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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가 박범신선생은 자신의 작품 세 가지를 꼽으면서 '애증의 3부작' 이라고 표현했다.
'고산자' '촐라체' '은교' 세 개의 소설을 일컬음인데, 세 작품을 다 읽어보았지만 작가의 그 표현을 잘 이해를 못했었다.
개인적인 생각으로는 '고산자'가 가장 훌륭하고 깊이 있는 작품으로 보였다.
'은교'는 영화를 먼저 보고 책을 읽었는데, 영화로도 나름 잘 표현했다는 생각이 든다.
'은교'에는 손에 꼽을 만한 명 문장들이 꽤 나온다.
'촐라체'는 고산등반가 박정헌의 촐라체 동계등반과 생환 스토리에 기반을 둔 소설이다.
작가가 통영으로 내려와 박정헌과 바닷가에서 2박3일간 술을 마시며 촐라체 등반에 대한 이야기를 듣고, 이 이야기를 소설로 써도 되겠느냐고 하고는 서울로 올라가 작품을 구상해 몇 달 뒤 나온 작품이 그것이다.
몇 년 전 박정헌과 술을 마시다 전화가 왔는데, 박정헌이 "성님!"하며 전화를 받던 기억이 난다. 누구냐 물으니 소설가 박범신형님이라고 한다.
작가가 '애증의3부작' 이라고 한 건, 작가 자신의 심정, 배경, 소설을 써놓기 전, 쓰고 고 난 뒤의 작가나름의 다른 무언가가 있으리라.
어제 천등산 '세월이 가면' 루트를 등반하고 집에 와서 나 역시 3부작을 정리해 보았다.
앞의 글 두 개는 서울을 떠날 때와 대전에 와서 쓴 글이고 마지막은 어제 등반하고 쓴 짧은 글이다.
<1>
서울을 떠나게 되니 문득 오래 전에 보았던 영화 'Leaving Las Vegas' (라스베가스를 떠나며)가 생각이 난다.
벤(니콜라스 케이지)과 세라(엘리자베스 슈)의 사랑이야기.
그렇지만 알콜중독자 남자와 몸을 팔아 살아가는 여자(prostitute)의
전혀 재미있지도 달콤하지도 않은, 우울하고 가라앉은 스토리
이렇듯 영화 캐릭터와 설정은
그다지 아름답지 않음에도 영화를 보면서 여러가지 생각을 하게 된다.
처음부터 끝까지 술병을 들고 술마시는 걸 멈출 수 없는 벤.
안타까워 하면서도 사랑하는 남자를 위해 술을 주고 또 술병을 사주는 세라.
두 사람이 영화에서 전하는 메시지는
사랑하는 사람의 단점을 고치려고 하지 말고 그 것을 인정하라는 것 같다.
그러나 그게 어디 쉬운가.
그게 쉽다면, 쉬운 일이라면 연인들의 다툼도, 헤어짐도, 부부간의 결별도 없을 것이다.
그나저나 사랑하는 사람의 마지막을 함께 지켜봐 주면서
또 다시 혼자가 된 그 녀.
그래도 그 4주 동안 그 녀는 행복했을까?
...
학교를 졸업하고 취직을 했고
그 직장에서 26년을 머물렀다.
최근에 회사에 지방근무를 요청했다.
다행히 나의 청을 들어줬고 이제 서울을 떠난다.
사람들이 묻는다. 어디로 가느냐고
지역이 어디인지, 서울에서 얼마나 떨어져 있는지,
시간은 얼마나 걸리는지는 중요하지 않다.
설악산과 속초의 거리, 마터호른과 체르마트의 거리
몽블랑과 샤모니의 거리, 인수봉과 우이동의 물리적 거리는 의미가 없는 것처럼...
다만 떠난다는 것에 의미를 두고 싶다.
'라스베가스를 떠나며'의 주인공
니콜라스 케이지처럼 페시미스트(Pessimist), 알콜중독자가 되지는 못하겠지만
Leaving Seoul 서울을 떠나며 ...
- 2017년 2월
어릴 때 나는
내 키보다
더 큰
수수밭 속에서 자랐네.
내 키보다 더 큰
수숫대 위에서
빨간 고추잠자리는
언제나 나를 놀렸다네.
빙...빙...빙...
떠나길 잘했지
세월은 흘러
이제 나는
어른이 되었다네.
절강은 그 옛날을
다시는 말해줄 수 없고
그 옛날 수수밭은
물속에 잠겨
간 곳이 없다네
내 어릴적
고추잠자리 한마리는
아직도 내 머리위에 있다네
빙...빙...빙...
떠나길 잘했지.
<2>
노래 '세월이 가면'은 두 가지 버젼이 있다.
최호섭의 노래 '세월이 가면'
세월이 가면 가슴이 터질 듯한
그리운 마음이야 잊는다 해도
한없이 소중했던 사람이 있었음을
잊지 말고 기억해줘요.
...
그리고 박인희의 '세월이 가면'
지금 그 사람 이름은 잊었지만
그 눈동자 입술은 내 가슴에 있네
바람이 불고 비가 올 때도
나는 저 유리창 밖
가로등 그늘의 밤을 잊지 못하지
사랑은 가도 옛날은 남는 것
여름날에 호숫가 가을에 공원
그 벤치 위에 나뭇잎은 떨어지고
나뭇잎은 흙이 되고
나뭇잎에 덮여서
우리들 사랑이 사라진다 해도
내 서늘한 가슴에 있네
...
서울을 떠난 지 한 달이 되어간다.
처음 내려올 때는 양복 몇 벌과 등산복 몇 벌만 가지고 왔으나
점차 이런저런 짐들이 많아지고 있다.
서울에 가끔 들를 때면 조금씩 짐을 차에 싣고 내려온다.
그런 것을 보면 이 곳 생활에 점차 적응이 되는 것도 같다.
어색하던 객지에서의 좁은 공간에서의 삶도
이제는 편안해지고 조금은 아늑해지기까지 하다.
하지만 그로 인해 생활패턴이 바뀐 것도 있다.
서울에서는 항상 귀가 시간이 늦었고
집이라는 것이 그야말로 잠만 자는 공간이었는데
지금은 집에서 보내는 시간이 많다. 많아지고 있다.
지난 주에는 창고에 처박아 두었던 캠핑용 테이블(IGT)를 가지고 내려와
거실에 설치해 두었더니 제법 폼도 나고 책상대용으로 안성맞춤이다.
캠핑할 때 쓰던 릴렉스체어를 함께 쓰니 세트로 구성이 아주 좋다.
커다란 옷걸이 행거를 하나 샀고 수납장도 하나 샀다.
행거에 양복과 와이셔츠, 가지고 온 등산복들을 죄다 걸었다.
왠지 기분도 펴지는 느낌이랄까.
전자렌지와 커피포트, 토스트기, 진공청소기 등도 있는데
이 물품들은 회사 후배들이 지방으로 발령난 나를 위해 선물로 보내줬다.
일단 살림살이는 그렇게 대충 구성이 되었고
소소한 살림살이들 칼, 냄비, 그릇, 수저 등등은
마트에서 틈틈이 구입해서 채워가고 있다.
다만 집에서 밥을 먹는 일이 거의 없어서 쓸 일도 없다.
컵반이 몇 개 있는데 보름이 지나도록 한 개도 먹지 않았다.
라면만 딱 한 번 끓여먹었다.
지난 겨울동안 독감과 감기에 걸리지 않고 잘 보냈는데
3주 동안 무리해서인지 지난 주부터 몸에 이상이 오기 시작했다.
아침에 일어나니 목이 부어 침을 삼키기 힘이 든다.
이틀간 그 상태여서 사무실에 있을 때는 따뜻한 차를 계속 마셨다.
그것도 효과가 없었나 보다.
무거운 몸으로 상조형과 대훈과 토요일에 천등산 등반을 갔다.
대훈이가 고향 익산에 집안 경조사가 있어 내려와야 하는데
식구들은 익산에 내려두고 천등산으로 가서 함께 등반하기로 했던 것.
등반 루트는 '세월이 가면'
몸 상태가 그닥 등반할 컨디션은 아니었으나
그렇다고 약속을 어길 수도 등반을 안할 수도 없다.
내가 1,3,5피치를 가고 대훈이가 2,4,6피치를 등반하기로 했다.
1피치를 끝내고 확보를 보는데 빗방울이 떨어진다.
하늘을 보니 먹구름도 몰려온다.
세컨으로 올라오신 상조형이 내려가자고 하신다.
전날 새벽까지 술도 마셔 힘도 드는데다 날씨가 이러니
고산에 가서 이광민씨 암장에서 운동을 하자고
대훈이가 올라온 후 일단 한 피치는 더하고 결정하기로 했다.
대훈이가 2피치 선등을 나간다.
베낭을 벗어놓고 후등으로 2피치를 오르니 한결 수월하다.
2피치 종료지점은 바로 옆에 있는 '어느 등반가의 꿈' 3피치 종료지점과 나란하다.
‘세월이 가면’ 루트의 하이라이트는 5피치다.
5.10d 인데 스타트부터 종료지점까지 계속 작은 홀드와 스탠스를 딛고 가야 하는 재미있는 구간이다.
빗방울이 많이 떨어지길래 아쉬움을 뒤로 한채 하강을 결정하고 벽을 내려선다.
고산 이광민씨 집에 설치된 암장 '레전드 클라이밍센터' 로 간다.
이광민씨는 불상 작업 중이라 등반을 못가고 일을 하는 중인데
작업실 옆 공간에 암장설비를 갖춰놓은 것.
요즘 상조형께서 그 곳에서 함께 운동하며 등반하는 재미에 푹 빠져 계시다고 한다.
툴링루트 한 개와 상조형이 프로젝트 중인 클라이밍 루트 하나를 등반하고 나니 시간이 오후 6시가 되어간다.
대훈이는 익산으로 상조형은 댁으로 나는 서울로 길을 나선다.
서울집에 도착하니 몸상태가 점점 악화된다.
목감기와 몸살기운이 심해서 약을 먹고 눕는다.
다음 날 딸아이를 데리고 일산 어머니 병원에 들렀다가 서울집으로 와서
몇 가지 일을 하고 짐을 꾸려 차에 싣고 다시 내려온다.
입술은 부르트고 목은 붓고 잠겨있다.
두통과 몸살때문에 꼼짝할 수 가 없다.
새로운 환경에 적응하느라 겪는 일종의 명현현상인가 싶다.
집과 회사에 있는 각종 약을 다 먹었는데도 차도가 없다.
어제 하루 사무실에 앉아 크리넥스 한 통을 다 썼다.
코밑이 헐었고 짙은 가래가 나온다.
세월이 가면,
모든게 나아지리라
시간이 지나면,
많은 것들이 해결되겠지.
- 2017년 3월
세월이 가면 1피치
세월이 가면 2피치
그리고
...
<3>
명절은 나에게 바쁜 계절이다.
설은 겨울에 있어 빙벽등반에 지장을 주고, 추석은 가을에 있어 암벽등반에 지장을 준다.
명절이 등반시즌의 가장 한가한 시기에 위치해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 생각을 해본다.
추석은 11월, 설은 3월. 이렇다면 충분히 등반을 만끽할 수 있겠다는 직장인의 말도 안되는 생각.
더불어 겨울 날씨가 영하 10도 이하이면 학생들 휴교하고, 직장인들은 회사에 안가도 되면 좋겠다.
오랜만에 천등산을 찾았다.
오늘의 등반루트 역시 ‘세월이 가면’
개인적으로 천등산에서 ‘어느 등반가의 꿈’과 함께 가장 좋아하는 루트다.
토요일인 어제는 근무를 하고, 일요일인 오늘은 오전근무 후 천등산으로 차를 몰았다.
천안에 사는 ER동문 박윤하씨가 버스를 타고 왔고, 회사 바로 옆이 버스터미널이라 바로 픽업을 해서 천등산으로 가니 40분 정도 걸린다.
박윤하씨는 지난 8월 초 설악산에서의 3일간의 등반여행 중 함께 하며 알게 됐는데 주변 사람들을 챙기는 모습이 아주 인상적인 동문이자 후배다.
천등산에 도착해 바위를 바라보니 많은 사람들이 벽에 붙어 있다.
다행히 모두들 두 루트의 2피치 위에 있어서 우리가 어프로치를 하고 장비를 차고 3피치 등반을 할 때쯤이면 다 들 등반을 끝냈으리라 생각이 들어 부담이 없었다.
벽앞에 서서 벨트를 차고 하나 둘씩 장비를 차니, 심장박동수가 조금 빨라진다.
1피치는 페이스 및 크랙인데 스타트 구간은 손가락 힘이 요구되고, 그 다음부터는 크랙상의 큰홀드가 많아 양호하지만 약간 사선 크랙이라 밸런스를 요한다. 10b
2피치는 수직으로 곧장 올라가는 페이스 및 크랙이 혼재되어 있는데 아기자기한 맛이 있다. 10c
3피치는 짧게 이동하여 턱을 넘어서는 구간이고 너럭바위 위에서 쉴 수 있는 곳이 나온다.
여기에서 누워 ‘어느 등반가의 꿈’과 ‘세월이 가면’을 등반하는 모습을 관망할 수 있다.
우리가 출발할 때 보던 앞팀들이 아직도 매달려 있다.
지방에서 온 무슨 등산학교 수료등반이라는데, 많은 인원들이 떼지어서 줄을 당기기도 하고 고정시켜놓고 등반을 하기도 하는데 몇 시간 째인지 모르겠다.
우리 바로 앞 팀은 세시간을 기다리다 지쳐서 다른 루트로 우회하고, 난 늦게 출발한 덕에 1시간 정도 기다리다 벽에 붙었다.
5피치 등반을 나가다가 홀드를 못 찾아 헤매기도 했다.
전에 수월하게 나가던 곳인데 왜 이렇지 하는 생각과 그 동안 트레이닝을 게을리 한 후회도 들었다.
‘어느 등반가의 꿈’ 5피치가 11c 구간이지만 두 동작만 해결하면 나머지 구간은 쉬운 것과는 달리, 이 구간은 등반하는 내내 작은 홀드를 찾아 잡고 딛고 버티는 페이스 구간이라 전 구간 내내 등반하는 맛이 쫄깃하다.
정상에서 만난 ER 동문 한 분 덕에 하강을 수월하게 했다.
나와 함께 등반한 윤하씨가 잘 아는 분이 두 명이 있었고, 그 중 남자분이 41기 졸업한 분이라고 하면서 두 번째 하강지점에서 기다리고 있다가 60미터 하강 고정자일을 쓰게 해준다.
덕분에 한 번에 하강을 마칠 수 있었다.
박윤하씨를 버스터미널에 내려 주고 집으로 와서 샤워를 하고 빨래를 세탁기에 돌리고, 더러워진 등반 로프를 세제에 넣어 두었다가 몇 번 헹군 다음 다시 세탁기에 넣어 돌렸다.
등반하는 내내 로프에 묻은 더러운 때와 먼지로 손이 새카맣게 되면서 필히 오늘은 세탁을 하리라 마음먹었었다.
탈수까지 마치고 나니 약간의 물기만 남아 있어 베란다에 널어놓았다.
로프를 당기면서, 손에 묻은 때를 보면서 내가 혹시 남들에게는 때묻은 로프같은 존재가 아닐까 하는 생각도 잠시 했었다.
그래서 집에 오자마자 세탁을 했는지도 모른다.
문득 3년 전 대전으로 발령이 나면서 썼던 글과, 그 후 천등산에서 ‘세월이 가면’ 을 등반하고 썼던 글이 생각이 나서 찾아보았다.
이 글에 함께 옮겨 본다.
지난 글은 기억에 가물거리고 내가 쓴 것이 맞나 싶고, 얼굴이 화끈거리는 글도 있다.
당시에 심정이 저러했나 하는 생각도 들고…
세월이 가면,
많은게 변하고, 의도치 않게 상황이 흘러가고 호전되기도 하고 악화되기도 한다.
그래서 세월이 약이라는 말이 있겠지.
세월이 지나니 이제는 대전에서 떠나기 싫어졌다.
다시 서울로 가기가 싫다.
‘세라’가 4주 동안 행복했을까 하는 의문을 갖었던 것처럼
난 대전에서 3년 동안 과연 행복했던 것일까!
- 2019년 9월
첫댓글 ᆢ
근데 겨우 월요일ᆢᆢ
천안에서 버스타고 와준 박윤하씨에게 다시 한 번 고맙다는 말 전합니다.
하강자일 쓰게 해 준 동문 분께도 감사말씀 전하구요
글로만 뵙던분을 만나뵙게돼서 반가웠습니다~
제가 더 감사하죵~
덕분에 즐겁게 등반했습니다^^
'Leaving Las Vegas' 우울한 영화 .. 오래전 영화네요
영화나 책, 음악 등을 받아들이고 느끼는 건 본인의 감정, 감성 등의 차이에서 오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저는 이 영화 보면서 충분히 만끽했습니다.
제레미 아이언스가 주연한 영화 '데미지' 도 그랬죠.
남들이 뭐라고 하든 받아들이는 내 자신의 감정이 중요하고 거기에 충실하고 싶었으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