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산군의 旌閭(孝行)이야기
32. 禮山 효자 전근금田斤金의 정려(효자비)
전근금田斤金(1691~1769은 예산군 대흥의 미곡리에서 태어난 선비이다.
전금금의 효자비 비석은 예산군 광시면 동서로 25(미곡리 210-2)입구의 마을버스정류장 오른쪽에있다.
고려가 망하자 불사이군의 신조를 지키며 그는 예산군 광시 초야에 묻혀 살았다. 선비의 후손이라 학식은 높았다. 어려서부터 소를 키우며 농사일을 열심히 하였다. 아버지가 병석에 눕고 말았다. 약을 써도 차도가 없다가 사망했다. 그 후 어머니 역시 같은 병으로 고생하여 전근금은 밤마다 정성껏 기도를 하였다. 하늘에서 노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 어머니 병환은 보통 약으로는 어림이 없다. 어머니 병환은 꼭 고치고 싶으면 한 가지 약이 있다. 너의 피가 어머니 몸에 흐르게 되면 효험效驗을 보아 좋아질 것이리라!”
말을 들고는 이것은 하늘에서 나에게 준 계시라고 그는 생각하고는 급히 집으로 달려가 손가락을 잘라서 피가 나오게 하여 그 피를 어머니 입에 흘려 먹이자 신기하게도 눈이 훤해지면서 기운을 차렸다. 그는 한참 있다가 또 한 손가락을 잘랐다. 피를 다시 어머니에게 드렸더니 완쾌하였다.
그는 부모의 삼년상 동안 술을 마시지 않았다. 삼년상 후에도 채식만 하는 등의 효행을 하였다.
전근금의 이러한 효성이 알려지자 대흥군과 청양, 홍주, 보령 등의 유생들이 감영에 전근금의 효행을 표창해 줄 것을 진정하였다. 공홍감사가 1738년 왕에게 보고하여 1741년 절충장군으로 품계를 받았다.는 내용의 기록이 전해진다. 처음에는 정려를 건립하였으나 세월이 지나면서 현판이 썩는 것이 염려되어 전근금이 죽은 1769년 효자비를 세웠다.
1885년(고종 22) 여름 전근금의 후손 전동수田東秀는 단자를 올려 전근금의 정려를 이건하였다. 정려를 이건할 때 ‘나주전씨 삼세삼효羅州田氏 三世三孝’라는 현판을 달았다.
전근금 정려는 비석과 있었으나 다른 정려와는 다르게 초가지붕에 좌우 벽면이 흙으로 되어 있었으나 1962년 봄 화재로 소실되어 현재는 효자비만 남아 있다.
나주전씨 절충장군의 후손가에는 전근금을 비롯한 1)삼세삼효三世三孝의 효행과 관련된 문서 18건이 전해지고 있다.
전근금 효자비는 비신의 앞면에는 ‘효자증절충장군전개금개명태운지거 금상십칠년신유십이월 일 명정려이현판공년구역후고기축십이월 일 입비孝子贈折衝將軍田介金改名泰運之居今上十七年辛酉十二月 日 命旌閭而懸板恐年久易朽故己丑十二月 日 立碑’라고 쓰여 있다.
1)《孝行錄: 羅州田氏 三世三孝》; 조선시대 숙종~영조때 충청도 대흥군 이남면 신대리(오늘날 예산군 광시면 미곡리)에 거주하던 효자 전근금(田斤金)공 아들 始福, 시복의 아들 處大 3대(代)의 걸친 효행에 대해 정려(旌閭)ㆍ표창(表彰)을 청원한 관련문서, 삽화, 안내문, 戶籍單子 2点, 8代孫世系 圖表, 年月順 孝行錄 照見表 수록
羅州田氏 三世三孝
고려 멸망 후 나주전씨 후손
예산군에서 불사이군 지키다
전근금 초야에 묻혀 병석에 누운 어머니에게
손가락을 잘라서 피를 입에 넣어드렸다.
효행실적 자자하여 대흥군과 청양 외 3곳
유생들이 감영에 표창을 진정했다.
예조의 등급 순서, 표창에 진정한
청원서기록 등 효행록 전해지다.
조선시대 양인인 전씨마을
도 지정 효의 마을 충효의 고장 되었다네.
※참고 문헌(자료)
1. 광시면지, 2010
2. 효행록(나주전씨 삼세삼효) : 孝行錄(羅州田氏 三世三孝)
3. 여지도서
4. 디지털예산문화대전
5. 문화유적분포지도, 예산군(충청남도, 충남발전연구원, 2001)
6. 충남발전연구원부설 충남역사문화연구소, 『예산군의 효행과
우애』, 예산군, 2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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