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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故) 이병철 삼성그룹 창업주의 장남인 이맹희(84) CJ그룹 명예회장이 14일 중국에서 지병인 암으로 별세했다. 사진은 아들 이재현 회장과 함께한 이 명예회장의 생전 모습. ⓒ연합뉴스 |
삼성가 '비운의 황태자' 고(故) 이맹희 CJ그룹 명예회장이 파란만장했던 삶을 뒤로 하고 영원히 잠들었다.
그가 영면한 이날은 음력 칠월 초이레, '견우와 직녀가 만나는 날'이라는 '칠석(七夕)'이다.
옛부터 칠석날 비가 내리면 견우와 직녀가 상봉해 흘리는 기쁨의 눈물이라고 전해진다.
공교롭게도 그의 영결식이 끝나고 장지로 이동할 그 시간, 잠시나마 서울 하늘에서는 부슬부슬 비가 내렸다.
이승에서 끝내 화해를 못했던 부친(이병철 창업주)과 저승에서 다시 만나 '해원상생(解寃相生)'할 기쁨의 눈물로 비춰지기도 했다.
사실 '해원상생(원한을 풀고 서로 잘 산다)'은 이 명예회장이 생전에 동생 이건희 삼성 회장을 향해 했던 표현이다.
동생과 상속소송 과정에서 변호인에게 건넨 편지를 통해 그는 이같이 말했다.
“이제 묵은 감정을 모두 털어내어 서로 화합하며 아버지 생전의 우애 깊었던 가족으로 다시 돌아가고 싶다.
진정으로 원하는 것은 10분 아니 5분 만이라도 죽기 전에 건희와 만나 손잡고 마음의 응어리를 푸는 것이다.”
그러나 그는 저승과 이승의 갈림길에서 아버지에 이어 동생과도 끝내 웃으며 화해하지 못한 채 이별해야만 했다.
◆가족 품에서 잠든 마지막길, 아버지 품엔 결국 못가
20일 오전 7시, 종로구 연건동 서울대병원에서 지난 14일 중국 베이징(北京)에서 세상을 떠난 이맹희 명예회장에 대한 발인식이 진행됐다.
이어 오전 8시가 되서야 발인식을 마치고 온 운구차량이 서울 중구 필동 CJ인재원에 도착했다.
이곳에서는 이 명예회장에 대한 영결식이 진행됐다.
생전 고인은 늘 가족과 떨어져 해외에 은둔하며 외로운 삶을 보냈지만 마지막 길은 가족들 품에서 마감했다.
이날 영결식에서 위패는 고인의 손자인 이호준씨(차남 이재환 재산커뮤니케이션즈 대표의 아들)이, 영정은 고인의 손녀사위인 정종환씨(장남 이재현 CJ그룹 회장의 딸 이경후씨 남편)이 들었다.
목탁소리를 시작으로 약 한시간 동안 진행된 이날 영결식에는 직계가족 뿐만 아니라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과 이부진 호텔신라 사장, 이서현 제일모직 사장 등 범 삼성가 일가친척들이 함께 추모를 했다.
장지로 떠나기 전 이 명예회장 영구차는 남대문 CJ그룹 본사와 장충동 이재현 CJ 회장의 자택을 잠시 들르기도 했다.
이 명예회장의 장지는 삼성가의 선영인 용인 에버랜드가 아닌 여주로 결정됐다.
결국 아버지가 묻혀있는 땅에 함께 눕지도 못하게 됐다.
▲ 고(故) 이맹희 CJ명예회장의 영구차가 20일 오전 영결식장인 서울 필동 CJ 인재원으로 들어서고 있다. ⓒ연합뉴스 |
이날 영결식에 장남인 이재현 CJ회장은 참석하지 못했다.
다만 이재현 회장은 중국에서 이 명예회장의 시신이 운구된 지난 17일 밤 입관식과 발인 전날인 19일 밤 아버지를 찾았다.
이 회장은 운명을 달리한 아버지를 처음 지켜본 17일 입관식에서 관이 닫히는 순간 끝내 참았던 눈물을 터뜨리며 크게 오열했다고 한다.
발인 전 마지막으로 아버지를 만나는 19일에는 시신안치실에 있던 아버지의 관을 수차례 쓰다듬으며 눈물을 삼켰다.
아마도 '비운의 황태자'라는 꼬리표가 따라붙었던 아버지의 삶에 대한 연민이었을지도 모른다.
◆끝내 지우지 못한 꼬리표 '비운의 황태자'
이 명예회장은 삼성가의 장남이었다.
당연히 황태자로 불렸다. 고 이병철 삼성 창업주의 1순위 후계자이기도 했다. 실제 그룹 내에서 삼성전자, 삼성물산, 제일제당, 중앙일보, 성균관대 등 총 17개 직책을 맡았던 실세 중 실세인 시절도 있었다.
아버지인 이병철 창업주가 매사 꼼꼼하고 침착하며 냉철한 성격이었다면 이 명예회장은 선이 굵고 호탕한 상반된 성격을 지녔다. 그게 문제였다. 부친과 경영 방식을 놓고 적잖은 대립의 순간이 잦았던 것이다.
지난 1966년 있었던 한국비료 사카린 밀수 사건은 두 부자의 사이를 극단적으로 갈라놓게 된 계기가 됐다.
당시 이 사건으로 이병철 창업주는 경영 2선으로 물러났고, 장남인 이 명예회장이 삼성그룹의 경영 일부를 잠시 맡게 됐다.
야심이 많았던 이 명예회장으로서는 부친으로부터 경영 능력을 인정받을 수 있는 절호의 기회였다. 그러나 결과적으로는 독이 됐다.
이병철 창업주는 자서전 '호암자전'에서 "장남 맹희에게 그룹 일부의 경영을 맡겨 보았다. 그러나 6개월도 채 못 되어 그룹 전체가 혼란에 빠졌다"고 복기했다.
이때부터 이 명예회장은 삼성 후계자에서 멀어지게 됐다. 더 나아가 1969년 터진 '청와대 투서' 사건은 아버지가 이 명예회장이 연루됐다는 의심을 품는 상황까지 만들었다.
결국 이 명예회장은 아버지가 눈 감는 날까지 끝내 화해하지 못한 '비운의 황태자'로 남게 됐다.
▲ 지난 1987년 11월 23일 이병철 삼성그룹 창업주의 영구차 뒤를 장남인 이맹희(맨 앞) CJ그룹 명예회장과 유가족들이 뒤따르고 있는 모습. ⓒ연합뉴스 |
그는 이건희 회장이 삼성전자를 상속받고, 다른 남매가 각 기업 계열사를 상속받는 과정에서도 철저히 외면당했다.
현 CJ제일제당의 전신인 제일제당 역시 이 명예회장이 아닌 아들인 이재현 CJ그룹 회장이 물려받았다.
이 명예회장은 이병철 창업주 사후 제일비료를 설립해 재기를 노렸지만 결과는 실패였다.
결국 해외와 지방을 오가며 가족과의 교류도 없이 영원히 눈을 감는 날까지도 은둔생활을 이어갔다.
그의 은둔생활이 잠시 멈췄던건 지난 2012년 동생인 이건희 회장을 상대로 낸 상속소송이 세간의 관심을 끌면서부터다.
그러나 상속재산은 단 한푼도 받지 못했고 결국 주변의 만류로 상고를 포기했다.
소송 포기후 동생 이건희 회장과 화해를 시도하기도 했지만 이 회장이 급성심근경색으로 쓰러지면서 그 뜻마저 이루지 못했다.
상속소송 직후 이 명예회장은 폐암 2기 진단을 받았다. 폐의 3분의 1을 절제했다.
치료 과정도 일본이나 중국 등 국내가 아닌 해외로 떠돌았다.
동생과 상속소송까지 벌인 그였지만 폐암 진단과 수술 이후 많은 것을 되돌아보게 됐을 것이라는 게 주된 추측이다.
그러나 아버지와도 이루지 못한 화해를 동생과도 끝내 이루지 못했다.
그나마 다행스럽게도 그의 후손들간에는 여느 친척들 처럼 꽤 돈독한 그림이다.
그의 빈소를 수차례 방문하며 큰아버지를 애도한 삼성가 3세들,
이를 따뜻하게 맞아준 고인의 유가족들을 통해 짐작할 수 있는 대목이다.
그가 말한 '해원상생'의 꿈을 후손들이 대신 이뤄줄지 지켜볼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