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라이트 안병직, 이번엔 '독도 망언' 파문
"일본, 독도 자기 것이라고 주장할 법적-사료적 근거 있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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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안부 강제동원 증거 없다"는 등의 망언으로 유명한 안병직 뉴라이트재단 이사장이 15일 일본의 독도 도발과 관련 "사실 일본도 일본 것이라고 주장할만한 그들 나름대로의 근거를 가지고 있다"고 주장, 파문이 일고 있다.
문제의 발언은 안 이사장이 이날 저녁 CBS라디오 '시사자키 고성국입니다'와의 인터뷰를 하는 과정에 나왔다.
안 이사장은 일본의 독도 도발에 대해 "일본이나 한국이나 자기가 주권을 가지고 있다고 주장하는 나라에서는 상대방이 우리 것이라고 얘기하면 우리도 우리 것이라고 얘기하는 게 당연하다"며 "그런데 이것이 여론화돼서 일본사회나 한국사회에서 시끄러워지면 독도가 국제분쟁지화가 된다. 국제분쟁지화가 되면 우리에게 이로울 게 없다"며 예의 '조용한 대응'을 촉구했다.
독도본부는 이와 관련 일본정부의 공작으로 국내 친일세력이 '조용한 대응'을 주장하며 일본의 독도침탈을 돕고 있다고 질타한 바 있다.
안 이사장의 문제 발언은 이어 나왔다. 그는 "왜냐면 우리는 사실상 독도를 실효적으로 지배하고 있다. 그런 상황에서 독도가 역사적으로 우리 것이라는 게 완전히 증명되면 우리가 자꾸 주장하면 좋지만, 사실 일본도 일본 것이라고 주장할만한 그들 나름대로의 근거를 가지고 있다"고 말했다.
그는 여기서 더 나아가 "그럼 현재 상황은 우리나라가 반드시 일본보다 법률적, 사료적 증거가 많다고 꼭 주장할 수가 없다"고 말하기까지 했다.
이는 해석하기에 따라선, 법률적-사료적 증거가 많지 않음에도 우리나라가 단지 '실효적 지배'를 하고 있을 뿐이란 일본정부의 주장과 맥을 같이 하는 주장으로도 볼 수 있는 망언이다.
그는 이명박 대통령의 어설픈 실용주의 외교가 이번 사태를 초래했다는 지적에 대해서도 "그렇지 않다. 냉정하게 말하면 독도 문제는 한일관계에 문제가 되는 수많은 문제 중 한 가지에 불과하다. 앞으로 한국이 발전하는 데 일본과 협조해야 할 일들이 많은데, 과거 정권들은 독도 문제에 발목 잡혀서 실질적으로 적극적인 협조를 해서 우리에게 이익이 되는 것까지를 못해냈다"며 "그러니까 앞으로 우리가 국제적인 협력을 해서 우리 사회를 좋게 만들려면 해결될 전망이 없는 문제를 자꾸 클로즈업시켜서 우리의 선진화라는 큰 국정방향마저도 그르치는 어리석은 짓을 해선 안 된다"며 독도 도발에도 불구하고 일본과 협력을 계속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는 "우리와는 독도 문제가 있고, 중국과 일본 사이에도 조어도 문제가 있다. 양국에서 항상 떠든다. 전후에 계속 떠들었는데도 그것도 양국에서 해결이 안 된다"며 "그러니까 그걸 떠들어서 양국이 자기들의 발전을 위해 국제협력을 해야 할 것까지도 안 해야 하느냐, 그렇지 않으면 그 문제는 궁극적으로 해결이 어려우니까 당분간 덮어두고 협력할 건 협력하느냐의 선택의 문제가 있다"며 거듭 일본과의 협력 필요성을 강조했다.
그는 일본의 이번 도발에 대해서도 "우리도 지금 독도가 우리 것이라고 주장을 하고 있다. 우리도 우리 교과서에 다 올라가 있을 것이다. 일본도 독도가 일본 것이라는 걸 교과서에 올리는 것도 아니고 교과서 지도요령에 표기하겠다는 정도의 얘기"라며 일본 도발의 의의를 애써 축소하며 "그걸 가지고 우리가 큰 난리가 난 것처럼 반응하면 말려들어가는 것"이라며 일본정부와 마찬가지로 '냉정한 대응'을 촉구했다.
지난 5월까지 한나라당 여의도연구소 이사장을 맡았던 안 이사장은 '식민지근대화론' 등 식민사관의 대표적 주창자로 그동안 "위안부 강제동원 증거는 없다" "일본식민지 시대에 한국이 근대화됐다"는 등 여러차례 친일 망언으로 물의를 빚어왔던 인사다. 그는 또한 식민사관에 기초한
뉴라이트교과서 제작에도 그의 수제자인 뉴라이트 이영훈 서울대교수를 통해 깊숙한 영향력을 행사해왔다.
이름 : 안병직(安秉直)
출생일자 : 1936년 6월 28일
출생지 : 경남 함안
- 부산공고
- 서울대 경제학과 졸업
- 서울대 대학원 경제학 석사
- 서울대학교 명예교수
- 뉴라이트재단 이사장
- 한나라당 여의도연구소 :
- 2007년 ~ 현재 : 한나라당 여의도연구소 이사장
- 2006년 ~ 현재 : 뉴라이트재단 초대 이사장
- 2002년 ~ 현재 : 일본 후쿠이 현립대학 대학원 특임교수
- 2001년 ~ 현재 : 서울대 명예교수
- 1990년 ~ 1992년 : 서울대 경제연구소 소장
- 1986년 ~ 1987년 : 일본 동경대 경제학부 교수
- 1965년 ~ 2001년 : 서울대 사회과학대 경제학부 교수
* 일본 도요타재단의 학술지원을 받으면서 일제시대가 한국 근대화의 기틀이라 주장하는 '식민지 근대화론' 주장.
도요타재단과 식민지 근대화론
안병직은 1987년 10월경 도요타재단의 '한국의 경제발전에 관한 역사적 연구'에 참여하여 두차례에 걸쳐 자금지원을 받았으며 일본학자들과 공동으로 1989년 '근대조선의 경제구조'라는 책을 냈고 1992년에는 '근대조선 수리조합연구'라는 책을 펴냈다.
일본내 우익집단들의 자금원 역할을 하는 도요타재단은 한국에서 87년 민주항쟁을 통해 경제적 발전 뿐만 아니라 정치적 민주화를 이뤄내는 것을 보고 그 이유를 일제의 식민지지배에서 찾고자 했다. 이들의 연구 지원 목적은 조선이 자체적인 발전 동인이 없었는데 한국이 이만큼 발전한 것은 결국 조선과 대한민국 사이에 존재했던 일본제국주의의 역할이 있었기 때문이라는 걸 증명하고자한 것이다.
안병직은 제자였던 이영훈교수 등 소위 낙성대경제연구소의 멤버들을 이끌고 연구에 참여하였고 도요타재단이 요구하는 답을 충실하게 내어놓았다. 일제시대에 광범위한 강제 수탈은 없었으며 일제가 시행한 각종 토지개혁과 산업화의 영향으로 식민지조선의 근대화가 가능했다는 주장이다. '일본제국주의의 침략지배는 강제적이거나 폭압적이지 않았으며 결과적으로 식민지 국가들의 근대화와 산업사회로의 발전을 이끌어냈다'는 일본 우익의 제국주의적 대동아경영 이론과 관점을 그대로 답습하고
한국의 뉴라이트
배경
한국의 뉴라이트는 2004년 자유주의연대로 출범하여, 2007년 뉴라이트 전국연합으로 바뀌게 된다.
하지만 다른나라의 뉴라이트와는 달리 이념적 색체를 강하게 내포하며, 출범시에는 중도적 보수로
시작하였지만, 현재는 극보수 반진보의 극단적인 대립단체로 보여진다.
주요 인사로는 박근혜 전대표, 안병직 소장, 신지호 교수, 김진홍 목사, 유인촌 장관,
임헌조 사무처장, 나경원 국회의원... 그리고 이명박 대통령이 있다.
뉴라이트 전국연합의 실체
위의 글을 보면, 뉴라이트가 이명박정부의 정책과 맞아 떨어지며, 이명박을 보좌하는 단체임을
쉽게 알 수 있다. 하지만 뉴라이트 전국연합의 이념적 배경과 이익추구 방향을 보면 단지 그 뿐만이
아닌 점을 알 수 있다. 뉴라이트의 특징은 다음과 같다.
(1) 극단적인 친일세력
뉴라이트는 친일세력을 등에 업은 기득권 정치세력으로 볼 수 있다. 이들은 일제시대로 인하여
한국의 시장경제와 자본주의가 정비되었다고 평가하고 있으며, 일제강점기가 우리 근대사의
큰 발전을 가져왔다고 평가하며 이에 감사해야 한다고 말한다.
또한, 종군위안부는 강제적인 것이 아닌 자발적인 매춘이며, 안중근 의사가 테러리스트라는
비상식적 주장까지 하고 있다. 이는 대표적 친일파인 이병도의 식민사관을 그대로 이어받은
것이라 할 수 있겠다.
우리의 근대사를 바라보는 관점도 매우 놀랍다. 지배 기득권에 빌붙은 친일파이었기 때문에
이런 관점이 나올 수 있는 듯 하다. 이들은 5.16쿠테타는 성스러운 혁명이며, 5.18민주화운동이나
각종 민주항쟁을 친북 세력에 이한 좌파 빨갱이들의 폭동이라고 말하고 있다.
또한 이러한 친일, 매국적인 이념을 ‘대안교과서’라는 책으로 나타내었는대, 이는 한국의 교과서는
좌파 빨갱이적인 성향이 강해, 한국의 근현대사를 친일적인 내용으로 바꿔야 한다는 것이다.
(2) 반민족적 성향
뉴라이트는 북한을 타도의 대상으로 보며, 통일을 반대하는 것으로도 유명하다.
그들은 기본적으로 남북교류는 중지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고, 이명박은 이를 받아들여
현재 북한과의 교류가 중단 된 상태이다.
이들은 평화적 통일이 아닌, 북한의 체제 붕괴로 인한 흡수를 원하고 있는대, 그 이후의 대안이
가관이다.북한을 같은 민족으로서 동등한 입장으로 보는 것이 아닌, 한-미-일 공동 관리 체제로
하자는 것이다. 즉, 북한을 한-미-일 3국의 공동식민지 같은 모습으로 그리고 있는 것이다.
(3) 이명박에 대한 맹목적인 지지
사실, 자신들의 표면적 대리인인 이명박에 대한 그들의 맹목적인 지지는 당연한 것이다.
이들은 지난 대선을 선거혁명, 시민혁명으로 칭하며, 10년만에 보수정권이 들어선 것을 세계사에
드문 기적으로 평가하고 있다. 또한, 김대중, 노무현 정부를 좌파정권이라 칭하며, 좌파는 국가와
민족을 팔아먹는 매국노라고 말한다. 또한 보수정권으로 바뀐 현재의 흐름을 사회정화운동이자
도덕성 재무장 운동이라고 주장한다.
이는 뉴라이트가 스스로 시민운동단체라고 말하지만, 극단적 정치단체임을 보여주고 있다.
(4) 정계, 재계 진출에 대한 야망
뉴라이트는 시민운동단체를 표방하고 있지만, 회원들의 정계나 사회단체 진출을 독려하는
태도를 보인다. 이들은 자체에서 정계로 진출할 회원을 신청 받아, 한나라당에 추천하고 있다.
이러한 뉴라이트 출신의 인사들은 우리 사회 전반에 널리 퍼져 있다.
사실 이들의 영향력은 막강하여, 유인촌 장관의 경우 이명박이 면접도 보지 않고 선임한
것으로 유명하다. 물론 유인촌이 뉴라이트이므로 안면이 있었을 것이지만 말이다.
위에서 본 대로 이들은 그들의 주장인 시민운동단체와는 거리가 멀다. 또한 보수도 아니다.
보수와 진보는 상호보완을 하는 이념이고, 어느 한 쪽도 비하되어서는 안 되는 이념이다.
이들은 보수도 진보도 아니며, 우파도 좌파도 아니다. 단지, 보수우파를 가장한
친일매국단체라고 보면 될 것이다.
3. 주요회원 명단
이명박 대통령
박근혜 한나라당 전대표
강재섭 한나라당 전대표
홍준표 한나라당 대표
이상득 국회의원(이명박 형)
유인촌 문화부 장관
나경원 국회의원 (이완용 후손 이윤형의 땅찾기 재판당시 관할 판사)
-> 승소한 1심에서 서울 서대문구 북아현동 545일대 712평(시가30억)을 넘겨줌
박진 한나라당 국제의원장
이영훈 서울대 교수
김태련 이화여대 교수(아이코리아 대표)
박효종 서울대 교수(한국국민윤리학회 회장)
신지호 서강대 교수(국회의원)
홍진표 자유주의연대 사무총장
임헌조 사무처장
최홍재 전 조직위원장(시사만화가)
안병직 여의도연구소 소장(뉴라이트 이사장, 후쿠이대학원 특임교수)
유세희 한양대 교수
김진홍 뉴라이트 현대표(목사,대통령직 인수위원회 자문위원)
윤창현 서울시립대 교수
김종석 한국경제연구원 원장(홍익대 교수)
김영호 성신여대 교수
이평기 자유교원조합 위원장
우봉식 의료와 사회포럼 사무총장
제성호 중앙대 교수(전 뉴라이트 공동대표)
권용목 뉴라이트노동연합 대표
두영택 뉴라이트교사연합 대표
정정택 뉴라이트안보연합 대표
장산 대각사 주지스님
박세일 서울대학원 교수
나성린 한양대 교수(국회의원)
박건우 전 한국도요타 회장
도준호 조선일보 논설위원
박범진 건국60주년 위원
이성림 문화예술단체총연합회 회장(대통령직인수위원회 자문위원)
조희문 인하대 교수
박범훈 중앙대 총장(대통령직 인수위원회)
박상하 전 대한체육회 수석부회장
복거일 문화미래포럼 대표(작가)
정정산 영화감독
신경수 전 붉은악마 대의원 의장
신국환 전국회의원
뉴라이트 "MB는 박정희 이후 최고 대통령이 될 것이다!!"
뉴라이트전국연합 상임의장을 지낸 김진홍 목사(두레교회)는 “이명박 대통령은 박정희 전 대통령 이후 최고의 대통령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김 목사는 ‘요즘 좌파와 야권은 물론이고 우파인사들과 보수신문들까지 연일 이 대통령을 질타하고 있다’는 질문에는 “이 대통령이 기대에 못 미친다고 생각하는 건데, 대통령의 일하는 솜씨가 시간이 좀 걸린다”며 “금년 들어 페이스를 찾기 시작했으니 내년에는 확실히 좋아질 거고 퇴임할 때는 좋은 대통령으로 박수 받고 나갈 것으로 100% 확신한다”고 말했다.
http://coldice.egloos.com/2373922
강재섭 한나라당 전대표
"뉴라이트와 한나라당은 생각이 똑같다"
한나라당 박근혜 전 대표(2008 뉴라이트 한국 보고서'의 출판기념회장에서)
"퇴행과 혼란의 역사에 마침표를 찍을 때가 됐다"
"비판하는 일은 어렵지 않을 수 있지만 직접 참여해 현실적 대안을 제시하는 건 어렵다.
그런 의미에서 뉴라이트는 정말 소중한 일을 했다. 여러분의 나라 사랑 마음에
경의를 표한다"
유기준 전 한나라당 대변인
"뉴라이트의 역사교과서는 한국 근현대사를 새롭게 인식해 나가는 과정으로 학문의
진일보로 평가할 수 있다."
안병직 서울대 명예교수
-뉴라이트 재단 이사장 & 현 한나라당 여의도연구소 이사장
-낙성대경제연구소 전임 소장
-일본 후쿠이 현립대 교수,
-일본 교토대학교수 중촌철(中村哲)의 이론인 "식민지근대화론"의 전도사
"위안부 강제동원했다는 객관적인 자료는 하나도 없다."
"위안부 영업자의 절반은 조선 사람이었다. 그들이 무슨 권력이 있어 동원했겠느냐."
"지배는 지배고 연구는 연구다. 강제지배를 하니까 연구가 안된다 그러면 말이 안되니까…."
"오늘날 우리가 행복할 조건을 과거에 침략한 사람이 해주면 거부할 이유는 없다."
"일제시대 때 위안부 강제동원 증거는 없으며 토지수탈도 없었다"
"노무현 정권은 거꾸로 간다. 우리가 협력하면 국가가 잘 될 수 있는 방향이 얼마든지
있는데 독도 문제니 야스쿠니 문제라든지 아무 것도 해결될 전망이 없는 문제를 가지고
수년간 내내 싸움한다"
안병직 "위안부 강제동원 없어" 또 망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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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한 MBC에 항의 빗발…"안 이사장 일본에 보내라" |
정말 부끄럽습니다.
이런 사람이 대한민국 국민이라는게...
"위안부 강제동원했다는 객관적인 자료는 하나도 없다."
"위안부 영업자의 절반은 조선 사람이었다. 그들이 무슨 권력이 있어 동원했겠느냐."
"지배는 지배고 연구는 연구다. 강제지배를 하니까 연구가 안된다 그러면 말이 안되니까…."
"오늘날 우리가 행복할 조건을 과거에 침략한 사람이 해주면 거부할 이유는 없다."
“일제시대 때 위안부 강제동원 증거는 없으며 토지수탈도 없었다”
"노무현 정권은 거꾸로 간다. 우리가 협력하면 국가가 잘 될 수 있는 방향이 얼마든지 있는데 독도 문제니 야스쿠니 문제라든지 아무 것도 해결될 전망이 없는 문제를 가지고 수년간 내내 싸움한다"
“참여정부는 건달정부”
이같은 말은 일본 학자들이 한 게 아니다. 우리나라 대표적인 학계인사라는 사람이 방송사에 출연해서 대놓고 한 얘기다.
안병직 뉴라이트재단 이사장은 6일 MBC <뉴스현장> '뉴스초점' 코너에 출연해 황헌 앵커와의 인터뷰에서 이 같이 말했다. 인터뷰가 진행되는 동안 황 앵커는 당혹스러움을 감추지 못했고, 인터뷰 뒤에는 MBC 제작진을 향해 시청자들의 항의전화가 빗발쳤다.
인터뷰 뒤 MBC에 항의전화 빗발
MBC 제작진은 "인터뷰 이후 수많은 항의전화가 걸려왔다. 제작진에 대한 격려전화도 있었지만 대부분은 '그런 사람이 어떻게 역사를 지도하느냐' '어떻게 그런 생각을 가질 수 있느냐' '아예 일본으로 보내라'는 내용이었다"고 밝혔다.
MBC는 안 이사장을 섭외한 이유에 대해 "교과서포럼에서 4·19 단체와의 불편한 관계도 있었고, 전날 오마이뉴스와의 인터뷰 및 반대학자들의 칼럼과 언론보도도 이어져 뉴스의 중심에 있는 인물이라고 생각돼 출연시키기로 했다"며 "인터뷰한 내용만으로도 충분히 이 사람들이 한국 근현대사에 대해 역사 어떤 생각을 가지고 있는지 보여줬다고 본다"고 덧붙였다.
안 이사장은 인터뷰에서 토지수탈은 없었다는 근거로 "전국 각지에 남아있는 토지조사부나 분쟁지 자료, 지적도를 10년에 걸쳐 검토한 결과 수탈 가능성이 있는 분쟁지는 극히 소수였다"며 "왕실 소유의 궁장토를 조선총독부 소유로 귀결시켰는데 그걸 가지고 수탈이라고 하는 것은 문제가 있다"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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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황헌 앵커가 6일 MBC <뉴스현장>에 출연한 안병직 뉴라이트재단 이사장을 인터뷰하고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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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BC "뉴스중심 인물이기에 인터뷰"
또, 위안부의 강제동원이 없었다는 주장의 근거로 안 이사장은 "일부 위안부 경험자의 증언은 있으나 한국이고 일본이고 객관적인 자료는 하나도 없다"며 "현재 한국에도 위안부가 많지 않느냐. 소위 사창굴이라는. 그런 일이 왜 발생하는가 하는 원인에 대해 정확하게 연구가 돼야한다. '무조건 강제에 의해 그런 현상이 일어난다' 이러면 강제만 없으면 그런 현상이 없어져야 되지 않느냐"고 말했다.
이에 대해 황 앵커는 "증언은 있는데 기록이나 자료가 없다고 해서 강제성에 대해 평가나 판정을 유보해버리면 심각한 오류가 아니냐"고 문제를 제기했다.
안 이사장은 "그것은 객관적 역사적 사실이다. 위안부를 동원해 영업을 한 사람이 있다. 이들 중 조선인이 절반을 넘는다. 조선인이 무슨 권력을 가지고 자기가 강제력을 동원했겠느냐"며 "내가 3년간 정대협에서 활동하다 그만뒀다. 그 사람들이 위안부 문제를 반일운동의 수단으로 하고 있어서 무슨 의미가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어서 빠졌다"고 말했다.
'일제시대에 연구가 제대로 안되지 않느냐'는 황 앵커의 질문에 안 이사장은 "연구는 연구고, 지배는 지배고 그렇지, 그걸 갖다 강제지배를 하니까 연구가 안된다, 그러면 말이 안된다"며 "박정희씨 통치 때는 유신해서 권위주의 정부를 만들어 얼마든지 탄압했다. (그 때도) 얼마든지 연구했다. 탄압이 있다고 자유로운 연구가 불가능하다는 가설이 어딨느냐"고 주장했다.
안병직 "침략자가 행복하게 해주면 거부할 이유 없어" 망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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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MBC 황헌 앵커가 6일 <뉴스현장>에 출연한 안병직 이사장의 주장에 당혹스러워하고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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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일 관계 개선을 위해 과거 침략에 대한 일본의 사과와 반성이 있어야 한다는 지적에 대해서도 안 이사장은 "과거에 얼마든지 당한 사람들도 오늘날 자기가 행복할 수 있는 조건을 과거에 침략한 사람이 해주면 그것까지 거부할 이유는 없다고 생각한다"며 "현재 우리 이웃에 어려운 사람들이 많거든. 그런 것을 없애기 위해 한일관계를 어떻게 가져가야 되느냐를 생각해하는 것이 국가를 이끌고 가는 책임있는 사람들의 자세다"라고 했다.
안 이사장은 이어 "노무현 정권은 거꾸로 간다. 우리가 협력하면 국가가 잘 될 수 있는 방향이 얼마든지 있는데 독도 문제니 야스쿠니 문제라든지 아무 것도 해결될 전망이 없는 문제를 가지고 수년간 내내 싸움한다"며 "이런 짓을 하지 말라는 게 제가 말씀드리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5·16이 쿠데타인가'라는 질문에 안 교수는 "쿠데타"라고 했다가 다시 "5·16을 계기로 해서 경제발전이 일어났으니까. 5·16을 쿠데타로 표현하지 않고 현재 교과서에서 군사정변으로 조금 낮게 평가한 이유는 그것 때문이다.
김문수 박근혜 오세훈 나경원
박근혜 "뉴라이트와 한나라당의 길 다르지 않다"
7일 오후 프레스센터 국제회의장에서 열린 '뉴라이트 전국연합 창립대회'에서 박근혜 한나라당 대표와 김진홍 상임의장이 악수를 하고 있다.
서울대 이영훈 교수
-2004.09.02 MBC 백분토론에서 <위안부 공창론> 주창
-안병직의 제자
-현 낙성대경제연구소장
"정신대, 자발적 참여"
이주영 건국대 교수
-뉴라이트 역사 교과서 집필참여
"개화파 일부는 친일행위 혐의가 있지만 문명사적 전환의 시대에 그들이 담당한
긍정적 역할에 비추어 관대하게 받아들여져야 한다"
한승조(韓昇助)
-고려대 명예교수 & 자유시민연대 공동대표
-일본 시마네현 독도사태파문(2005.01.14~)으로 명예교수에서 물러남
-<공산주의·좌파사상에 기인한 친일파 단죄의 어리석음-한일병합을 재평가하자>
---> 2005년 3월 4일 일본 시사월간지 <정론(正論)>에 기고한 발표문
"식민지 지배는 축복"
왼쪽부터 매국노 이완용. 이완용의 질손인 민족반역자 이병도.
이병도의 손자인 이장무 서울대총장.
할아버지 이병도의 후광으로 사학계에서 활동하는 이건무 전 국립중앙박물관장.
현 고고학회 회장 겸 용인대 교수
<친일 청산법>
- 과거 친일파가 부당한 방법으로 착복하여 그 후손에게 물려준 토지 등의 불법적인
재산을 환수하여, 국가 반역에 대한 최소한의 조치는 취하겠다는 법안
노무현-친일청산법 제시 VS 한나라당-친일청산법 반대
17대 친일파 재산환수법 찬성 서명자 현황
(1) 열린우리당 : 149명중 149명 전원 서명
(2) 민주노동당 : 10명중 10명 전원 서명
(3) 한나라당 : 121명중 6명 서명
(4) 민주당 : 9명중 3명 서명
17대 친일파 재산환수법 입법 현황
(1) 열린우리당 : 100% 전원 찬성표
(2) 민주노동당 : 100% 전원 찬성표
(3) 민주당 : 100% 전원 찬성표
(4) 한나라당 : 100% 전원 반대(아예 입법을 막기 위해 국회에 전원 불참함)
이명박 " 5년뒤 똑같은 모습으로 다가가겠다" (뉴라이트 송년회 참석연설)
이명박 대통령 당선자는 22일 대선때 적극적 지원활동을 펼쳐준 뉴라이트전국연합에
대해 감사를 표시했다.
이 당선자는 이날 저녁 서울 서대문구 한 호텔에서 열린 '2007 뉴라이트전국연합
송년의 밤' 행사장을 방문해 "뉴라이트 안에 불교도 있는데 종단을 초월해 지지해 줘
감사드린다"며 고마움을 표시했다.
이 당선자는 특히 김진홍 뉴라이트 상임의장에 대해 "정치 쪽에 와서 도와준 것에
대해 감사하다"며 "의장님이 힘들고 지쳤을 때마다 사모님이 운전기사 등으로
내조를 잘 해주셔서 여기까지 올 수 있었다고 생각한다"며 김 의장 부인에게도
감사를 표시했다.
그는 참석자들에게 "내가 5년동안 유별나게 할 것은 아니고 일을 열심히 하되
5년 전이나 5년 후나 똑같은 모습으로 여러분에게 다가가겠다"고 약속했다.
이 당선자는 이날 공식행사가 시작되기 직전 수행원 등과 행사장을 찾아 단상에서
10분 남짓 감사 발언을 한 뒤 자리를 떴으며 김진홍 의장을 비롯해 이석연 변호사,
서정갑 국민행동본부장, 허준영 전 경찰청장 등 참석자 200여명은 박수로 환영했다.
뉴라이트 "어떻게 뽑은 이명박인데"
이명박 대통령 당선자를 대상으로 하는 'BBK 특검법'이 26일 국무회의에서 의결되자
17만 회원을 거느린 우파 단체 뉴라이트전국연합(상임의장 김진홍)이 법과 절차를
무시한 특검을 증단하라고 요구했다.
전국연합은 27일 성명을 통해 "'이명박 특검'은 법과 절차를 무시한 명백한 오류이기
때문에 계속 하면 안된다"며 "대통합민주신당은 '이명박 특검'을 한나라당과
국회 법사위에서 논의하지 않았고 법과 절차에 따라 처리하지도 않았다.
좌파의 지독함과 우파의 안일함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부분"이라고 말했다.
이어 "16일 이 당선자가 ‘특검법안’을 전격 수용하겠다고 밝히자 다음날인 17일,
신당은 ‘이명박 특검법’에서 언급된 내용과 관련한 진정·고소·고발 사건 및
수사과정에서 인지된 관련 사건을 추가하는 등 대폭 수정했다"며 "이명박 특검’은
누구나 의혹만 제기하면 사실 여부와 관련없이 수사 대상이 무한대로 늘어날 수
있다는 의미"라고 우려했다.
전국연합은 "어떻게 뽑은 당선자인데 이렇게 법과 절차를 무시한 특검법에 당선자를
맡길 것인가"라고 반문한 뒤 "국민의 전폭적 지지를 통해 당선된 당선자를 지켜야
할 우파가 체면과 안일함으로 좌파와 타협하려 한다면 국민도 더 이상 지지를
뉴라이트 "뉴라이트 인사들 정치에 적극 진출해야 한다"
대선 기간 이명박 한나라당 당선자를 적극 지원했던 뉴라이트 진영이 자파 인사들의
적극적 정치권 진출을 공개 주장하고 나섰다. 뉴라이트 주장은 한나라당에 대한 사실상의
공천 요구여서 향후 이 당선자의 대응이 주목된다.
17만명의 회원을 확보하고 있는 뉴라이트전국연합(상임의장 김진홍)은 25일 성명을 통해
"뉴라이트, 안주하면 안 된다"며 "대선에서 우파 후보가 당선된 것으로 끝난 것이 아니다.
이제 시작이다. 아직 ‘이명박 특검법’도 남았고 총선도 남았다"며 뉴라이트의 총선 역할론을
주장했다.
연합은 "뉴라이트 일꾼들은 향후 3가지 길을 갈 것"이라며 "하나는 뉴라이트에 남아
시민운동을 계속하는 것, 다른 하나는 정치쪽으로 진출하는 것, 나머지 하나는 시민운동이나
정치와 다른 본업으로 돌아가는 것이 그것"이라고 말했다.
연합은 우선 시민운동 방향과 관련해선 "시민운동으로는 지난 10년간 뿌리내린 한총련,
전교조 등 좌파를 견제해야 하고 목민정치학교를 통해 정치진출 인력을 길러내고,
제3노총을 통한 노동운동을 전개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연합은 이어 정치진출과 관련해선 "성공하는 정부, 성공하는 대통령을 만들기 위해
능력있고 정치에 관심있는 뉴라이트 일꾼들이 적극 정치쪽으로 진출하여 일해야
할 것"이라며 "아주 똑똑했지만 너무 걱정이 많아 날지 않다가 날개가 퇴화되어 굳어져
버린 키위새 이야기가 있다. 목표를 이루기 위해서는 한계 상황에 도전해야 한다"고
정치권 진출의 당위성을 주장했다.
뉴라이트 진영은 이제까지 김진홍 목사와 제성호 중앙대 교수가 이끄는
'뉴라이트전국연합', 신지호 씨와 안병직 서울대 명예교수의 '자유주의연대',
서경석 목사의 '선진화국민회의' 등 크게 3계파가 이끌어왔으나 올해 중반이후
뉴라이트전국연합으로 사실상 창구가 단일화된 상황이다. 이명박 당선자 역시
휴식중이던 지난 22일 저녁 뉴라이트전국연합 송년의 밤 행사에 참석해 고마움을
김진홍 "이명박을 위해 뉴라이트 시작"
뉴라이트전국연합 김진홍 상임의장은 "이명박이란 좋은 대통령감이 있어 2005년 6월
뉴라이트 운동을 시작했다"고 24일 중앙일보와의 인터뷰에서 밝혔다.
이날 김 의장의 발언은 '커밍아웃'을 한 것이나 다름 없다. 한나라당 경선 기간 중
박근혜 전 대표와 이 당선자 사이에서 '중립'을 강조했던 전국연합이 뒤늦게나마
이 당선자를 지지했음를 공식적으로 인정한 셈이 된 것.
지금은 지난 일이라 크게 문제될 것이 없지만 경선 당시에는 우파 진영에서 이는
제법 심각한 문제였다. 17만여 명의 회원을 거느리고 우파 진영에서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했던 전국연합이 이 당선자를 지지한다는 소문이 돌자 전국연합은 박 전 대표 지지
단체들과 극한 대립상황까지 가기도 했다. 또 내부적으론 '내홍'을 겪으며 일부 회원이
탈퇴를 선언했다. 당시 문제가 커지자 김 의장은 '개인적으로 누구를 지지할 순 있지만
전국연합이라는 이름으로는 중립을 지켜야 한다.
경선 승리자를 지지할 것'이라며 사태를 수습했다.
이 신문에 따르면 김 의장은 "경선 때 지나치게 이 당선자 편을 들 수도 없고
박 전 대표를 비난할 수도 없어 고민이었다"며 "결과적으론 개혁보수 성향인 이 당선자가
승리하는 데 직·간접적 역할을 했다. 이 당선자는 국가 경영 능력에서 어떤 후보보다
탁월하다"고 경선기간 중 이 당선자를 밀었음을 시인했다.
그는 "뉴라이트 태동기부터 이명박 대통령을 염두에 두고 개혁보수 세력이 집권하는 데
기여하자는 그림을 그렸다"며 "사회가 좌편향으로 가는 걸 보고 시대 정신을 개혁 우파로
돌려야겠다고 판단했다. 정권교체의 중심에 이 당선자 같은 일꾼을 세우면 나라가
안정되고 선진국으로 간다는 확신이 있었다"고 말했다.
한편, 김 의장은 이명박 정부에서의 뉴라이트 역할과 관련 "개인적으론 정권에 관여할
일은 전혀 없다"고 단언하면서도 "뉴라이트 일꾼들이 이명박 정권에 많이 참여하길
바란다. 국가 권력 교체에 이어 노동 교육 학생운동 등 사회 전 영역에 걸쳐 개혁 우파가
뉴라이트가 만든 교과서
"일제강점통치는 근대로의 이행과정"
"식민지기에는 일제가 한반도를 영구병합 할 목적으로 근대문명을 강제로 이식하였다.
그렇지만 그 이식은 어디까지나 전통과의 주체적인 집합이었다. 해방 후 대한민국은 이렇게
접합하기 시작한 근대문명을 소중히 보존하고 발전시켰다"(11p)
"당초,조선에 대해서는 모집,관알선의 형식으로 노동력을 동원하다 1944년부터 강제징용"(107p)
---> 35년 40년에 일본에 끌려간 사람은 징용이 아니라고 주장하는 것임
"지원병제를 실시한 첫해에는 3천 명 가량의 지원자에 입소자는 4백 명에 불과했지만
1943년에는 지원자도 30만 명이 넘고 입소자도 6300명에 달했다"(107p)
---> 일제하 1943년 10월 일본은 학병동원에 나섰고 일본의 동원이라는 것은 지원을
명령하고 이에 응하지 않는 학생들은 휴학 처분하고 공장,광산에 징용하였다.
징병이 안되면 징용을 했던 것임
김구 -> "대한민국의 건국에 참여하지 않았다"
<뉴라이트가 만든 교과서의 집필진>
이영훈 서울대 경제학 교수
김용직 성신여대 정치외교학 교수
김영호 성신여대 정치외교학 교수
김재호 전남대 경제학 교수
김일영 성균관대 정치외교학 교수
김세중 연세대 국제관계학 교수
김종석 홍익대 경영학 교수
전상인 서울대 환경대학원 교수
주익종 낙성대경제연구소 연구위원
김광동 나라정책연구원 원장
김영환 시대정신 편집위원
<지난 총선에 정치세력으로 진출을 시도한 뉴라이트 멤버>
한나라당 공천신청자 명단 : 총 17명
조전혁 뉴라이트 정책위원(인천 남동을 공천신청자)
신지호 뉴라이트대표(도봉갑)
최홍재 뉴라이트은평연대(은평갑)
이건찬 뉴라이트청년연합(송파을)
최윤천 뉴라이트전국연합(강동갑)
백병훈 뉴라이트고양연합(고양일산을)
김장희 뉴라이트 경기남양주연합(남양주갑)
김성희 뉴라이트경기안보연합(화성)
박승오 뉴라이트전국연합 군포연합(군포)
유창수 뉴라이트바른정책포럼(용인을)
김기풍 뉴라이트김포연합(김포)
허명환 뉴라이트포항연합(부산진갑)
도회윤 뉴라이트전국연합(부산강서갑)
박상헌 뉴라이트재단(부산강서갑)
이영수 뉴라이트부산연합(부산 사하을)
정스윤 뉴라이트재단(부산 금정)
MB연대 박명환대표(광진 을)
한나라당 공천확정 총 3명
장흥-영암-강진 채경근 (53·광주 전남 뉴라이트 장흥군 대표)
달서을 권용범 (44·뉴라이트전국연합 공동대표)
도봉갑 신지호 (45·자유주의연대 대표)
---> 2006년 11월 자신이 주도했던 '뉴라이트닷컴'은 자유주의연대의 후원으로 전국 주요
도시를 돌며 '해방전후사의 재인식-저자와의 만남'이라는 이영훈 교수의 공개강좌를 개최함.
--->강의 내용 중 "정신대는 일제가 강제동원한 것이 아니라 당사자들이 자발적으로 참여한
상업적 매춘이자 공창제였다"
<친일파의 친미파로의 둔갑, 냉전수구세력으로의 자리매김>
일제 강점 지배에서 해방되면서 38도선이 그어짐으로써 민족분단의 위험이 높아져 갔을 때,
분단위험을 극복하고 통일국가를 건설하려는 정치세력도 있었고, 통일국가가 수립되는 경우
권력을 획득할 가능성이 없을 것을 알고 분단국가 수립을 획책하는 정치세력도 있었다.
남쪽에서는 우리들이 익히 들어 알고 있는 여운형 선생이나 김규식 선생, 그리고 김구 선생 등이
분단위기를 극복하고 통일국가를 건설하려는 인사들이었으며, 이북 정권 역시나 마찬가지의
행보를 밟았다.
한편 분단국가 수립을 획책하는 세력들은 거의 대부분 일제 강점 시대에 민족해방 운동을 탄압하고
일제의 앞잡이 노릇을 했던 세력들이었다. 특히 일제의 강점 지배에 부역하여 그 행정관·경찰관·
사법관·직업군인 등으로 종사했던 세력, 즉 친일세력이 거의 그대로 분단국가의 통치세력으로
자리잡았다.
해방 직후 인민위원회가 각 지방에 수립되어 자주독립국가를 건설하려는 노력이 미군의 탄압으로
인해 무산되고 미군정이 실시되면서 해방 후 한 때 도망갔던 지난날의 친일 행정관료·경찰관료들이
행정일선에 복귀했으며, 여기서 친일세력의 정치세력화가 이루어지게 되었다.
좌·우익을 막론하고 해방운동 세력이 해방 후의 치안을 담당하고 국가건설을 주도할 수 있었다면
반드시 숙청대상이 되었을 친일세력이, 미군정이 성립됨으로써 그대로 정치계·경제계를 장악하게
되었된 것이다.
그 중심에 바로 이승만이란 인물이 있었다. 이승만은 자신의 정치적 야욕, 즉 대통령이 되겠다는
사리사욕에 집착해 미국의 남조선 군정을 지지했을 뿐 아니라 친일파들을 옹호하고 친미분단정권을
세우기 위해 혈안이 되어 있었다. 따라서 친일파들이 과거의 잘못에 대해 뉘우치고 역사적 처벌을
받기는커녕 남조선의 관료·경찰·군대 등의 요직을 차지하며 통일독립국가를 건설하려는 민중의
투쟁을 탄압하고 남쪽만의 단독정부 수립을 위해 모든 수단을 동원하였던 것이며, 그들에게 그러한
역할과 권한을 부여해 주었던 것은 미군정과 이승만 이었던 것이다.
물론 이들이 역사적으로 청산될 수 있는 '위기'를 겪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1947년 6월 미군정의
자문기구로 구성된 '과도정부입법의원'은 반민족행위자들의 입법의원 진출을 막기 위해 입법의원
선거법에 그들의 공민권을 제한했으며, 그 해 7월 반민법의 모태가 되는 '민족반역자, 부일협력자,
모리간상배에 관한 특별법'을 제정하여 반민족행위자들에 대한 처벌문제를 공식적인 법률안으로
제기하였다. 그러나 이 법률안은 친일파를 비호하는 미군정에 의해 공포되지 못한 채 사장되었고,
친일파에 대한 처벌문제는 아무런 성과 없이 이승만 정권으로 넘어가게 되었다.
초대 대통령에 추대된 이승만은 국내에 정치적 기반이 취약하다는 약점을 갖고 있었다.
그는 이러한 약점을 극복하고 자신의 정치세력을 구축하기 위해 친일파들을 포용하여 정부요직에
기용하였다. 그렇기 때문에 국회 내에서 '반민족행위자 처벌을 위한 특별법' 제정 발의가 일게 되자
이승만은 국회와 대립하게 되었다. 이승만 정권은 '반민족행위처벌법'(이하 반민법) 제정 때부터
반민특위의 활동이 종결될 때까지 사사건건 국회에 대해 견제와 방해를 계속했다. 그나마 이렇게
열악한 상황에서 국회가 반민법 제정과 친일파 처리활동을 계속 해 나갈 수 있었던 것은
소장파들이 주도하는 제헌국회 초기의 특성 때문이었다.
어찌 되었건 반민법은 국회가 중심이 되어 친일파 처벌을 다루고 정부는 협조자의 차원에
머무른다는 특징을 갖고 있었는데, 이러한 반민법의 특징은 친일파를 처벌하려는 국회와
친일관료가 주측인 정부가 사사건건 충돌하는 빌미를 제공하게 되었고, 그 충돌은
'정부 내 친일파 숙청건의안'이 국회에서 통과되면서 그 절정에 이르게 된다.
국회가 반민법을 통과시켜 정부로 이송시키자 국무회의는 기다렸다는 듯이 만장일치로
거부를 결의하는 사태로까지 발전하였다. 더욱이 이승만 정권은 반민법을 반대하는 대규모
국민대회를 지원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친일파 처벌에 대한 국민의 절대적 지지는 9월 22일 이승만에게 법률을 공포할 수밖에
없도록 강제했고, 10월 12일 국회는 마침내 반민특위를 구성하였다. 뒤이어 1949년 1월 5일
반민특위는 중앙청 205호실에 사무실을 개설하고 본격적인 활동에 들어갔다.
반민특위의 활동이 시작되자 마자 이승만 정권은 물론이고 사회 곳곳에서 권력을 장악하고 있었던
반민법 해당자들은 반민특위의 활동을 끈질기게 방해하였다. 그 가운데서도 친일경찰의
방해공작은 반민특위 간부들에 대한 중상모략뿐 아니라 군중데모의 선동, 테러, 특위습격 등
다양한 형태로 나타났다. 특위가 완성되면서 친일경찰의 방해공작은 특위위원 암살계획으로까지
치달았다.
1948년 10월 하순 수도경찰청 수사과장 최란수, 사찰과 부과장 홍택희, 전 수사과장 노덕술은
수도청 수사과장실에 모여 반민특위위원 가운데 강경파 의원들을 제거하기로 합의본 후,
전문테러리스트인 백민태에게 암살계획의 실행을 맡겼다.
그러나 백민태는 암살대상인 김병로 특별재판부장, 신익희 국회의장, 김상덕 반민특위원장 등
15명이 너무나 엄청난 인물들이었던 까닭에 검찰에 자수하였다. 그리하여 암살계획은
폭로되었고 모의자들이 구속되어 사건이 일단락지어졌다. 그러나 이 사건은 친일경찰의 저항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비이성적이라는 것을 적나라하게 보여주었다.
한편 반민특위는 '국회 프락치사건'과 이른바 '6·6 사건'을 거치면서 실질적으로 와해되었다.
국회프락치사건이 친일파 척결의 주도세력이었던 소장파 의원들을 위축 분해시켰다면, 6월 6일
발생한 경찰의 반민특위 습격사건인 이른바 6·6 사건은 반민특위를 무력화시켰다.
그렇다면 해방 이후 다시 경찰과 군대의 요직을 담당했던 친일파들의 분포는 어떻게 될까.
<1946년 미군정 당시 경찰에서의 친일파 분포>
직위 1946년 총수 식민경찰출신 비율(%)
치안감 1 1 100
청장 8 5 63
국장 10 8 80
총경 30 25 83
경감 139 104 75
경위 969 806 83
<1956년 현재 주요 부대 지휘관과 일제하 경력>
직위 계급 이름(나이) 일제 경력
육군총참모총장 대장 정일권(37) 만주군 장교
제1군사령관 대장 백선엽(35) 만주군 장교
1군단장 중장 최덕신(42) 중국군 장교
2군단장 중장 함병선(63) 일본군 중사
3군단장 중장 송요찬(37) 일본군 중사
5군단장 중장 최영희(34) 일본군 장교
6군단장 중장 이한림(34) 만주군 장교
제2군사령관 중장 강문봉(34) 만주군 장교
따라서 이들로서는 반민특위를 와해해야 할 충분한 이유가 있었으며, 또한 그럴 수
있는 권한까지 갖고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이들은 분단과 한국 전쟁을 거치면서
냉전수구·반통일세력으로 그 성격을 분명하게 전환하게 된다.
한편 이들 친일파들은 위와 같은 물리적 수단만을 동원한 것이 아니라 이념 논쟁을 통한
'민족 분열주의 공작'을 통해 자신들의 정치적 위기를 모면하려 하였다. 즉 그들은 미군정에
반대하면 매국노이고 반민족세력이며, 미군정에 찬성해야만 애국자이고 민족세력이라는
것이었다. 이러한 공작은 특히 '신탁통치 논쟁'을 통해 극명하게 드러났다
다만 간단히 요약한다면 미국이 제시한 신탁통치안을 마치 소련에서 제시한 것으로
호도한 것이다. 사실 소련은 조선이 통일국가를 형성할 수 있는 현실적 조건을 내세웠으나
이남의 모든 행정력을 장악한 미군정과 친일파들이 사실을 왜곡보도한 것이었다.
당시 사회주의 계열과 민족주의 계열은 소련이 제시한 방안의 현실 타당성을 인정하여
신탁통치를 주장한 미국을 반대하고 소련의 안을 지지하였는데, 친일파들은 '신탁통치를 주장한
소련의 제안을 지지하는 세력들은 모두 빨갱이이자 민족반역자'라는 논리를 앞세워 대대적인
이념 공세 및 대규모적인 탄압을 자행하며 이들 애국세력들과 조선민중과의 분열을 획책하였던
것이다.
미군정이나 이승만 정권 아래서 그 자리를 유지하게 된 친일세력들로서는 일제시대부터
그들의 탄압대상이었던 민족해방운동세력을 해방 후에도 전같이 탄압하는 것만이
정치적 위치를 그대로 유지할 수 있는 길이었다. 친일세력이 이승만 정권 아래서
과거 그들의 적이었던 민족해방운동세력을 탄압할 수 있었던 명분은 그들을 모두
좌익세력이나 용공세력으로 모는 길이었다.
일제 시대의 경찰 요원이 그대로 온존했던 이승만 정권 아래서는 민족 해방운동세력의
좌우익을 막론하고 일단 좌익세력으로 몰기만 하면 당연히 탄압대상이 될 수 있었다.
민족해방운동전선의 우익 중의 우익이라 할 수 있을 백범 김구도 남북협상에 갔다 온
후에는 이승만 정권이 "남북협상을 주장해서 공산분자와 합작을 구실 삼으려 소련 지지를
표시하여 민국 정부를 백방으로 반대한다"했고, '여순사건'은 "공산주의자가 극우 정객들과
결탁해서 일으킨 것"이라 발표했으며 그런 끝에 결국 백범은 암살되었다.
임정세력과 연합하지 못함으로써 지주세력 중심의 한민당과 친일세력을 기반으로
할 수밖에 없었던 이승만 정권은 그 역사적 정통성에서 임정세력이나 북쪽 정권에 비해
상대적으로 취약했으며, 그것을 메우기 위해서 반공정책을 내세웠던 것이다.
한편 세계정세 면에서도 제2차 세계대전 후 유럽과 아시아 등지에서 급격히 확산되어
가는 사회주의권을 봉쇄하기 위해 미국과 영국 등 자본주의 제국은 냉전체제를
강화해갔으며, 특히 미국은 한반도에서의 냉전체제 구축을 위해 이승만에게 냉전정책을
강요하였다. 이같은 과정으로 통해 남한에서는 친미세력으로 둔갑한 해방 전의 친일파들이
냉전세력으로 전환해 간 것이다.
냉전세력의 형성, 반공이데올로기의 형성을 이야기할 때 또 하나 빼놓지 말아야 할 것은
바로 이북에서 도망쳐 나온 월남인들이다. 이북에서는 소련군 점령 초기부터 이남과는
비교가 안될 정도로 침략자 일본인과 친일파들에 대한 처리가 가혹했다. 민족 내부의
친일파 관료들과 친일 지주들은 이북에서 도망쳐 나와 이남으로 대거 월남했다.
이들 월남인들이 만든 조직체 중 특히 '서북청년회'같은 단체는 남쪽 반공단체들과 연합하여
강력한 반북·반공세력으로 되었으며, 그들은 이승만 정권이 단독정부를 수립하고자 할때
단독정부 반대세력들을 탄압하는 전위대로서 활동했다.
이들은 자신들이 해왔던 친일 행각에 대한 반성은커녕 친일행적과 친일파에 대한
처벌을 강도높게 진행하였던 북한 정권에 대한 불만을 가득품고 악의에 찬 반공 전선을
형성하였던 것이며, 이승만 정권에 반하는 모든 애국세력들을 '빨갱이'로 몰아 탄압하는
선봉적 역할을 자임했던 것이다.
이렇게 냉전수구라는 성격으로 전환하게된 반민족세력들은 한국 전쟁, 5·16 쿠데타 등과
같은 한국사의 격변기에 그들의 위상을 더욱 강화하면서 분단 체제 하에서의 남한 사회의
정치·군사·경제·행정의 요직을 차지하면서 분단 체제를 강화하고 반공·반북이데올로기를
광범위하게 유포시켰다.
우선 이들은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민족자주세력, 중도파세력, 평화통일세력을 거의
완전히 제거하다시피 하였으며, 약간 남아있다 하더라도 그러한 탄압 속에서 애국세력들은
모두 활동을 중지하고 잠복함으로써 냉전체제가 급격히 강화되었다. 전쟁이 끝나면서
다시 평화통일세력이 고개를 들기 시작했고 그것이 진보당 결성으로 나타났으나 냉전의
망령 속에서 그 세력은 희생될 수밖에 없었다.
4·19 혁명이 폭발하면서 잠복해 있던 종전의 평화통일세력과 4·19 주체세력으로서의
평화통일세력이 급부상했으나 5·16군사쿠데타로 모두 탄압을 받게 되었다.
5·16 쿠데타세력은 평화통일론을 '간접침략론'이라 단정하고 '4·19 공간'을 통해 표면에
나타난 모든 평화통일세력을 숙청하면서 냉전체제를 다시 강화해 갔다.
5·16 군사쿠데타 이후 군사 정권이 30년 간 계속됨으로써 냉전 세력이 크게 확대되었다.
세계사적으로 냉전체제가 무너지고 한반도의 남쪽에서도 군부정권 후 김영삼 정권이
성립되어 한때 남북정상회담이 약속되기도 했으나 김일성의 사망과 군사정권의
태내에서 나온 문민정권의 반통일성 등이 원인이 되어 냉전체제가 그대로 지속되었다.
한편 이들은 일정한 정치적 행보를 걸어왔다. 이승만 독재 시절에는 말할 것도 없고
박정희 시절의 공화당, 전두환 시절의 민정당, 90년에 야합하여 탄생한 민자당, 이름을
바꾸었지만 이들은 신한국당을 거쳐 지금의 한나라당으로 이어져 오고 있다.
한나라당의 대다수 정치인들은 '반공반북이데올로기', '북한주적론'을 사상적 근거로,
미국과 주한미군을 정치적 후원자로, 분단독재를 사회적 토대로 하여 권력을 잡고
지금까지 오고 있다.
뉴라이트 안병직 영입 논란
ㅡ 뉴라이트는 어떤 단체인가?
뉴라이트 = 일본 우익이 한국 사회 문화 정치를 마음대로 조종하기위해
검은돈으로 만든 단체
노무현 - 친일 청산의 강한 의지 표명 VS
한나라당 - 이명박 대선 후보가 뉴라이트 안병직 재단 이사장을 여의도 연구소
인사로 영입함
일제치하 조선일보의 조국은 일본이었습니다. 1930년 후반에서 조선일보는 <국어 장려운동>을
펼치며 <국어학습코너>를 만들어 국민들에게 국어학습을 시킵니다.
그런데 조선일보 국어학습코너에는 놀랍게도 한글이 아닌 일본어였습니다. 조선일보가 생각한
국어는 일본어였습니다. 조선일보의 조국은 일본이었습니다. 이것만이 전부가 아닙니다.
『조선일보』는 일제강점기 매년 일본 히로히토 천황의 생일날인 '천장절'만 되면 1면에 경하의
글을 올렸는데 1939년 4월 29일자 사설 <봉축 천장절>의 정신 나간 짓을 한번 살펴 볼까요.
임금보다 더 높여 부르는 '성상폐하'라는 호칭과 자신과 조선인들이 천황의 신하, 천황의 백성임을
강조하는 억조신서(億兆臣庶), 일본 천황에 대해 황공의 극존칭인 성황성공(誠惶誠恭), 천장절을
몸서리치게 축하한다는 동경동하(同慶同賀) 기타 등등. 정말 몸서리 쳐집니다.
조선일보, 일제강점기 간행 신문, 히로히토와 그 처를 1면에 올리고
일장기와 함께 '천황폐하' 외치고 있다.
민족 반역자에 대한 공소시효는 없어야 합니다. 조선의 청년들에게 황국신민의 군인이 되어
총알받이가 되라 하고 조선의 처녀들에게 일본군의 성노리개가 되라고 열을 올렸던
조선일보입니다. 우리는 1948년 반민특위 좌절 이후 친일파가 친미파로 변신해 독재자들과
한통속이 되어 호의호식했던 비극의 현대사를 갖고 있습니다.
프랑스는 독일 치하 겨우 4년 동안의 부역자를 공소시효를 없애 가며 사형에 처했는데,
공식적으로 발표한 숫자만 1만1천2백 명이고 비공식적으로는 12만 명에 달한다고 합니다.
그런데 프랑스는 다른 유럽국가에 비하면 관대한 편이랍니다. 부역행위로 구속된 사람이
숫자로 프랑스 10만 명당 94명, 벨기에 5백96명, 네덜란드 4백19명, 노르웨이 6백38명에
이른다고 합니다.
(이명박 일본 외교 편)
이명박씨가 대통령이 된 후 일본을 첫 번째 방문했을 때 그의 일본 정상외교 활동상(?)입니다.
일본 국왕을 천황이라 호칭하고 천황폐하에게 허리 깊숙이 숙여 인사를 하는 그의 모습을
보면서 이대통령이 무척이나 예의 바른 사람이라 생각한 국민은 없었습니다.
다음은 그가 일본에서 행한 언행들을 전한 신문기사입니다.
<이 대통령은 전날 재일동포 리셉션에서 "그리 멀지 않은 역사 속에서 마음 상한 일도 있었지만
과거 마음 상한 일을 갖고 미래를 살 수 없다"며 "과거는 잊을 수 없지만 과거만 갖고 오늘과
미래를 살 수는 없다"고 강조한 바 있다. "일본에 대해 만날 사과하라고 요구하지 않겠다."는 것이다.
이날 일본 총리 관저에서 열린 공동기자회견에서 이 대통령은 일본과의 독도 및 과거사 문제에 대해
질문을 받고 "한일관계는 먼 과거 역사를 우리가 항상 기억을 할 수밖에 없다"면서도 "그러나
과거에 얽매여 미래로 가는 데 지장을 받아서는 안 된다."고 거듭 주장했다.
특히 이 대통령은 "(일본의) 정치인은 가끔 거북한 발언을 한다."며 "그러나 정치인이 발언하는
것에 일일이 민감하게 대응할 필요는 없다. 어느 나라나 정치인은 개인의 의견을 말할 수 있다"고
역설했다.
이 대통령이 일본을 방문한 20일부터 이틀째 일본 애국당 소속 시위대는 이 대통령이 머물고 있는
제국호텔 앞 사거리에서 시위를 벌이고 있다. 특히 '대일본애국당'이라고 쓰인 차량 3대의
스피커에서는 일본어와 한국어로 번갈아 "다케시마(독도)는 일본 땅이다. 즉시 한국은
다께시마에서 떠나라"는 구호가 울려 퍼졌다.
특히 일본 내 역사교과서 왜곡 문제와 함께, 한국 뉴라이트 계열이 출간한
'대안교과서 한국 근현대사'도 적잖은 논란이 되고 있다. 이 대통령의 말처럼 "역사 인식에 대한
문제는 일본이 할 일"이 아니라, 여전히 한국의 당면한 문제인 셈이다.
이 자리에서는 (이대통령은) “일본 천황이 한국을 방문하지 못할 이유가 없다”라고 말하면서,
‘천황’이라는 호칭을 쓰고 한일 과거사 문제에 대해 오히려 우리 쪽에서 먼저 언급하지 않겠다는
태도를 보였다.......우리 측에서 먼저 면죄부를 주는 발언을 했다.>
간단히 보는 근대사
공전의 히트를 기록했던 "여명의 눈동자"라는 드라마가 있습니다.
여기에 스쯔끼라는 악질 고등계 형사가 나오는데요, 이 자는 수많은 독립운동가들을 잡아다
고문하고 죽입니다. 아무 죄 없는 사람들에게 불량선인이라는 딱지를 붙이고 누명을
씌우기도 합니다. 정말 보면서 주먹이 불끈불끈 쥐어질 정도로 증오스러운 놈입니다.
주인공인 하림 역시 스즈끼에게 가족들을 잃은 희생자 중 한 명이었지요.
스즈끼는 하림 역시 엮어 넣으려고 계속 괴롭힙니다. 그러던 중 2차 세계대전이 일어나고
하림은 징병에 끌려갔다가 탈출해 미군 특수부대에 들어가 독립운동을 합니다.
전쟁이 연합군의 승리로 끝나고 해방이 되었습니다. 드디어 세상이 바뀌었습니다.
하림은 평범한 시민으로 돌아갑니다. 그런데 하림은 어느 날 경찰서에 들렀다가
충격적인 광경을 목격합니다. 경찰서에서 여전히 부하들을 호령하고 있는 스즈끼를
발견한 겁니다. 눈이 돌아간 하림은 뛰어가 스즈끼의 멱살을 잡습니다.
믿을 수가 없어서 소리를 지릅니다.
"스즈끼! 네가 왜 여기에 있어! 네가 왜 여기에 있어! 해방이 되었어! 스즈끼!"
멱살을 잡힌 스즈끼는 부하들을 시켜 하림을 끌어내라고 합니다. 하림은 무력하게
경찰들에게 질질 끌려가면서 비명을 지릅니다. 그 모습을 보면서 스즈끼는 침을 뱉듯
말합니다. "저런, 빨갱이 새끼."
"여명의 눈동자"에서 이 장면은 정말 충격적인 장면이었습니다. 친일파는 해방이 되어도
처벌받지 않고 독립운동을 한 사람은 빨갱이로 몰려 두들겨 맞습니다. 해방이 되었지만
세상이 바뀌지 않은 겁니다. 문제는 이게 그냥 드라마의 극적 구성이 아니라는 겁니다.
한국 역사에서 실제로 일어났고, 지금도 일어나는 일이라는 겁니다.
미 군정을 뒤에 업은 이승만은 정권을 장악하기 위해 친일파를 모두 흡수합니다.
세상이 뒤집히고 처벌이 될까 두려워 덜덜 떨던 조선총독부의 관료들, 경찰들은 살기 위해
이승만에게 가서 붙습니다. 그리고 한국전쟁이 일어납니다. 친일파들의 살길이 열렸습니다.
그들은 이제 '빨갱이'를 입에 달고 삽니다.
'빨갱이가 쳐들어온다.', '빨갱이가 우리를 죽이려 한다.',
'우리가 빨갱이로부터 너희를 지켜주겠다.'
그렇게 친일파는 식민지 시대의 권력을 그대로 유지한 채 건국의 공로자 자리를
차지합니다. 이승만 독재 시대에 승승장구하던 그들은 그러나 다시 한번 위기를 맞습니다.
1960년 4.19혁명이 일어난 것이지요. 그들은 두려움에 떱니다.
하지만, 불과 1년 뒤 박정희에 의해 5.16 군사 쿠데타가 일어납니다. 친일파들에게 다시
살길이 열렸습니다. 그들은 이제 박정희의 공화당에 투신합니다. 따지고 보면 박정희
자신이 일제시대 친일파입니다. 일본 육사 졸업하며 천황한테 혈서 쓰고 자랑스러운
황국신민으로 공인받은 자이니까요. 그리고 박정희의 독재가 시작되었습니다.
박정희는 헌법 개정을 통해 자기가 죽을 때까지 대통령을 할 수 있도록 하였습니다.
그러다 암살당합니다.
친일파에게 다시 위기가 왔습니다. 그러나 또 구원투수가 등장합니다.
전두환이 12.12. 쿠데타를 일으키며 정권을 장악한 겁니다. 친일파들은 이제 기꺼이
전두환의 품에 안깁니다. 1980년 5월 18월 광주에서 민주화를 요구하는 시민들에게
총질을 하고 수많은 사람들을 죽입니다. 그리고 지들끼리 모여 지들끼리 전두환을
대통령으로 선출합니다. 박정희 때 공화당 인사들은 이제 전두환의 민정당을 구성합니다.
1987년 6월. 또 위기가 옵니다. 전 국민이 대통령 직선제를 요구하며 거리로 쏟아져
나온 겁니다. 끝도 없이 쏟아져 나왔습니다. 대통령을 니들끼리 뽑는 게 아니라 국민들이
직접 뽑겠다고 주장합니다. 노태우에게 대통령직을 선물하려던 전두환은 어쩔 수 없이
이에 굴복합니다. 그래서 드디어 대통령을 국민이 직접 뽑는 역사적 선거가 시작되었습니다.
친일파들은 긴장합니다. 그러나 그들에게는 정말 기적 같은 상황이 벌어졌습니다.
오랫동안 민주화 운동을 함께 해왔던 김영삼과 김대중이 서로 대통령이 되겠다고 싸우다
후보단일화를 못 해 표를 갈라 먹은 겁니다. 결국, 노태우가 35.9%의 득표율로 턱걸이로
대통령에 당선됩니다. 친일파는 또 살아남았습니다.
그리고 죽어도 대통령 한번 해먹겠다고 결심한 김영삼은 마침내 노태우에게 항복합니다.
노태우, 김영삼, 김종필이 3당 합당을 하여 민자당을 만듭니다.
유일한 민주화 세력이 된 김대중은 고립됩니다.
그리고 그다음 대선에서 민주화 운동의 경력을 팔아넘기고, 양심을 팔아넘기며 친일파,
군사독재 세력과 손을 잡은 김영삼은 마침내 꿈에 그리던 대통령에 당선됩니다.
당 이름은 신한국당이라고 바꿉니다. 그리고 나라를 하나하나 말아먹다가 1997년 IMF 사태를
일으킵니다. 나라가 부도가 났습니다. 수많은 회사들이 망해 넘어가고, 수많은 사람들이
직장에서 쫓겨나고, 수많은 사람들이 소주병을 들고 한강에 뛰어내리고 목을 맸습니다.
신한국당은 슬쩍 한나라당으로 이름을 바꿉니다. 고작 당 이름을 살짝 바꾼 것만으로 나라를
부도 상태로 몰아넣은 그들은 대선에서 약 40%의 득표율을 기록합니다.
어이가 없는 일입니다. 그래도 티끌만 한 차이로 마침내 김대중이 대한민국 역사상 최초로
정권교체를 이뤄냅니다.
친일파가 대한민국 건국 이후 최초로 정권 재창출에 실패한 사건이 벌어졌습니다.
패닉에 빠진 그들은 그러나 5년만 참자고 다짐합니다. 5년 동안 열심히 김대중을 빨갱이라고
욕합니다. 스즈끼가 하림을 빨갱이라고 몰아붙이듯, 이들이 살아남는 길은 무조건 상대방을
빨갱이라고 몰아붙이는 겁니다. 그러나 5년 뒤 선거에서 생각지도 않았던 노무현에게 또
패합니다. 미칠 것 같습니다. 다시 5년 동안 빨갱이라고 몰아붙입니다. 경제가 망했다고
외쳐댑니다. 서민 경제가 파탄이라고 외쳐댑니다. 마치 IMF를 김대중이 일으킨 것 같은
착각마저 일어날 지경입니다.
어쨌든 김대중 노무현 정권에서 친일파 명부를 만들고 진상을 조사하는 작업이 진행됩니다.
친일파들은 위기감을 느낍니다. 정치적 탄압이라고 마구 훼방을 놓습니다. 그 과정에서
뉴라이트가 결성됩니다. 그냥 상대방을 빨갱이로 모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고 느낀 그들은
이제 자신들의 과거 행적을 감추려 들지 않습니다. 아예 맞불을 놓습니다.
식민지 시대가 좋은 시대였다고 우기기 시작합니다. 친일 행위를 정당화하는 것이죠.
통계 자료를 가져와 식민지시대가 이렇게 경제 발전이 된 시기였다고 주장합니다.
근대화 시대였다고 주장합니다. 자신들을 친일파라고 부르지 말고 근대화 세력이라고
불러 달랍니다. 자신들을 군사독재 세력이라고 부르지 말고 근대화 세력이라고 불러 달랍니다.
그들의 논리는 간단합니다. '친일하면 어때, 경제만 살리면 됐지!', '독재하면 어때, 경제만 살리면
됐지! '그리고 이명박을 밀어줍니다. '범죄자면 어때, 경제만 살리면 돼지', '사기꾼이면 어때,
경제만 살리면 돼지' 말도 안 되는 일인데, 이게 먹힙니다.
마침내 이명박은 대통령이 되었고, 뉴라이트는 새로운 정부의 각료로 곳곳에 포진되었습니다.
이들은 지금 역사 교과서가 좌 편향 되어 있다고 주장하며 식민지 시대, 독재 시대를 근대화
시대로 바꾸겠노라고 수정하고 있습니다.
일제시대 친일파-자유당-공화당-민정당-민자당-신한국당-한나라당으로 이어지는 세력이
다시 정권을 잡았습니다.
대한민국 역사상 이들이 권력을 놓친 시기는 딱 지난 10년간뿐입니다.
그리고 그들은 이 10년을 '잃어버린 10년'이라고 부릅니다.
긴 글 읽느라 고생하셨는 줄로 압니다. 하나만 묻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