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이 보호하시던 때가 다시 오기를 원하노라! (욥기 29장 1절 – 25절) 29:1 욥이 풍자하여 이르되 2 나는 지난 세월과 하나님이 나를 보호하시던 때가 다시 오기를 원하노라 3 그 때에는 그의 등불이 내 머리에 비치었고 내가 그의 빛을 힘입어 암흑에서도 걸어다녔느니라 4 내가 원기 왕성하던 날과 같이 지내기를 원하노라 그 때에는 하나님이 내 장막에 기름을 발라 주셨도다 5 그 때에는 전능자가 아직도 나와 함께 계셨으며… 6 젖으로 내 발자취를 씻으며 바위가 나를 위하여 기름 시내를 쏟아냈으며 7 그 때에는 내가 나가서 성문에 이르기도 하며… 8 나를 보고 젊은이들은 숨으며 노인들은 일어나서 서며 9 유지들은 말을 삼가고 손으로 입을 가리며… 11 귀가 들은즉 나를 축복하고 눈이 본즉 나를 증언하였나니 12 이는 부르짖는 빈민과 도와 줄 자 없는 고아를 내가 건졌음이라 13 망하게 된 자도 나를 위하여 복을 빌었으며 과부의 마음이 나로 말미암아 기뻐 노래하였느니라 14 내가 의를 옷으로 삼아 입었으며 나의 정의는 겉옷과 모자 같았느니라 15 나는 맹인의 눈도 되고 다리 저는 사람의 발도 되고 16 빈궁한 자의 아버지도 되며 내가 모르는 사람의 송사를 돌보아 주었으며 17 불의한 자의 턱뼈를 부수고 노획한 물건을 그 잇새에서 빼내었느니라 18 내가 스스로 말하기를 나는 내 보금자리에서 숨을 거두며 나의 날은 모래알 같이 많으리라 하였느니라… 21 무리는 내 말을 듣고 희망을 걸었으며 내가 가르칠 때에 잠잠하였노라… 23 그들은 비를 기다리듯 나를 기다렸으며 봄비를 맞이하듯 입을 벌렸느니라… 25 내가 그들의 길을 택하여 주고… 왕이 군대 중에 있는 것과도 같았고 애곡하는 자를 위로하는 사람과도 같았느니라 (개역개정) 오늘의 성경 본문은, 욥이 당한 고난의 원인을 두고 친구들 간에 벌어진 3차 변론(22-31장)의 마지막 부분(26-31장) 중에서, 욥의 독백 부분(29-31장)으로 하나님이 과거 자신에게 베푸신 은혜를 회상하며 그 잃어버린 영광을 다시 회복할 수 있기를 하나님 앞에 갈망하는 내용입니다. 고난의 상황에서도 하나님 앞에 감사와 소망의 신앙을 잃어버리지 않은 욥의 모습을 보여줍니다. 극심한 고난 중에 친구들의 정죄로 영적인 고통을 겪어야 했던 욥은, 그들과의 3차례에 걸친 변론을 마무리하며 자신의 문제를 독백을 통해서 결론적으로 요약합니다. 오늘 본문(29장)의 독백에서는, “나는 지난 세월과 하나님이 나를 보호하시던 때가 다시 오기를 원하노라”(29:2)며, 자신이 고난 받기 전에 누렸던 축복과 사회적 지위와 영향력을 회고하며, 그 이유를 함께 하신 하나님께서 베풀어주신 은혜였다는 고백과 함께 하나님의 뜻대로 살고자 했던 삶을 회상하며, 그 영광을 다시 회복할 수 있기를 갈망합니다. 친구들이 현세적 인과응보 논리에만 사로잡혀서 내뱉는 그릇된 주장으로 욥을 악인으로 몰아간 것에 대한 반론이기도 했습니다. 1. 욥은 하나님의 은혜를 어떻게 회상합니까? 오늘 본문은 “욥이 풍자하여 이르되”(29:1)라는 선언을 통해서, 욥의 변론하는 내용의 전환이 있음을 밝힙니다. 이를 공동번역에서는 “욥이 탄식하며 읊조렸다.”는 표현을 통해 욥의 “탄식”의 독백으로, 새번역에서는 “욥이 다시 비유를 써서 말을 하였다.”고 함으로써 욥이 “비유”를 사용하여 자신의 독백을 표현한 것으로 나타냅니다. 욥의 첫 마디는, “나는 지난 세월과 하나님이 나를 보호하시던 때가 다시 오기를 원하노라!”(29:2)는 갈망의 고백이었습니다. 새번역에서는 “지나간 세월로 되돌아갈 수만 있으면, 하나님이 보호해 주시던 그 지나간 날로 되돌아갈 수 있으면 좋으련만!”이라는 가정법적 희망으로 표현합니다. 공동번역에서는 “지나간 옛 시절은 영영 돌아오지 않으려나! 하느님께서 지켜주시던 그 날은 끝내 돌아오지 않으려나!”는 강렬한 갈망의 회상으로 표현합니다. 어찌되었든 욥은 과거에 대한 회상의 독백을, 하나님의 인도와 보호로 자신이 번영과 축복을 누렸다는 감사의 신앙고백으로 시작합니다. 어려운 상황에도 과거에 베푸신 하나님의 은혜를 욥은 잊지 않았습니다. 욥은 자신이 번영을 누리던 때를 “하나님이 나를 보호하시던 때”라는 고백을 통해서, 사람의 생사화복을 주장하시는 분은 하나님이시며, 하나님의 주권적 섭리에 의해서 인생이 다스려지기에 하고자 하시면 과거에 베푸셨던 은혜로 자신을 다시금 “지난 세월”의 주님과 함께 하던 때로 회복시켜주실 수 있다는 희망을 고백합니다. 욥처럼 많은 믿음의 사람들은 환난과 고난의 역경의 때에 “나의 영혼이 잠잠히 하나님만 바람이여, 나의 구원이 그에게서 나오는도다. 오직 그만이 나의 반석이시오, 나의 구원이시오, 나의 요새이시니, 내가 크게 흔들리지 아니하리로다”(시62:1-2)라는 찬양과 믿음의 확신을 고백했던 것을 기억하지 않습니까? 욥은 “하나님이 나를 보호하시던 때”를, “그 때에는 그의 등불이 내 머리에 비치었고, 내가 그의 빛을 힘입어 암흑에서도 걸어 다녔느니라.”(29:3)고 고백합니다. “그의 등불”은 “여호와께서 그의 종 다윗을 위하여 유다 멸하기를 즐겨하지 아니하셨으니, 이는 그와 그의 자손에게 항상 등불을 주겠다고 말씀하셨음이더라.”(왕하8:19)고 했던 말씀처럼,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사랑과 보호를 나타내는 상징적 표현입니다. 따라서 “그의 등불이 내 머리에 비치었고”는, 하나님의 사랑과 보호로 자신이 축복과 번영을 누릴 수 있었다는 신앙 고백이자 찬양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욥은 “내가 그의 빛을 힘입어 암흑에서도 걸어다녔느니라”며, 하나님을 “등불”삼아 “빛으로 인도해 주시는 대로”(새번역) 어떠한 어려운 순간도 헤쳐 나갈 수 있었다고 고백합니다. 한편, 지금 현재 욥이 처한 파국 상황과 절망적 탄식을 할 수밖에 없는 이유가, 하나님이 “등불”을 꺼버리신 암흑의 상태이기 때문이라는 호소이기도 합니다. 욥은 하나님과 함께 하던 때가 가장 행복했다며, 물질적 육체적 축복의 회복 이전에 하나님과의 영적인 교제와 평안의 회복을 갈구했습니다. 따라서 욥은 “내가 원기 왕성하던 날과 같이 지내기를 원하노라. 그 때에는 하나님이 내 장막에 기름을 발라 주셨도다”(29:4) 곧 “내 나이 한창일 무렵, 하느님께서 나의 천막을 감싸주시던 그 때”(공동번역), “내가 그처럼 잘 살던 그 시절로 다시 돌아가서 살 수 있으면 좋으련만! 내 집에서 하나님과 친밀하게 사귀던 그 시절로 되돌아갈 수 있으면 좋으련만!”(새번역)이라며 하나님의 보호와 임재를 갈망합니다. 욥은 현재 자신이 겪는 비참한 상황이 무엇 때문인지는 몰라도 하나님의 친밀한 손길이 끊겼기 때문으로 보았기 때문입니다. 욥은 “하나님이 나를 보호하시던 때”를 “그 때에는 전능자가 아직도 나와 함께 계셨으며”(29:5)라며, 자녀들과 행복하게 살며 풍요를 누리던 때를 “나의 젊은이들이 나를 둘러 있었으며, 젖으로 내 발자취를 씻으며, 바위가 나를 위하여 기름 시내를 쏟아냈으며”(29:5-6) 곧 “내 자녀들도 나와 함께 있었건만. 젖소와 양들이 젖을 많이 내어서, 내 발이 젖으로 흠뻑 젖었건만. 돌짝 밭에서 자란 올리브 나무에서는, 올리브기름이 강물처럼 흘러 나왔건만.”(새번역)이라고 회상합니다. 이 회상에는 자신이 과거에 누렸던 모든 것이 하나님이 보호하시고 임재하시고 동행하시는 은혜로 말미암았다는 고백으로서, 그 은혜를 다시금 베푸셔서 자신이 지금 당하는 극심한 고통에서 구원해주시기를 갈망하는 욥의 호소이기도 했습니다. 2. 욥의 사회적 존경과 그 이유는 왜입니까? 욥은 “하나님이 나를 보호하시던 때” 곧 “지난 세월”(29:2)을 “그 때에는”(29:3,4,5,7)으로 고백하며 회상합니다. 욥은 단지 하나님이 베푸신 물질적 번영과 축복에만 도취되어 살았던 사람이 아니라, 사회적 존경을 받으며 살았던 사람이었음을 회상합니다. 그가 사회적 권위와 명예를 추구했기 때문도 아니었습니다. 욥은 “이스라엘아,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요구하시는 것이 무엇이냐? 곧 네 하나님 여호와를 경외하여 그의 모든 도를 행하고, 그를 사랑하며,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섬기고”(신10:12)라고 하신 말씀에 순종했기 때문임을 어떻게 고백합니까? 욥은 자신의 신앙적 가치를 “내가 의를 옷으로 삼아 입었으며, 나의 정의는 겉옷과 모자 같았느니라”(29:14) 곧 “정의가 나의 옷이었으며, 공평이 나의 두루마기요, 나의 면류관이었”(공동번역)으며, “나는 늘 정의를 실천하고, 매사를 공평하게 처리하였다.”(새번역)라고 고백합니다. 욥은 자신이 겪고 있는 재앙이 친구들의 정죄처럼 사람들에게 악한 짓을 했기 때문이 아니라는 간접적인 항변이었습니다. 오실 메시아이신 예수께서 성령으로 충만하실 때 그의 행하실 중요한 사역 자세를, 하나님께서 이사야 선지자를 통해 “이새의 줄기에서 한 싹이 나며, 그 뿌리에서 한 가지가 나서 결실할 것이요. 그의 위에 여호와의 영 곧…여호와를 경외하는 영이 강림하시리니…공의로 그의 허리띠를 삼으며, 성실로 그의 몸의 띠를 삼으리라”(11:1-5)고 하신 계시의 말씀의 의미가 무엇인가를 깨닫는 이들이 복됩니다. 욥이 성령으로 충만할 때,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베푸신 물질적 번영과 축복을 통해서 행한 그의 중요한 신앙적 삶의 가치가 “정의”와 “공평”으로 존경받는 사회적 인사였다는 것을 어떻게 증언합니까? “그 때에는, 내가 나가서 성문에 이르기도 하며, 내 자리를 거리에 마련하기도 하였느니라. 나를 보고 젊은이들은 숨으며, 노인들은 일어나서 서며, 유지들은 말을 삼가고 손으로 입을 가리며, 지도자들은 말소리를 낮추었으니 그들의 혀가 입천장에 붙었느니라.”(29:7-10). “성문”과 “거리”는 사람들이 많이 모이는 광장으로, 재판과 토론이 벌어지는 정치적 중심 장소였고, 필요한 물건을 거래하는 시장판이 벌어지는 경제적 중심 장소이기도 했습니다. 그곳에 욥이 나타나면 그를 대하는 모든 사람들이 존경과 경외를 표하는 태도를 보였다는 점에서, 욥이 사회적 정신적 지도자였음을 나타냅니다. 욥은 이처럼 자신이 사회적 존경을 받는 정신적 지도자였음을, “젊은이들”과 “노인들” 그리고 “유지들”과 “지도자들” 곧 관리들과 귀족들뿐만 아니라 모두가 “귀가 들은즉 나를 축복하고 눈이 본즉 나를 증언하였나니”(29:11) 곧 “내 소문을 들은 사람들은 내가 한 일을 칭찬하고, 나를 직접 본 사람들은 내가 한 일을 기꺼이 자랑하고 다녔다.”(새번역)라고 증언합니다. 욥은 자신이 자화자찬을 하고자 한 말이 아니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면서 욥이 이러한 존경을 받게 된 이유로서 자신이 행한 신앙적 삶을 어떻게 증언합니까? 첫째로, 욥은 자신이 존경을 받게 된 이유를 “이는 부르짖는 빈민과 도와 줄 자 없는 고아를 내가 건졌음이라.”(29:12)고 증언합니다. 하나님은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이 가나안 땅에 정착했을 때 해야 할 중요한 삶의 자세를, “너희 중에 분깃이나 기업이 없는 레위인과, 네 성중에 거류하는 객과 및 고아와 과부들이 와서 먹고 배부르게 하라. 그리하면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 손으로 하는 범사에 네게 복을 주시리라”(신14:29)며, 하나님을 믿는 자는 어떻게 살아야할지를 모세를 통해 당부했습니다. 욥은 이러한 율법이 주어지기 이전에 이미 하나님이 원하시는 삶이 무엇인지를 알고 그렇게 살아왔음을 고백합니다. 욥은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주신 소유와 권리를 이기적으로 남용하지 않고, 이웃에 대한 구체적인 사랑을 실천하는 기회로 삼았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망하게 된 자도 나를 위하여 복을 빌었으며, 과부의 마음이 나로 말미암아 기뻐 노래하였느니라.”(29:13) 곧 “비참하게 죽어 가는 사람들도, 내가 베푼 자선을 기억하고 나를 축복해 주었다. 과부의 서러움은 나에게서 기쁨으로 바뀌었네”(새번역,공동번역)라고 증언합니다. 친구인 엘리바스가 욥을 향하여 “너는 과부를 빈손으로 돌려보내며, 고아의 팔을 꺾는구나”(22:9)라고 정죄하며, 이 때문에 욥이 심판을 받았다는 것에 대한 반론이기도 했습니다. 둘째로, “나는 맹인의 눈도 되고, 다리 저는 사람의 발도 되고, 빈궁한 자의 아버지도 되며, 내가 모르는 사람의 송사를 돌보아 주었으며, 불의한 자의 턱뼈를 부수고 노획한 물건을 그 잇새에서 빼내었느니라”(29:15-17)며, 절대적인 도움이 필요한 연약한 사람들을 차별하지 않고 도운 덕분에 자신이 존경을 받았다고 증언합니다. “모르는 사람의 송사를 돌보아 주었으며”는, 욥이 전혀 알지 못하는 사람이라고 할지라도 그 사람의 억울함을 풀어주었다는 것입니다. 3. 욥이 꿈꿨던 희망과 영향력은 무엇입니까? 친구들이 주장하는 현세적 인과응보 논리로만 본다면, 욥처럼 이렇게 선을 행한 자는 축복을 받아야하는데 재앙을 당해 고통 받는 것을 어떻게 설명할 것이냐는 반론이기도 했습니다. 욥은 하나님의 통치 섭리가 물론 인과응보적인 것도 있지만, 그것을 모든 상황에 적용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인간이 이해할 수도 설명할 수도 없는 또 다른 하나님의 절대 주권적인 섭리까지를 볼 수 있어야 된다는 의미였습니다. 욥이 “그 때에는 그의 등불이 내 머리에 비치었고, 내가 그의 빛을 힘입어 암흑에서도 걸어 다녔느니라.”(29:3)고 했던 고백이, 어쩌면 그렇기 때문에 지금 자신이 극한 고통 중에도 소망 중에 견딜 수 있는 이유라는 고백인지도 모릅니다. 그런데 친구들은 그러한 욥을 격려하고 위로하며 함께 해주고자 하지 않고, 왜 그렇게 욥을 정죄하기에만 급급해하느냐고 하는 안타까운 고통의 탄식이었습니다. 욥은 과거 “악을 행하는 자들의 턱뼈를 으스러뜨리고, 그들에게 희생당하는 사람들을 빼내어 주었다.”(29:17,새번역)라고 할 정도로 의협심도 강했습니다. 자신이 그렇게 행동한 신앙 고백적 이유를 “내가 의를 옷으로 삼아 입었으며, 나의 정의는 겉옷과 모자 같았느니라”(29:14) 곧 “나는 늘 정의를 실천하고, 매사를 공평하게 처리하였”(새번역)기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오늘 현대 사회에서도 많은 사람들이 갈망하는 것이 무엇이며, 과연 사람들의 탄식이 무엇인가를 우리 기독교인들이 알고 있기나 한 것입니까? 오직 숫자 늘리기에만 관심이 있을 뿐, 기독교인으로서 하나님 앞에 각자가 감당해야 할 사회적 책임과 의무에 대해서는 아무런 관심이 없기에 벌어지는 교회의 타락상을 어떻게 생각합니까? 욥이 “나는 지난 세월과 하나님이 나를 보호하시던 때가 다시 오기를 원하노라!”(29:2)고 갈망한 것은, 단지 과거의 번영과 축복의 회복에 대한 갈망만이 아니라, 이제 자신이 겪는 재앙과 육체적 고통으로 이웃을 위해 할 수 있는 것이 아무 것도 없는 것을 안타까워하는 탄식과 호소인지도 모릅니다. 욥은 자신에게 주어진 하나님의 은혜를 누릴 때에, “내가 스스로 말하기를, ‘나는 내 보금자리에서 숨을 거두며, 나의 날은 모래알 같이 많으리라’ 하였느니라”(29:18)는 희망을 꿈꾸었다고 고백합니다. “내 보금자리에서 숨을 거두며”는, 날마다 건장하게 살다가 가족의 품에서 평안하게 죽음을 맞이할 수 있으리라고 보았다는 것입니다. “나의 날은 모래알 같이 많으리라”는 것은, 장수를 가리키는 상징적인 표현으로, 자신이 행한 의와 신실함으로 하나님께서 장수하게 하실 줄로 보았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욥은 자신이 누렸던 번영과 사회적인 존경이 자신이 죽을 때까지 계속되리라고 생각했던 그 과신이 막연한 희망이었다고 솔직하게 고백합니다. 이처럼 욥은 자신이 계속적인 풍요와 번영과 영광을 누리게 되리라고 꿈꾸었던 희망을 계속하여, “내 뿌리는 물로 뻗어나가고, 이슬이 내 가지에서 밤을 지내고 갈 것이며, 내 영광은 내게 새로워지고, 내 손에서 내 화살이 끊이지 않았노라”(29:19-20) 곧 “‘나는, 뿌리가 물가로 뻗은 나무와 같고, 이슬을 머금은 나무와 같다. 사람마다 늘 나를 칭찬하고, 내 정력은 쇠하지 않을 것이다’ 하고 생각하였건만”(새번역)이라고 고백합니다. “내 뿌리는 물로 뻗어나가고”는 “그는 시냇가에 심은 나무가 철을 따라 열매를 맺으며, 그 잎사귀가 마르지 아니함 같으니, 그가 하는 모든 일이 다 형통하리로다”(시1:3)는 말씀처럼, 물가에 뿌리를 내린 나무가 당연히 번성할 수밖에 없듯이 자신의 생애가 그러하리라고 보았다는 것입니다. “이슬”은 아무도 보지 않는 새벽녘에 맺혀지는데 비가 내리지 않는 땅에서도 생명이 존속할 수 있는 비결로서 하나님이 베푸시는 축복을 상징한다는 점에서, “헐몬의 이슬이 시온의 산들에 내림 같도다”(시133:3) 또 “내가 이스라엘에게 이슬과 같으리니, 그가 백합화 같이 피겠고, 레바논 백향목 같이 뿌리가 박힐 것이라”(호14:5)고 비유합니다. “내 영광은 내게 새로워지고, 내 손에서 내 화살이 끊이지 않았노라”는 고백은, 시간이 지나도 쇠약해지지 않고 하나님의 인도와 보호로 자신은 날마다 새로운 힘과 능력을 얻어 축복된 생활을 계속할 수 있으리라는 희망을 욥은 꿈꾸었다는 것입니다. 욥은 하나님이 베풀어주신 은혜와 하나님 앞에 살아갔던 의로운 삶 때문에, “내가 스스로 말하기를”(29:18) 곧 “그러니 내가 어찌 이런 생각을 하지 않을 것인가?”(공동번역)라며, 교만하게 함부로 자신의 미래를 장담하며 꿈꾸었던 희망이 잘못되었다고 하는 과오를 고백합니다. 욥이 그러한 희망을 꿈꿀 수밖에 없었던 것을 “내가 의를 옷으로 삼아 입었으며, 나의 정의는 겉옷과 모자 같았느니라”(29:14) 곧 “나는 늘 정의를 실천하고, 매사를 공평하게 처리하였다”(새번역)라고 고백했습니다. 그 때문에 연약하고 억울한 사람들을 물심양면으로 섬기고 도왔을 때, 자신이 사람들의 존경을 받았을 뿐 아니라 사람들로부터 권위가 주어졌다는 것을, “무리는 내 말을 듣고 희망을 걸었으며, 내가 가르칠 때에 잠잠하였노라”(29:21) 곧 “사람들은 기대를 가지고 내 말을 듣고, 내 의견을 들으려고 잠잠히 기다렸다.”(새번역)라고 증언합니다. 욥이 보여준 실천적인 신앙적 삶과 인격적 가치는, 사람들의 존경을 받기에 충분한 권위가 주어졌기 때문입니다. 욥이 사람들 속에서 “정의”와 “공평”을 자신이 행할 실천적인 신앙적 삶과 인격적 가치로 여길 때, 욥이 하는 말에 대한 반응을 “내가 말한 후에는 그들이 말을 거듭하지 못하였나니, 나의 말이 그들에게 스며들었음이라”(29:22) 곧 “내가 말을 마치면 다시 뒷말이 없고, 내 말은 그들 위에 이슬처럼 젖어들었다.”(새번역)라고 증언했습니다. 욥이 하는 말이 인간적 지식이나 자기 야망의 성취를 위한 것이 아닌 하나님이 허락하신 지혜인 “정의”와 “공평”에 입각한 진리였다는 점에서, 어떤 반론이나 이의 제기 없이 농사에 꼭 필요한 이슬처럼 사람들에게 많은 감동과 유익을 주었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욥의 말 한마디와 동정어린 작은 미소에도 “그들은 비를 기다리듯 나를 기다렸으며, 봄비를 맞이하듯 입을 벌렸느니라. 그들이 의지 없을 때에 내가 미소하면, 그들이 나의 얼굴빛을 무색하게 아니하였느니라.”(29:23-24) 곧 “사람들은 내 말을 기다리기를 단비를 기다리듯 하고, 농부가 봄비를 기뻐하듯이 내 말을 받아들였다. 내가 미소를 지으면 그들은 새로운 확신을 얻고, 내가 웃는 얼굴을 하면 그들은 새로운 용기를 얻었다.”(새번역)라고 했습니다. 욥이 사람들 속에서 어떤 사회적인 선한 영향력을 끼쳤는가를 보여줍니다. 이 때문에 욥은 자신이 “마치 군대를 거느린 왕처럼”(29:25,새번역) 백성들에게 끼칠 수 있었던 막대한 영향력을 회고하며, “내가 그들의 길을 택하여 주고 으뜸 되는 자리에 앉았나니, 왕이 군대 중에 있는 것과도 같았고, 애곡하는 자를 위로하는 사람과도 같았느니라”(29:25)고 비유합니다. 사랑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욥이 “하나님이 나를 보호하시던 때가 다시 오기를 원하노라!”(29:2)고 했던 고백과 갈망을 어떻게 생각합니까? 단지 번영과 축복을 누리던 자신의 “지난 세월”(29:2)이 회복되기만을 바라는 갈망과 고백만은 아니었습니다. 욥도 왜 과거의 번영과 축복이 회복되기를 바라지 않았겠습니까? 그러나 고난 중에 있는 욥을 위로하고 격려하기보다 정죄만을 일삼았던 세 친구들과의 반복된 변론의 말다툼을 통하여, 욥은 많은 것을 생각하고 깨달았습니다. 욥은 하나님께서 은혜로 베푸신 번영과 축복의 의미를 깨닫고, 이로 인해 주어진 힘과 권위를 “희망”을 잃어버린 연약하고 억울한 상황에 있는 이들을 “정의”와 “공평”의 정신으로 돕고 섬기는데 사용했습니다. 또, 조언이 필요할 때는 그러한 자세로 조언을 아끼지 않다보니, 사람들의 신뢰와 존경을 한 몸에 받는 정신적 지주가 되었습니다. 욥이 본문에서 마지막으로 “나 윗자리에 앉아 그들의 갈 길을 지시하며, 군대를 거느린 제왕처럼 앉아 목메어 우는 사람들을 위로하던, 아, 그 시절은 다시 오지 않을 것인가!”(29:25,공동번역)라는 갈망을 고백한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군대를 거느린 제왕처럼”이, 연약한 백성들 위에 욥이 군림했다는 뜻이 아닙니다. 고통스러워하는 자신에게 정죄만을 일삼는 친구들을 보면서, 그들과 달리 과거 자신이 도울 수 있는 힘과 권위를 가지고 섬겼던 것을 감사하며, 다시금 그 때처럼 “정의”와 “공평”으로 지금의 자기처럼 고통 받는 사람들을 섬길 수 있기를 바라는 갈망이기도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이사야 선지자를 통하여 오실 메시아 되신 예수 그리스도의 사역 자세와 목표 그리고 인격적 권위를 “내가 붙드는 나의 종, 내 마음에 기뻐하는 자 곧 내가 택한 사람을 보라. 내가 나의 영을 그에게 주었은즉. 그가 이방에 정의를 베풀리라…상한 갈대를 꺾지 아니하며. 꺼져가는 등불을 끄지 아니하고. 진실로 정의를 시행할 것이며, 그는 쇠하지 아니하며 낙담하지 아니하고. 세상에 정의를 세우기에 이르리니, 섬들이 그 교훈을 앙망하리라”(사42:1-4)고 계시하셨습니다. “섬들”은, 하나님을 모르거나 안 믿기에 주님으로부터 멀리 떨어져 사는 수많은 이방인들을 상징합니다. 그런데 이들이 갈망하는 것이 “정의” 곧 “공의”(개역)이며, 하나님은 이것이 예수님을 통해 세워질 믿는 자들의 가치관이어야 하고, 세상에 시행되어야 할 하나님 나라의 통치 질서라고 계시합니다. 욥 역시 예수님처럼 사람들 속에서 “정의”와 “공평”을 자신이 행할 실천적인 신앙적 삶과 인격적 가치로 여길 때, 욥이 하는 행동과 말에 모두가 존경과 신뢰와 찬사를 보내며 용기와 희망을 얻는 기대가 되었습니다. 오늘 우리가 욥처럼 “하나님이…보호하시던 때가 다시 오기를 원하노라!”(29:2)는 소망 가운데, 하나님과 그리스도 예수를 구주로 믿는 기독교인으로서의 정체성을 회복하는 올바른 신앙적 삶이 무엇인가를 깨닫고 순종하는 실천적 신앙인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아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