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의 명시감상 에서는 특정시(特定詩)의 내용을 감상하기보다는 1940년대부터 근 20년간에 걸친 청마(靑馬) 유치환과(柳致環)과 정운(丁芸) 이영도(李永道)의 실로 세기적(世紀的)인 희대(稀代)의 사랑 이야기를 더듬어 거슬러 올라가 보고자 한다.
유치환의 호는 청마(靑馬). 청마는 1908년 통영(統營) 출생이다. 유명한 연극인 극작가 유치진(柳致眞:1905-1974)은 청마 유치환의 실형(實兄)이다. 청마는 통영보통학교 4학년을 마치고 일본으로 건너가 도요야마 중학교에 다니다 부친의 사업이 기울자 귀국하여 동래고보 5학년에 편입한다.
1928년 연희전문(延禧專門)을 중퇴하고 진명 유치원의 보모로 있던 권재순과 결혼한 이듬해 고향으로 내려와 정지용(鄭芝溶)의 시에 깊은 영향을 받아 본격적으로 시를 쓰기 시작한다.
청마 유치환은 고향 통영에서 같은 학교[통영여중]에서 알게 되어 사랑하게 된 이영도에게 사랑의 혼(魂)을 쏟아 붓는 수많은 편지를 띄운다. 늦게 찾아온 진정한 사랑을 불꽃의 혼으로 승화(昇華)시켜 시와 편지로 연민(憐憫)의 정(情)을 담아 사랑하는 사람에게 바친다. 따라서 여기 소개하는 유치환의 시,
< 행복>은 감수성(感受性)이 예민(銳敏)한 사춘기(思春期) 소녀로부터 황혼(黃昏)의 노년층(老年層)에 이르기까지 국민 모두에게 회자(膾炙)되고 애송(愛誦)되는 시이기도 하다.
"사랑은 받는 것보다 주는 것이 더욱 행복하다"는 말로 시작되는 이 시는 전체적으로 낭만적이고 감상적인 느낌을 주지만, 사랑을 주기보다 받기만을 원하는 요즘의 젊은이들에게 '참사랑'의 의미를 조용히 깨우쳐준다 하겠다.
'사랑은 받는 것보다 주는 것이 행복하다'는 깨달음 때문에 시적 화자는 행복한 느낌으로 우체국에 가서 사랑하는 이에게 편지를 쓴다. ‘에머랄드 빛 하늘‘ 이라든가 ‘환히 내다뵈는‘ 이라는 구절은 바로 이러한 화자(話者)의 행복한 심정을 대변해주는 것으로 볼 수 있다.
그가 그토록 많은 편지를 창문 앞에서 썼던 당시의 그 통영우체국은 고풍(古風)을 풍기던 옛집은 헐리고 지금은 산뜻하게 새 단장을 하여 옛 정취(情趣)를 찾아 볼 수는 없다. 여러 차례 이 우체국의 이름을
<청마 우체국>으로 고치자는 여론(輿論)이 비등(沸騰)하였으나 청마의 친일행각(親日行脚)의 시비(是非)로 아직까지 이름이 바뀌지 못하고 있다.
'통영문협(統營文協)'에서는 연전에도 유치환이 절절(切切)하게 편지를 썼던 "통영 우체국 (지금의 통영 중앙동 우체국)"을 유치환의 호를 딴 ‘청마 우체국’으로 바꾸자는 캠페인을 전개하고 나섰으며 또 주민들도 많은 내방객(來訪客)들이 이곳 ‘에메랄드 빛 하늘이 환히 내다뵈는 우체국 창문 앞에 와서’‘청마’를 떠올리지 않겠느냐는 취지(趣旨)에서 우체국 윗 층 일부를 ‘청마’를 기리는 공간으로 쓰면 좋겠다는 움직임도 있었다 한다.
본래 청마선생의 탄생 100주년이 되는 2008년도에 통영우체국 앞에 청마의 흉상(胸像)이 건립될 예정이라는 소문이 있었는데 최근 남종(문정일)이 직접 "통영우체국"에 전화로 확인해 보았다. 현재의 통영우체국"은 근년에 새로 세워진 우체국이고 청마(유치환)가 정운(이영도)에게 편지를 쓰던 우체국은 "통영중앙우체국"이라 하여 다시 그 우체국으로 전화를 걸어보니 그 우체국 앞에 청마의 시비(詩碑)가 세워졌는데 그 시비에는 위에 소개한 시 "행복"이 새겨져 있다고 한다.
그 우체국 담당자의 말로는 우체국으로서는 아무런 추진된 특별 계획이 없고 통영시 당국에서 마선생의 기념관 건립 등 몇 가지 부대적(附帶的)인 기념사업을 추진하였다고 한다. 아무튼 유치환 시인의 생애는 애달픈 사랑으로 대표되는 슬픈 현대사의 일부라 해야 할 것 같다.
당시 통영여중의 교사로 있던 이영도는 딸을 데리고 사는 독신녀였다. 이때부터 청마는 이영도를 향해 쉬지 않고 편지를 보내고, 숱한 연모(戀慕)의 시를 썼다. 청마가 이영도(정운)에게 보내는 편지는 마치 한편의 산문시(散文詩)와도 같이 서정(抒情)으로 가득차서 읽는 이로 하여금 가슴 뿌듯한 감동을 느끼게 한다.
이영도는 경상북도 청도(淸道) 출생으로 시조시인이며 호는 정운(丁芸)이다. 시조시인 이호우(李鎬雨) 의 여동생이기도 하다. 정운은 재색(才色)을 고루 갖춘 규수(閨秀)로 출가(出嫁)하여 딸 하나를 낳고 남편이 폐결핵으로 사망하여 홀로 되었다. 정운은 해방되던 해 가을 통영여중 국어 교사로 부임한다.
이렇게 같은 학교의 교사로 만나게 되자 정운은 청마의 첫눈에 깊은 물그림자로 자리 잡기 시작한다.
일제하에서 방황과 고독으로 지쳐 돌아와 남보다 피가 뜨거운 서른 여덟살의 청마는 스물아홉의 청상(靑孀) 정운을 만나면서 걷잡을 수 없는 사랑의 불길이 치솟는다. 당시 청마의 가누지 못하는 심경을 <그리움>이라는 시로 표현하고 있다.
파도야 어쩌란 말이냐.
파도야 어쩌란 말이냐.
임은 뭍같이 까딱 않는데
파도야 어쩌란 말이냐.
날 어쩌란 말이냐.
통영 앞바다에서 바위를 때리고 있는 청마의 시 '그리움'은 뭍[육지]같이 까딱도 않는 정운에게 바친 사랑의 절규였다. 유교적 가풍의 전통적 규범을 깨뜨릴 수 없는 정운이기에 마음의 빗장을 굳게 걸고 청마의 사랑이 들어설 틈을 주지 않았다. 청마는 1947년부터 거의 하루도 빠짐없이 편지를 보내기를 3년,
마침내 이영도의 마음도 움직여 이 두 사람의 '플라토닉'한 사랑은 시작됐으나 청마가 기혼자(旣婚者)여서 이들의 만남은 거북하고 안타깝기만 했다. 청마는 1967년 2월 교통사고로 사망할 때까지 편지를 계속 보냈고 이영도는 그 편지를 꼬박꼬박 보관해 두었다.
그러나 6·25전쟁 이전 것은 전쟁 때 불타 버리고 청마가 사망했을 때 남은 편지의 숫자만도 5,000여 통이었다. 시인 청마 유치환과 정운 이영도의 20여년에 걸친 '플라 닉'사랑은 그 시대의 젊은이들에게는 전설과 같은 것이며 사랑은 미완성(未完成)을 통해 비로소 완성(完成)되는 것이라는 아이러니를 남긴다.
<주간한국>이 이들의 '아프고도 애틋한 사랑이야기'를 <사랑했으므로 나는 행복하였네라>라는 제목으로 연재한 것이 계기가 되어 청마의 남아 있는 편지 5,000여 통 중에서 200통을 추려 단행본 (單行本)으로 엮게 되었다.
이 책의 제목은 청마의 시《행복(幸福)》중의 마지막 줄인 "…사랑했으므로 나는 진정 행복하였네라"에서 따온 것이었다. 이 청마의 사랑 편지가 책으로 나오자 그날로 서점들의 주문이 밀어닥쳤고 베스트셀러가 되어 무명이던 '중앙출판사'는 하루아침에 이름을 날리게 되었다.
시인(유치환)은 살아 있는 동안에 많은 여인들을 연모(戀慕)했고, 그 쉬지 않는 연모로부터 시를 우물에서 물을 긷듯이 길어냈다. 청마는 어느 글에선가 "나의 생애에 있어서 애정의 대상이 그 후 몇 번 바뀌었습니다.
이 같은 절도(節度) 없는 애정의 방황(彷徨)은 나의 커다란 허물이 아닐 수 없습니다."라고 자성(自省)의 술회(述懷)를 한 일이 있기도 한데 여인들이란 시인에게 '항상 얻지 못할 영혼의 어떤 갈구의 응답과도 같은 존재'라고 할 수도 있을 듯하다.
흔히 '나의 이야기'는 <로맨스>이고, '남의 이야기'는 <불륜(不倫)>이라지만, 이 두 사람의 사랑은 '불륜'이라 이름 하기엔 '너무 아름답다' 하지 않을 수 없다. 이루지 못할 사랑인 줄 알면서도 20년 간 지켜간 그들의 사랑은 '불륜'이라 치부(置簿)하기엔 진정한 사랑과 고통이 있었음을 독자들은 알기 때문이다.
이영도의 경우도 뭇 여인들의 부러움을 받았던 것이 사실이다. 청마가 유부남이요, 자신은 딸을 둔 미망인이라는 이유로 마음의 문을 열지 않았지만 청마는 혼자서 변함없는 사랑을 보냈던 것이다.
흔히 이별의 원인은 자존심 때문인데 이 두 사람의 진정한 사랑엔 자존심이 살아있지 않음을 보게 된다. 비록 일방적이었지만 변함없는 사랑을 보여주는 청마가 곁에 있는 이영도가 혹자에게는 부러운 존재일 수가 있을 것이다.
이영도가 있었기에 바위처럼 꿋꿋하기만 했던 청마도 애련(哀戀)의 글을 쓸 수가 있었으리라. 결과적으로 이영도는 청마의 시세계(詩世界)를 넓혀주었다. 많은 사람들은 자기 자신에게 매일 연서(戀書)를 보내 줄 사람을 만나고 싶어 한다. 변함없이 사랑을 보여줄 수 있는 사람을 만나고 싶어 한다. 세간에서 참 아름다운 숭고한 사랑이라고 이름해 주는 그런 사랑을 하고 싶기 때문일 것이다.
한 가지 놀라운 사실은 청마의 부인이 남편의 행동을 "예술혼(藝術魂)에 대한 갈증(渴症)"으로 이해하고 이영도시인을 초대하여 세 분이서 함께 식사했다는 이야기도 전하고 있다. 청마에게는 이영도에 대한 연모(戀慕)가 자신의 필연적 선택일 수 있다. 하지만 청마의 부인이 이것을 용납했다는 것은 지금의 기준으론 잘 이해하기 힘들다.
이러한 상황의 이해를 위해서는 여성들의 이혼과 이혼 후 생활이 힘들었던 당시의 시대적 분위기도 감안(勘案)해야 할 것이다. 어쨌든 조강지처(糟糠之妻)를 두고서 다른 여인에게 20년 가까운 세월동안이나 연서(戀書)를 날려 보냈던 것은 청마의 선택이었고 그런 청마를 떠나보내지 않고 끌어안아 주었던 것은 청마 부인의 선택이었다.
첫댓글 청마에게는 예술로도 결코 풀 수 없었던 그 안의 허공이 있었던 게 아닌가 여겨집니다. 이영도는 그의 예술혼을 불태운 일부분이겠지요. 그녀 말고도 수많은 여인들이 편지의 대상이었던 것을 보면.. 인간은 누구에게나 허공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리스도를 영접하여 그분이 내주하게 되면 비로소 허공이 사라지지요.
청마가 마음의 병이 들어도 단단히 들었던것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