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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세기 서구 선교사들로부터 배우는 교훈
-선교의 위대한 세기라 불리는 19세기 선교사들에 대한 평가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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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11.22.-
1. 들어가는 글
19세기는 18세기의 복음주의 각성운동과 선교열정을 이어받아 유래 없는 기독교의 확장을 경험한 시기였다. 19세기가 되면서 세계 대부분의 주요 기독교 국가가 세계 각국의 선교지에 선교사를 보내었으며 수적으로도 가장 많은 수의 선교사들이 파송되었다. 이런 점에서 기독교 역사 가운데 19세기만큼 복음을 땅 끝까지 전하기 위하여 집중적, 체계적, 모험적인 노력을 기울인 적이 일찍이 없었던 것이 사실이다.
이런 점에서 저명한 교회사 라투렛은 19세기를 가리켜 “선교의 위대한 세기” 라 칭하고 그의 교회 확장사 7권 중 마지막 3권을 19세기에 할애할 정도로 19세기를 선교적으로 높이 평가하였다. 실제로 1815-1914년까지 100년 동안에 기독교는 남북미, 호주, 아프리카, 태평양 군도, 한국을 비롯한 아시아권에 확장되었으며, 이것은 1800년 동안 기독교가 선교한 모든 것을 능가할 정도의 성과였다. 19세기가 이처럼 위대한 선교의 세기였던 만큼 19세기에 활동했던 선교사들도 또한 위대한 선교사들로 칭송을 받아왔다. 적어도 1945년 전까지 19세기 선교사들에 대한 존경심은 거의 의심받지 아니하였다.
그러나 1945년 2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과거 식민지였던 나라들이 독립되면서 19세기 서구 선교사들에 대한 이 같은 긍정적 평가들은 빠르게 사라지기 시작하였다. 사라지는 정도가 아니라 19세기 선교사들에 대한 부정적인 평가들이 봇물처럼 터져 나오기 시작했다. 그 결과 서구 선교 사역은 부패하고 불순한 사역으로 비치게 되었고, 선교사역 자체가 서구 식민지 지배 야심과 동일시되게 되었다. 이런 생각 때문에 기독교인들은 선교역사를 부끄러워하고 심지어 ‘선교사’와 ‘선교’라는 말이 기독교 용어에서 사라져야 한다고까지 주장하는 경우가 생겨나게 되었다. 프레만 닐스, “오늘날의 세계 선교,” in 신학의 전망: 21세기를 맞으며, 영남신학연구소 편 (서울: 한국장로교출판사, 1999), pp. 200-201.
즉 선교의 위대한 세기라 불리우는 19세기 선교사들에 대한 평가는 점차로 부정적인 평가로 점철되어지게 된 것이었다. 과연 19세기 서구 선교사들을 어떤 사람들이었는가? 물론 19세기 선교사가 한둘이 아니고, 이들의 사역형태 및 사역 태도 등이 워낙 천차만별이어서 이들의 특성을 일반화하는 것은 참으로 쉬운 일이 아니다. 잘못하면 지나친 일반화의 함정에 빠질 가능성도 없지 않다. 하지만 일반화될 수 없는 역사적 사실은 의미 없는 정보에 불과하다. 사실 일반화라는 것은 사실 모든 가치 있는 역사적 해석, 또 나아가 모든 학문의 본질 중 하나임에 틀림없다. 잘된 일반화는 건설적인 자극과 통찰력 있는 제안을 제공해 줄 수 있는 것이다. 류대영, 초기 미국 선교사 연구 1884-1910.
전통적인 견해대로 그들은 과연 존경을 받기에 합당한 선교사들이었는가 아니면 제국주의자들과 동일시되어져야 하는 사람들이었나? 본 연구는 보다 균형 잡힌 시각을 가지고 그들을 평가해볼 것이며, 그 평가에 근거하여 그들로부터 어떤 교훈을 얻을 수 있을지를 찾아보고자 한다.
2. 19세기 서구 선교사들에 대한 비판들
19세기 서구 선교사들에게 쏟아지는 비난은 여러 가지다. 이것들을 좀 간단히 요약해본다면 아마도 다음의 4가지로 크게 요약해볼 수 있을 것이다. 첫째는 이들의 사역이 제국주의적 선교였다는 것이고, 둘째는 이들은 서구문화우월의식에 깊이 사로잡혀 있었다는 것이다. 아울러 이들은 현지인의 문화나 정서를 고려하지 않고 지나치게 일방적으로 강요하고 지시하는 선교를 하였으며, 마지막으로 교파주의를 심었다는 비난을 받고 있다. 이상의 4가지 비판은 서로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어서 나누기 어려운 면이 있지만 이해를 위하여 4가지로 구분지어 그 내용을 살펴보고자 한다.
1) 제국주의적 선교
서구는 18세기 산업혁명 이후 저들의 부가 폭발적으로 증가하게 되고 그 활력의 분출구로서 제국주의적 침략의 불길이 분출되기 시작하면서 아시아와 아프리카는 ‘하나님의 섭리에 따라, 그리고 서구문명의 혜택을 베풀기 위하여’ 정복되고 지배되어야 한다는 이론이 식민주의적 침략세력과 서구선교세력의 만남과 유착을 이루게 되었다. 이런 이유로 서구 식민착취와 서구 선교세력은 두 얼굴을 가지고 있었다고 할 수 있다. 하나는 미화된 서구의 개척정신이요, 다른 하나는 탐욕스런 교세 확장주의이었다. 서구의 식민 정치세력과 선교세력은 서로가 서로를 적절히 이용하거나 교묘히 이용당했다. 이 둘은 마치 악어와 악어새 같이 공생의 관계였다. 즉 제국주의는 선교를 가능하게 하고 선교사들을 보호하였고, 선교사들은 제국주의의 근대 서구 선교사업의 제일차적인 목표는 서구의 세력 확장을 정당화시켜주는 일이었다.
새로운 영토를 탈취하고 해외에서 거대한 무역활동을 행하는데 자원, 인력, 에너지를 전력투구하는 일은 백인들의 의무(White Man's Burden)라는 이데올로기가 없이는 불가능했기 때문이었고, 은연중에 이 이데올로기를 뒷받침해 주었던 것이 바로 선교사들이었던 것이다. 이런 이유 때문에 영국은 인도를 점령한 후 제일 먼저 기독교 세력을 통하여 식민지 지식층의 흡수정책을 폈다. 인도에 세워진 영국의 동 인도 주식회사는 투자한 재산의 10배 이상을 해마다 거두어 갔지만 영국 선교사들은 저들의 불법성을 지적하기는커녕 저들을 정당화시켜 주면서 관료들의 보호아래 각종 특혜를 누렸던 것이다. 또한 미국선교사들은 일반적으로 1840년부터 1900년까지 중국에 대한 서구의 침략을 하나님의 섭리로 생각하였다. 그러기에 아편전쟁마저도 중국의 개국을 위한 하나님의 섭리로 생각하였다.
식민주의적 선교는.... 식민통치구조의 필요불가결한 (integral) 구성 요소이며 또한 서구의 문화적 관행의 축적된 결과다. 나는 인도에 있어서의 서구의 강압적 “식민” 정치 구조와 식민주의적 선교신학을 단 하나의 몸체 (a single constitutive reality)로 간주한다. 식민주의 이데올로기를 선교신학으로부터 분리하려는 시도는 무익하다. 식민주의와 선교의 이와 같은 기능적 관계는 19세기 내내 유지되었으므로, 선교와 제국주의는 실제에 있어서 상부상조를 했던 것이다..... 나는 식민주의적 선교는 근본적으로 유럽인들의 집단적 이념과 식민통치자들의 통치 관행을 표현하는 문화적, 정치적, 선교론적 현상에 불과하며, 18세기에 있었던 자연스럽고 자발적인 웨슬레주의 부흥운동의 순수하고 환상적인 반영은 아니라고 본다. .... 유럽의 선교 각성운동은 [유럽의] 식민주의적 팽창과 부정할 수 없는 연관을 가지고 있었다.”
미국에서 해외 선교운동이 1880년대 말 이후 급격히 부흥기를 맞은 것도 선교와 제국주의와의 결탁이라는 측면에서 그 이유를 제시하는 의견도 있다. 즉 북미 대륙에서 더 이상 정복해야 할 땅이 사라진 이후, 미국인들 속에 있는 개척정신이 해외로 눈을 돌려 진출을 도모하기 시작한 현상과 해외 선교 사이에 깊은 상관관계가 있다는 것이다. 1880년대는 미국이 산업혁명에 성공하여 산업자본주의가 완성된 시점으로 제국주의적 해외 진출을 모색하던 시점이었다. 미국의 해외 선교는 이 같은 미국 제국주의화와 같은 시기에 일어났다”
이 같은 이해 위에서 이향순은 미국선교사들의 행태를 분석하면서 미국선교사들은 제국주의자로서 행동한 일면이 있으며 제국주의적 확장에 기여한 측면이 있다고 보고 그들 역시 제국주의자 였다는 평가를 내린바 있다. 이향순, “미국선교사들의 오리엔탈리즘과 제국주의적 확장,” in 선교와 신학, 12집, 2003. p. 253.
2) 서구 문화 우월주의
19세기 서구 선교사들에게 쏟아지는 두 번째의 비난은 그들이 서구문화 우월주의를 지녔다는 것이다. 에드워드 사이드에 의하면 서양은 동양을 생각할 때 낯익은 ‘우리’와 구별되는 ‘그들’ 곧 타자로 구분하여 인식했다. 서구는 비 서구를 열등하고 기이하고 전근대적이고 후진적이고 쾌락적이고 더럽고 전제적이고 야만적이며 미개한 ‘그들’ 곧 타자로 인식하는 이데올로기적 사고를 낳았다. 이러한 타자 화를 통하여 서구는 우월하고 합리적이며 문명화되었다는 자기 정체성을 확립하고, 타자인 비 서구를 제국주의적 침략과 확장의 대상으로 삼는 것을 정당화하기도 했다.
19세기의 주류 사회 과학과 역사인식은 이같은 서구 중심적인 오리엔탈리즘에 의해 채색되고 왜곡되어 있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서구 선교사들은 서구 우월적인 문화에서 성장하고 교육받고 사회화되면서 자연히 서구 중심 사고에 의해서 각색된 사회과학이론과 역사관을 배우고 그러한 사고를 가지고 있었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이향순, “미국 선교사들의 오리엔탈리즘과 제국주의적 확장,” p. 213.
선교사들이 이처럼 오리엔탈리즘의 영향을 받을 때 나타나는 몇 가지 성향이 있었다. 그들은 자신들의 문화를 곧 기독교의 복음과 동일시하면서 선교지의 문화와 종교 등을 정면으로 논박하고 정죄하는 경향을 보였다. 즉 선교사들은 피선교지 사람들의 문화와 종교가 본질적으로 이교적이며 악한 것이라고 하는 전제를 가지고 있었다. 다른 한편으로 선교사들은 원주민들에게 서구의 문화와 종교를 적극적으로 이식하고자 했다. 이 과정에서 ‘서구선진문화=복음=선’, 그리고 ‘미개동양문화=미신종교=악’ 이라고 하는 이원론적 세계관이 성립했고 또한 널리 받아들여졌던 것이다. 그런데 이 이원론적 세계관이 비서구인들에게는 파괴적인 결과를 야기해 왔다는 것이 브릿스턴의 판단이다. 피 선교지인들이 이 이원론적 세계관으로 인하여 한편으로는 자신의 고유문화를 경시하게 되고, 다른 한편으로는 서양문화를 피상적으로 모방하게 되는 비극적 결과를 낳게 되었다는 것이다.
이런 태도는 타종교들과 전통문화나 사상들은 미개하고 마귀의 역사이고 잘못되었으며 일고의 가치도 없는 정복되어야 할 것으로 간주한다. 따라서 거기에는 복음전파를 위한 어떤 문화적 수용의 접촉점이나 대화의 여지가 없다. 비기독교인들 중 어떤 이들은 이 방법을 문화 사상적인 “전쟁선포” 또는 “제국주의적 접근방법” 이라고 부른다. 이는 용기 있게 다가오는 고속열차의 엔진을 향하여 돌격하는 것과 같은 방법으로, 용기는 100%이지만 분별력은 영점이라고 평가한다.
또한 문화우월의식을 가진 선교사들은 서구 문화를 선교지에 퍼뜨리는 것이 곧 자신들의 사명이라고 생각했으며 이것이 곧 그들의 선교동기였다. 예를 들어 미국인들은 자신들이 정치적으로나 종교적으로 선택된 국민이라고 생각해 왔으며, 미국식 생활방식이나 정치 체계에 의해 세계를 개혁하는 것이 ‘미국의 사명’ (American Mission) 이라고 생각해왔다. 이러한 문화적 팽창 천명 사상은 미국 교회의 외국선교 운동에 있어서 기독교의 전파와 미국문화의 확산을 동일시하는 경향으로 나타났다. 이런 점에서 무어 (R.C.Moore)는 주장하기를 “선교운동의 본질은 공격적인 문화제국주의, 즉 유럽적 이념과 이상을 전 지구상에 퍼뜨리기 위한 프로파간다였다“ 라고 했다.
계속해서 그는 "식민통치자들에게는 사실상 ‘서구 문화화와 기독교화 (civilizing and Christianizing)는 동의어이었다. 서구 문화화는 인도 국민이 우리 [영국 식민통치자들]와 쉽게 상거래를 하게 해주고, 기독교화는 그들을 영국에 충성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라고 하였다. 이와 연관하여 키이스 브릿스턴 (Keith R. Bridston)은 주장하기를, “선교운동이 아직도 세계를 회개시키는 것보다 서구 문화화 (Latinizing)에 열중하고 있으며” 선교사들이 설교한 것은 사실에 있어서 “기독교문화” (Christian civilization) 였다 라고 주장한다.
3) 선교사 중심의 일방적인 선교 수행
서구 선교사들에게 주어진 다른 비평은 그들이 지나치게 선교사 중심의 일방적인 선교를 행하였다는 것이다. 선교사들은 메시지의 의미들보다는 형태들을 제 3세계의 교회로 이전하는데 주된 관심을 가졌다. 이런 과정에서 선교의 내용과 형태의 모든 것을 선교사가 결정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선교사는 가르치는 사람이며 선교지의 교회는 단지 배우기만 하는 대상이었다. 이처럼 선교사로부터 선교지로 가기만 하는 일방통로의 선교를 수행하면서 19세기 선교는 선교사와 선교하는 교회 중심의 선교 형태를 지니게 되었다.
이같은 일방성은 두 가지 문제를 양산하였는데, 첫째는 선교사는 언제나 가르치는 자로만 여기는 것이며 선교사 자신은 선교지로부터 배우는 것에는 닫혀 있었다는 점이다. 둘째로 선교지 교회는 자신의 정체성을 자율적으로 결정하거나 형성하지 못하고 선교사와 그의 교회 신앙 형태를 답습하여 고착화하는 현상을 낳게 되었던 것이다. Ibid., p. 138.
이러한 선교의 결과로 선교지의 성도들은 하나님을 그들의 하나님으로서가 아니라 외국인의 하나님으로 느끼게 되는 경우가 많았다. 교회는 그들의 교회가 아니라 선교사의 교회로 느껴지게 되는 경우가 많았다. 교회는 예배, 건축, 리더쉽, 재정, 그리고 전도의 측면에서 충분히 상황화되지 아니한 경우가 많았다. 나아가서 겉모양은 그럴듯한데 진정한 회심은 일어나지 않는 경우도 있었다.”
즉 자신들의 문화적, 신학적 창조성을 계발하지 못하는 비극적인 결과를 낳았다고 볼 수 있다. 제국주의 시대가 끝난 후 각 국가들이 공동체의 정체성을 지키기 위해 특정한 문화적, 종족적, 종교적 전통들을 강조하는 시대가 되면서 피선교지 교인들은 이제 그들이 당면한 여러 문제들을 어떻게 풀어가야 할지 몰라서 고통을 당하는 경우가 종종 발생하게 되었다. 이것은 선교사들의 하수인 역할을 해오면서 ‘참으로 기독교적이며 우애 있는 (fraternal) 대화의 주체’ 가 되어 본 경험의 부족으로 인해 어떤 문제라도 주체적, 능동적, 창조적으로 풀어갈 수 있는 능력을 키워 오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4) 강한 교파주의적 색채
19세기 서구 선교사들에게 주어지는 또 하나의 비평은 그들이 지닌 강한 교파성일 것이다. 18세기와 19세기에 유럽과 미국 전역에서 발생한 1, 2차 각성운동은 국내 교회를 새롭게 갱신하였을 뿐 아니라 해외 선교 운동을 활성화하는 촉진제 역할을 하였다. 이 때에 수 많은 선교회들이 설립되었고, 이 단체들로부터 많은 선교사들이 해외로 파송하였다. 즉 18, 19세기 선교운동은 확실히 부흥과 각성운동에 큰 빚을 지고 있다. 그런데 이 같은 선교운동은 때로 무분별한 열심과 행동주의에 의해 이루어지면서 경쟁적인 선교 형태로 번져가기도 했다. 이러한 경쟁심은 주로 교파주의와 연관 지어 지면서 교파주의 적 색채를 띤 기독교 확장이 되었다. 즉 선교를 교회의 설립과 확장 즉 교회 중심적으로 이해하면서 어느 나라의 어떤 교회 (교파)가 어느 지역에 교회를 세우는가에 깊은 관심을 갖게 되었던 것이다.
자연히 선교사들은 자신이 속한 교단의 확장을 위한 일군으로서의 정체성을 강하게 지니게 되었다. 예를 들어 한국에 진출했던 선교사들은 신학적, 교회 정치적 견해에서 미국에 있는 모교회의 대변자들의 역할을 하였다. 특정 교단 선교부에서 월급을 받고 일하는 피고용인으로서, 선교사들은 각 교단의 신학, 교회 정치, 선교 정책 등을 선교지에 충실하게 전달할 의무를 지녔다. 이런 배경 하에서 그들은 모교회의 신학을 별다른 여과 과정 없이 그대로 선교지에 이식시키는 경우가 많았다.
교단 적 분리와 특성이 서구의 경우에 역사적 중요성이 많지만 사실상 제 3세계의 새로 설립되고 있는 교회들에게는 실질적인 의미가 없었다. 힌두교나 불교 또는 이슬람교에서 예수 그리스도께로 돌아오는 데에는 엄청남 대가를 치러야 했다. 어떤 경우에는 아내와 가족 및 생계를 포기해야 하는 때도 있었다. .... 그런데 단순히 그리스도인만이 되는 것이 아니라, 장로교인이나 루터교인이나 침례교인이 되어야 한다고 할 때 그들은 놀랍기도 하고 실망하게 된다. 그리고 회심자들을 놓고 선교기관들이 서로 다투게 되면 그 추문은 더 심각해지는 것이다.
3. 19세기 서구 선교사들에 대한 종합적 평가
앞부분에서 우리는 19세기 서구선교사들에게 주어진 비판들을 살펴보았다. 그들은 확실히 제국주의자적인 면을 지녔던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그들이 제국주의자의 측면을 지고 있었지만 그들을 제국주의자로만 규정하는 것은 좀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그들이 제국주의 면모를 지닌 것이 사실이지만, 그들이 꼭 제국주의적 동기 때문에만 선교한 것은 아니었다. 또한 그들이 인종우월주의자, 독재자, 교파주의자 같은 모습을 지녔던 것이 사실이지만 동시에 그들은 이와 반대되는 모습도 지니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본 장에서는 이들의 모습을 좀 더 균형 있게 살펴보고자 한다.
1) 제국주의자 vs. 복음의 일군
시대적으로 볼 때 19세기는 강한 자가 약한 자를 사정없이 짓밟던 제국주의시기였다. 19세기의 선교는 바로 이같은 시대적 상황을 배경하고 하고 있었고, 자연히 그 시대적 배경인 식민주의로부터 지대한 영향을 받게 되었다. 이런 상황에서 선교사들은 나름대로 순수한 목적을 가지고 사역을 했다 해도 그들의 사역은 많은 경우에 정치적 동기에 이용되고, 제국주의를 보강하는 데 쓰여지게 된 것도 사실일 것이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19세기의 선교사들을 모조리 제국주의자로 몰아붙이는 것은 좀 무리가 있다고 보여 진다.
선교사들이 제국주의자들에게 항상 협조했던 것은 아니었다. 때로 선교사들은 식민주의적이고 중상주의적인 이익과 그 해악에 대하여 강하게 저항하였다. 예를 들어 “캐리와 동료 선교사들은 그 당시 수치스러운 정도까지 이르렀던 노예 매매제도에 대하여 혹심하게 비판을 가했다. 또한 캐리는 노예 매매제도에 대하여 반대한다는 개인의 의사를 표시하는 방법으로 설탕을 먹지 않았다. 선교사들은 ‘노예 매매제도로 인해 그들에게 부과한 비극들’과 ‘서구 세계가 아프리카에 해를 끼쳤던 그러한 상해와 불법에 대해서 어느 정도 보상해야 할 의무’ 에 대해 의견을 표명하였고, 이러한 의견들의 영향으로 본국에 있던 복음주의자들이 아프리카에서의 영국의 역할이란 현지 국민들의 수호자 및 보호자의 역할이어야야 된다고 주장하게 되기도 하였다.
19세기 서구 선교사들을 제국주의자로 평가하는 견해의 이면에는 제국주의적 팽창과 기독교 선교를 동일시하거나, 기독교 선교를 제국주의적 팽창의 종속물로 보는 견해가 자리를 잡고 있다. 이러한 제국주의 이론들은 외국 선교 운동에 있어서 교회의 내적이며 자율적인 동기들을 축소시키거나 은폐시키면서 제국주의적 팽창의 전위대로서의 선교 역할만을 지나치게 부각시키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팽창주의와 외국 선교운동은 각자의 독립적인 영역에서 발전하면서 서로에게 영향을 주었던 것이지, 종속적인 관계에 있었다고만 보는 것은 다소 무리가 있다. 물론 선교운동이 서구인들에게 외부 세계에 대한 관심을 제공해주었고, 이러한 관심이 증대되어 나타난 해외팽창주의는 다시 외국 선교에 영향을 줌으로써 각각의 운동이 증대되도록 상호작용을 한 것은 사실일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기본적으로 선교운동은 그리스도의 위임명령에 입각한 기독교인들의 소명의식과 미국 교회의 성장이라는 더 중요한 원인이 선교운동에 작용했다는 점을 결코 무시해서는 안 될 것이다.”
기독교 선교가 제국주의 팽창의 종속물이라는 견해가 주장되려면 부흥운동이나 선교적인 열정을 지닌 사람들의 뜨거운 헌신이 없었다 해도 선교는 이루어졌을 것이라는 것을 증명해내어야 할 것인데 이것이 그리 쉬워보이지는 않는다. 19세기 선교의 가장 주요한 동력은 제국주의가 아니라 독일의 경건주의 운동과 영국과 미국을 중심으로 한 복음주의 각성운동이었다고 할 수 있다. 특별히 미국에서의 제 2차 대각성운동 (1787-1825) 속에서 발생한 폭발적인 에너지가 선교단체들의 조직으로 이어졌고, 이 선교회들이 지닌 해외 선교에 대한 열정은 교회로 하여금 역사상 유래가 없었던 기독교의 확장을 경험하게 하였던 것이다.
제국주의가 아무리 성행했다 해도 선교사들이 복음을 전하고자 하는 강한 열망이 없었다면 선교사역은 그토록 왕성하게 이루어지지 않았을 것이며, 이런 점에서 19세기의 선교가 제국주의에 의하여 동력을 얻었다 라고만 보는 것은 좀 단순한 평가라고 할 수 있다. 이런 점에서 프레만 닐스는 “... 식민주의가 이방인을 착취하여 영국과 여타의 유럽 국가들로 보물들을 축재하는데 관심을 가지고 있었던 때, 이 선교사들은 자기들에게 위탁되었다고 생각한 하늘의 보물을 이방인에게 건네 주는데 더욱 관심이 있었다는 것을 기억해야만 한다” 19세기 서구선교사들이 당시의 시대정신이요 이데올로기였던 식민주의의 영향을 받았고 이것을 강화하는데 일조를 했다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고 우리가 잊어서는 아니 될 사항이다. 그러나 우리는 동시에 그들이 지녔던 그들의 뜨거운 선교에의 헌신도 잊어서는 안될 것이다.
2) 인종우월주의자 vs. 인류애 실천가
19세기 서구 선교사들에게 주어지는 또 하나의 부정적 평가는 인종우월주의자 라는 것이다. 이같은 전통적 서구선교신학의 문제점을 황재범은 다음과 같이 요약한다. 1) 서구의 제국주의적 팽창과 기독교의 팽창을 동일시한다. 2) 서구의 문화와 종교 (기독교)는 고등한 것이기에 저등한 이방 문화권으로의 팽창은 당연한 것이며, 그러므로 윤리적 문제는 있을 수 없다. 3) 기독교는 이 서구 문화를 미개인들에게 전하는 통로 (vehicle)이기도 하다. 황재범, “현대서구 개신교 선교에 있어서의 제국주의적 경향성에 대한 비판적 관점들,” 한국 기독교신학 논총, Vol 31 (2004), p. 243. 황재범의 말은 분명히 일리가 있는 말이다. 실제로 19세기 선교사들이 선교를 수행하면서 자신들도 모르게 자신들이 비서구에 비해 우월하다는 생각을 가질 수 있는 가능성은 충분히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19세기 서구 선교사들이 자신들의 문화를 우월하게 생각하면서 자신들의 문화가 우월하니까 이것을 시혜하기 위하여 선교를 하였다고만 보는 것은 조금 무리가 있다고 보여진다. 예를 들어 중국 내지 선교회를 창시했던 허드슨 테일러 (Hudson Taylor, 1832- 1905)의 경우, 그는 ‘서구문화화 = 복음화’의 원리를 신랄하게 비판하면서 서구 문화화는 오히려 복음화를 방해한다고 보았다. 그는 말하기를, “복음을 전파하는 대신 의술을 베푸는 것은 중대한 실수입니다. 만약 우리가 마음을 변화시키는 영적인 능력 대신에 교육을 위한 학교를 제공한다면 이 또한 중대한 실수입니다” 라고 했다. 즉 테일러는 복음의 전파를 일차적 선교의 목표로 삼았다. 또한 우리나라에서 사역했던 마펫도 “의료사역과 복음 전도 사역이 연합함으로써 얻게 되는 유익이 엄청납니다. 의료사역은 복음 전도 사역을 위한 수단이 되고 그 자체로서 목적이 되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라고 말하면서 의료와 교육사역이 교회의 설립을 “뒤따라야” 하는 것이지 “앞서서는” 안 된다고 단호하게 우선순위를 매겼다.
이러한 견해는 당시 19세기 선교사들에게 공통적으로 퍼져있는 사고였다. 19세기의 대부분 선교사들은 선교활동의 초점을 회심과 교회개척에 두었다. 그들은 학교나 병원의 설립 등을 통해 사회봉사를 하였지만, 이는 주로 복음 전도를 위한 보조수단으로 사용하였다. 19세기 서구 선교사들이 서구의 문화를 전해주고자 한 차원이 있었다면 그것은 인도주의적인 차원에서 너무도 열악했던 선교지의 사람들의 삶의 질을 향상시키는데 도움을 주고자 했거나, 선교지의 문화 중 도저히 기독교와 양립될 수 없는 문화를 청산하고자 하는데 있었다고 보는 것이 맞을 것이다. 실제로 19세기 선교사들은 당시의 많은 사회 폐습을 교정하는데 상당한 공헌을 하였다.
예를 들면 소아 결혼 (child marriage), 사티 관습(남편의 장례 화장시에 과부를 따라 죽게 하는 제도), 성전간음, 천민 학대 등의 인도 폐습, 전족 (여자 아이들의 발을 자라지 못하도록 묶는 것), 아편 중독, 유아 포기 등의 중국 폐습, 일부다처제, 노예 매매, 쌍둥이 살해 등의 아프리카 폐습을 고치는데 크게 기여하였다. 이같은 폐습들은 동서를 가릴 것 없이 모든 인류가 함께 폐기시켜야 할 악습이 아니었던가? 19세기 서구 선교사들이 비서구 세계의 근대화에 기여한 점은 결코 부인될 수 없다. 예를 들어 아프리카만 보더라도 그들이 닦아 놓은 기초 가운데 특히 교육 분야의 공헌이 없었다면 암흑대륙의 단 하나라도 오늘날 독립되지 않았을 것이라고 해도 거의 과언이 아닐 것이다. 이런 점에서 나이지리아의 발레와 수상 (Balewa)은 1960년 1월에 의회에서 행한 독립 발기문에서 “우리들은 우리 나라 독립에 많은 공을 세운 선교사들에게 깊이 감사하고 있습니다. .... 선교부는 교육방면에 현저한 성과를 올렸기 때문에 만족할 수 있으며, 사실 이것을 아는 살아있는 증인들이 아직도 이 의원들 가운데 많다고 확신 합니다” 라는 말을 할 정도였다. 우리나라의 경우를 보더라도 조선은 19세기에 수행된 서구 선교로 인해 서구 사회의 문화와 가치관을 동반한 근대화를 경험하기 시작했다. 서구의 선교는 우리에게 새로운 교육제도, 의료 체계, 생활양식 등에 개혁을 가져오는데 많은 기여를 해왔다. 이런 점에서 이만열도 그의 저서 한국 기독교 수용사 에서 “ .... 기독교는 단지 교회를 세우는 것으로 그 목적을 이루는 것이 아니라 복음을 통한 인간과 사회를 개혁하여 하나님 나라를 확장하는 운동으로 이해되었다“ 라는 평가를 하고 있다. 19세기 서구 선교사들에게 인종적 우월감이 없었다고 말할 수는 없을 것이다. 하지만 그들은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 받은 인간의 존엄성을 지키기 위해 일하였고, 그런 점에서 인종우월주의자의 측면보다는 오히려 하나님의 사랑에 근거한 인류애 실천가의 측면이 더 강하게 나타났던 것이 아닌가 싶다.
3) 독재자 vs. 후원자
19세기 서구 선교사들에 대한 근래의 평가를 보면 다소 독재자 같은 모습으로 묘사된다. 그들은 선교지의 그리스도인들을 달래고 야단치며 보호해주어야 할 어린 아이들로 생각했으며, 사무실을 운영하고 교육을 실시하며 교회 일을 운영할 수 있는 성숙한 장년으로 생각지 않았다는 점을 지적받는다. 19세기 서구 선교사들에게 이 같은 독재자적 성향이 있었던 것은 분명하다. 그러나 서구 선교사들이 현지인들을 속한 시일 내에 자립시켜서 그들로 하여금 교회를 세워나갈 수 있도록 돕는 것을 사역의 목표로 삼았다는 사실도 기억할 필요가 있다. 바로 19세기의 대표적인 선교정책이 삼자원리였다는 사실이 이것을 증명하지 않는가? 물론 이러한 원리가 실제적으로 다 지켜진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적어도 그러한 목표를 지니고 있었고 그렇게 되려고 애썼던 것은 사실이다.
캐나다 출신으로 한국에서 사역했던 말콤 팬윅 (Malcom C. Fenwick) 선교사는 자신의 선교사명을 두 가지로 말하였는데, 첫째, 그가 돌보는 양떼들의 복지와 생활개선을 도모해야 한다는 것, 그리고 둘째는 복음을 전하는 데는 서양인 선교사보다는 현지인을 양성하여 현지인으로 하여금 복음을 전하게 하는 것이 더욱 효과적이라고 주장하였다.
중국에서 사역했던 로티 문의 경우도 1889년에 안수 받은 침례교 선교사를 모셔다 첫 번째 침례를 실시한 후 교회가 꾸준히 성장하였는데, 그녀가 가졌던 중요한 선교목표 중의 하나는 ‘20년 내에 외국 선교사의 간섭을 배제하는 것’ 이었다. 이러한 목표에 따라 리슈팅이라는 중국인 목사에 의해 1,000명 이상이 침례를 받았으며 그녀가 사역했던 지역인 핑투는 중국 전역에서 남침례교의 최대 선교중심지가 되었다. 윌리암 캐리도 영국 정부나 동인도회사 편에서보다는 인도 사람들의 편에 서서 그들의 사회를 개혁하려 하였고, 인도사람들이 주체가 되어 이 일을 실현시켜 나가도록 노력하였다.
즉 상당수의 선교사들은 현지인을 무시하고 혼자 모든 권한을 쥐고 모든 것을 하려는 독재자의 모습보다는 현지인을 최대한 속한 시일 내에 성장하도록 도우려는 후원자의 자세를 지니기도 하였다. 19세기는 시기적으로 많은 선교지가 개척 선교 단계에 해당하였다. 선교의 단계이론으로 보더라도 개척단계에서는 선교사가 어느 정도 일방적인 자세를 취할 수밖에 없다. 현지 교회가 어느 정도 성장했다면 몰라도 교회가 개척되는 상태에서 선교사가 현지인과 협력적 선교를 실행하는 데는 분명 한계가 있다. 실제로 19세기 선교지 상황에서 생각하면 많은 사람들이 선교사의 지도를 받아야 할 상황에 있었다. 예를 들어 아프리카의 경우를 생각해보면, 대부분의 회심자들은 부족 사회에서 도망 나온 노예요 무지한 사람들이었다. 선교사들은 이들을 맡아서 음식과 의복은 물론 거처할 곳을 마련해주고, 생명을 보호해주었으며, 한편 글을 읽고 쓰는 법도 가르쳐 주었고, 토지와 씨와 연장을 주어 농사를 짓게 했으며, 그들에게 장사하는 법도 가르쳐주었다. 현지인들은 당분간 선교사들의 지침을 잘 따르는 것이 그들이 발전할 수 있는 최선의 길이었다.
한국의 상황을 보아도 비슷한 여건이었다. 당시 조선의 환경은 참으로 열악했고, 사람들의 의식수준은 무지몽매하기 그지없었다. 당시의 조선 사람들이 서양 사람에 대하여 얼마나 무지하였는지를 정연희의 다음 글에서 확인할 수 있다. "서양놈들 상판을 보라지. 그게 귀신이지 사람이오? 글쎄, 그 놈들이 조선 놈 중에 심보 고약한 놈을 돈으로 매수해서는 조선 아이들을 잡아들였다지 뭐야. 그놈들은 사람고기를 먹는다는군. 아이가 연하니까 연한 것을 고르느라고 아이들을 잡아들였다는 게야. 말도 말아요, 고기만 먹는 게 아니라 눈알을 빼서는 사진을 현상하는데 쓴다는구먼,... 병원이라는 데는 아이를 잡아 죽이는 도살장이고, 서양놈들이 모여서 쑥덕거리는 공사관이라는 데는 아이고기를 요리해 먹는 자리랍니다”.
당시 조선에 태어난 아이들 특별히 여자아이들의 삶은 한마디로 비참하기 그지 없었다. 일곱 살만 되면 집안에 갇혀 있어야 했고 또 결혼을 하면 남편에게 묶여 갇힌 생활을 하여야 했다. 그들에게는 조선어를 배울만한 기회도 주어지지 않았다. 그들의 교육을 위한 선생도 책도 별로 없었다. 거기다가 먹을 것도 귀하고 기거하는 집마저도 굴속처럼 어두운 곳이었다. 선교사들이 이런 여자아이들을 데려다가 가르치려 하자 사람들은 “아니 계집을 가르쳐서 뭘 한다는 거여? 소처럼 일하고 아이나 뽑으면 됐지. 기집한테 뭘 가르친다는 거여? 그걸 뭣에다 써먹어?” 그리고 아이들을 데려다가 키우려고 하자 이상한 소문이 돌아다녔다. “서양 귀신들이 왜 애들을 저렇게 눈이 벌게서 찾아다니는지 알아? 데려다가 양국으로 끌고 가서 종으로 부리려는 거야” 라는 식으로 오해를 하고 여아들 교육을 반대하였다. 그러나 선교사들은 이들에게 신앙을 심어주고, 점차적으로 인간으로서의 기본적인 권리를 찾아주는 작업을 서서히 해나갔다. 묵묵하게 일을 하다 보면 언젠가 하나님이 그 일을 이루어주실 것을 믿고 행하였다. 그들에게 독재자적인 면모가 있었던 것은 사실이지만, 현지인을 양육하여 함께 하나님나라 사역에 동참시키고자 했던 협력자의 모습을 지니고 있었던 것도 사실이었다.
4) 교파주의자 vs. 에큐메니칼 운동가
앞에서 살펴 본대로 19세기 선교 속에 지나친 교파주의적 경쟁이 있었던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동시에 교파적 연합을 위한 노력이 많이 있었다는 사실도 간과해서는 안된다. 윌리암 캐리는 에딘버러 대회가 열리기 100년 전인 1810년 보편적 교회의 선교를 위해 10년에 한번씩 세계 선교대회를 개최할 것을 건의하였다. 또한 람베드 주교대회 (1867), 세계 개혁교회 연맹 (1875), 미국 감리교 가독교회 총회 (1876), 제 1차 회중교회 연합회 (1891), 제 1차 침례교 세계대회 (1905) 등의 대회 등이 열린 것으로 보아 19세기가 교회의 일치를 위해 그 이전까지 경험하지 못했던 새로운 시도를 많이 했던 시기였음도 짐작할 수 있다.
또한 선교사들은 선교의 효과성을 높이기 위하여 상호 협력하는 선교를 수행하고자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예를 들어 우리 나라에 온 선교사들의 경우만 보더라도 연합공의회 같은 것을 만들고 공의회의 결정에 따라서 선교지역을 분할하여 사역을 수행하였는데, 이같은 이유는 선교를 수행하는 과정에서 불필요한 경쟁과 힘의 낭비를 막기 위하여 다른 교파들과의 효과적인 협력 선교 즉 에큐메니칼 선교를 하기 위하여 선린 우호적인 합의 아래 이루어진 것이었다. 이러한 상황들을 볼 때 19세기 서구 선교사들을 교파주의자로만 몰아붙이는 것은 조금 무리한 면이 있다. 개신교회는 처음부터 교파주의로부터 결코 자유롭지 못하였다. 교파주의의 문제는 개신교회의 근본적인 문제점 중의 하나이며, 이러한 문제를 19세기 서구 선교사들에게만 덮어씌우는 것은 공평하지 못한 평가일지 모른다.
3. 19세기 선교사들로부터 배우는 교훈
19세기 서구 선교사들에게는 확실히 양면성이 다 있었던 것으로 보이며, 그런 점에서 19세기 서구 선교사들에 대하여 양면성을 다 말하지 않는 평가는 편향된 시각의 평가라고 할 수 있다. 19세기 서구 선교사들에 대한 균형 잡힌 평가를 접할 때, 우리는 그들의 실수를 보면서 우리가 고쳐야 할 것들을 찾게 되고, 그들이 잘한 것으로부터 많은 도전을 받게 된다. 19세기 서구 선교사들로부터 어떤 것들을 배울 수 있는지 살펴보자.
1) 제국주의적 팽창주의 경계
19세기 서구 선교사들 가운데 자신이 제국주의를 돕는다거나 제국주의적인 이기심충족을 위하여 선교지에 나가게 되었다고 인정할 사람은 거의 없었으리라고 생각한다. 약간의 예외는 있겠지만 적어도 그들 스스로는 제국주의적인 동기보다는 복음증거와 영혼구원을 위하여 선교전선에 들어간 것으로 생각하였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19세기 서구 선교사들이 자신도 모르게 제국주의적인 사고를 가지고 때로 제국주의와 손을 잡고 도움을 서로 주고 받으며 제국주의 확장에 기여하였다는 사실을 부인하기 어렵다. 즉 우리는 아무리 선한 의도를 가지고 선교에 임한다 하더라도 무지한 죄인이기에 쉽게 악에 이용당할 수 있다는 사실을 기억하고 늘 경계해야 할 것이다.
오늘날은 일단 표면적으로는 제국주의가 거의 사라졌으므로 오늘의 선교가 제국주의와 직접 연관되어질 가능성은 일단 없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제국주의적 자세는 여전히 있을 수 있다. 즉 자신의 영역과 세력을 무한대로 확장시켜 나가고자 하는 욕심이 선교사를 보내는 교회와 선교단체 그리고 가는 선교사들에게 도사리고 있을 수 있다. 이것이 복음전파의 당위성과 연결되어질 때 자칫 우리의 제국주의적 욕망이 복음전파의 당위성 밑으로 감추어지기 쉽다. 물론 어떠한 상황에서든 복음전파는 계속 이루어져야 한다. 그러나 우리는 선교를 수행하면서 무의식적으로 가질 수 있는 제국주의적 팽창주의를 항상 경계해야 한다. 그리고 우리 자신 혹은 교회의 영역을 넓혀가는 방편으로서의 선교를 단호하게 거절해야 한다. 한 설문조사에 의하면 선교사의 잘못된 선교 동기 유형을 다음과 같이 보여주고 있다. 1)국내사역 불가능 (33.7%), 2)해외 거주 계기 마련 (32.6%), 3)명예를 위하여 (27.6%), 4)물질혜택을 위하여 (2.1%) 등의 순으로 나타나 있다.
또한 선교사를 보내는 파송기관들도 다분히 자신들의 이름을 내걸고 위상을 높이려는 동기에서 선교사를 보내는 경우도 종종 있음이 사실이다. 이같은 동기들은 다분히 이기적인 동기들이고 이것은 곧 제국주의 선교의 현대판이라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이처럼 이기주의적인 동기로 선교를 수행할 때 선교현장의 필요를 따라 선교하는 것이 아니라 선교사 혹은 파송 단체의 필요를 따라 선교하는 선교 목적 도치 현상이 배태될 수 있다. 즉 현지에 필요 없는 선교사를 보낸다든지, 현지에 더 이상 필요 없는 선교사가 자신의 필요 때문에 계속 남아 있다든지 하는 문제를 낳을 수 있고, 이러한 현상은 선교에 오히려 장애요인이 되는 경우도 있게 되는 것이다.
2) 문화 우월주의 경계
19세기 서구 선교사들이 당시 서구에 만연하였던 서구우월주의 사고의 영향으로 무의식적으로 서구우월의식을 가질 수 있었다고 이해하고, 그들이 실제로 자신들의 문화를 전파하기 보다는 복음을 전파하는데 더 관심을 기울였다고 양보 한다 해도, 어쨌든 그들이 낙후된 선교지의 상황을 보면서 자연스럽게 문화우월적인 자세를 가졌다는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이러한 문화우월주의는 자연히 현지인과 그들의 문화를 무시하는 일방적 자세, 복음이 아닌 서구의 문화를 절대적인 것으로 여기는 자세, 온정적 간섭주의를 낳게 되었다. 이러한 자세는 자연히 현지인들의 반발을 사기 쉬었고, 실제로 중국에서는 ”기독교인이 한 사람 늘어나면 중국인이 한 사람 줄어든다“는 속담이 생겨날 정도로 교회를 외국의 것으로 보면서 교회에 대한 반발을 가지기도 하였다.
중요한 것은 우리의 선교 속에도 이 같은 문화우월주의가 쉽사리 자리 잡을 수 있음을 미리 간파하고 늘 마음 자세를 가다듬는 일이다. 선교지에서 한국 선교사들에 대하여 들리는 평가를 이광호는 다음과 같이 정리하고 있다. 1) 가르치려고만 하지 말고 선교지의 성도들이 스스로 결정할 수 있는 기회를 많이 달라, 2)선교지에서 자신의 직분을 내세우며 주장하려하고 대접받으려고만 하는 자세를 고치라, 3)현지의 문화를 경시하며 자신의 문화를 우월하게 여기는 자세를 고치라, 4) 선교사가 자신의 신앙정도를 모든 신앙의 기준으로 삼아 모든 사람에게 요구하는 것을 지양하라 등이다.
기타 여러 가지 많은 평가들이 있지만 위의 내용과 유사한 요구들이고, 대부분이 선교사들의 문화우월주의에 기인한 일방적인 자세 등을 많이 질책하는 내용이다. 이러한 것들은 선교사 자신들도 알지 못하는 사이에 스며드는 것이므로 이러한 것이 우리들의 선교 속에서 나타나지 않도록 늘 세심한 주의를 기울여야 할 필요가 있다. 우리는 또한 주기만 하는 거만한 자세도 경계해야 한다. 우리는 주는 자이며 동시에 받는 자인 것이다. 우리는 다른 이들에게서부터 기꺼이 배우고자 해야 한다. 또한 효과적인 선교를 위하여 기꺼이 서로 존중하며 선교를 위해 서로가 가진 자원을 함께 나누어야 한다. 아무리 많은 은사를 받고 풍부한 경험을 쌓은 선교사라 할지라도 언어와 문화가 다른 상황에서는 훈련받은 토착민 그리스도인만큼 효과적으로 복음을 전하는 것이 어렵다는 것을 우리는 잘 인식해야 하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선교에는 거만이나 승리주의가 끼어들 수 있는 여지가 없어야 한다. 우리를 위하여 고난당하시고 죽임을 당하신 주님은 이런 일에 좋은 본을 보여주셨던 것이다.
3) 선교를 위한 헌신과 희생
19세기 선교사들의 생애를 보면서 가장 감동 깊게 다가오는 것은 선교를 위한 그들의 헌신과 희생이다. 물론 앞서 살펴본 대로 19세기의 선교사들이 제국주의적 팽창주의와 문화우월주의 등으로 얼룩진 면이 있지만 선교를 위한 그들의 희생과 헌신 앞에서 오늘 우리들은 할 말을 잃게 된다. 그들은 끝없이 계속되는 무관심, 의혹, 증오, 학대 및 투옥 등의 어려움을 겪었다. 가정이 약탈을 당하고, 가옥이 불타며, 교회가 폐허화되고 생명의 위협을 받는 일이 많았다. 또한 많은 선교사들과 그 가족들이 열대성 질병으로 목숨을 잃었고 핍박가운데 순교를 당한 경우도 있었다. 특별히 아프리카의 경우 질병으로 인한 선교사의 사망자수가 많았는데, 말라리아, 황열병, 발진티푸스와 이질 같은 병들이 창궐하였다. 아프리카의 선교사였던 알렉산더 멕케이 (Alexander Mackay)는 우간다를 향해 출발하기 전, 교회 선교회 (Church Missionary Society)에서 행한 연설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앞으로 6개월 이내에 아마 우리 중의 한 사람이 죽었다는 소식을 들을지도 모릅니다. 그런 소식이 들려도 절대로 낙심하지 마십시요. 오히려 그 빈 자리를 채울 사람을 즉시 파송해주시기 바랍니다” 허버트 케인, 기독교 세계 선교사, pp. 138-140.
그의 예언은 결코 과장이 아니었다. 정말 3개월 이내에 8명 가운데 한명이 죽었다는 소식이 들려왔고, 1년이 지나면서 또 다섯명이 세상을 떠났으며, 2년이 지날 때에는 멕케이만이 유일한 생존자가 되었다. 그 자신도 12년의 분투 끝에 열병으로 쓰러지고 말았다. 아프리카 선교는 그야말로 모험과 인내와 빈곤, 질병, 허약, 죽음의 연속이었으며, 서부아프리카는 “백인의 묘지”로 알려질 정도였다. Ibid., pp. 139-140.
이것은 아프리카에만 제한된 상황이 아니었다. 당시 대부분의 선교지는 모두 그 상황이 매우 열악하였다. 예를 들어 인도의 경우를 생각해본다면 인도까지 가는 데만 보통 3-4개월이 걸렸고, 700-800킬로미터의 내지를 가기 위해서 말이나 수레를 이용해서 5-6주씩 걸려서 여행을 했다. 사역기간도 안식년 없이 7년 이상을 계속해서 사역하는 것이 보통이었다. 게다가 각가지 위험한 풍토병과 이에 대한 의약품의 부족으로 질병과 죽음의 위험성은 매우 높았다. 일례로, 1880년과 1891년 사이에 10쌍의 루터교 선교사들이 인도로 갔는데, 1891년 말경에는 무려 7명의 남자 선교사와 9명의 여자 선교사와 32명의 아이들이 죽었다. 인도에서 사역했던 한 루터교 선교사는 장례식에 지장이 없도록 관을 만들어 놓고 무덤을 자기 집 옆에 파놓았다고 한다. 그는 지붕에 물이 너무 심하게 샐 때에는 관속에 들어가 잠을 자기도 했다고 한다. 대부분의 선교사들은 선교지에서 30 혹은 50년씩을 보내었고, 그러는 가운데 자신들이 사역한 그 땅에 아내와 아이들을 묻어야만 하였다.
한국의 경우도 외국인 선교사들의 묘지인 양화진에 약 4백기의 묘소가 있다. 4백기 중에는 미국이 2백 30, 영국 30, 프랑스 25, 덴마크 3, 호주 12, 벨기에 4, 백러시아 54, 캐나다 7, 일본 1, 스페인 4, 한국 17개소로 국적을 달리한 묘소들이 한 자리에 모여 있다. 이들의 희생적인 삶은 우리에게 선교가 어떻게 이루어졌으며, 어떻게 이루어져야 하는 것인가를 감동적으로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4) 구령의 열정
19세기 선교사들이 이토록 험악한 상황 속에서도 굴하지 않고 선교사역을 감당하도록 만든 가장 중요한 원동력은 아마도 구령의 열정일 것이다. 19세기의 선교사들은 구령의 열정으로 가득 찬 사람들이었다. 예수 그리스도를 알지 못하면 영원히 멸망한다는 것을 의심 없이 믿고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더 늦기 전에 한시라도 더 빨리 멸망하고 죽어가는 영혼들에게 복음을 전해야 한다고 믿었고 이 일에 저들의 생명까지도 기꺼이 바쳤다.
물론 그들은 교회와 사회를 구별하고 지나치게 개인 신앙 위주의 신앙형태를 지니고 이로 인해 교회의 사회 개혁적 기능이 약화된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그들은 영혼 구령의 중요성을 알았고, 이 일이 그 어떤 다른 일보다 시급하고도 중대하며 근본적인 것이라고 믿었다. 그랬기에 그들은 선교 도중에 요구되는 그 모든 희생을 감내할 수 있었다. 그들이 하는 일이 단순히 사람들로 하여금 좀 더 인간다운 삶을 살고 좀 더 풍족한 삶을 사는 것을 돕는 일이었다면 그들은 자신의 자녀와 아내 그리고 자신의 목숨까지 바쳐가면서 그 일을 감당하지 않았을 것이다. 인간화를 이루기 위해 비인간적인 일을 감수하는 것은 논리적으로 맞지 않는 일이기 때문이다. 김동선, 초기 개신교 선교사들 (서울: 한들출판사, 2001), pp. 152-153.
당시의 선교사들이 얼마나 강한 구령의 열정을 지녔는지를 보여주는 한 예를 우리는 감리교 선교사로서 한국에 와서 무료 병원을 개설한 스크랜톤 선교사가 어머니 스크랜톤 여사에게 한 다음의 말에서 읽을 수 있다.
어머니, 어머니께서 누구보다도 잘 알고 계신 일이지만 저의 변함 없는 목표는 오직 전도 그 한 가지 뿐입니다. 그렇다고 의료 사업을 이용하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고 계시겠지요. ‘너희는 온 천하에 다니며 만민에게 복음을 전파하라’ 하신 그 말씀을 한 순간인들 잊을 수 있겠습니까. 의료 사업은 이들 가난한 사람들에게 우선 필요한 일이니까 어쩔 수 없어서 쫒기다시피 시작한 일입니다. 복음을 전할 길이 따로 있다면 저는 언제고 이 의료사업을 다른 사람에게 맡길 준비가 되어 있습니다”.
이같은 구령의 열정 때문에 19세기 선교사들은 그 엄청난 희생을 치르면서도 유감과 후회가 없이 모든 고난을 감수하면서 사역을 감당할 수 있었다. 그들은 얼어붙은 그린랜드에서부터 열기로 들끓는 아프리카 정글에까지 지구상에 인간이 살고 있는 곳이라면 어디든지 갔다. 그것은 바로 복음을 전하여 그들의 영혼을 구하고자 하는 열정 때문이었던 것이었다. 오늘날 WCC를 중심으로 교회의 역사 및 사회참여를 강조하는 방향은 매우 중요한 도전이고 실천해야 할 부분이지만, 이런 것들에 대한 강조가 자칫 구령 열정의 식어짐으로 이어진다면 그것은 매우 우려되는 사안이 아닐 수 없다. 신앙의 선배들의 목숨을 내건 구령의 열정이 없었다면 우리는 아직도 하나님을 알지 못했을 것이고, 기독교는 지구상에서 사라졌을지도 모른다. 이형기는 WCC의 세계대회들을 평가하면서 말하기를 1975년 나이로비 대회는 “...통전적 선교를 지향했다. 그러나 역시 19세기의 복음주의적 선교적 열의로부터는 멀어져만 갔다” 이형기, “에큐메니즘의 역사적 고찰,” in 말린 벧엘데렌, 세계 교회 협의회 40년사, 이형기 역 (서울: 한국 장로교 출판사, 1993), p. 231. 는 지적을 하고 있는데, 우리 모두가 경청해야 할 평가가 아닌가 싶다.
4. 나가는 글
이차대전 이후로 19세기 서구 선교사들에 대한 평가들은 대부분 부정적인 평가가 많다. 그들에게 제국주의자들, 문화우월주의자들, 교파주의자들 등의 딱지를 붙이면서 그들에게서 배울 것보다는 오히려 배우지 말아야 할 것이 더 많은 것으로 평가된다. 물론 그런 평가는 결코 틀린 것은 아니다. 그러나 그들에게 있었던 문제들은 예리하게 지적하면서 그들이 행했던 그 숱한 헌신과 희생들은 아무것도 아니었던 것처럼 그냥 지나가는 것은 결코 공정한 평가가 아니다. 그들을 무조건 존중하고 따르는 것도 문제지만, 그들을 전혀 고려의 가치도 없는 사람들로 평가절하 하는 것도 문제가 아닐 수 없다. 그들을 부정적인 시각으로만 보는 것은 정당하지 않으며 우리의 선교에도 도움이 되지 못한다. 세상 모든 사람들이 다 그렇듯이 19세기의 선교사들 역시 참으로 귀한 선교의 열정을 가지고 헌신한 사람들이었지만 자신들이 속한 시대와 상황을 벗어나지 못하였던 것이 사실이다. 허버트 케인의 “인간은 유한하여 타락한 존재이고, 가장 고상한 노력을 한다 해도 불완전성과 실패에 의해 상처를 받는 것이다” 라는 말이 19세기 서구 선교사들에게도 그대로 적용되는 것 같다.
사실 우리는 그들이 살았던 세계를 잘 모르는 경우가 많으며, 특정한 상황들을 고려할 때 그들의 선교가 그렇게 된 것은 때로 피할 수 없는 일이었을 경우도 있다는 사실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이런 점에서 보쉬는 ”그러므로 신앙의 조상들을 가차 없이 비판할 때에 우리가 그들이 했던 것보다 더 잘하지 못할 수도 있었다는 것을 우리는 기억해야 한다 라고 말하면서 선배들에 대한 우리들의 가혹한 비판에 경종을 울린다.
그렇다. 시대의 한계 속에서 사역했던 선교사들을 무조건 오늘의 잣대를 들이대어 비판적으로 평가하고 말 것이 아니라, 그들에게서 배울 것이 무엇인지를 찾으려는 진지한 자세가 오늘의 선교를 위하여 더 필요할 것이라고 본다. 우리는 가장 왕성했던 선교 활동 시기를 되돌아보면서 우리 선배들이 실수로 범했던 것들을 되짚고 그런 실수들이 우리의 선교 속에서 반복되지 않도록 할 뿐 아니라, 그들이 지녔던 선교에의 헌신과 희생, 그리고 구령에의 열정을 간직하도록 또한 힘써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