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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리대로의 한말글 사랑 한마당 원문보기 글쓴이: 나라임자
한글학회는 민족독립학회요 건국 유공 단체다
한말글문화협회 대표 이대로
- 차례 -
1. 머리말
2. ‘국어연구학회’가 태어나기 전 한글 살려 쓰기
2.1. 가장 처음 한글로 번역된 성경 예수셩교젼셔
2.2. 가장 처음 한글로만 만든 교과서, 민필지
2.3. 가장 처음 한글로 만든 신문, 독립신문
2.4. 정부가 처음으로 한글을 쓰게 한 법과 규정
2.5. 정부가 만든 국문연구소
3. 대한제국 시대 태어난 ‘국어연구학회’
4. 일본제국 시대 조선어학회 활동
4.1. ‘조선어학회 사건’을 좀 더 자세히 밝힌다.
4.2. 광복 뒤 한글학회가 한 건국 준비 활동
5. 맺음말
<벼리>
이 글을 한글학회가 태어나게 된 배경과 지난 100년 동안 한글학회가 한글을 빛내려고 어떤 일을 어떻게 했는지 살펴보고, 그 일이 겨레와 나라 독립과 발전에 큰 업적이었음을 밝혔다. 아울러 한글운동은 바로 겨레와 나라 독립운동이고 광복운동이며, 한글학회가 한 일은 대한민국을 세우는 운동임도 알려주고, 정부와 국민 모두 한글학회가 한 일을 고마워하고 앞으로 더욱 밀어주어야 겨레와 나라가 빛날 것임도 설명했다.
그리고 한글은 세계에서 으뜸가는 우리글자인데 한글을 즐겨 쓰고 빛내지 않고 있는 것은 잘못이라는 것과, 한글이 지난날은 한자에 짓밟히고, 오늘날 영어에 밀리고 있음을 온 국민이 깨닫고 한글을 더욱 사랑하고 빛내어 자주문화를 꽃피워 문화강국이 되고, 인류문화발전에도 이바지하자고 강조했다. 그리고 한글이 빛날 때 교육, 문화, 통일 들 나라의 여러 문제가 저절로 풀릴 것임도 설명했다.
표제어: 한글학회 탄생 배경과 한 일,한글학회는 민족학회요 한글운동은 나라 독립운동.
1. 머리말
한 나라가 바로 서려면 그 나라 말이 바로 서야 한다. 그 나라말이 바로 서려면 그 말을 적는 글자가 있어야 하고, 그 글자는 그 말을 적기에 편하고 쉬워야 한다. 또 한 나라가 튼튼하려면 그 나라 얼이 튼튼해야 한다. 그 나라 얼은 그 나라 말이 바로 설 때 튼튼해진다. 그런데 우리 겨레는 지난 수천 년 동안 말은 있으나 글자가 없어 중국 한자를 빌려서 썼다. 중국 한자로 공문서도 쓰고, 중국 한문으로 교육을 했다. 그러니 나라말이 바로 서지 못해서 나라 얼도 튼튼하지 못했다. 그래서 한자를 쓰는 중국에 수천 년 동안 끌려 다니고 눌려 살았으며, 우리 문화는 중국 문화의 곁가지였다.
더욱이 온 누리에서 가장 훌륭한 우리 글자를 가지고도 쓰지 않아 우리말이 홀로 설 수 없었다. 한심하고 어리석은 일이었다. 뿌리 깊게 박힌 힘센 나라 섬기는 근성으로 제 말글보다 남의 말글을 떠받들던 우리나라는 마침내 국운이 기울어 일본에 나라를 빼앗기고 짓밟힘과 업신여김 속에 살았다.
그런데 하늘의 보살핌으로 19세기 말에 이르러 한글 ‘훈민정음’, 그리고 ‘언문’, ‘국문’이라고 부르던 우리 글자의 이름을 ‘한글’로 통일한다.
이 온 누리에서 으뜸가는 글자임을 깨달은 선각자들이 이 한글을 갈고 닦아 오늘날 누구나 마음대로 글을 쓰고 읽을 수 있게 해주어 사람답게 살게 되었다. 그리고 세계에서 보기 드물게 민주주의가 빨리 꽃피고 잘사는 나라가 되었다. 더욱이 타자기나 슬기틀(컴퓨터)로 글을 쓰고 지식과 정보를 주고받는 누리통신 시대를 맞이해 정보통신 강국이 되었다. 우리말을 적기에 가장 좋고 온 누리에서 가장 훌륭한 우리 글자인 한글을 갈고 닦았기에 이루어진 일이다.
이렇게 누구나 글을 읽고 쓸 수 있게 된 것은 저절로 된 것이 아니다. 많은 이들과 모임에서 지난 100여 년 동안 한글을 갈고 닦고 누구나 쓸 수 있도록 힘썼기에 된 일이다. 한글을 갈고 닦은 사람과 모임이 한둘이 아니지만 그 가운데 103년 전 대한제국 고종 때에 주시경 선생과 그 제자들이 만든 한글학회 한글학회는 1908년에 ‘국어연구학회’로 창립하여 1911년에 ‘배달말글몯음’, 1912년에 ‘한글모’, 1919년에 ‘조선어연구회’, 1931년에 ‘조선어학회’, 1949년에 ‘한글학회’로 그 이름을 바꾸었다.
가 가장 오래되었고 가장 애썼다. 국어 독립운동 단체의 맏형으로 중심이 되어 이 운동을 이끌었다. 한글을 만든 세종대왕과 한글을 지키고 갈고 닦은 한글학회에 모두 고마워해야 할 일이다.
그런데 아직도 중국과 일본 말글을 제 말글보다 우러러보고 섬기는 한국인이 많고, 거기다가 영어에 얼빠진 자들이 늘어나니 안타깝고 가슴 아프다. 지난 100여 년 동안 한글학회가 우리 겨레의 독립과 광복, 건국에 얼마나 공로가 컸는지 여기서 한글학회 발자취를 살펴보련다. 먼저 한글학회가 태어나기 전의 분위기와 배경을 알아보자.
2. ‘국어연구학회’가 태어나기 전 한글 살려 쓰기
우리는 지난 수천 년 동안 우리말은 있으나 우리말을 적는 글자가 없어서 중국 한자로 공문서도 적고, 한자로 교육을 했다. 그래서 매우 불편했다. 그런 불편함을 풀려고 삼국시대부터 향찰, 구결, 이두를 만들어 우리말을 적었으나 모두 한자를 빌려서 적는 것이기에 마찬가지로 불편했다. 그러던 중 세종대왕이 우리말을 적기에 아주 편리한 우리 글자, ‘훈민정음’(한글)을 만들었다. 그러나 수천 년 동안 한자를 쓰던 관습을 쉽게 벗어나지 못하였다.
丙申/十七日丙申, 太祖卽位于壽昌宮。 先是, 是月十二日辛卯, 恭讓將幸太祖第, 置酒與之同盟, 儀仗已列。 侍中裵克廉等白王大妃曰: “今王昏暗, 君道已失, 人心已去, 不可爲社稷生靈主, 請廢之。” 遂奉妃敎廢恭讓。 事旣定, 南誾遂與門下評理鄭熙啓齎敎, 至北泉洞時坐宮宣敎, 恭讓俯伏聽命曰: “余本不欲爲君, 群臣强余立之。 余性不敏, 未諳事機, 豈無忤臣下之情乎?” 因泣數行下, 遂遜于原州。 百官奉傳國璽, 置于王大妃殿, 庶務就稟裁決。 壬辰, 大妃宣敎, 以太祖監錄國事
위에 있는 한문은 조선 태조실록 첫머리 글이다. 조선이 망할 때까지 나라 공문이나 기록들이 이렇게 중국 한문이니 읽기도 힘들었다. 이런 말글살이로는 조상이 어떻게 살았는지, 역사와 전통을 알 수 없고 자주문화를 꽃피울 수 없었다. 나라 사람 가운데 1%도 안 되는 사람만 이런 글을 쓰고 읽을 수 있었단다. 그러니 그 나라가 튼튼할 리가 없다.
摩訶般若波羅蜜多心經, 觀自在菩薩 行深般若波羅蜜多時 照見 五蘊皆空 度一切苦厄
舍利子 色不異空 空不異色 色卽是空 空卽是色 受想行識 亦復如是, 舍利子 是諸法空相 不生不滅 不垢不淨 不增不減, 是故 空中無色 無受想行識 無眼耳鼻舌身意 無色聲香味觸法
無眼界 乃至 無意識界 無無明 亦無無明盡 乃至 無老死 亦無老死 無苦集滅道 無智亦無得 以無所得故
위에 한문은 반야심경(불경) 첫머리 글이다. 불교가 이 땅에 들어온 것은 천 수백 년 전인 삼국시대이며 한 때는 국교처럼 많은 이들이 믿었다. 그러나 이런 어려운 말글로는 그 종교가 민중 가슴에 제대로 파고 들 수 없었다. 그러니 이 종교도 제대로 뿌리내리기 어려웠다.
子曰 學而時習之 不亦說乎 有朋 自遠方來 不亦樂乎 人不知而不溫 不亦君子乎.
子曰 巧言令色 鮮矣仁 曾子曰 吾 日三省吾身 爲人謀而不忠乎 與朋友交而不信乎.
傳不習乎 無友不如己者 過則勿憚改 告諸往而知來者 子曰 不患人之不己知 患不知人也.
위 글은 중국 논어 가운데 「학이편」이다. 우리 말글로 풀어서 쓰면 누구나 읽고 알아보기 쉬운 내용인데 이렇게 한문이니 이 글을 읽고 배우려고 한문 공부에 많은 시간과 노력을 바쳐야 한다. 그러니 국력은 낭비되고 민생은 어려울 수밖에 없었다. 마찬가지로 유학과 유교도 시들게 된다.
이렇게 수천 년 동안 한문만을 쓰다가 19세기 서양인들이 한글로 기독교 성경을 번역하여 보급하기 시작했다. 배우고 읽기 힘든 중국 한문으로 성경을 만들어 기독교를 알리는 것보다 배우고 읽기 쉬운 우리 말글로 성경을 만들어 보급하니 많은 이들이 기독교 교리도 빨리 알 수 있었다. 서양 사람들은 우리 한글과 똑 같은 소리글자인 로마자를 써 본 사람들이라 바로 한글이 얼마나 훌륭하고 쓰기 좋은 글자인지 알고 써먹은 것이다.
불교 서적이나 유교 서적, 조선왕조실록 들이 한자로만 쓴 것에 견주어 한글만으로 쓴 기독교 성경과 한글 교과서는 하늘도 놀랄 정도로 우리 말글살이를 바꿔 놓았다. 그 이전에도 왕실에서 부녀자들이 한글로 편지를 쓰고 구운몽, 홍길동전 같은 한글 소설이나 시를 읽고 쓴 일이 있지만 일반 대중들이 이렇게 한글을 많이 쓰고 읽는 일은 없었다. 이것은 한글과 우리 겨레를 밝고 빛나게 만드는 일이었다.
마침내 성경만 한글로 번역하는 게 아니라 교과서와 신문도 한글로 만들고, 나라에서 법으로 한글을 쓰게 하고, 한글을 갈고 닦는 ‘국문연구소’도 만들었다. 그리고 「국어연구학회」란 민간 학술 단체가 태어났다.
2.1. 가장 처음 한글로 번역된 성경 예수셩교젼셔
가장 처음 한글로 만든 성경은 영국인 존 로스(1842~1915) 목사가 이응찬, 이성하 등과 함께 중국 심양에서 1882년에 만든 예수셩교 누가복음젼서와 1887년에 예수셩교젼셔란 신약 성경이다. 로스는 1877년 한국어 문법 및 회화 교재인 한국어 첫걸음(A Corean Primer)도 출판했다. 비록 89쪽에 지나지 않았으나 이 책은 영어로 된 최초의 한국어 회화 교재였다. 그리고 신구약을 완전 번역한 셩경젼셔가 1911년 출간되었다. 이렇게 서양인들이 한글의 가치를 알아주고 성경을 한글로 만들면서 한글이 힘을 얻기 시작하였다.
2.2. 가장 처음 한글로만 만든 교과서, 민필지
△ 민필지 머리글(헐버트박사기념사업회가 낸 영인본 사진)
미국인 헐버트는 125년 전인 1886년 한국 정부 최초 서양식 교육기관인 육영공원의 교사로 한국에 와서 3년 만인 1889년에 한글로만 쓴 민필지란 교과서를 짓고, 한글이 영어를 적는 로마자보다도 우수하다는 사실을 영어로 써서 국외 학술지에 최초로 소개하였다. 헐버트는 서재필과 함께 배재학당 교사로서 주시경을 가르치고 주시경과 함께 독립신문도 만들었다. 이로써 주시경은 헐버트가 만든 한글 교과서로 공부하고 헐버트를 만나면서 한글이 좋은 글자임을 깨닫고 더욱 믿게 되었다.
영국인 존 로스가 한글로 성경을 번역한 일과 함께 미국인 헐버트가 한국에 와서 3년 만에 한글 교과서를 만든 것은 한글이 얼마나 배우고 쓰기 쉬운 글자인지 보여주는 본보기다.
2.3. 가장 처음 한글로 만든 신문, 독립신문
독립신문은 한국 최초의 민간 신문으로서 미국에서 귀국한 서재필이 정부로부터 자금을 지원받아 1896년 4월 7일 창간하였다. 주시경이 편집을 했고, 가장 처음 한글로 만든 신문이고, 띄어쓰기를 했으며 한국 사회 발전과 민중 계몽에 새로운 모습을 보였다. 독립신문은 창간사에서 전국 인민을 위하여 무슨 일이든지 대변자가 되고, 부정부패 탐관오리 등을 고발할 것을 밝혔다. 주시경은 이 신문사에 ‘국문동식회’를 만들고 한글 표기법을 연구했다. 선각자요 선구자요 애국자인 주시경은 한글로 나라 독립을 이루려고 온갖 노력을 하였다.
오늘날 이 나라에서 이 신문이 처음 나온 4월 7일을 ‘신문의 날’로 정해 기념하고 있다.
△ 독립신문 창간호.
2.4. 정부가 처음으로 한글을 쓰게 한 법과 규정
세종 다음으로 고종이 한글을 살려 쓰려고 애썼다. 수백 년 동안 우리를 지배하던 한문 나라 중국(청나라)이 약해지면서 고종은 나라 이름을 ‘대한제국’이라고 바꾸고, 한글을 국문이라고 부르며 법으로 한글을 쓰게 했다. 처음으로 나라 글자로 인정하고 부른 매우 큰일이었다. 한글나라가 될 새싹이 돋아난 것이다.
● 1894년 11월 21일
고종 31년, 고종 칙령 제1호 공문식 14조
법률 칙령, 모든 글은 국문(곧, 한글)을 바탕으로 하고 한문은 딸림으로 적되 다만, (필요하면) 국한문을 혼용해서 쓴다. (法律勅令 總以國文爲本 漢文附譯 或混用國漢)
● 1895년 5월 8일
고종 32년, 고종칙령 제86호 공문식 제 9조
법률 명령은 모두 국문으로 적고 한역(한문으로 번역하는 일)은 딸림으로 적되 다만, 국한문을 혼용한다. (法律命令은 다 國文으로 本을 삼고 漢譯을 附하며 或 國漢文을 混用홈.)
2.5. 정부가 만든 국문연구소
고종 31년, 1894년에 고종 칙령 제1호에서 ‘언문’이나 ‘암클’이라고 불리던 우리 글자를 국문이라 부르면서 공문서에 쓰게 했다. 그러나 한글을 아는 사람도 드물고 국문 문자 체계도 제대로 갖추지 못했으니 온 국민이 바로 쓴다는 게 쉽지 않았다. 그래서 1905년에 지석영이, 1906년에 이능화가 이 문제를 풀 연구소를 만들자고 상소하였다.
그 뒤 1907년(광무 11) 대한제국 학부(學部) 안에 ‘국문연구소’라는 국어 연구 기관을 설치한 것이다. 이 연구소에 지석영, 주시경, 이능화 들이 참여해 1907년 9월 16일 제1차 회의를 연 뒤, 1909년 12월 27일까지 총 23차례의 회의를 열었다. 여기서 토론과 의견을 거친 14개항의 문제가 1909년 12월 28일 학부대신에게 제출되었고 이 보고서는 「국문연구의정안」(國文硏究議定案)으로 꾸며졌으나 정부가 이에 대한 조처를 취하지 않아 세상에 공포되지는 못했다.
「국문연구의정안」의 내용은 ① 국문의 연원, ② 초성 ··ㅿ·◇····ᄬ 등 여덟 자의 사용 여부, ③ 초성 ㄲ·ㄸ·ㅃ·ㅆ·ㅉ 등 다섯 자의 병서법(竝書法)의 일정화, ④ 중성 ‘ㆍ’의 폐지와 ‘=’ 자의 창제 여부, ⑤ 종성 ㄷ·ㅅ 의 용법 및 ㅈ·ㅊ·ㅋ·ㅌ·ㅍ·ㅎ 여섯 자의 종성 통용 여부, ⑥ 자모 7음과 청탁(淸濁)의 구별, ⑦ 사성표(四聲票)의 사용 여부와 높낮이, ⑧ 자모의 음독(音讀) 일정화, ⑨ 자순(字順)과 행순(行順)의 일정화, ⑩ 철자법 등이다. ‘ㆍ’ 자를 쓰기로 한 것을 제외하면 현재의 문자 체계 및 맞춤법의 원리와 일치한다.
이때도 훈민정음 28자를 다 쓸 것인가 고민을 많이 하고 논의했으나 오늘날 우리가 쓰는 24 글자만 써야 모든 국민이 빨리 한글을 배우고 쉽게 쓸 수 있다는 쪽으로 기울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 토대로 1933년에 조선어학회가 오늘날 쓰는 24자 만으로도 우리말은 충분히 적을 수 있다고 보고 한글 맞춤법 통일안을 만들었다. 한글이 빨리 뿌리내리게 하려는 최소한의 선택이었고 그 노력에서 나온 결과다.
국문연구소는 한글이 태어난 세종 때 정음청과 언문청을 만들어 우리 글자를 쓸 수 있는 연구와 준비를 한 뒤 처음으로 나라에서 만든 한글 연구기관이다. 아주 잘한 일이고 대단히 큰일이었으나 정부 기관만으로 한글을 온 국민에게 알리고 쓰게 하는 데는 한계가 있어 민간 학술단체인 「국어연구학회」를 만들어 연구뿐만 아니라 한글 쓰기운동을 하게 된 것이다. 그러나 일제에 나라를 빼앗기니 이 일들을 계속할 수 없게 되었다.
그런데 이때 지석영과 주시경은 한글 가로쓰기 주장을 했다고 한다. 주시경이 한글로만 쓰는 독립신문을 만들고 민간 학술단체인 한글학회를 만든 일들을 보면서 주시경과 지석영 들 선각자들이 얼마나 우리 글자인 한글을 살려 써서 나라를 일으키고 지키려고 했는지 엿볼 수 있다. 그런데 요즘 한글 역사 공부를 제대로 안 한 이들이 일제 때 최현배, 이희승 들이 참여한 조선어학회가 오늘날과 같은 한글 맞춤법을 만들었다고 해서 일본이 시키는 대로 훈민정음을 파괴한 친일 행위였다고 헐뜯고 있으니 딱한 일이다.
3. 대한제국 시대 태어난 ‘국어연구학회’
주시경은 최초 민간 신문인 독립신문도 한글로 만들고, 정부에 국문연구소도 만들고, 상동 청년학원과 여러 학교에서 한글을 가르쳤지만 온 국민이 한글을 자유롭게 쓰는 데는 어려움이 있었다. 그래서 상동 청년학원 2회 졸업식날인 1908년 8월 31일 그가 가르친 상동청년학원 제자들과 함께 여러 한글사랑 동지들을 데리고 서대문구 봉원사에서 민간 학술단체인 ‘국어연구학회’를 만들고 회장으로 김정진을 추대한다. 오늘날 한글학회의 전신이고 세계 최초 어문 학술단체다.
그러나 바로 일제에 나라를 빼앗기게 되어 일본어가 ‘국어’가 되는 바람에 이 학회는 ‘국어연구학회’란 이름에서 ‘국어’라는 말을 쓸 수 없게 되었다. 그래서 1911년 9월 3일 ‘배달말글몯음’으로 바꾸었다가 1913년 3월 주시경이 회장에 오르면서 ‘한글모’로 바꾸었다. 이 학회가 운영하던 강습소도 ‘조선어강습원’에서 ‘한글배곧’으로 바꾸었다. 그러다가 1914년 주시경이 갑자기 세상을 뜨게 되니 1917년부터 활동이 침체되었다가 1921년 12월 3일 ‘조선어연구회’라는 이름으로 활동을 재개했다. 그 뒤 1931년 1월 ‘조선어학회’로 다시 바뀌었다가 광복 뒤 1948년 대한민국이 태어나니 1949년 9월 지금의 명칭인 ‘한글학회’로 바뀌어 오늘에 이르게 된 것이다.
이때 이름에서 한자말이 아닌 ‘배달말글몯음’이라고 쓴 일과 우리 글자를 ‘한글’이라고 부른 일, 그리고 ‘학교’를 ‘배곧’이라고 부른 일은 모두 주시경으로부터 비롯된 일로서 우리 것은 지키려는 큰 뜻이 있었던 것이다. 우리말을 우리 글자로 적는 좋은 본보기이며, 얼마나 우리 말글을 살려 쓰고 빛내려 했던 높은 뜻을 엿볼 수 있다. 오늘 우리가 눈여겨보고 따를 일이다. 이때 우리 글자는 ‘한글’이라고 하고, 우리말은 ‘한말’이라고 부르기도 했다는데 ‘한글’은 뿌리를 내렸지만 ‘한말’은 자리 잡지 못했다.
주시경과 그 제자들은 겨레말이 독립해야 겨레 얼이 독립하고 나라 독립도 이룰 수 있다고 믿고 모임을 만들고 한글 연구와 한글을 가르친 것이다. 주시경은 그 정신으로 우리 말글을 가르치고 우리 말글을 사랑하고 써야 한다고 끊임없이 계몽했다. 상동교회에서 청년학원을 만들고 한글을 가르쳤으며, 1904년 개교해 1913년까지 7회 졸업생을 냈는데 그 졸업생 가운데 김윤경 선생은 한 삶을 한글학회와 같이 했다. 국어강습소는 여름 방학 때 단기 국어교육을 하는 곳으로 1907년에 7월 1일에 주시경 선생이 시작했고 3회부터는 국어연구회에서 맡아 시행했다. 주시경은 일제 강점기 때도 이 학교, 저 학교로 한글을 가르치려고 책 보따리를 들고 바쁘게 다녔기에 ‘주 보따리’라는 별명이 붙었다고 한다.
이 학회 창립 주역인 주시경이 1910년 한 회보에 쓴 글을 보면 이 학회가 한글을 연구하는 학술 활동만 한 것이 아니라 한글로 튼튼한 나라를 만들려 한 모임임을 엿볼 수 있다.
100 년 전에 주시경 선생님이 쓴 글, ‘한나라말’
말은 사람과 사람의 뜻을 통하는 것이라. 한 말을 쓰는 사람끼리는 그 뜻을 통하여 살기를 서로 도와주므로 그 사람들이 절로 한 덩이가 되고, 그 덩이가 점점 늘어 큰 덩이를 이루나니, 사람의 제일 큰 덩이는 나라라. 그러하므로 말은 나라를 이루는 것인데, 말이 오르면 나라도 오르고 말이 내리면 나라도 내리나니라. 이러하므로 나라마다 그 말을 힘쓰지 아니할 수 없는 바니라.
글은 말을 담는 그릇이니, 이지러짐이 없고 자리를 반듯하게 잡아 굳게 선 뒤에야 그 말을 잘 지키나니라. 글은 또한 말을 닦는 기계니, 기계를 먼저 닦은 뒤에야 말이 닦아지나니라.
그 말과 그 글은 그 나라에 요긴함을 이루 다 말할 수가 없으나, 다스리지 아니하고 묵히면 덧거칠어지어 나라도 점점 내리어 가나니라. 말이 거칠면 그 말을 적는 글도 거칠어지고, 글이 거칠면 그 글로 쓰는 말도 거칠어 지나니라.
말과 글이 거칠면 그 나라 사람들의 뜻과 일이 다 거칠어지고, 말과 글이 다스리어지면 그 나라 사람들의 뜻과 일이 다 거칠어지고, 말과 글이 다스리어지면 그 나라 사람들의 뜻과 일도 다스리어 지나니라. 이러하므로 나라를 나아가게 하고자 하면 나라 사람을 열어야 되고, 나라 사람을 열고자 하면 먼저 그 말과 글을 다스린 위에야 되나니라. 보중 친목회보 창간호(1910.06.).
4. 일본제국 시대 조선어학회 활동
주시경과 그 제자들은 일본제국 시대에도 한글을 지키고 빛내는 일을 계속한다. 이 일이 바로 광복 운동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한글강습소를 만들고 많은 사람들에게 한글을 가르치면서 한글 세력을 키웠다. 이때 건강하던 주시경이 배탈이 나서 병원에 갔다가 갑자기 세상을 떴는데 일제에 죽임을 당한 것으로 추측하고 있다. 주시경이 1914년 갑자기 세상을 뜨게 되어 이 모임이 주춤했으나 그 제자들이 중심이 되어 1921년 ‘조선어연구회’로 이름을 바꾸고 다시 힘차게 연구하고 활동하게 된 것이다.
△ 조선어강습원 최현이 졸업장. ‘졸업장’이란 말이 아니고 ‘익힘에 주는 글’이라고 했고 그 뒤에 ‘닦은 보람’, ‘마친 보람’,‘배흔 보람’이라고 했다.
조선어연구회는 1926년 민족 운동가들과 ‘가갸날’을 만들고 2년 뒤 1928년 ‘한글날’로 이름 바꾼다. 이 한글날은 한글 학자와 운동가들이 한글을 지키고 사랑하고 빛내는 정신을 다지고 뭉치게 해준 매우 뜻있는 날이었다. 이 한글날이 있었기에 일제 강점기 때는 말할 것 없고 대한민국 시대에도 한글사랑 정신을 다지고 이어가는 중대한 날이기에 2005년 국경일로 승격하게 된다.
1926년 한글날 처음 이름인 ‘가갸날’이 태어났을 때에 만해 한용운이 동아일보에 쓴 「가갸날」이란 시를 보면 한글날의 참뜻과 이 날이 얼마나 감격스런 날인지 느낄 수 있다. 한자말 “축일, 제일”과 영어 “데이, 시이즌”보다 우리말 ‘날’이 아름답고 좋다는 것을 힘주어 말한 것을 오늘난 한자말과 영어에 미친 한국인들이 귀담아 들어야 겠다.
가갸날
한용운
아아 가갸날
참되고 어질고 아름다워요.
축일, 제일, 데이, 시이즌, 이 위에
가갸날이 났어요. 가갸날.
끝없는 바다에 쑥 솟아오르는 해처럼
힘 있고 빛나고 뚜렷한 가갸날.
데이보다 읽기 좋고 시이즌보다 알기 쉬워요.
입으로 젖꼭지를 물고 손으로 다른 젓꼭지를 만지는
어여뿐 아기도 일러줄 수 있어요.
아무것도 배우지 못한 계집 사내도 가르쳐 줄 수 있어요.
가갸로 말을 하고 글을 쓰셔요.
혀끝에서 물결이 솟고 붓 아래에 꽃이 피어요.
그 속에 우리의 향기로운 목숨이 살아 움직입니다.
그 속엔 낯익은 사랑의 실마리가 풀리면서 감겨 있어요.
굳세게 생각하고 아름답게 노래하여요.
검이여 가갸날로 검의 가장 좋은 날을 삼아 주세요.
온 누리 모든 사람으로 가갸날을 노래하게 하여 주세요.
가갸날, 오오 가갸날.
한글학회는 1927년 동인지한글을 처음 내기 시작한 뒤, 1932년 학회지 한글을 창간하여 지금까지 내고 있다. 1929년 10월 ‘조선어사전편찬회’를 조직하여 우리말 사전 만들 준비를 시작했고, 1930년 ‘조선어 철자 통일’을 하고, 12월에 한글 맞춤법통일안 제정위원을 선출했다. 그리고 1931년에 ‘조선어학회’로 이름을 바꾸고 이극로가 간사장이 되어 더욱 활발하게 활동한다. 1933년 마침내 한글 맞춤법통일안 만들어 오늘날 까지 그 바탕에서 한글을 쓸 수 있게 했다. 이 일은 대단히 중대한 일이었다. 1936년 조선어 표준말 모음을 발표하고 1941년 외래어 표기법 통일안을 내놓았다. 그리고 1942년 봄에 그동안 사전을 만들려고 준비한 원고를 조판에 들어갔으나 그해 가을 일제는 이 사전 만드는 일에 관련된 사람들을 잡아간 사건이 일어났으니 이른바 ‘조선어학회사건’이다.
이 모두 중대한 독립 준비 운동이고 광복 운동이다. 이때 이렇게 우리 말글을 갈고 닦았기에 광복 뒤에 우리 말글로 교육도 하고, 공문서도 쓰고 우리 말글살이로 국민들 지식수준을 높여 주어 오늘날 우리 말꽃이 활짝 피게 되어 우리 문화 바람이 나라밖 까지 불고 있다. 한글 운동이 중국과 일본 유럽에까지 일어난 한류의 밑거름이다.
4.1. ‘조선어학회 사건’을 좀 더 자세히 밝힌다.
일제는 배달겨레 정신이 강한 사람을 사상범으로 분류하고, 그들을 탄압하기 위하여 1941년 ‘조선사상범 예방 구금령’을 공표하여 민족 운동이나 민족 계몽 운동을 하는 한국인을 마음대로 구속할 수 있도록 하였다. 대동아전쟁을 일으키고 우리 겨레를 없애려고 학교에서 우리 말글을 배우고 쓰지 못하게 했다. 배달겨레말을 못 쓰게 해야 우리 겨레 얼이 사라지고 완전한 일본인으로 만들 수 있기 때문이었다. 이런 분위기에서 일제는 1942년에 배달겨레말 사전을 만드는 조선어학회 회원들과 그 지원자들을 일본에 반역하는 사상범으로 잡아다 감옥에 가둔 것이다.
앞에서 밝힌 것처럼, 한글을 연구하고 갈고 닦아 겨레와 나라를 지키려는 주시경과 그 제자들이 1908년 대한제국 때에 만든 조선어학회는 일제가 그들의 목적을 이루는 데 가장 큰 걸림돌이었기에 이른바 조선어학회사건을 조작한 것이다. 이 사건으로 1942년 10월 1일부터 1943년 4월 1일까지 모두 33명이 검거되었고, 그리고 조사를 받은 사람은 100명이 넘었고, 증인으로 붙잡혀간 사람도 48명이나 되었다. 이들은 검거 과정과 취조 과정에서 혹독한 고문을 당하였다.
일제는 애국선열들을 감옥에 가두고 거짓 자백을 받아내려고 모진 고문을 했고, 한징, 이윤재 두 분은 감옥에서 돌아가셨다. 이들은 “물 먹이기, 공중에 달고 치기, 비행기태우기, 메어차기, 난장질하기, 불로 지지기, 개처럼 사지로 서기, 얼굴에 먹으로 악마 그리기, 동지끼리 서로 빰치게 하기” 들과 같은 온갖 모욕과 고문에 한징, 이윤재 두 분은 감옥에서 돌아가셨다. 1945년 8월 15일 일본이 연합국에 항복해서 그 때까지 감옥에 있던 이극로, 최현배, 정인승, 이희승 선생도 풀려나게 되었다. 그 때 출옥 광경을 목격한 이급엽(전 연세대 교수)님의 증언에 따르면 한 분은 들것에 실려 나오고, 한 분은 다리에 상처가 있어 쩔뚝거리고 나왔는데 그 모습이 너무 처참하였다고 한다(한글새소식 제 463호 16쪽).
치안유지법으로 검거한 이들에 대한 재판은 함흥지방재판소에서 9회에 걸쳐 진행되어 1945년 1월에 최종 선고가 이루어졌다. 유죄가 선고된 자에게는 “고유 언어는 민족의식을 양성하는 것이므로 조선어학회의 사전편찬은 조선민족정신을 유지하는 민족운동의 형태이다.”라는 결정문이 내려졌다.
일본 강점기 때에 수많은 지식인들이 일본제국에 무릎을 꿇고 그 앞잡이가 되었으나 조선어학회 학자들과 그를 도운 분들은 끝까지 겨레 얼과 말을 지키고 빛내려고 애썼다. 이런 분들이 있었기에 우리가 광복 뒤 이렇게 잘 사는 나라를 만들 수 있었고, 세계를 이끌 꿈을 꿀 수 있게 된 것이다. 이 일은 한두 번 시위나 싸운 일보다 일생동안 겨레말과 얼을 지키고 빛내는 연구를 하고 목숨까지 바쳤으니 어떤 광복 운동보다도 귀중한 광복운동이고 독립운동이었다. 그런데 지금 우리는 이 분들에게 고마워하고 이 분들 정신과 사건을 기리는 기념탑은 말할 것 없고 조그만 표지석 하나도 없으니 선열들에게 죄송하고 안타깝기 그지없다.
△ 조선어학회 사건으로 경찰에 조사를 받거나 감옥살이를 하고 순국한 선열들 33인(위 왼쪽부터 이인, 김법린, 안재홍, 김도연, 서민호, 이은상, 이중화, 한징, 장지영, 이윤재, 이만규, 윤병호, 권덕규, 이강래, 이우식, 이병기, 이극로, 서승효, 신윤국, 최현배, 김윤경, 정열모, 이희승, 장현식, 김양수, 정인승, 안호상, 정태진, 정인섭, 김선기, 이석린, 권승욱 ).
4.2. 광복 뒤 한글학회가 한 건국 준비 활동
조선어학회는 광복이 되자 7년간이나 말살되었던 국어교육이 시급함을 느끼고 1945년 한글첫걸음, 초등국어교본, 중등국어독본 등 12가지의 국어교과서를 편찬했으며, 그해 10월 훈민정음 원본의 기록에 의거하여 한글날을 10월 9일로 바꾸었다. 또한 1946년 한글강습회 사범부 수료자 1,000여 명을 배출한 데 이어 1948년 세종중등국어교사양성소를 열고 국어교사 배출에 힘썼다. 일본어를 국어로 배웠으니 우리 말글을 가르칠 사람이 없는 판에 이 일은 우리 교육에 매우 중대한 일이고 학회의 업적이다.
그리고 일제가 못쓰게 한 우리말을 도로 찾고 새로 만드는 일을 한다. 이즈음 일제 말기에 중단되었던 조선말 큰사전 편찬을 재개하여 1947년 제1권과 1949년 제2권을 펴낸 다음, 1950년 제3권 인쇄와 제4권 조판이 끝날 무렵 6·25전쟁이 일어나 중단했다가 1957년 6권 모두 완성했다. 미군정시대에 건국 준비를 한 것이다.
1948년 남쪽에 대한민국, 북쪽에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 서니, 북쪽에 조선어학회가 있어 남쪽의 조선어학회란 이름이 문제가 되었다. 남쪽의 조선체육회도 대한체육학회로 바꾸고, 조선기독교서회도 대한기독교서회로 바꾸었다. 1949년 10월 2일 학회 이름을 바꾸는 회의를 했는데 정인승은 ‘한글학회’로, 정태진은 ‘국어학회’로, 이희승과 방종현은 ‘국어연구회’로, 이강로와 유열은 ‘우리말학회’로, 최상수는 ‘한글갈모임’으로, 최현배는 ‘대한국어학회’로, 김윤경은 ‘대한어학회’로 바꾸자고 했는데 정인승이 내세운 ‘한글학회’로 결정한다. 한글을 살리고 빛내려는 깊은 똣은 담은 결정이었다.
1946년 6월 미 군정청 문교부 편수국장 최현배, 부국장 장지영이 국어정화위원회를 구성하고 우리말 도로 찾기 운동을 한다. 한글학회는 자매모임인 ‘한자폐지회’(위원장 이극로)와 ‘한글문화보급회’(회장 정열모), ‘한글전용촉진회’(위원장 최현배)들과 함께 왜말 버리기와 왜색 간판 버리기에 힘썼다.
이 때에 일본말 “돔부리”는 “덮밥”, “오리쓰메”는 “나무도시락”, “가마보꼬”는 “생선묵”, “가마야기”는 “통구이”, “벤또오”는 “도시락”, “사시미”는 “생선회”, “스시”는 “초밥”, “우동”은 “가락국수”, “덴뿌라”는 “튀김”, “용달사”는 “심부름집”, “나까마”는 “거간”, “소매점”은 “구멍가게”, “매물”은 “팔것”, “오뎅”은 “꼬치안주”, “배급소”는 “태움곳”, “중매”는 “거간”으로 바꾸기 운동을 했다. 이 때 한자 폐지와 우리말 도로 찾기 운동이 매우 뜻있고 중대한 일이었기에 장지영이 쓴 글을 살펴보자.
[광복 뒤 우리말 도로 찾기] 나랏말을 깨끗이 하자.
1946년 조선어학회 이사장 장지영
머리말
우리가 지난 사십 년 동안 왜정 밑에서 민족 동화 정책이 엎어 눌리어, 우리가 지녔던 문화의 빛나는 자취는 점점 벗어지고 까다롭고 지저분한 왜국 습속에 물들게 되어 거의 본래의 면목을 잃게 되었는데, 더욱 민족정신의 표현인 말에 있어 무심하였다.
우리의 뜻을 나타냄에 들어맞는 우리말이 있지마는 구태여 일본말을 쓰는 일이 많았고, 또 한자어를 씀에도 참다운 한어식의 한자어가 아니요 왜식 한자어를 써서 그 말의 가진바 뜻이 한자의 본뜻과는 아주 달라진 것이 많다.
이제 우리는 왜정의 더러운 자취를 말끔히 씻어 버리고 우리 겨레의 특색을 다시 살려 만년의 빛나는 새 나라를 세우려 하는 이때에, 우리로서는 우리의 정신을 나타내는 우리말에서부터 씻어 내지 아니하면 아니 될 것이다.
- 줄임 - 우리말 가운데 한 마디라도 일본말이 남아 있는 동안에는 곧, 일본의 정신이 우리에게 한 토막 남아 있다는 표징이 되는 것이다.
우리는 이런 점을 생각하여, 한시 바삐 일본말을 쓸어버리고, 우리말을 살려야 할 것이다. 그리하여 잠을 자던 우리 민족혼을 깨워 내고, 우리의 맑은 정신을 우리의 깨끗한 우리말로 나타내어서, 이 세상에서 우리는 이것이라는 것을 뚜렷이 드러내어 뵈어야 할 것이다.
방침
1. 우리말이 있는데 일본말을 쓰는 것은 일본말을 버리고 우리말을 쓴다.
2. 우리말이 없고, 일본말을 쓰는 것은 우리 옛말에라도 찾아보아 비슷한 것이 있으면 이를 끌어다가 그 뜻을 새로 작정하고 쓰기로 한다.
3. 옛말도 찾아낼 수 없는 말이 일본말로 씌어 온 것은 다른 말에서 비슷한 것을 얻어가지고 새말을 만들어 그 뜻을 작정하고 쓰기로 한다.
4. 한자로 된 일본말은 일본식 한자어를 버리고 우리가 전부터 써 오던 식의 한자어를 쓰기로 한다.
1945년 한자폐지회 이극로 위원장
강령
1. 우리는 삼천만 하나하나가 눈뜬 봉사가 없게 하자
1. 우리는 우리말과 우리글로 새 문화를 건설하자.
1. 우리는 우리말과 우리글이 세계 문화를 지도하는 데까지 이르도록 하자.
실행조건
1. 초등교육에서 한자를 뺄 것. 다만 중등 교육 이상에서 한자를 가르쳐 동양 고전 연구의 길을 열기로 할 것.
1. 일상 문에 한자를 섞지 아니할 것. 다만 취미에 따라 순한문을 쓰는 것은 개인의 자유에 맡길 것.
1. 신문, 잡지는 그 어느 면, 무슨 기사임을 물론하고 한자를 아니 섞을 것.
1. 편지 겉봉, 명함, 문패도 모두 한글을 쓸 것.
1. 동서고금의 모든 서적을 속히 한글로 번역할 것.
한글학회는 1948년 한글문화보급회(회장 정열모, 중앙위원회 위원장 이극로)를 만들어 ‘한글문화’를 간행하고, 1949년 12월 한글전용촉진회(위원장 최현배)를 만들어 일본말 찌꺼기 버리기와 “한 마음, 한 뜻으로 한글만 쓰자.”는 운동을 했는데 6.25 뒤에 ‘한글 전용운동가는 빨갱이’라는 과격한 말까지 나돌아 이 운동이 위축되었다. 그런데 오늘날도 한자 혼용파들은 한글 운동가를 빨갱이라고 몰아 부치니 참으로 어처구니없는 일이다.
1957년 4월 13일 학회는 문교부장관에게 ‘한글타자기 글자판 통일에 대한 건의서’를 낸다. 그해 5월 초에 정부는 ‘한글타자기 자판 합리적 통일 위원회’를 구성하였다. 1962년 한글기계화연구소(소장 최현배)도 만들어 ‘한글타자기 글자판 통일안’을 문교부에 내고, 한글타자기 검증시험도 실시하고 1976년까지 이 연구소를 두고 기계로 한글 쓰기 연구와 운동을 했으나 정부가 엉터리 표준을 정하면서 해산했다. 오늘날 정보통신 선진국으로 가는 초석이었다.
박정희 정권 때인 1968년에는 한글전용국민실천회(회장 주요한)를 만들어 한글전용운동을 했고, 1972년부터 한글 새소식이란 우리 말글 계몽지를 다달이 내고, 1974년에 한글문화협회(회장 주영하)를 만들고 한글운동을 한다. 1968년부터 전국국어운동대학생연합회(회장 이봉원)가 활동하게 되면서 그 활동을 도와주고 1974년에 국어운동고등학생회(지도 교사 오동춘)가 한글문화협회 소속 모임으로 활동한다. 1986년에 한글단체 연합모임인 한글문화단체모두모임(회장 안호상)이 창립되어 한글학회와 함께 한글 지키고 빛내는 활동을 열심히 한다.
그리고 세종대왕기념사업회, 외솔회, 우리말살리는겨레모임, 전국국어운동대학생동문회, 국어정보학회 우리말바로쓰기모임, 한글문화원, 국어문화운동본부, 한글문화연대, 한글문화연구회 들과 한글날국경일제정범국민추진위원회(위원장 전택부)를 조직해 2005년에 ‘한글날 국경일 제정 법안’을 통과시키고, 국어기본법 제정운동도 하고 한글박물관 건립, 한글마루지 사업, 한자와 영어로부터 한글을 지키고 빛내는 일에 앞장서고 있다.
한글학회는 한글 연구와 학술 활동을 많이 했다. 우리 말광(사전) 만들기, 옛 한문책 국역하기, 한글을 기계로 쓰기 들이 중요한 일이었다. 그러나 한글을 짓밟는 일본식 한자 혼용 세력과 싸우느라 우리말을 갈고 닦는 일을 제대로 하지 못한 아쉬움이 있다. 지금도 일본식 한자 혼용주의자와 영어 공용주의자들이 한글학회 활동을 가로막고 우리 말글 독립을 방해하니 어찌 통탄할 일이 아닌가!
△ 1992년에 우리말 큰사전을 내고 한글새소식, 한국땅이름큰사전을 이어서 낸다.
그러나 1958년 중사전과 1960년 소사전을 펴냈으며, 학회 안에 조사부를 두어 지명 조사에 착수하는 한편 금강경 삼가, 석보상절의 영인본을 펴냈고 같은 해 ‘한글타자기통일글자판안’을 문교부에 제출했다. 1970년대 이후 국제언어학자대회, 한글기계전시회, 국어학 도서전시회 등을 열어 한글을 널리 알리는 데 이바지했다. 1987년 ‘개정 헌법의 표기 및 표현에 대한 건의서’를 제출했으며, 1990년 이후 북한언어 연구와 국어국문학 관련 논문 데이터베이스화 작업 등 정보화시대의 한글 쓰임새 높이기에 많은 많은 관심을 보이고 있다. 1965년 중사전을 보완한 새한글사전을 편찬한 후, 쉬운말사전(1967), 고치고 더한 쉬운말 사전(1984), 한국지명총람(1986), 한국 땅이름 큰 사전(3권, 1991), 우리말큰사전(4권, 1992), 국어학사전(1995)을 펴냈고, 기관지로 계간 한글, 월간 한글 새소식, 연간 문학한글․교육한글․한힌샘 주시경 연구 등을 펴내고 있다.
△ 1927년부터 2011년 3월까지 291호 째 한글지가 나왔다.
지금은 한글학회 재단 이사장 겸 학회 회장에 김종택, 한글 운동 산하 단체인 한말글문화협회 대표 이대로가 중심이 되어 선열들이 이어온 우리 말글 독립운동과 나라 독립운동을 열심히 하고 있다. 지난 100년 동안 한글학회가 우리말과 얼을 지키고 빛내어 겨레와 나라가 독립하고 튼튼하고 잘 사는 나라를 만드는 데 얼마나 많은 일을 했는지 중요한 일만 살펴보았다. 지난 100년 동안 한글학회가 한 일이 많아서 국어 정책이나 국민 국어 생활에 문제가 생기고 모르는 게 있으면 지금도 많은 국민이 한글학회를 찾으며 한글학회를 국가 기관인 것으로 알고 있을 정도이다. 그러나 대한민국 정부로부터 재정 지원을 한 푼도 받지 못하고 오히려 멸시를 받고 있다.
5.맺음말
우리 겨레는 지난 수천 년 동안 우리말은 있으나 우리 글자가 없어 중국 한자를 빌려 썼다. 그러나 그 한문은 중국말을 적은 글이기에 우리에게는 몹시 불편했다. 그래서 삼국시대 설총이 만들었다는 이두로 우리식 말글살이를 해보기도 했다. 그 시대 향찰과 구결을 만들어 쓴 것은 우리식 말글살이 첫 몸부림이었다. 그러나 이는 모두 중국 한자를 빌려 쓰는 일이기에 마찬가지로 불편했다.
그런 불편한 말글살이를 천 수백 년이나 하다가 마침내 565년 전인 1446년 조선 4대 임금인 세종이 세계 으뜸가는 우리 글자, 훈민정음을 만들었다. 참으로 자랑스럽고 고마운 일이었다. 그러나 세종과 그 뒤 몇 왕 시대엔 이 글을 살려 쓰려고 애썼으나 450여 년 동안 그 한글을 거들떠보지 않고 한자만 좋아해서 한글은 그 빛이 나지 못했다. 그런데 한글과 같은 소리글자인 로마자를 쓰는 서양 강대국들이 이 나라에 한글로 성경을 써서 기독교를 선교하면서 많은 이들이 우리 한글에 눈을 뜨기 시작했다. 그리고 중국 청나라 그늘에서 벗어나면서 한글로 자주독립된 나라를 세우고자 한글에 주목하게 된 것이다.
이때 하늘이 도와서 이 한글을 갈고 닦고 지키는 모임이 태어났다. 바로 오늘날 한글학회의 처음 이름인 ‘국어연구학회’다. 이 학회는 나라가 기울던 1908년 고종 때 태어나서 103년 동안 험난한 길을 헤쳐 온 오늘날 한글학회다. 이 학회는 언어학회로서는 세계에서 가장 먼저 생긴 학술 학회이면서 겨레 독립과 광복을 위해서 목숨까지 바친 겨레사랑 나라사랑 민족 학회요 독립운동 단체인 것이다.
한글학회는 나라가 기울던 대한제국 때엔 우리 말글로 힘센 나라를 만들려고 애썼다. 이 일은 독립 운동이었다. 일본제국에 나라를 빼앗긴 뒤엔 한글을 갈고 닦으면서 우리말과 얼을 지키고 빛내려다가 일제에 끌려가 고문과 감옥살이에 목숨까지 빼앗겼으니 이 일은 광복 운동이었다. 광복 뒤에는 우리 말글로 교육을 하고 말글살이를 자유롭게 할 수 있도록 해 나라다운 나라를 만들게 했으니 이 일은 건국 운동이었다.
한마디로 한글학회는 한글을 갈고 닦는 연구를 한 세계 최초 언어 학술 학회이면서 이 나라에서 가장 큰 독립운동 단체요, 광복운동 단체일 뿐만 아니라 대한민국을 세우는 데 가장 큰 공로가 있는 건국 공로 단체였다. 한글학회가 한글을 지키고 갈고 닦았기에 그 국민 지식수준이 높아졌으며, 그 바탕에서 세계가 놀란 정도로 빨리 민주주의와 경제 발전을 이루었고, 오늘날 정보통신 강국이 되었다. 한글을 만든 세종임금과 한글을 지킨 한글학회와 한글이 새삼 고맙고 자랑스럽다.
우리 대한민국 국민에게 세종임금과 한글, 그리고 한글학회가 있다는 것은 큰 복이다. 만약에 이 세 가지 복을 받지 못했다면 오늘날 우리는 우리 말글로 공부도 못 하고, 공문서도 쓰지 못하고, 말글살이를 하지 못하고 조선시대와 그 이전처럼 중국 한문으로 말글살이를 하거나 일본 강점기 때처럼 일제 말글로 말글살이를 하고 있을 것이다. 생각만 해도 끔찍한 일이다.
그런데 일제 강점기 때는 한글과 한글학회가 일본인들에게 멸시당하고 푸대접받았다하더라도 대한민국 정부와 국민으로부터 한글과 한글학회가 푸대접 받고 있으니 어찌된 일이란 말인가! 수천 년 동안 우리 뼈와 가슴속에 박힌 중국문화와 한문 숭배 풍조 때문인가? 아니면 철저하게 일본제국 교육에 물든 친일 분자와 일본제국 찌꺼기 때문인가? 참으로 부끄럽고 안타까운 일이다.
이제라도 세종임금을 제대로 받들고 그 분의 높은 뜻을 따르고 받들어야 할 것이다. 그러려면 세종대왕 나신 곳을 찾아 겨레 문화 성지로 만들고, 한글 역사 문화관을 잘 짓고 국경일이 된 한글날을 공휴일로 지정해 온 국민이 함께 한글 잔치를 하면서 한글을 더 사랑하고 한글을 지키고 빛내려고 애쓴 분들을 받들어야 할 것이다. 그러려면 광화문 광장에 한글탑을 세우고 그 앞에 영원히 꺼지지 않는 한글 불빛을 밝히고 그 옆 공원에 조선어학회 사건 기념탑도 세우고, 대한민국 정부와 국민이 세운 한글회관을 문화재로 지정하고, 세종대왕 생가터와 경복궁 일대를 한글문화 관광지로 잘 꾸며야 하겠다.
한글학회 학술 활동도 광복 운동이고, 독립운동이었다. 사대 근성과 식민 통치 찌꺼기 때문에, 또 학술 단체로만 보기에 나라 독립 기초를 닦고도 독립운동을 한 업적이 묻혔다. 지금도 튼튼한 나라를 만들려고 애쓰는 한글학회가 더 좋은 일을 많이 하도록 밀어주고, 한글을 잘 이용할 길을 찾아 정보통신 선진국으로 계속 가자. 우리 말글로 노벨문학상을 탈 문학 작품도 쓰고, 한글로 모두 수준이 높은 문화인이 되어 문화 강국이 되자. 그래서 더 살기 좋은 나라를 만들고 인류 문화 발전에도 이바지하자.
아직 우리 말글 독립이 완전하게 이루진 게 아니다. 그래서 우리 얼도 나라도 완전하게 독립하지 못했다. 모두 힘을 모아 우리 말글 독립을 이루자. 우리 말글이 독립할 때, 자주문화가 꽃피고 교육과 통일문제는 말할 거 없고 나라의 모든 문제가 저절로 풀릴 것이다.
△ 2008년 8월에 한글학회에서 낸 한글학회 100년사.
<참고 자료>
사민필지(1892년 삼문출판사 헐버트 지음)
한글학회 100년사(2008년 한글학회)
한글새소식(1972년부터 2011년 까지)
우리말글 독립운동 발자취(2008년 지식산업사. 이대로 지음)
파란눈 한국혼 (2010년 참좋은친구, 김동진 지음)
주시경 선생 전기(한글학회 단기 4293년 김윤경 지음 )
네이버 백과사전
문학신문 [이대로의 우리말글 사랑]:이근엽 연세대 명예교수의 조선어학회 사건 증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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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리대로의 한말글 사랑 한마당 원문보기 글쓴이: 나라임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