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년 11월 24일 목요일 성 안드레아 둥락 사제와 동료 순교자들 기념일)
"무너졌다. 무너졌다. 대바빌론이! 바빌론이 마귀들의 거처가 되고, 온갖 더러운 영들의
소굴, 온갖 더러운 새들의 소굴, 더럽고 미움 받는 온갖 짐승들의 소굴이 되고 말았다." (2)
하느님의 영광을 반사하는 천사(묵시18,1)가 외치는 내용이다. 특히 '무너졌다. 무너졌다.
대바빌론이!' 라는 외침은 이미 묵시록 14장 8절에서 언급된 다른 두 번째 천사가 외쳤던
바로 그것이다.
즉 대바빌론(큰 성 바빌론)의 멸망은 이미 묵시록 14장 8절에 암시되었고, 묵시록 16장
19절에 묘사된 일곱째 대접 재앙에서 본격적인 멸망에 이른 것으로 묘사된 것이다.
여기서 '무너졌다'로 번역된 '에페센'(epesen;fallen)은 '무너지다',
'떨어지다' 라는 뜻을 지닌 '핍토'(pipto)의 예언적 부정 과거로서, 이것이 이중으로
언급되어, 향후 반드시 도래할 대바빌론의 완전한 멸망을 확신에 찬 어조로 드러낸다.
그런데 본문에서 선언된 바빌론의 멸망은 명백히 '무너졌습니다. 무너졌습니다.
바빌론이!'(이사21,9) 라고 말한 이사야의 언급과 연관되는 것이다. 그리고 '대'(큰)로
번역된 '메갈레'(megalle)가 '바빌론'과 함께 사용된 용례가 자주 발견되는데, 이것은
그 성의 실제 크기나 위대함을 가리킨다기보다는, 네부카드네자르처럼 스스로를 과대
평가하는 교만함에 대한 상징적 묘사이다.
묵시록에서 바빌론은 문자적 의미의 고대 바빌론이 아니라, 일차적으로 사도 요한 당시
로마 제국을 염두에 둔 표현이다. 따라서 대바빌론은 일차적으로 네부카드네자르와
같이,스스로를 과대평가하는 교만한 로마 제국의 정치 권력을 암시한다고 할 수 있다
(1베드5,13).
그럼에도 불구하고 로마 제국이 바빌론의 궁극적인 상징은 아니다. 왜냐하면, 묵시록은
단순히 로마의 멸망을 예언하는 예언서가 아니기 때문이다.
사도 요한은 단순히 로마를 거점으로 하여 종교적, 도덕적 타락의 극치를 바빌론으로
형상화한 것일 뿐이다.
다시말해서, 사도 요한이 바빌론으로 상징하고 있는 것은 종말에 드러날 '악의 총체'이다.
따라서 대바빌론의 멸망은 곧 사탄에 의해 통제되던 악의 총체가 괴멸당할 것이라는
의미를 축하고 있는 것이다.
대바빌론은 '땅의 탕녀들과 역겨운 것들의 어미'(묵시17,5)로서, 이 탕녀에게 내려질
심판은 묵시록 17장에,그것의 패망은 묵시록 18장에 더욱 확대되어 자세하게 묘사된다.
'바빌론의 마귀들의 거처가 되고, 온갖 더러운 영들의 소굴, 온갖 더러운 새들의 소굴,
더럽고 미움받는 온갖 짐승들의 소굴이 되고 말았다'
하느님의 영광을 반사하는 천사는 힘찬 소리로 바빌론의 함락을 선포하고, 그 결과
그곳이 마귀들의 거처와 온갖 더러운 영들의 소굴과 온갖 더러운 새들의 소굴, 더럽고
미움받는 온갖 짐승들의 소굴이 되고 말았다고 언급한다.
묵시록 16장 13절,14절에서 사도 요한은 "그때에 나는 용의 입과 짐승의 입과
거짓 예언자의 입에서 개구리같이 생긴 더러운 영 셋이 나오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들은 마귀들의 영으로서 표징을 일으키는 자들입니다" 고 언급한다.
즉 사도 요한의 어법에서 '더러운 영'과 '마귀들의 영'은 상호 교환이 가능한 표현으로서,
'마귀'(다이모니온;daimonion)는 곧 '더러운 영'(프뉴마토스 아카다르투;pneumatos
akathartu)과 동격 관계를 형성한다.
따라서 바빌론이 '온갖 더러운 영들의 소굴, 온갖 더러운 새들의 소굴, 더럽고 미움받는
온갖 짐승들의 소굴이 되고 말았다'라는 언급은 '바빌론이 마귀들의 거처가 되었다'
라는 언급을 더욱 풍부하게 부연 설명한 것으로 간주할 수 있다.
여기서 '거처'로 번역된 '카토이케테리온'(katoiketerion)과 세 차례나 '소굴'로
번역된 '퓔라케'(phyllake)는 언어적으로 병행한다. 그런데 '퓔라케'는 단순히 삶의
근거지(dwelling place)나 모이는 곳만이 아니라 '감옥', '소굴'이란 부정적 의미도
지닌다(묵시20,7).
이런 의미에 유의할 경우, 본문은 틀림없이 바빌론의 과거의 화려했던 모습과는
대조되는 황폐하고 불결하기 짝이 없는 모습을 부각시킴으로써, 멸망한 바빌론의
참상을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특히 '되고 말았다'로 번역된 '에게네토'(egeneto)는 '발생하다', '일어나다' 라는
뜻을 지닌 '기노마이'(ginomai)의 부정 과거로서, 이러한 발생을 동적 이미지로
드러낸다.
영적 차원에서 보면, 바빌론은 이미 이전에도 마귀들의 '거처' 였지만(에이미,eimi),
본문에서는 그것을 마귀들의 거처가 '되고 말았다'(기노마이, ginomai)라고 묘사하여,
멸망당한 바빌론의 폐허를 더욱 선명하게 연상시킨다.
그러나 다른 한편, '퓔라케'(phyllake)는 '감시하는 곳'(watching place)이란 의미도
나타낸다. 이럴 경우 이것은 하바쿡서 2장 1절의 "나는 내 초소에 서서, 성벽 위에
자리 잡고서 살펴보리라" 라는 어구와 병행한다. 즉 반신적 세력들은 마치 먹이를
기다리는 더러운 새들처럼 멸망해 가는 그들의 파수대를 구축하고 있는 것이다.
한편, '더럽고 미움 받는'으로 번역된 '아카타르투 카이 메미세메누'(akathartu kai
memisemenu)는 묵시록 17장 4절에 언급된 '손에는 자기가 저지른 불륜의 그 역겹고
더러운 것이 가득 담긴 금잔을 들고 있었습니다' 에도 나온다.
여기서 '더러운 것'으로 번역된 '아카타르타'(묵시17,4)는 부정 접두어 '아'(a)와
'깨끗한', '정결한' 이란 뜻을 가진 형용사 '카타로스'(katharos)에서 파생한 명사
'카타로테스'(katharotes)의 합성어로서, 탕녀가 자행한 불륜 때문에 역겹고 더러운
것들이 금잔 속에 담겨져 있음을 보여준다.
그런 의미에서 '불륜의 역겹고 더러운 것'이란 우상 숭배로 인한 도덕적, 영적 타락
일체를 형상화한 것이다(마태23,25참조).
그리고 신명기 14장 12-20절에는 먹을 수 없는 부정한 새의 목록이 언급되고 있으며,
구약 성경은 도처에서 동물과 사람의 썩은 시체를 먹이로 찾는 새들에 대해 언급하고
있으므로 (신명 28,26;1열왕14,11; 21,24; 예레7,33; 15,3;1 6,4; 19,7; 34,20;
에제29,5; 32,4), '온갖 더러운 새들'은 이러한 새들을 염두에 둔 표현이며, 앞에 나온
'마귀들', '더러운 영들' 등 악령을 상징한다고 볼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