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나의 입에 달고 다니는 말은
만나는 사람마다 불교식으로 하나님을 믿는 기독 교인에 대한 우려의 말입니다.
불교식으로 하나님을 믿는다는 말을 언뜻 이해하지 못하고....
고개를 갸웃하며 질문을 하다가 대화가 시작됩니다.
안타까운 것은 "믿음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이해가 근본적으로 부족하여
기독교의 민간신앙은 끝없이 생성되는 것 같습니다.
믿음에는 두 종류가 있습니다.
하나는 믿음의 주체가 "나"자신에게 있는 믿음이요,
다른 하나는 믿음의 주체가 믿는 "대상"에게 있는 믿음입니다.
믿음의 주체가 "나" 자신에게 있는 믿음은 인본주의 신앙이요,
믿음의 주체가 "대상", 즉 하나님에게 있는 것은 신본주의 신앙입니다.
"적극적 사고방식"이나 "긍정의 힘", 그리고 "꿈은 이루어진다"는 신념은
믿음의 주체가 "나" 자신에게 있는 인본주의 신앙의 기초를 이루고 있습니다.
기독교의 인본주의 신앙이라는 말은
말 자체가 성립하지 않고 사실상 존재할 수 없는 신앙입니다.
그럼에도, 오늘날 기독교인의 모습에서
인본주의 신앙으로 넘쳐나는 것은 정체성의 심각한 위기를 느끼게 합니다.
신본주의 신앙은
선택의 주체가 "나" 자신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에게 있는 절대 신앙입니다.
성경의 권위와 하나님의 주권이 강조되는 개혁주의는
기독교 신앙의 본래 모습이요, 바른 신앙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주권적 선택은
우리 사람에게 은혜와 사랑으로 햇빛처럼 주어집니다.
하나님의 우주적 경영은
그 선하신 뜻으로 되는 것입니다.
신본주의 신앙은
하나님의 하나님 되심을 그대로 받아들이고 믿는 신앙입니다.
그러나 오늘날 기독교인의 신앙은
이것을 많이....아주 많이 잃어버렸습니다.
하나님의 주권적 선택의 역사로 되는 "하나님의 은혜"를
긍정의 힘으로 그 목적을 만들어 내려고 발버둥을 치고 있습니다.
"긍정의 힘"에서 "목적의 힘'으로 이어지는 인본주의 신앙은
하나님의 주권적 선택의 역사를 무너뜨리고 있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뜻이라고 말하면서
바리새인의 후예로 굳어지고 있습니다.
바리새인들의 인본주의 신앙은
하나님의 주권적 선택의 역사로 되는 구원의 은혜와 정면충돌을 하였습니다.
그 결과 예수님은
십자가에 고난을 받게 되었습니다.
오늘날 교회 안에
바리새인의 후예로 인본주의 신앙을 만들어 가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신본을 가장한 인본주의......
외식적이요, 위선적인 바리새인의 신앙입니다.
예수님 당시 유대교의 귀족층으로 존경을 받고 종교적인 모든 기득권을 가졌던 바리새인들은
예수의 복음과 하나님 나라를 역행하였습니다.
오늘날 교회 안에
바리새인의 후예가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소름이 끼쳐옵니다.
그런데 절대다수로 기독교의 모든 종교적 기득권을 누리고 있다면
이 시대 예수님이 다시 오셔도 십자가에 처형되고 말 것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복음이 상실된 기독교 신앙은
사실상 적 그리스도 세력이요, 기독교 유사종교이며 사이비라고 말할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이 모든 것은
어떤 믿음을 가졌느냐에 달렸습니다.
당신은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믿습니까....
아니면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으로 믿어집니까?
성경이 하나님의 말씁이라고 맹신하는 것은 인본주의 신앙이요,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으로 믿어지는 확신에 거하는 사람은 신본주의 신앙을 가진 사람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으로 예수님을 이해하는 믿음을 가진 사람은
예수의 하나님 나라 백성으로 존재하는 신본주의 신앙을 가진 사람입니다.
믿음으로 구원받는다는 말씀을 깨달은 성도는
영적 전쟁과 그 도해를 믿지 않습니다.
믿음으로 구원받는다는 진리를 깨달은 성도는
알파 영성을 따라 무속적 신앙의 늪에 빠지지 않습니다.
믿음으로 구원받는다는 복음을 깨달은 성도는
적극적 사고방식, 긍정의 힘, 싯크릿 등 유사 믿음에 현혹되지 않습니다.
참된 주 에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구원받은 성도는 하나님의 말씀을 이루며 진리의 복음을 증거하며
사탄의 미혹으로 말미암는 다른 예수, 다른 영, 다른 복음을 따르지 않습니다.
이단과 사이비에 구원이 있다고 말하면
우리 주 에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구원받지 못한 증거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