틈바구니 바람소리
김인기
원래 헛소리란 게 근거가 없거니와 상식에도 어긋나서 대개 웃음거리로 떠돌다가 금방 사라진다. 그러나 더러는 그렇지 않다. 혹자는 분통을 터뜨린다. 딴은 그럴 만도 하나, 한편으로는 놀랍다. 가짜가 이렇게나 위력을 떨치다니. 그래서 너나없이 조심한다. 어쩌다 잘못 엮이면 여러모로 피곤하니까. 때로는 누군가의 생활이 크게 흔들린다. 이건 부당하다. 그렇다면 이참에 헛소리를 아예 싹 없애 봐? 에이, 이게 가능하다 하더라도, 당최 미덥지가 않아. 어쩐지 헛소리도 역할이 있는 게 아닌가도 싶어.
“넌 다리 밑에서 주워왔다.”
어른들의 이런 이야기에 아이들이 혼란에 빠졌다. ‘그러면 어머니나 아버지도 진짜가 아니구나. 그래서 그랬구나. 뭐가 좀 이상하더라.’ 이게 다만 경상도의 풍습만이 아니고 강원도나 평안도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전라도나 함경도 등 여타 지역이라 한들 뭐가 달랐을 리 없다. 이웃사람들도 덩달아 아이들을 놀렸는데, 이런 헛수작의 정체가 뭘까? 참 이상하게도 아무런 설명이 없었다. 그게 그저 그렇다는 거지, 뭐. 사람들의 태도가 늘 이 모양이었다.
‘그래도 어머니는 진짜였을 것이다.’
이게 내 짐작이다. 사람이 어디 꼭 물증이 있어야만 뭘 믿던가? 때로는 편견에 사로잡혀 엉뚱한 결론에 도달하기도 하지만, 직감도 상당히 정확하다. 설령 누가 실지로 다리 밑에서 울던 녀석이라 하더라도, 이건 어디까지나 남들도 다 알면서 속아주는 자작극이어야 이치에 맞다. 피임이나 낙태가 어려웠던 시절이다. 서방도 없는 여자한테 갑자기 아기라도 생기면 어떻게 할 것인가? 이렇게라도 아기를 거둬야지. 그러니까 곧이곧대로 말하기에는 뭔가 복잡한 것들을 이렇게 얼버무린 셈이다.
의당 그곳이 다리여야 한다. 거기는 사람들의 왕래가 빈번하다. 그래야 부모를 도저히 찾을 수 없었다는 변명이 성립한다. 가끔은 이런 자작극도 벌이기가 어려웠던가 보다. 그래도 방법은 있었다. 마당에서 개가 몹시 짖어서 내다봤더니 호랑이가 아기를 물어다 놓고 가더라. 꿈속에 산신령이 나타난 바로 그 바위로 가봤더니 오색영롱한 광채와 함께 아기가 있더라. 놀라워라, 삼신할머니가 도우셨구나. 이것도 쓴웃음을 부르는 ‘클리셰’이다. 오늘날에는 어떻게 달라졌을까? 나는 갑자기 정신이 혼미해진다.
더러는 사실을 있는 그대로 드러낼 수 없는 사정이 있어. 비밀로 꼭꼭 숨겨야 할 정도의 일이야 아니더라도 과거의 상처를 건드려 좋을 게 뭐 있나. 그래도 아이를 버리지는 않았지 않느냐. 다 그럴 만한 사연이 있으려니. 나도 더 캐묻지 않는다. 이를테면 이웃집 할머니가 여태까지 혼인도 않고 수양딸을 데리고 살았다는데, 실지로는 그게 친딸이 아닐까 의심스럽기는 해도, 굳이 이걸 확인하려 들지 않는다. 이러는 게 인간의 도리가 아닌가도 싶어. 하물며 내가 긁어 부스럼을 만들까 보냐.
자식은 죄가 없다. 어휴! 그래, 어머니가 문제의 중심이었다 하자. 그런들 누가 돌을 던지랴. 또 아기는 어쩌고? 이렇게 얼렁뚱땅 수습하자는 것도 상당한 이해력을 기반으로 한다. 아무개의 출생에 곡절이야 있을 수 있어. 그렇기로 오로지 특정인만 다리 밑에서 주워왔다고 하면, 그 녀석도 서러울 것이다. 그러나 이것도 여럿이면 견딜 만하다. 설령 어른들의 희롱이 그저 떠벌리는 망발이었을 뿐이지 사려 깊은 말씀은 아니었다 하더라도, 이게 신통방통 쓸모가 있다.
이와는 배경이 조금 다른 경우도 있다. 호랑이가 담배 먹고 토끼가 방아 찧던 시절에 산골 총각이 나무 아래에서 낮잠을 자다가 낯선 사내들한테 보쌈을 당해 잡혀갔는데, 밤중 어딘가에 막상 도착하고 보니, 절세가인이 나타나 곱게 절을 하며 동침을 간청하더라. 그래서 잠시 황홀한 시간을 보내고, 다시 보쌈을 당해 원래 자리로 돌아왔다더라. 곳곳에 널린 이런 민담도 맥락을 따져보면, 그리 괴이하지 않다. 여기는 아기의 부재가 걱정거리였다. 그렇지, 누군가는 절박한 상황에 직면했던 거야.
요즘은 잠결에 총각이 잡혀갈 일이 없다. 차라리 광화문광장에서 구미호를 봤다거나 청도 유등지에서 우렁이각시를 만났다고 해라. 시대가 달라졌다. 그러나 과학기술이 해결할 수 없는 인간사들도 많다. 어쩌면 문명의 불빛 아래 더 짙은 어둠이 있는지도 몰라. 대대손손 내려왔던 향촌이 사라지자, 아이들도 뿔뿔이 흩어졌다. 누군가의 묵인과 방조로 고아 아닌 고아도 생겨났다. 어이가 없다. 헤이그국제아동입양협약조차 비준하지 않고 ‘국제입양’이라니. 대한민국이 책무를 패대기쳤다.
아이가 젖병을 물고 자신의 의지와 무관하게 미국으로 입양을 갔으나, 성인이 되자마자 더러는 바로 이 나라에서 추방을 당했다. ‘당신은 불법체류자요.’ 어쩌다 국적의 취득 여부가 양부모의 손에 달렸던 탓이다. 그렇다고 미국의 공직자들이 꼭 엉터리여서도 아니다. ‘저들이 정말 고아들을 보내는 것인가? 아이들을 납치해서 팔아먹는 것인가?’ 역지사지를 해보라. 자신들이 상대하는 입양기관이 의심스럽지 않겠는가? 한국정부가 적절하게 감독하고 적법하게 보증하는 역할을 했어야 했다. 아직도 피눈물이 강을 이룬다.
국적은 대한민국이다. 외모로 보더라도 그냥 한국인이다. 그러나 한국어를 모른다. 오로지 영어만 안다. 이런 사람이 한국인으로 한국에서 살아야 한다. 괜찮을까? 그렇지 않다. 마치 악몽처럼 암담하다. 자신이 지금까지 써왔던 언어가 도리어 낙인인 듯하다. 그런가 하면 유럽의 나라들로 흩어진 아이들도 결코 녹록하지 않았다. 양부모들이라고 다 천사더냐. 아이들은 이들에게 마음에 없는 감사를 표해야 했다. 이게 또 상처로 남는다. 인간이 멀쩡하기 어렵다. 골병이 든다, 골병이 들어.
나는 자질로 보나 경력으로 보나 그저 그렇고 그래서, 주장하는 바도 별스럽지 않다. 세상을 파악하는 방식도 단순하다. 누구 말마따나 마치 가축시장에서 소나 돼지를 고르는 듯하다. 동물의 신체 중 꼬리나 터럭이 말단이다. 여기에 주목한다. 인간사회라고 다를까. 나는 빈자나 병자 등등의 약자들이 궁금하다. 이들의 상태로 공동체의 건강성을 짐작한다. 도로나 항만 또 통신 등등의 눈에 보이는 인프라만큼이나, 비록 눈에 보이지는 않으나 널리 통하는 관습이 실상을 오롯이 드러낸다고 믿어.
무슨 일이든 회피하기로 작정하면, 이것도 어렵지 않다. ‘아, 그건 어디까지나 담당자들이나 전문가들 소관사이지, 내가 관여할 바 아니야.’ 정말 그럴까? 아니지. 그렇다고 이들이 쉬이 물러나지도 않는다. 그러면 그 담당자들이나 전문가들인들 변명거리가 없을까? 누가 봐도 빤한 일조차 이런저런 이유들로 그득하다. 자신도 안타깝다나 뭐라나. 실속은 없어도 언변은 화려하다. 이들이 이렇게나 선량할 수가 없는데, 이 부조리는 또 뭐냐? 급기야 의혹이 뭉게뭉게 피어난다.
“혹시 저것들이 뒷거래로 도적질이라도 하는 게 아닐까?”
이러자 사방에서 비방이 쏟아진다.
“거, 세상을 꼭 그렇게 삐딱하게 보나?”
아무개가 ‘불순한 인물’이 되는 것도 순식간이다.
‘어? 이게 아닌데?’
과연 이 사회에도 어둠이 있다. 무엇보다도 흉악무도한 자들이 활개를 친다. 그래도 설마 오탁악세이기만 하랴. 이런 믿음마저 종종 흔들린다. 저들이 너무나 후안무치하다. 어쩌면 나 홀로 근거도 없이 자신을 속이는지도 몰라. 어둠이 짙은 만큼 새벽이 가까운 거라고? 제발 그랬으면 좋겠다. 사람이 평생에 걸쳐 한두 차례만 겪어도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 일들을 오늘날 우리들이 다반사로 겪는 게 아닐까 싶다. 마침내 인간들이 너나없이 무뎌져서 주변의 웬만한 참상에는 미동조차 하지 않는다.
그렇다고 크게 실망할 건 없다. 상상력이 빈약한 자들이나 함부로 자포자기를 하지. 무엇이 내 시야에 들어오지 않는다고 해서 그게 존재하지 않는 건 아니다. 그러므로 저마다 깜냥대로 시도하자. 실패도 많을 거다. 그렇다고 이게 무의미하랴. 지금 자신의 역량이 미약하다고 한탄할 것도 없다. ‘도대체 헤이그국제아동입양협약이란 게 뭐요? 아무개가 왜 저래요?’ 일반인들이 당장 이런 질문만 몇 차례 던져도 수많은 불상사들을 막을 것이다. 밀실의 짬짜미도 저절로 사라질 것이다.
중생의 잡설도 들을 만하다. 횡설수설에도 애틋함이 있으니까. 그러고 보면 말이나 글이 달빛이기도 하고 물결이기도 하다. 실체가 어떤지도 모르는 틈바구니에 끼어버린 삶이 비일비재하다. 각자가 살아보자고 발버둥을 쳤다. 내가 감히 뭘 이해한다거나 응원한다고 할 수 있으랴. 어울리지 않아. 자격도 없어. 이러다가 문득 되돌아본 내 모습 또한 측은하다. 그리하여 나는 이렇게 틈바구니를 스쳐지나가는 바람이고자 한다. 바람은 형체가 없다. 이런 바람이 소리를 낸다. 이 소리가 어디로 가 닿으려나.
후대에야 우스울지라도 당대에는 그저 그러려니 하는 이상향이 있다. ‘저 푸른 초원 위에 그림 같은 집을 짓고…….’ 산업국가로 탈바꿈한 오늘날에는 이런 노래가 심드렁하겠으나, 한때는 그렇지 않았다. 환경이 급변했다. 여유가 없어. 그러면서도 정작 미래의 그림은 잘 그려지지가 않아. ‘에라, 일단 푹 쉬자. 이런다고 벼락이 떨어지랴.’ 그러나 이건 꼰대들의 오지랖이어라. 청춘들은 자신들을 혹사하느라 여념이 없다. 아무쪼록 틈바구니 바람소리가 이들에게도 잠시나마 들리기를!
[2023.5.15.]
한국작가회의 회보 2023년 여름호 통권 140호
첫댓글 입양하는 이유가 다 그렇지는 않지만 정부에서 돈을 주니까 한다는 입양아들의 이야기에 깜짝 놀랐습니다. 서정적인 작품도 있어야겠지만 이런 시사적인 작품도 많이 나오길 기대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