인 것을 실감하고 고백하면서 살았다.
그래서 그는 설교하면서
"우리 사람은 약합니다" "우리는 파산된 존재입니다" 란
말을 자주 했다.
그는 고난과 약함의 사람으로 살다가 고난과 약함의 사람으로 죽었다.
평안하게 죽는 것이 복일 수도 있으나 진정한 목자와 제사장의 죽음은 그런 죽음이 아닙니다. 강한 사람들이 너무 많은 이 시대에 우리는 인간 한경직에게서 약한 사람을 본다.
인간 한경직은 고난과 약함의 사람이었습니다.
둘째, 인간 한경직은 참회와 회개의 사람이었다.
그는 평생 죄를 고백하는 참회와 회개의 사람으로 살았다.
자기의 죄는 물론 다른 사람들의 죄까지 짊어지고 고백하는 참회자로 살았다.
하나님 앞에서 그리고 사람들 앞에서 항상 자기의 죄와 허물을 고백했다.
한경직 목사는 제사장처럼 자기의 죄와 백성들의 죄를 위하여
속죄의 제사를 드리는 참회와 회개의 삶을 살았다.
한경직이 27세 되던 1929년 프린스턴 신학교를 졸업하고 예일 대학 박사과정에 진학할 준비를 하고 있었는데 그 때 폐결핵 3기라는 진단을 받고 그는 슬픔과 절망 중에서 자기의 죄를 회개하며 하나님께 처절한 기도를 드렸다.
한경직 목사는 월남 후 자기의 죄와 민족의 죄를 자복하는 회개의 삶을 살면서
자복과 회개의 메시지를 자주 전했다.
1955년 11월 6일에 행한 "사죄의 축복"이란 제목의 설교에서는
사죄의 축복이 가장 큰 축복인데 그것은 안수기도를 받으므로 주어지는 것도 아니고
자선사업이나 도덕적 생활을 해서 주어지는 것도 아니고 오직 온전히 죄를 회개하고
내 죄를 대속하신 크리스토의 십자가를 믿음으로 주어진다고 역설했다.
1956년 1월 8일에 행한 "회개와 보상"이란 제목의 설교에서는 이렇게 설교했다.
"우리 개인이나 가정, 교회, 우리 전 민족이 새 해에 축복 받는 길은 오직 하나인데
회개의 좁은 길입니다. 참 회개는 후회만이 아닙니다.
죄의 자리에서 떠나서 돌아서서 하나님께로 나아오는 것입니다."
한경직 목사는 사람들이 자기를 높일 때마다
자기는 부족한 죄인임을 거듭해서 고백했다.
1973년 1월 2일 한경직 목사가 원로목사로 추대되던 날
백낙준 박사, 홍현설 박사 등의 찬사에도 불구하고 한경직 목사는 이렇게 겸손하게 자기의 부족함을 고백하며 사과했다.
"은퇴하는 저에게 분에 넘친 말씀을 해 주셨는데, 영락교회 목사로서의 책임을 다하지 못하여 하나님께 부끄러울 따름입니다.
지금 저는 여러분들 앞에 사과해야 할 일들이 있습니다.
교인들이 어려움을 당할 때 그들의 어려움에 동참하지 못하였고,
[양 떼를 두고 도망쳤고] 그분들을 제대로 만나지 못한 때가 많았습니다."
한경직 목사가 한국교회 앞에서 공적으로 자기의 죄를 고백한 것은
1992년 템플턴상 수상을 축하하는 모임에서였다.
1992년 6월 18일 오후 3시 여의도 63빌딩에서 축하예배를 드리는 자리에서
그는 인사말을 하면서 이렇게 고백했다.
"먼저 나는 죄인임을 고백합니다. 나는 신사참배를 했습니다.
이런 죄인을 하나님이 사랑하고 축복해주셔서 한국교회를 위해 일하도록 이 상을 주셨습니다." 수 많은 사람들이 한경직 목사의 죄를 고백하는 참회의 모습에 충격과 진한 감동을 받았습니다. 옥한흠 목사는 "개인적으로 목사님에 대해 평생 잊을 수 없는 강렬한 인상은 템플턴상 수상을 축하하는 모임에서 '나는 죄인임을 고백합니다' 라고 인사말을 할 때였습니다." 라고 고백했습니다. 이선미 양은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신사참배 했던 죄인아라는 목사님의 고백 속에서 전 그만 참지 못하고 눈물을 흘렸어요." 이 시대는 의인은 많지만 죄인은 찾아보기 힘든 시대입니다. 죄인이 보고 싶은 이 시대에 우리는 인간 한경직에게서 죄인을 봅다. 인간 한경직은 죄를 고백하는 참회와 회개의 사람이었습니다.
셋째, 인간 한경직은 기도와 눈물의 사람이었습니다.
한경직 목사는 한 평생을 기도로 시작해서 기도로 마친 기도와 눈물의 사람이었다.
그는 평생 울었다.
그의 기도는 자신과 민족의 고난과 약함과 아픔과 절망 중에서 드려진
진솔하고 처절한 눈물의 기도였다.
그가 깊은 기도에 빠지게 된 것은 대학교 3학년 때였습니다.
1924년 여름 황해도 구미포 해변을 혼자 걷고 있는데
어디선 가 세미하고 강권적인 음성이 들려왔습니다.
"네 길은 이것이다. 하나님께 완전히 몸 바쳐 이 땅에 복음을 전파해야 한다.
이 백성이 올바른 사람들이 되어야 나라도 바르게 된다" 라는 음성이었다.
그는 백사장에서 무릎을 꿇고 헌신의 기도를 드렸다.
결국 한경직은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아 목회자가 되기 위해
미국 프린스턴 신학교에서 3년간 신학을 공부했는데
이때 한경직은 기도와 묵상에 많은 시간을 보냈다.
학교 근처에 무명 병사들의 묘지가 있었는데 소나무들이 울창한 조용한 묘지에서 한경직은 많은 시간을 기도와 묵상으로 보냈다.
한경직이 보다 처절한 기도에 빠진 것은 그가 프린스턴 신학교를 졸업하고
예일 대학 박사과정에 진학할 준비를 하고 있던 때인 1929년 폐결핵 3기라는 진단을 받았을 때였다. 그 때 한경직은 하나님만 바라보며 처절한 기도를 드렸다.
단 2,3년만이라도 건강을 회복시켜 주시기를 그래서 겨레를 위해서 봉사할 수 있게 해 주시기를 간절히 기도했다.
3,4개월이 지나서 건강이 호전되었고 2년 후에는 병원에서 완전히 퇴원할 수 있었다.
동료와 교수들이 예일 대학에 진학하기를 권했으나
한경직은 그것을 포기하고 나라와 겨레를 섬기기 위해 미국을 떠나 조국으로 돌아왔다.
하나님께 드린 기도의 서약을 그대로 이행하기 위해서였다.
한경직 목사의 비움과 버림과 청빈의 삶은 여기서부터 시작되었는데
그런 비움의 삶은 그의 처절한 기도로부터 비롯한 것이었다.
한경직 목사가 1942년 신의주 제2교회에서 추방당한 후
1945년까지 보린원 원장으로 지내면서
한 편으로는 고아와 노인들을 돌보고 한 편으로는 명상과 기도의 시간을 가지곤 했다.
그는 북쪽을 바라보며 신의주 제2교회와 교인들을 위해 기도하기를 멈추지 않았다.
그러던 어느날이었습니다. 역시 그 언덕에 올라가 기도하고 있는데,
갑자기 이상한 환상이 보였습니다.
언덕 밑으로 삼천리 강산이 한눈에 보이는데 흰 돌로 지은 교회당이 그 강산을 꽉 메우고 있는 게 아닌가! 그는 소스라치며 눈을 떴습니다.
순간적으로 '일본은 틀림없이 망하고 조국은 분명히 독립한다
독립된 조국은 크리스토의 터 위에 세워져야 한다'는 생각이 마음을 스쳤다."
이 기도와 환상은 후에 흰 돌로 지어진 영락교회 교회당 건축으로 실현되었다.
한경직 목사는 한 평생 눈물을 흘리면서 울었다.
자기의 허물과 함께 민족의 비극을 가슴 아파했기 때문이었다.
한경직 목사의 남한산성에서의 마지막 26년 동안의 삶도
기도와 눈물과 묵상으로 이어진 삶이었다.
한경직 목사는 매일 새벽 5시에 일어나 30여분 동안 산책과 체조를 한 다음 5시 30분부터 기도와 예배의 시간을 가졌고 때때로 언덕 길을 올라가 조그만 바위 돌 위에 앉아서 교회와 나라와 민족을 위해서 일본의 복음화와 남북의 통일을 위해서 눈물로 기도하며 하루하루를 살았다.
한 목사님은 남한산성에서 나의 손을 꼭 쥐고 순교하신 나의 아버지(김관주 목사)에 대해서 말씀하시다가는 언제나 목이 메어 눈물을 흘리시곤 했습니다.
눈물이 메마른 이 시대에 우리는 인간 한경직에게서 눈물의 사람을 봅니다.
넷째, 목회자 한경직은 설교와 전도를 쉬지 않은 복음전파의 목회자였다.
그는 설교하기 위해서 그리고 복음을 전파하기 위해서 태어난 사람처럼
한 평생 설교하며 복음을 전파한 말씀과 복음의 목회자다.
한경직 목사가 이렇게 회고한 일이 있다.
"목사로서 중요한 것은 설교, 심방, 교회운영이다.
설교를 통해 전도하고 양을 먹이어야 한다."
그리고 설교의 목적은 전도라고 지적했다.
"우리가 어떤 설교를 하든지 꼭 몇 마디라도 전도 설교를 해서 그들을 건져내야 한다."
한경직 목사는 교회를 시작할 때 전도를 교회의 첫째 사명으로 삼으며
교회 이름을 아예 베다니 전도교회라고 불렀다.
한경직 목사는 목회 시초부터 설교를 통한 복음전파에 주력했다.
한경직 목사가 그의 목회 사역에 있어서 복음 전파와 함께 교육과 봉사에 주력한 것은
첫째는 나라와 민족을 살리는 길이 바로 그 길이라는 확신에서 비롯했고
둘째는 그의 성서적이고 복음주의적인 교회관에서 비롯했다.
한경직 목사는 성경적이고 복음적이면서도 시대적인 진리의 말씀을 선포하는 일에
한 평생을 바쳤다.
한경직 목사가 설정한 영락교회 네 가지 지도방침 중
첫째가 "성서중심적 복음신앙" 이었다.
"복음주의 신앙이라 함은 성경중심, 크리스토 중심, 십자가와 부활 중심의 신앙을 의미한다. 그리고 복음주의라 함은 소위 자유주의 노선과는 대립되는 말이다.
독선적 근본주의적 보수정통의 유혹에 기울이지도 안하고 오만한 자유주의의 흐름에도 한눈 팔지 않는다."
이제 한경직 목사의 목회의 가장 중심적인 요소인 설교의 특징을 살펴본다.
마치 연약한 체구의 암브로스의 설교가 어거스틴에게 놀라운 영적 감화를 미쳤던 것처럼 병약해 보이는 한경직 목사의 설교가 영락교회 성도들에게 놀라운 감화를 끼쳤는데
그 비결은 그의 설교에 '영적 카리스마'가 있었고
그의 설교에 '대중성' '신행일치' '인간사랑' '실존성' 이 있었디 때문이라고 분석한다.
그의 설교는 성경적이고 복음적이며 상황적인데 평이하고 경건하고 은혜로웠다.
강신명 목사는 한경직 목사의 설교가
그의 인격과 경건성에서 흘러나오는 설교이기 때문에 은혜가 된다고 지적했다.
이종성 박사는 한경직 목사의 설교를 평범하면서도 사람들의 마음을 찔러주는 설교라고 지적했다.
정진경 목사는 한경직 목사의 설교의 특징을 묘사하면서 '텍스트'와 '콘텍스트'의 조화라고 지적했습니다. 조향록 목사는 한경직 목사의 설교가 친근감과 감동이 있는 것은
그의 설교가 말이 설교하는 설교가 아니고 겸손과 기도와 인격이 설교하는 설교이기 때문이라고 정확하게 분석했다.
한경직 목사의 설교가 복음적이기보다는 윤리적이라고 평하는 사람도 간혹 있다.
이에 대해 기독교 철학자요 윤리학자인 손봉호 교수는 이렇게 평했다.
"한경직 목사의 설교에서 매우 두드러진 특징 가운데 하나는 윤리적 설교가 매우 드물고, 윤리적인 문제를 다룰 때라도 그 자체의 중요성보다는
하나님에 대한 사랑과 예수 크리스토에 대한 믿음의 일부 혹은 그 당연한 결과로 취급한다는 것이다. 올바른 신앙만 강조하면 그만이지 윤리를 따로 강조할 필요가 없다는 것이 그의 입장이었던 것 같다." 한경직 목사가 설교 중심적인 목회자였지만 그의 설교와 목회는 언제나 전도 지향적이었다.
한경직 목사의 전도에 대한 열정은 아세아 복음화운동과 세계복음화 운동으로 이어졌다. 자기 세력확장과 자기 왕국건설에 여념이 없는 경쟁시대에
나라 사랑과 하나님 사랑의 일념에서 오직 하나님의 말씀과 복음만을 전하기 위해서
한 평생을 바친 복음전파의 목회자를 우리는 한경직 목사에게서 발견한다.
한경직 목사는 하나님의 말씀과 복음을 전하는 일에
전 생애를 건 복음 전파의 목회자였다.
다섯째, 목회자 한경직은 돌봄을 쉬지 않는 사랑과 봉사의 목회자였습니다.
그에게 있어서 봉사는 복음의 생활화요 신학의 실천이었다.
그것은 나라 사랑과 하나님 사랑의 삶의 방식이었다.
그는 가난하고 약한 자 그리고 원수들에게까지 사랑을 베풀며 사는 것이 인간의 가장 가치 있고 보람된 삶이라고 강조하며 그렇게 살았다.
한경직 목사는 1933년 신의주 제2교회에서 목회를 시작하면서부터 가난하고 약한 자들에 대한 특별한 관심을 나타내 보였다.
그는 1936년경 고아원을 설립하여 고아들을 돌보았다.
1939년에는 남 신의주에 땅을 얻어 벽돌집을 신축하여 고아들과 노인들이 함께 기거할 수 있는 공동체적 복지 시설인 '보린원'을 만들었다.
한경직 목사가 1945년 10월 월남 후 12월 2일 서울 저동에 베다니전도교회를 설립하고
월남하는 피난민들에게 위로와 소망의 메시지를 전하며 동시에 양식과 거처할 숙소를 마련하는 일을 했다.
1946년 11월 베다니교회는 영락교회로 이름을 바꾸었는데 영락교회는 피난민들과 실향민들의 안식처가 되었고 새로운 삶의 출발지가 되었다.
한경직 목사는 영락교회를 시작하면서 교회의 3대 목표 중의 하나를 봉사로 정하고 봉사에 지대한 관심을 기울였다. 한경직 목사는 교회창립 1주년을 맞은 1946년 12월 1일 주일 "교회란 무엇인가?"라는 제목의 설교를 하면서 교회의 중요한 사명이 민중들을 인도하고 돌보는 사회 봉사임을 밝혔다.
한경직 목사는 이미 그 해(1946년) 3월 16일 주일 "상부상조의 정신"이란 제목의 설교를 하면서 교회의 중요한 사명이 가난한자, 병든 자, 나그네 등을 돕는 상부상조임을 강조하며 호소했고 그리고 그것을 실천했습니다. 한경직 목사의 봉사의 목회는 그의 성서적인 교회관에서 비롯했습니다. 그는 교회에 대해서 설교할 때마다 교제와 봉사를 항상 강조했습니다. 한경직 목사는 1950년 6월 서울을 떠나 피난 길을 가면서도 고난 당하는 사람들을 돌보는 일을 잊지 않았습니다. 대전에서는 '기독교구국회'를 조직하여 피난민을 구호하고 국군을 위문하는 일을 했습니다. 한경직 목사는 한국을 돕고자 부산에 와 있던 밥 피얼스 박사와 함께 기도회를 개최하고 피난민들을 돕는 일을 하다가 피얼스 박사로 하여금 미국에 돌아가서 월드 비젼을 창시하여 미국인들로 하여금 한국의 피난민들을 돕게 했습니다. 한경직 목사는 후에 가난하고 병들고 약한 자들을 돌보기 위해서 영락 보린원을 비롯해서 모자원, 경로원, 노인요양소, 농아원, 장애아원, 어린이집, 재가노인복지 상담소 등을 세웠습니다. 그리고 1990년 1월 17일부터는 "사랑의 쌀 나누기 운동"을 폭 넓게 펴나갔습니다. 영락교회의 이창로 장로는 목회자 한경직의 특징중의 하나는 '긍휼'이라고 지적했습니다. 목회자 한경직은 긍휼의 사람, 사랑의 사람, 봉사의 사람으로 우리에게 오래오래 남아 있습니다. 그는 한국의 프랜시스요 한국의 슈바이쳐요 한국의 테레사로 우리에게 영원히 남아 있습니다. 한경직 목사의 봉사는 이기적인 봉사도 과시적인 봉사도 아니었습니다. 이타적인 봉사였고 드러내지 않는 숨은 봉사였습니다. 주님 사랑과 동족 사랑에서 우러나온 순수한 봉사였습니다. 자기 과시와 자기 명성을 위한 꽹과리 소리가 요란한 선전시대에 이름도 소리도 없이 가난하고 약한 사람들을 돕기 위해 자신의 소유와 자신을 모두 허비한 사랑과 봉사의 목회자를 우리는 한경직 목사에게서 발견합니다.
여섯째, 목회자 한경직은 화평을 추구한 협력의 목회자였다.
한경직 목사는 교회 일을 보면서 제일 애쓴 일이 무엇이냐는 질문에
그것은 화평이라고 대답한 일이 있다.
한경직 목사는 교회 안에서 온유와 겸손을 바탕으로 화평을 이루어간 화평과 협력의 목회자였습니다. 최창근 장로는 한경직 목사의 목회의 첫째 특징을 화평의 목회라고 지적했고 이종성 박사는 한경직 목사의 목회의 특징 세 가지 중의 하나가 협력의 목회라고 지적했습니다. 이와 같은 화평의 목회는 한경직 목사의 교회관에서 비롯했습니다. "교회는 그리스도를 머리로 하는 한 몸이다. 그리스도가 분열될 수 없는 한 교회의 통일성과 공동성이 파괴될 수 없다. 사업보다도 인화가 더 중요하다. 다양의 극치 속에서도 조화를 찾아 총화의 아름다움을 드높이는 것이 교회의 참 모습이다." 한경직 목사는 교회의 안과 밖에서 화평을 추구한 협력의 목회자였습니다. 자기의 신앙은 보수이지만 교회론에서는 에큐메니칼하다고 지적하곤 했습니다. "에큐메니칼 정신이라 함은 협력, 협동, 동참, 참여의 정신을 의미한다. 백화만발이란 말로 표현하는 꽃의 세계를 볼 때 그 다양성과 통일성은 실로 놀라 마지 않는다." 한경직 목사는 영락교회의 목회뿐 아니라 한국장로교회와 한국교회의 전반적인 목회에 있어서도 화평과 협력과 연합을 추구해 나갔다.
한숭홍 교수는 한경직 목사의 포용의 자세를 이렇게 기술 하였다.
"그는 배타주의를 주장하는 옹졸한 사람도 분리주의를 역설하는 과격한 사람도 아니다.
그는 분명히 그의 신학사상이 복음주의적 신앙과 에큐메니칼 신학에 근거하고 있음을 밝히고 있지만, 그와 신학사상이 다른 사람들도 모두 한 형제로 포용하는 포괄적인 사상의 주인공이다.” 한경직 목사는 한 걸음 더 나아가 교파의 다양성을 인정하는 조화와 통일을 추구했습니다. 즉 한국교회 안에서 복음적인 에큐메니칼 운동을 폭 넓게 펴 나아갔습니다.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는 누구나 손을 잡고 모두를 협력하며 격려했습니다. "비록 교파는 다르지만 교파를 초월해서 온 교회가 다 같이 당면하는 일 즉 국가 민족 사회를 위한 봉사나 복음 전파에 있어서 서로 협력할 줄 알아야 한다." 그는 기독교연합회 회장(1955-1956), 한국기독교 100주년 기념사업회 총재(1982-1984), 한국기독교총연합회의 주역 등으로 한국교회의 초 교파적 연합운동에 주도적 역할을 했습니다. 특히 한경직 목사가 한국교회 100주년을 맞을 때 모든 교회, 모든 단체를 하나로 통합, 결집시키는 일을 한 것은 교회사적으로 괄목할만한 일이었습니다. 한경직 목사의 화평의 목회관은 그의 정치관과 통일관에도 그대로 나타났습니다. 그는 정교분리의 입장을 표방하면서도 교회는 정치에 영향을 미쳐야 하는데 그 방법은 투쟁적 방식이 아닌 사랑과 평화의 방식이어야 한다고 했습니다. 한경직 목사는 또한 남북의 통일은 반드시 이루어져야 하는데 그 통일도 무력통일이 아닌 자유 통일이고 평화 통일이어야 한다고 강조했습니다. 한경직 목사의 화평의 목회가 그의 성서적인 교회관에서 비롯한 것이 사실이지만 그가 예수 닮은 온유와 겸손의 인격을 지니지 못했다면 아무 열매도 맺지 못했을 것입니다. 그는 온유와 겸손을 몸에 지니고 살았습니다. 모두 자기가 옳다고 주장하고 남을 비판하고 정죄하며 주님의 몸 된 교회를 갈기갈기 찢어놓고 민족을 동서 남북으로 갈라놓은 갈등과 분열이 최고조에 달한 이 시대에 우리는 온유와 겸손과 인내로 주님의 몸 된 교회를 하나로 치유해간 그리고 민족의 평화 통일을 염원한 화평과 박애의 목회자를 한경직 목사에게서 발견합니다.
일곱째, 목회자 한경직은 민족과 세계를 품은 역사의식의 목회자였다.
한경직 목사는 역사의식과 역사적 안목을 가지고 산 분이었다.
아마 민족과 세계를 바라보는 역사의식은
오산학교의 이승훈 선생과 조만식 선생으로부터 배웠을 것이고 후에는 프린스턴 신학교에서 폭 넓게 연마되었을 것이다.
그래서 그는 예일대학 박사과정에서 교회사를 연구할 계획을 세우고 있었다.
한경직 목사는 귀국 후 조선신학교에서 교회사를 강의했다.
그리고 민족의 고난의 역사를 몸으로 살아가면서 역사의식을 스스로 터득하며 역사의식을 가지고 한 평생을 살았다. 한경직 목사가 남다르게 폭 넓은 사고와 비전을 가지게 된 것은 그리고 세계를 그의 활동 무대로 삼은 것은 그의 비범한 인격과 함께 그가 터득한 역사의식과 역사적 안목 때문이었을 것이다. 특히 그는 다양성 가운데서 조화를 이루는 역사적 안목의 비결을 지녔습니다. 한경직 목사는 평생 한국 나라와 한국교회를 사랑하고 봉사한 분이었지만 동시에 민족주의나 국가주의를 넘어서서 세계를 품고 사랑하며 봉사한 분이었습니다. 한경직 목사는 1957년 3월 3일에 행한 "성서적 애국심"이란 제목의 설교에서 '예수님도 애국자이십니다'라고 말하여 나라 사랑을 강조하면서도 성서적 애국심이란 민족주의나 국가주의를 넘어서서 하나님과 그의 나라를 우선적으로 구하는 것이라고 강조했습니다. "한 가지 우리가 조심할 것이 있습니다. 성서적 애국심은 혹 우리 사회에서 가끔 듣는 민족지상주의나 국가지상주의는 절대로 아닙니다. 성서가 가르치는 애국심은 민족을 우상화해서는 안 된다고 말합니다.” 한경직 목사는 이기주의와 지역주의에 사로잡혀 있는 한국교회를 향해 인류의 연대성을 강조했습니다. "넓은 의미에서 하나님은 만민의 아버지시오, 사해는 다 동포이며 형제입니다. 연대성이라고 하는 말은 서로 연한 것같이 우리 사람은 각자 나뉘어 있지 않고 다 서로 연결되어 헤어질래야 헤어질 수 없는 연대성을 가지고 있다고 하는 말입니다. 사람은 사회적 동물로서 혼자 살 수는 없습니다. 사람은 자연히 사회를 이루어 살게 되어 있는 까닭에 사회의 한 분자가 되었고 사회의 한 분자가 된 다음에는 그 사회에서 일어나는 사실에 대하여 공동적인 책임을 자연히 지게 됩니다.” 한경직 목사는 신앙을 자기 개인의 울타리 안에 가두거나 목회를 개 교회의 울타리 안에 가두어 놓지 않고 이웃과 사회와 민족과 세계의 울타리로 뻗어나가게 했습니다. 그는 폭 넓은 시각을 가지고 폭 넓은 연계를 이루며 살았습니다. 따라서 그의 삶과 활동의 범위는 넓고 다양했습니다. 그의 삶과 사역은 전도와 교육과 봉사는 물론 사회복지, 치안유지, 정당활동, UN 활동, 세계선교와 구호활동 등 다양한 영역에 미쳤습니다. 그는 한국 사람과 한국교회가 지니지 못했던 역사의식과 역사적 안목을 지니고 폭 넓게 살았습니다.
끝으로, 인간 한경직과 목회자 한경직은
삶이 깨끗한 청빈의 사람이요 청빈의 목회자였다.
인간 한경직과 목회자 한경직의 삶과 사역의 면모를 살펴보았다.
결국 그분은 예수처럼 살아간 사람이었고 성 프랜시스처럼 살아간 사람 이었다.
예수는 가난한 자가 복이 있다고 말씀하시고 친히 가난하게 사셨고
성 프랜시스도 "나는 가난이란 여인과 결혼했다"고 선언하고 친히 가난하게 살았는데,
한경직 목사도 가난한 사람들을 돌보면서 평생 깨끗하고 가난하게 살았다.
한경직 목사는 1982년 8월 11일 이렇게 말한 적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언제 저를 부르실지 모르지만 빈손 들고 왔다가 빈손 들고 갈 인생입니다."
한경직 목사는 본인의 말 그대로 빈손 들고 왔다가 빈손 들고 간 깨끗한 청빈의 사람이다.
한경직 목사가 2000년 4월 19일 오후 1시15분 하나님의 부름을 받아 우리 곁을 떠났을 때 세상은 입을 모아 그를 가리켜 "청빈의 사람"이었다고 말하며 그를 높이 기렸다.
명예욕과 물욕과 정욕에 사로잡혀 살아가는 부끄러운 오늘의 시대가 가장 보고 싶어한 사람의 모습이었는지 모릅니다.
그래서 청빈과 봉사의 사람 장기려 박사가 세상을 떠났을 때 "작은 예수"가 우리 곁을 떠났다고 아쉬워했듯이 청빈과 봉사의 사람 한경직 목사가 세상을 떠났을 때에도 "작은 예수"가 우리 곁을 떠났다고 모두들 아쉬워 했습니다. 「신앙계」는 한경직 목사를 기리며 그를 가리켜 "3무의 삶"을 실천한 분이라고 지적했습니다. 즉 "통장, 집, 재산이 없는 3무의 삶을 실천했다"는 것이었습니다. 청빈이 그분의 삶의 전부는 아니었지만 그분의 삶의 중요한 부분이었습니다.
한경직 목사는 분명히 "한국교회에 내리신 하나님의 귀한 선물"(손봉호 교수)이었고 "20세기 한국이 낳은 세계적인 성자"(정진경 목사)였습니다. 빌리 그래함 목사는 한경직 목사를 가리켜 "제가 가장 존경하고 사모하는 분"이라고 부르며 "20세기의 가장 위대한 목회자들 가운데 한 사람"이라고 극찬했다.
시인 고훈 목사는 한경직 목사를 기리며
"가난한 목자, 사랑의 목자, 작은 예수"라고 목이 메어 불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