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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광군 안마도 뒷산
산행지도
영광군 안마도
지도
영광군 안마도
영광군 낙월면에 소속된 안마도는 서해의 영해기점에 외로이 떠 있는 섬으로 전라남도에서 가장 북쪽에 있으며 전북 부안군과 경계를 이루고 있다. 면적 5.8km2, 해안선 길이 36km의 안마도는 총면적 770ha 중 임야 600여ha, 밭 117ha, 논 13ha, 기타 35ha이다.
안마도는 섬의 생김새가 말안장을 닮았다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역사에 처음 이름을 올린 것도 말과 관련된 것이다. 『세종실록지리지』(영광)에 “안마도(安馬島)는 암·수말 아울러 33필을 방목한다”는 기록이 있다. 고려나 조선시대에는 말 사육이 중요한 국가정책이었으며 말의 숫자가 나라의 부강함을 결정할 만큼 전국 방방곡곡에 말 목장을 설치하였다. 조선시대에는 목장이 설치된 섬이 130여 개로 추정된다고 한다.
이곳은 천혜의 어장터를 가지고 있음에도 어업의존도가 낮고, 건산(145), 뒷산(177), 막봉(167) 능선을 개간해 농사를 지으며 생활해 온 ‘해변산중’의 섬이다. 안마도는 법성포 계마항에서 서쪽으로 약 36.4km 떨어져 있으며, 안마도 본섬을 중심으로 인근의 죽도와 횡도·오도·석만도·소석만도 등의 유인도과 함께 안마군도를 이룬다.
죽도는 1980년대 방파제를 쌓아 안마도 본도와 연결되었으며 1973년도에 8가구 44명, 횡도 5가구 13명, 오도 16가구 136명, 대석만도 30가구 214명, 소석만도 7가구 43명, 어미섬인 안마도는 253가구 1,409명이 살았다. 현재 대석만도에 14가구, 죽도와 횡도에 1가구가 살며 소석만도와 오도는 무인도가 되었다.
낙월면의 대표적인 섬은 면소재지가 있는 상낙월도와 안마도, 송이도 등 3개이다. 그런데 안마도는 낙월면에서 가장 큰 섬이다. 심지어 면의 중심인 낙월도보다 다섯 배나 크다. 그런데도 면소재지는 낙월도에 빼앗겼다. 그 이유는 원래 낙월도는 목포시 관할이고, 안마도는 영광군에 속했다가 합쳐지면서 목포시에 속했던 낙월도에 면소재지를 빼앗겼다고 한다. 안마도 어느 주민은 낙월도가 수산물이 풍부하며 돈도 많고 배움도 많아 면소재지를 빼앗겼다고 하는데 그러나 안마도는 먼 바다에 위치하고 낙월도는 육지와 가까울 뿐만 아니라 물산이 풍부하여 면소재지가 되었지 않았을까 추측해 본다. 단지 섬의 크기보다 육지와의 소통, 그리고 나머지 주민들의 편리함 등을 고려해 보면 억울해할 일은 아닌 것 같다는 생각도 든다.
과거에는 같은 면이지만 생활권은 완전히 달랐다. 안마도와 송이도는 계마항을 통하여 법성포로 가지만 낙월도는 목포행 여객선을 이용하기에 목포가 생활권이었다. 하지만 2005년도부터 영광군 염산면 향화도에서 하루에 3번 배가 다닌다.
계마항과 가마미 해수욕장
안마도와 송이도에 가기 위해 지금까지 말로만 들었던 계마항에 가 보았다. 일부러 일찍이 도착하여 계마항과 가마미 해수욕장을 둘러보았다. 계마항은 많은 고깃배들이 조업을 하기 위하여 드나드는 어항인 동시에 송이도를 거쳐 안마도로 가는 여객선이 뜨는 항구이다. 포구는 길게 이어진 두 개의 방파제로 정사각형이다. 모퉁이에 배가 드나들 수 있는 문이 있을 뿐 사방이 방파제와 호안으로 둘러싸인 포구다. 배가 닿는 경사제에서 나오면 방파제 옆으로 매립공간이 있다. 여객선 대기소가 있는 공간 역시 텅텅 빈 상태다. 여기서 호안을 따라 길이 이어진다. 오른쪽 호안에는 정박한 배들이 별로 없다. 배에 오르기 위한 계단이 곳곳에 있다.
길을 따라 계속 가면 수협이 있고 조금 더 가면 제법 큰 해양파출소가 있다. 이곳은 천연 포구가 아닌 만들어진 항구였다. 여기서 조금 더 가 호안이 꺾이는 부분에서 길이 갈라지지만 어차피 만나게 되어 있다. 그 가운데에 큰 상가건물이 있는데 ‘가마미활어회센터’다. 니은자 형태의 이 구간에 배들이 집중적으로 접안해 있다. 이곳이 가마미 포구다. 영역이야 구별할 수 없지만 여기는 항만과 포구가 혼합된 곳이다. 활어회센터 앞에는 제법 넓은 물양장이 있다. 활어회센터 왼쪽에 길게 이어진 낡은 건물도 있다. 그 뒤로 공판장이 있고 어민회관도 있다.
계마항 가는 길목에서 직진하여 500m쯤 더 들어가면 가마미해수욕장이 나온다. 1627년 보명대사가 이곳에 와서 보니 말이 해변을 향해 오는 형국이라 ‘마래’라 했고, 말의 꼬리가 피어나는 형국이라 ‘가마미’라 했다는 설이 있다. 또한 해수욕장과 포구의 배경이 되고 있는 금정산의 지형이 꼭 멍에를 쓴 말의 꼬리처럼 생겼다는 데서 가마미라고 했다는 설도 있다.
영광군에서 첫손 꼽히는 ‘가마미 해수욕장’. 계마항에서 북쪽 지점으로 계마마을 뒤에 해당되는 지점이다. 백사장 길이는 1킬로, 폭은 200m로 반달 모양으로 완만하게 휘어진 곡선이 매우 아름답다. 수심이 1~2m이고 물이 맑아 한때 호남의 3대 해수욕장의 하나로 이름을 날렸지만 영광원전이 들어서면서 반달 모양의 백사장이 절반으로 줄어들었다. 예전에는 축구운동장 5~6개 나올 정도로 넓은 모래사장이 있었다고 한다. 주변에 200여 그루의 울울창창한 소나무 숲이 명물이며 길게 펼쳐져 있어 제법 운치를 자아내고 있다. 이곳은 약 90km에 이르는 영광 해안도로 드라이브의 출발점이기도 하다.
안마도 가는 길
안마도는 1992년 가을에 등대호를 타고서 서해안을 따라서 인천 경기 지방으로 올라가던 중에 아쉽게도 상륙하지 못하고 지나쳤던 터라 늘 미안함이 마음속에 남아 있는 섬이었다. 그러던 중 2004년 10월에 안익현 선교사, 2012년 6월에는 홍성권 작가와 등대호를 타고 이 섬을 방문했다. 2013년 7월에는 두 명의 사진작가와 함께 1박을 하였다.
2012년 10월 여객선으로 안마도와 송이도를 돌아보기 위해서 아침 일찍이 굴비의 본고장인 법성포에 왔다. 정확히 말하자면 법성포에서 차로 20분 정도 가서 계마항이라는 데에서 배를 탔다. 배 시간은 그때그때마다 다르다. 서해안의 바다는 간만의 차이가 심한 지역이다 보니 물때에 따라서 배가 출항하는 시간이 날마다 다르다. 대표적으로 충남 외연도와 인천 세어도가 있었지만 이제는 옛말이 되었는데, 여기는 아직도 물때 타령만 하고 있는 것 같아 기가 막힐 뿐이다.
나그네가 이럴진대 주민들의 불편은 어떨지, 왜 공무원들이 발 벗고 나서 시민들을 위한 일을 찾아 나서야 하는지를 알 것 같다. 영광군의 행정이 이런 정도일지 아쉬움이 남는다. 기껏해야 두세 시간 차이가 난다. 그러나 안마도의 경우는 지금도 어떤 때는 오전 7시 30분, 어느 날은 오후 1시가 되어야 출항해서 도무지 종잡을 수가 없다. 조수간만의 차가 크기 때문이라고 볼 수 있지만 새로 만든 계마항구와 안마도 포구가 수심이 낮기 때문에 이런 현상이 벌어지고 있다. 안마도의 경우는 출발 시간이 6시간 정도 차이가 나서 주민들도, 선원들도 헷갈리고 피곤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안마도에 들어가려면 그때마다 반드시 여객선 회사에 전화를 하여 출항 시간을 확인하고 가야 한다. 또 안마도는 먼 바다에 속하기 때문에 풍랑주의보에 자주 걸린다는 것을 미리 알고 날씨를 알아본 후 가야 한다.
매일 단 1회만 왕복 운행하는 차도선은 차량이 많으면 그 수효를 감당하지 못하기 때문에 일찍이 계마항에 도착하여 대기표를 받아야 배를 탈 수 있다. 만약에 항구에 일찍이 도착하면 약 10대 정도의 차량이 승선 가능하나 더 늦으면 다음날 선착순으로 줄을 서야 한다. 물론 모래등이 있어 섬으로부터 멀리 떨어져 가야 하는 환경적 요인도 있겠지만 무엇이 우선인지 다시 생각해 보지 않을 수가 없다. 그런데 부득이 화물을 싣고 가야 하는 차량이 아니면 차를 가지고 송이도나 안마도를 방문할 이유가 없다. 섬들이 작고 도보로 얼마든지 가능하기 때문이다. 차도선 신해9호를 타면 약 20km 정도의 속도로 물살을 가르며 달려 나간다.
계마항을 떠난 지 30분쯤 지나면 남쪽으로 조기어장으로 유명한 무인도 칠산도가 보인다. 일산도부터 이산도―칠산도까지 일곱 섬이 나란히 떠 있다. 또한 천연기념물 제361호인 노랑부리백로 외에도 괭이갈매기와 저어새의 번식지여서 천연기념물 389호로 지정되었다.
물반 고기반으로 넘치던 조기의 천국 칠산바다, 칠산어장은 예로부터 서해안의 대표적인 황금어장이었다. 동중국해에서 월동한 조기는 날씨가 따뜻해지면 산란하기 위해 칠산바다를 거쳐 연평도로 북상했다. 곡우(4월 20일 무렵)를 전후해 칠산바다에서 잡힌 조기는 영광굴비 중에서도 으뜸으로 치는 ‘오사리 굴비’로 명성이 자자했다. 그러나 이제는 조기 떼가 자취를 감추었고 수산자원이 감소되어 더 이상 풍요로운 칠산바다는 볼 수 없게 되었다. 배와 어업 기술의 발달과 남획 탓이란다. 대형 화물선이 멀리 수평선 쪽으로 오가지만 고깃배는 한 척도 보이지 않는 바다가 고즈넉하게 펼쳐져 있다.
계마항에서 출항하여 1시간 30분쯤 후면 송이도에 도착한다. 사람과 짐을 내리고 다시 배는 안마도로 향한다. 그 중간에 안마도의 부속섬 석만도에 닿아 또 한 차례 사람과 짐을 풀어 놓고 종착지인 안마도로 간다. 안마도를 중심에 두고 오른쪽에는 오도, 횡도 그리고 왼쪽으로는 석만도가 한 가족처럼 옹기종기 모여 있는 형상이다.
안마도 둘러보기
계마항에서 출발한 지 2시간 30분 후에 드디어 목적지인 안마도에 도착한다. 이 배는 연평도나 가거도, 어청도처럼 당일 입항한 배가 30분 정도 정박한 뒤 다시 출항하면 육지로 가는 교통이 끊긴다. 한두 시간 정도 머무르다가 가면 급한 일은 보고 갈 수 있고 아쉬운 대로 사람을 만나 차라도 한 잔을 할 수 있는데 너무 급히 출발하는 듯한 느낌을 지울 수 없다.
1978년도에 이곳 안마도에서 교회를 설립했던 구혜란 사모(당시 26세)는 이렇게 회고하였다. “어렵게 교회를 세우고 아이들의 미래를 위하여 해군 기지장에게 부탁하여 군인들에 의해 중학교 과정인 해광학원을 시작하였지요. 육지에만 살다가 처음에 섬에 도착했을 때는 모든 것이 신기하고 재미가 있었습니다. 모래사장과 조개껍질, 파도······ 특히 안마도의 일몰은 장관이었지요. 그러나 조금 지나면서부터 섬 생활의 어려움을 체험하기 시작했습니다. 나무가 없어서 길거리에서 나무를 주워다 불을 지펴야 했고, 섬에서 갇혀 사는 생활은 감옥같이 느껴졌으며, 수도와 전기도 없는 생활은 얼마나 불편했는지 모릅니다. 도대체 어떤 문화 혜택조차도 누릴 수가 없었지요. 4~5시간 걸리는 법성포항을 이틀에 한 번씩 운항하는 영남호가 유일한 희망같이 보였습니다. 그때 안마도 사람들에게는 영남호가 가장 큰 뉴스거리였습니다. 사람들과 각종 화물을 많이 싣고 영남호가 입항하면서 뱃고동을 울리면, 모든 섬사람들이 영남호를 향해 뛰어가곤 했지요. 이런 상황에서 밀려오는 외로움을 이겨내기는 쉽지 않았지만 5년간 사역을 할 수 있었습니다.”
안마도는 조선시대에 국가에서 필요로 하는 말 목장으로 지정되어 말을 길러 한양으로 보내야 했으니 도서 교통은 상당히 오래 전에 이루어졌을 것이다. 그러나 그에 따른 내력을 알 수 있는 자료는 없어서 아쉽다. 육지와 먼 거리에 있는 섬이기 때문에 육지 나들이는 대단히 어려운 형편이다.
해방 이후에는 유명환호가 목포-낙월-송이-안마-위도까지 다니다가 1950년부터 1960년까지 사선인 신명호(5톤)가 대신했다. 1970년대에는 옥당호(40톤) 다음으로 군산 선적의 영남호가 법성포 항에서 송이도를 거쳐 안마도까지 운항했다. 지금까지 일반여객선이 다니다가 1998년도에 법성포 계마항에서 차도선 신해9호가 다니면서 안마도와 송이도 사람들은 차량을 싣고 온 배 때문에 경제적으로 상당한 이익을 보게 되었다.
비록 배를 타야 했으나 섬에서 직접 화물을 실음으로써 하역에 따른 시간과 비용을 줄일 수 있게 되어 신선한 수산물을 육지로 보낼 수 있게 되었다. 마침내 안마도의 생선이 전국의 횟집으로 갈 수 있게 된 셈이다. 소금에 절인 생선보다 훨씬 좋은 값으로 파는 셈이다.
안마도에 도착하여 방파제 안으로 들어서면 선착장은 안쪽 깊숙한 만 안에 형성되어 있다. 오른쪽에 선착장과 물양장이 있고 조그만 항구답게 20여 척의 고깃배들이 정박해 있다. 커다란 물양장은 온통 줄과 통발 그리고 잡다한 어구들로 널려 있다. 선착장 근처에는 부잔교와 부교가 있고 그 안쪽에 여객선이 닿는다.
이 만은 안마도 내부 깊숙이 만입되어 안쪽에 모래질 해변과 사구, 그리고 뒤에 석호지형으로 형성되어 있다. 안마도에 서해안처럼 갯벌이 있을 거라고 상상하면 오산이다. 너무 먼 바다에 외따로 떨어져 있기 때문에 수심이 깊어서 갯벌은 전혀 없다. U자형으로 둘러싸인 안마도항은 사람들이 살 수 있도록 형성된 천혜의 포구다. 또한 항구 입구에는 조그만 섬들인 죽도, 오도와 횡도 등이 버티고 있기 때문에 바람이 세차게 불면 주변 어선들이 높은 파도를 피하기에 안성맞춤이다.
안마도 파시
예전에 칠산 바다에서 조기가 많이 잡힐 때는 안마도에서도 파시가 열렸으나 파시가 사라진 때가 1970년대 초반이었다고 하니, 벌써 50년이 된 셈이다. 칠산 바다에서 조기가 사라지고 그 다음은 조기 사촌격인 부서가 많이 나던 시절, 현재의 여객선터미널 부근의 월촌리 낫바위(광암, 넓은바위) 근처에 20여 호 술집이 있었는데 그 중 10여 호에 색시들이 있었다고 한다. 부서와 함께 아지(전갱이)도 많이 잡혔는데 2~3개월의 짧은 기간 동안, 바다와 섬이라는 특수한 공간에서 온갖 인간사가 뒤엉킨 파시가 이루어졌다. 풍선을 타고 여수, 완도, 경상도 배들과 함께 일제시대에는 일본 배들도 많이 왔다.
이곳 출신 오상권(81세) 씨는 이렇게 회고하였다. “어린 시절부터 조기 파시 때 뗏목을 만들어 술, 쌀, 김치, 담배, 잡화와 선구를 판매하는 해상 행상을 하였다. 그때는 동네 사람보다 돈이 더 많았다.”
풍선들이 조기를 잡다가 들어오면, 여자들은 물을 머리에 이고 물을 팔러 다니기도 했다. 수심이 얕아 배들이 갯벌에 걸려 있으면, 여자들은 허리까지 물에 빠지며 배까지 걸어가 물을 팔았다. 월촌리에는 ‘불등’이라는 자연마을이 있는데 풍선들이 모여들어 밤이면 등불이 불야성을 이뤘기에 붙여진 이름이다.
겨울철에는 주로 외지에서 온 풍선들이 바람과 파도를 피해 정박했다. 그물과 배들을 손질하는 이들을 상대로 영외리의 글떼기 마을에도 2~3호 정도의 색시집이 있었다고 증언하고 있다. 글떼기는 풍선들이 바람이 많이 불 때 일시적으로 바람과 파도를 피해 기다렸던 곳으로, 산 너머 오도 쪽에 있으며 지금은 폐촌이 되었다.
“파시가 이루어지던 시절에는 안마도 앞바다에 배들이 꽉 들어차서 배 위를 걸어서 죽도까지 갈 수 있었지요. 글떼기 마을의 파시와 술집은 풍선이 동력선으로 바꾸어지면서 문을 닫았고, 안마도 월촌리 낫바위 파시는 어획의 부진함으로 점차 축소되다가 전두환 정권이 들어서는 1980년대 초반에 사라지고 말았다. 그 당시까지 해상 행상은 10명 정도였다”고 오상권(81세), 김삼중(71세) 씨는 증언하고 있다.
1960년대까지만 해도 안마도에는 300여 가구 1,500명 정도의 주민이 거주했단다. 주로 농사와 축산을 많이 하였고, 논이라고 해야 월촌리와 신기리 일대의 사구를 막고 석호를 개답한 작은 농지가 유일하다. 겨우 10여 호만이 어업에 종사할 만큼 해변산중에 속한 동네였다. 지금도 이러한 산업 구조가 크게 변동이 없을 정도이기 때문에 황금 바다를 지척에 두고도 외지배들이 판을 친 셈이다. 칠산어장에 조기가 많이 잡혀도 너무 가난하여 배를 마련할 여건이 허락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타향 사람들이 와서 조기를 잡아 돈을 벌어가도 그저 바라보기만 했단다. 사람은 많이 살고 농토는 너무 작았기 때문에 일찍이 바다로 나가야 하는데 수많은 사람들이 좁디좁은 농토에만 의지하고 살아가니 가난의 굴레에서 벗어날 수 없었던 것이다. 해마다 칡뿌리, 고사리, 산야초 그리고 바다의 돌김, 톳, 미역, 우뭇가사리 등을 뜯어다 곡식을 조금 넣어 죽을 쑤어먹었고 점심은 고구마를 먹었다.
적극적인 사고 끝에 여러 사람이 출자해서 배를 마련할 수는 없었는지 아쉬움만 남는다. 전국 어느 섬에서도 실로 보기 힘든 경우이기에 더욱 그렇다. 정작 주인은 가난해 구경만 하고 객이 모여 씨가 마를 정도로 고기를 남획해 갔다고 하니 지금 생각하면 기가 찰 일이다.
안마도는 오랫동안 지속된 파시 때문에 일시적으로 흥청거리기도 하였지만, 세상을 향해 본격적으로 눈을 뜨기 시작한 것은 1980년대 후반 안마도항이 국가어항(3종 어항)으로 개발되면서부터이다. 이때 방파제, 물양장과 선착장을 만들면서 항구를 확장시켰다. 주변 해역의 선원들이 이곳에 와서 바람과 파도를 피하고 그물을 손질하며 휴식을 취하자 이곳 주민들도 배를 장만하여 고기잡이에 뛰어들게 된 것이다.
예전에는 겨울에 북서풍이 정면으로 불어오기 때문에 안마항에 계류시키지 못하고 고개 넘어 영외리에 배를 댔다. 항구가 제 기능을 하면서 농사보다 바다에서 이익이 더 많다는 것을 깨달아 5톤 정도의 어선을 가지고 어업에 뛰어들었지만, 늦어도 너무 늦었던 셈이다. 어족 자원의 고갈에다 젊은이들이 이미 육지로 빠져 나간 뒤였다. 장비의 영세성으로 인해 섬 주변의 한 시간 거리에서 조업을 한다. 20톤 정도의 배를 타고 멀리 공해상이나 동지나 해상으로 나가 고기를 잡는 배는 아직 없다.
안마군도 근해는 먼 바다이기 때문에 조기는 사라졌지만 지금도 다른 섬에 비교해서 어종이 풍부한 편이다. 4월부터 11월까지 서대, 민어, 넙치, 병어, 꽃게, 가자미 등을 유자망이나 안강망을 이용해 잡는다. 안마도는 꽃게가 유명하여 뭍의 상인들이 차도선에 트럭을 싣고 들어와서 꽃게를 사간다.
예전의 일반 여객선 때는 제값을 받지 못했지만 법성포 계마항에서 바닷물을 실은 트럭, 즉 수조차를 싣고 들어오는 차도선 때문에 수산물을 제값에 팔게 되었다. 이곳은 수협 어판장이 없다. 때문에 잡은 고기의 판로가 어렵다. 매일 잡은 고기를 가지고 법성포로 가져 갈 수 없는 노릇이다. 너무 거리가 멀어 시간도 많이 걸린다. 비경제적이다. 그래서 업자들이 차도선에 수조차를 싣고 와서 고기를 걷어간다. 수산물 위판장이 생긴다면 값을 조금 더 받을 수 있을 터인데 아직도 안마도는 아쉬움투성이다.
그래서 어선들은 여객선이 들어오는 시간에 맞추어 바다에 나갔다가 돌아와 꽃게와 활어를 수조차에 옮겨 싣는다. 예전에는 상고선으로 고기를 옮겨 실었는데 지금은 차도선이 차를 싣고 들어와 이 차에다가 직접 고기를 옮겨 싣는다. 이 작업은 일종의 현대판 파시의 흔적이라고 보면 된다. 날마다 안마도 여객선 선착장에는 이런 풍경을 볼 수 있다. 차도선이 오후 1시에 출발하면 10여 척 어선의 선원들은 점심을 먹고 꽃게 그물을 정리한다. 그래야 다음날 다시 바다에 나가서 꽃게를 잡을 수 있기 때문이다.
같은 섬사람들끼리 혼인을 했던 안마도
안마도의 경우 마을 사람들의 통혼은 연령대별로 다르지만 전체적으로 볼 때 대부분 이 섬 안에서 이루어졌다. 너무나 고립된 지역으로 생활권의 폭이 좁았기 때문으로 보인다. 통혼권은 보통 5일장을 중심으로 밀접한 관계가 있는데 해상 교통이 발달되기 이전이라 고립된 도서 지역의 특성상 혼인망이 좁아질 수밖에 없었다.
옛날부터 안마도에는 그 섬사람들끼리만 혼인을 했다. 같은 면인 송이도나 낙월도 사람들과는 섬이 그렇게 멀지 않지만 서로 혼인을 하지 않았다. 이런 일은 오래 전부터 내려오는 전통이었다. 그래서 다들 이 섬에 태어나서 이 섬사람과 결혼해 아이를 낳고 살다가 죽어서 안마도에 묻혔다. 작은 섬에서만 혼인을 하다 보니 팔촌 간에 결혼이 이루어지는 경우가 있다는 말은 들려도 정작 그런 경우는 없다고 한다. 그러다 보니 좁은 지역에서 다들 친척이며 매형, 외삼촌, 이모, 형수이기도 했다. “여기는 몇 번 얽혀서 남이 없어라우.” 흔히들 말하는 몇 겹의 사돈이다.
이제는 해상 교통의 발달로 인해 사회 관계망이 넓어져서 전국적으로 통혼이 이루어지게 되었다. 이곳에는 강씨들이 주류를 이룬다. 그 당시는 법보다 주먹이 우선인 세상이어서 주먹을 잘 쓰는 사람이 어른이었다. 다른 성을 가진 사람은 큰소리를 못하고 살았는데 다른 성을 가진 사람과 싸움이 나면 사촌, 육촌까지 덤벼드니 이길 수가 없었다고 한다. 설마 싸움을 잘해서 주류가 될 수 있겠는가만 외지와 교류가 뜸한 섬의 고립에 따른 특성을 설명하는 좋은 예로 보인다.
실패한 전복양식
여객선이 닿는 물양장 한쪽에는 비교적 큰 규모의 육상 전복 양식장이 있지만 지금은 양식을 하지 않는다고 한다. 수온과 해양생태계가 적합하지 않아서 채산성이 떨어지기 때문이다. 15년 전에 안마도 사람들은 전복양식에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 완도 사람들이 전복 양식에 성공하였다는 말을 듣고 1999년도에 소용호 씨에 의해 처음으로 전복 종패 양식이 성공을 거두었다. 처음에는 6가구 중 5가구는 해상에서, 1가구는 해상과 육상에서 가두리를 시작했다. 2000년도에 김성수(당시 30세) 씨도 해상과 육상 수조에 전복 양식을 시작하였지만 2002년 9월 태풍 루사에 의하여 정전과 함께 전부 폐사되고 말았다.
2002년도에 영광군은 안마도 전복 양식을 중점 사업으로 선정하였다. 주민들은 정부로부터 융자금을 받아 양식을 시작하였다가 2008년도에 손을 떼고 말았다. 그 이유는 완도 지역에 비해 수온이 낮아 성장이 배나 더디고 전복 폐각에 굴이 많이 붙어서 전복이 잘 자라지 않아 경쟁력이 떨어졌기 때문이다. 아직도 4명이 해상 가두리를 통하여 전복양식을 하지만 그만두려 하고 있다.
사실 안마도는 청정해역이다. 예로부터 전복과 그 먹이인 미역, 다시마 등이 자생했다. 전복은 갯벌과 상극이다. 그래서 서해안에서 전복 찾기란 쉽지 않다. 하지만 안마도 어민들은 역발상으로 질 좋고 맛있는 전복을 키워 생산해 내고 있지만 그 비용이 너무 많이 들어가기 때문에 타산이 맞지 않는 셈이다. 환경 우선성에 있어 남해의 완도 등지에 밀린 것이다.
물양장 뒤로 가게와 식당과 민박 등의 편의시설이 들어서 있다. 건물들도 대부분 2층이다. 민박집 앞에 세 대의 카트가 있다. 골프장에서 사용되는 카트로 민박집에서 관광객을 위해 준비한 교통수단이다. 물양장 끝자락에 잘 만들어진 건물 한 채가 있는데 안마어민회관이다. 이런 것만 보면 작지 않은 섬임을 알 수 있다.
안마도 둘러보기
물양장 한쪽에 ‘청정의 섬 안마군도’라는 표지석이 세워져 있다. 안마도가 아닌 군도를 상징하는 표지석이다. 마을표지석 아래에는 안마도에 대한 지명 유래와 기초적인 사실들이 적시되어 있다. 그 뒤로 대합실이 있다. 대합실 앞은 객선이 접안하는 경사제이다. 이 옆으로 고깃배들이 집중적으로 정박해 있다.
물양장을 나오면 파출소가 있고 그 옆으로 민박집 등 가정집이 몇 채 있다. 오른쪽은 낮은 산, 왼쪽은 바다 그리고 길게 이어진 해안도로이다. 마을로 들어서는 길목에 발전소와 모래해안이 있는데 그 입구에 정자형 쉼터가 있다.
앞은 삼거리다. 직진하면 마을로 가는 길이고, 왼쪽으로 가면 해수욕장과 월촌리 마을로 이어지는 길이다. 길은 결국 어디서든 만나게 되어 있다. 마을로 들어서는 입구에 보건진료소가 있다. 길 오른쪽에 위치한 진료소 옆에는 공중목욕탕을 갖추었다. 매주 수요일만 문을 연다. 그것도 남자와 여자가 따로 시차를 두고 열린다. 남자가 오전이라면 여자는 오후에 운영된다. 요금은 어른 2천 원이란다.
진료소 맞은편에 낙월면 안마출장소가 있다. 바로 옆에 있는 학교는 ‘법성포 초등학교 안마분교장’이자 ‘법성포 중학교 안마분교장’이다. 두 개의 학교 교사가 나란히 배치되어 있다. 운동장도 제법 넓은 편이다. 분지형태로 이루어진 모래동산 가운데 교정이 서 있고 그 뒷산에 소나무 숲이 어울려 있어 매우 인상적이다. 이 소나무 숲은 오래 전에 학생들이 야산에서 어린 소나무를 캐와 모래밭에 조림한 것이라고 한다. 이 학교가 본교로 시작했다가 분교로 격하된 것은 지난 1993년이다. 제법 큰 건물이지만, 교사 한 명과 2학급의 학생 3명이 전부다.
여기서 조금 더 가면 또다시 갈림길이 나온다. 제법 큰 섬인데 산마다 길이 뚜렷하게 이어진다. 최고봉인 뒷산(177m)을 비롯하여 막봉(167m)·건산(145m) 등 비교적 기복이 큰 구릉이 있고, 중앙은 평지를 이루어 농경지와 마을이 분포한다.
길이 참 다양하게 나 있다. 대부분 농로 위주의 길들이다. 학교 앞 갈림길에서 ‘안마길 1길’로 들어선다. 안마길 1길은 바로 선착장에서 시작되는 길이다. 그다지 많은 집이 아니지만 폐가도 더러 눈에 들어오고 주변에 밭들이 제법 있다. 이곳에는 밭이 많은 편이다. 7만 평이라는 말이 있지만 과장된 듯하다. 이 길을 따라 계속 가다가 왼쪽으로 꺾여 들어가면 군 시설이 나타난다. 해군 레이더 기지로 원래는 재원도에 들어서려다가 강한 반대에 부딪쳐 대신 이곳에 들어선 것이라고 한다. 레이더 시설은 산꼭대기에 있고 마을 끝자락에 부대가 있다.
부대 입구 앞에서 길은 왼쪽으로 꺾인다. 주변에는 집들이 산재해 있다. 이곳에는 두 개의 마을이 있는데 남쪽 지점의 월촌마을과 북쪽의 신기마을이 그것이다. 두 마을 사이는 중간에 논이 가로막고 있다. 이곳 역시 매립을 통해 논으로 만든 지역임을 알 수 있다. 석호지대는 시간이 지나면서 농사를 지었고, 최근에는 경지정리를 해 섬에서 유일하게 벼농사를 짓는 지역이다.
안마도 당산제
월촌에는 노인정 옆에 세 그루의 팽나무가 있는데 큰 나무는 둘레가 397cm이다. 과거에는 매년 정월 초하루에 마을의 안녕, 풍어와 재앙을 막아 달라고 농악을 치면서 당산제를 지냈지만 지금은 사라졌다. 수령이 수백 년 정도의 팽나무가 당산나무로서 위용을 뽐내고 있다. 보호수로 지정될 가치가 높지만 주민들은 그냥 평범한 나무로 생각하여 아무도 신청을 하지 않았다고 한다. 이곳 팽나무보다 그 크기는 작지만 바로 옆 신기마을의 다섯 그루 팽나무도 옹기종기 모여 있어 마을의 운치를 돋우고 있다. 두 마을의 당산 고목 옆에 사람들이 쉴 수 있는 공간을 만들어 두었다.
이곳 사람들은 철마를 섬기는 전통을 갖고 있었다. 또 마을마다 각각 독립된 당을 가지고 있으며 한때는 세 개의 마을이 당을 연합하여 당산제를 올리기도 했다. 안마도의 당산제는 1969년에 사라지게 되었다. 말과 연관된 섬답게 안마도의 당제에 모시는 신체는 철마였다. 안마도에서 철마를 당신(堂神)으로 모시기까지 사연이 있다.
곰몰(동촌)에 살던 신씨 할머니 꿈속에 한 장군이 나타나 ‘나는 중국의 장수였으나 제대로 싸워보지 못하고 죽어 그 유품이 바닷가로 밀려와 궤 속에 있으니 이를 건져다 산에 모시고 제사를 지내달라’고 했다. 할머니가 마을 앞 갯가에 나갔더니 정말로 중국 돈과 철마가 든 궤짝이 밀려와 있었다. 신씨는 동네 주민들과 함께 뒷산에 철마를 모시고 섣달 그믐날 밤에 제사를 지냈다. 그 후 할머니가 돌아가자 아래 작은 당산에 모셨다고 한다. 당제를 모신 다음날(정월 초하루) 산에서 내려와 곰몰, 신기, 월촌 등 마을의 유사집(당제를 준비한 사람)을 돌며 뫼구굿을 쳤으며, 닷샛날 당산제를 지내고 보름에는 세 마을 주민들이 모여 헛배를 만들어 제물을 싣고 풍어굿을 한 다음, 액을 쓸어 담아 먼 바다로 띄워 보냈다. 이렇게 거의 한 달 동안 이어지는 마을제의는 1960년대 말 중단되었다. 당시 큰 당산에는 네 필의 철마를 신체로 모셨다고 전한다. 조선조까지 국가에서 필요한 말을 사육했던 흔적이 남이 있는 셈이다.
안마도의 지명 유래를 보면, 말에 안장을 얹은 채 투구를 벗어 놓고 쉬는 장군의 형상과 같다고 하여 안마도라 부른다는 설도 있다. 〈세종실록지리지〉에는 ‘안마도(安馬島)’로 표기되어 있다. 조선 초기에는 말 목장을 설치하여 말 33필을 방목했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그리고 안마도라는 이름의 유래에는 다음과 같은 전설이 있다.
옛날에 마을사람들이 월촌리 당 너머에서 표류된 중국대신의 관 2개를 건져 보니 관의 표면에 안장을 한 말의 모양이 새겨져 있어 정성껏 묻어주고 제사를 지내준 일이 있다. 조선 때 이사과(벼슬이름이 동지)라는 사람이 이곳으로 귀양 와서 보니 섬의 모양이 안장한 말의 모양과 같고, 중국대신의 관 표면에 안장한 말의 조형이 있는 것을 보고 안마도라 하였다고 전한다.
김 양식과 소 사육
김양식은 강남기 씨에 의하여 1981년도에 처음 도입되었다. 법성포에서 김 공장을 하면서 마을의 갯벌에 말뚝을 박고 지주식 김발을 시작하였다. 1993년부터 부류식으로 바꾸어 최고 10가구까지 김양식을 하였으나, 2002년도에 가격 경쟁력을 잃고 2가구로 줄었다가 지금은 완전히 사라진 상태이다.
전복 양식과 김 양식에서 재미를 보지 못한 안마도 주민들은 1976년부터 소를 사육하기 시작하였다. 처음에는 10여 가구가 4~5마리 정도 키우다가 1983년 소값 파동으로 여러 집이 소 사육에 손을 떼고 말았다. 현재 3가구가 대규모로 사육하는데 300마리 정도 된다. 소 사육은 산에 울타리를 치고 방목하는 형태이다. 2013년 8월, 3명의 일행과 함께 신기리에서 울타리의 문을 열고 들어갔다. 한참 가다 보니 다시 두 번째 문이 닫혀 있기에 그 문을 열고 죽도 근처까지 걸어가면서 주위를 살펴보았다. 시멘트포장 길 위에 온통 소똥이 널려 있었으며, 소들은 잘 보이지 않았다.
죽도에 가기 직전 작은 모래밭에 한우들이 더위를 피해 한가로이 해수욕을 즐기고 있는 사진을 보았지만 그런 장면은 만나지 못했다. 그 바로 위에 초소가 있는데 군인들은 보이지 않고 한우 몇 마리가 초소를 지키고 있었다. 1년 내내 겨울에만 사료를 먹이고 나머지는 방목하며 풀을 먹고 자라기 때문에 이곳 한우고기는 인기가 그만이다.
육지처럼 가두어 놓고 대량으로 소를 키우지 않는다. 그래서 이곳 한우는 더욱 인기가 높다. 안마도 한우라는 지역브랜드를 만들어 잘 관리해 나간다면 나름대로 경쟁력이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초소 바로 밑에 있는 짧은 방파제를 지나 죽도 뒷산에서 풀을 뜯는 소들을 발견할 수 있었다. 한반도에서 가장 팔자 좋은 소들로 보인다. 평온히 자연 상태에서 자란 소의 모습으로부터 평화의 풍경이 감지된다.
인기가 좋은 지네주
안마도에는 지네가 유명하지만 별로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다가 10년 전에 지네술을 만들어 유명세를 타고 있다. 이곳 특산물로 지네주와 말린 지네가 있다. 지네는 마흔두 개의 다리를 가진 절지동물이다. 다리가 많아 징그럽고 혐오스러운 비호감 동물로 낙인 찍혔지만, 안마도에는 유독 지네가 많다고 한다. 햇볕에 바싹 말려서 먹기도 하고 술로 담가 먹기도 한다. 또 살아 있는 채로 먹기도 한다. 해충이지만 예부터 만병통치약으로 쓰였다고 한다.
지네를 잡는 시기는 5월 한 달뿐이다. 곡괭이와 빈 페트병을 허리에 차고 손에 장갑을 낀 채 길도 없는 비탈진 산을 헤매는 이들은 지네를 찾는 사람들이다. 혐오스럽고 징그럽게 생긴 지네는 나무뿌리와 돌 틈 사이에 숨어 지내는데 5월이면 산란기가 되어 땅 위로 올라온다. 이때를 놓치면 바위틈으로 숨어 보이지 않기 때문에 지네를 잡기 어려워진다.
지네주에 사용하는 술은 50도의 독주로 일반 술과는 다르며, 50마리의 지네를 넣어 만든 지네주는 인기가 좋다. 지네주의 색이 초록색인 것은 지네에서 우러나기 때문이다. 지네술은 1리터 한 병에 50,000~70,000원 정도 하며 신경통에 좋다 하여 각지에서 많이 찾는다. 배가 없어서 어업에 종사하지 않는 사람들은 이 지네를 이용한 상품으로 가장 큰 부수입원을 얻는다. 한 마리당 1,000~2,000원씩 하는 지네는 해변산중인 안마도에서 더없는 수입원이다.
예로부터 지네는 관절염, 오십견과 신경통 등 고질적인 통증에 효과가 있다고 한다. 한방의학서 ‘신농본초경’에도 ‘오공(지네)의 맛은 맵고 성질은 따뜻하다. 각종 뱀독, 벌레 독, 물고기 독을 품고 감염질환이나 기생충병 등을 치료한다’고 적혀 있단다. 지네의 독이 통증 치료에 효과가 있다는 소문이 퍼지면서 안마도의 지네주 인기는 여전히 상종가를 달리고 있다니 고단한 어촌마을에 다행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안마도를 떠나면서
안마도는 여러 가지 해양문화유산이 풍부한 곳으로 국립해양문화재연구소(소장 성낙준)는 전남 영광군 낙월면 안마도의 역사, 유적, 전통선박, 민속문화, 생활상 등 해양 역사와 문화를 기록한 조사 보고서 ‘안마도’를 발간했다. 이 보고서를 보면 서해의 황금어장으로 유명한 칠산바다에 떠 있는 섬으로 조기, 고등어, 멸치 파시가 성황리에 열렸던 섬이다.
조선시대에는 국영목장이 있던 곳으로 ‘태종실록’과 ‘세종실록’에 목장이 있었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현재 안마도에는 이런 역사적 기록을 뒷받침할 수 있는 목장 울타리 흔적들이 남아 있고 이외에 고려시대 석곽묘, 봉수시설, 입석, 당산나무, 당터 등 섬 지역 문화유산들이 비교적 잘 남아 있는데, 아직 상세히 보고되지 않은 자료들이다.
이번 보고서에는 이러한 문화유산과 함께 섬의 역사, 생업활동, 사회생활, 개인 생애사, 어촌민가 등 고립정도가 심한 안마도 주민들의 삶의 모습을 생생하게 기록했다. 이 자료들은 변방에 있는 섬의 역사와 문화적인 가치를 발견하고 재평가하여 우리의 전통문화유산으로 끌어들이기에 충분한 것들이다. 또한 이번 조사는 인멸위기에 처한 문화유산을 발굴하고 기록하여 해양 관련 문화재 후보군을 발굴해내는 의미를 지니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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