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나는 여호와로라
(6:1-8)
본장내용
1~8 난국에서 기도하는 모세에게 격려하시고 여호와의 이름으로 언약을 주시고 전하라 하심
9~13, 28~30 모세가 전하나 백성이 듣지 아니하고 모세는 하나님의 명하심을 전하기를 주저함
14~27 모세와 아론을 중심한 레위족의 계보
서론
본장 중 2-8에는 “나는 여호와로라” 는 말씀이 세 번 있다. (2,6,8)
하나님이 스스로 자기의 이름을 여호와라 말씀하신 곳은 여기가 처음이다.(3)
이름은 속성을 나타낸다. 고로 여호와란 이름은 하나님의 속성을 나타낸다.
본론
1.여호와란 언약하신 하나님이시다. (3절, 창 15:18, 17:4,7)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가나안 땅을 주시기로 언약하셨고 우리에게 신령한 가나안 곧 천국을 주시기로 언약하셨다. 하나님의 언약은 영원한 언약이다.
2. 여호와란 언약을 기억하신 하나님이시다.
5절下 “나의 언약을 기억하노라.” 하셨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자손들이 신음중에 있는 것을 듣고, 보시고, 가나안을 주시기로 언약하신 바를 기억하셨다. (민 23:19)
3. 여호와란 언약한 바를 이루어 구원하시는 하나님이시다.
6-8절 “하나님께서 하시리라" 는 내용이 일곱번이나 기록되었다
1) 애굽인의 무거운 짐 밑에서 너희를 빼어내며(6)
2) 고역에서 너희를 건지며
3) 편 팔과 큰 재앙으로 너희를 구속하여
4) 너로 내 백성을 삼고(7)
5) 주기라 맹세한 땅으로 인도하고 (8)
6) 그 땅을 너희에게 주고
7) 기업을 삼게 하리라
일곱 번을 말씀하신 것은 완전수이고 또 하나님께서 내가 하리라고 하신 것은 반드시 이루실 것을 말씀하신 것이다.
결론
우리는 하나님께서 여호와인 것을 믿어야 한다. 하나님은 여호와로서 당신의 백성과 언약관계의 하나님이시다.
1. 언약하시고
2. 언약을 기억하시고
3. 언약대로 구원하신다. 할렐루야
출처: 임성락 원문보기 글쓴이: 임성락의 행복한 날들
하나님의 약속
출 6: 1-8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이제 내가 바로에게 하는 일을 네가 보리라 강한 손을 더하므로 바로가 그들을 보내리라 강한 손을 더하므로 바로가 그들을 그 땅에서 쫓아내리라, 하나님이 모세에게 말씀하여 가라사대 나는 여호와로라, 내가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전능의 하나님으로 나타났으나 나의 이름을 여호와로는 그들에게 알리지 아니하였고, 가나안 땅 곧 그들의 우거하는 땅을 주기로 그들과 언약하였더니, 이제 애굽 사람이 종을 삼은 이스라엘 자손의 신음을 듣고 나의 언약을 기억하노라, 그러므로 이스라엘 자손에게 말하기를 나는 여호와라 내가 애굽 사람의 무거운 짐 밑에서 너희를 빼어내며 그 고역에서 너희를 건지며 편 팔과 큰 재앙으로 너희를 구속하여, 너희로 내 백성을 삼고 나는 너희 하나님이 되리니 나는 애굽 사람의 무거운 짐 밑에서 너희를 빼어낸 너희 하나님 여호와인 줄 너희가 알지라, 내가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주기로 맹세한 땅으로 너희를 인도하고 그 땅을 너희에게 주어 기업을 삼게 하리라 나는 여호와로라 하셨다 하라"(출6:1-8)
어떤 사람이 "내 재산의 반을 무조건 주겠다"고 약속했을 때, 그 사람이 부자인가 가난한 사람인가는 매우 중요합니다. 만약 백만장자가 그런 약속을 했다면 우리는 너무나 흥분하여 잠을 이루지 못할 것입니다. 생각만 해도 얼굴에 웃음이 번지고, 이제 고생 끝! 행복시작 아닙니까? 그런데 똑같은 약속을 한 푼 없는 건달이 했다면, 그의 약속에 가슴이 뛰기는커녕 기대할 것도 없고 오히려 기분이 나쁠지도 모릅니다.
"무엇이든 구하는 대로 주겠다"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약속을 나는 어떻게 믿고 있습니까? 그분의 약속에 흥분이 되고, 기대가 되고, 가슴이 뜁니까? 그분은 나에게 백만장자입니까? 아니면, 그분의 약속은 빈털터리 건달의 약속과 같습니까?.
그분은 나에게 백만장자입니까 아니면 빈털터리 건달입니까?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에서 생활하는 동안 어려움이 있을 때에 현명하게 대처했던 일은 하나님께 부르짖었던 일입니다.
때로는 하나님의 말씀을 준행하지 아니하고 거역하며 불평하고 원망도 했지만, 그래도 하나님께 부르짖었을 때 하나님게서 그들의 기도를 들으시고 다음과 같은 세가지 약속을 해 주셨습니다.
1.강한 손으로 역사해 주시겠다고 하셨습니다.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이제 내가 바로에게 하는 일을 네가 보리라 강한 손을 더하므로 바로가 그들을 보내리라 강한 손을 더하므로 바로가 그들을 그 땅에서 쫓아내리라"(1) 고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바로의 강퍅한 마음과 애굽사람에게 강한 손으로 역사해 주실 때 이스라엘백성들은 애굽에서 나올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보호를 받을 수 있었습니다.
시편 89:20-21에 "내가 내 종 다윗을 찾아내어 나의 거룩한 기름을 그에게 부었도다, 내 손이 그와 함께 하여 견고하게 하고 내 팔이 그를 힘이 있게 하리로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손이 다윗에게 함께 할 때 다윗이 힘이 있게 된 것처럼 성령으로 기름부음 받은 우리에게도 하나님의 손이 함께 할 때 우리가 힘이 있게 되는 것입니다.
"나 여호와가 의로 너를 불렀은즉 내가 네 손을 잡아 너를 보호하며 너를 세워 백성의 언약과 이방의 빛이 되게 하리니, 네가 눈먼 자들의 눈을 밝히며 갇힌 자를 감옥에서 이끌어 내며 흑암에 앉은 자를 감방에서 나오게 하리라"(사42:6-7) 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의 강한 손은 대적자 바로에게 심판의 손임을 보여 주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지도자 모세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불신자요 하나님의 대적자인 바로에게 그의 능력을 나타내리니 이스라엘 백성이 이것을 볼 수 있도록 하실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여호와의 강한 손은 바로의 모든 불신의 힘을 정복하신 것입니다. 바로의 교만한 마음을 정복하시는 것입니다.
모세를 통해서 하나님은 말씀하신 것입니다. 내 백성을 보내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주의 말씀을 들은 바로는 여호와가 누구냐? 내가 이 나라의 주권자인데 누가 이스라엘 백성을 보낸다는 말이냐? 결코 나는 보낼 수 없다고 대적하고 나선 것입니다.
이때 여호와께서는 그의 능력의 손으로 이스라엘 백성을 보낼 수 밖에 없도록 역사 하시겠다는 것입니다. 여호와 하나님의 강한 손으로 이스라엘을 해방시키시고야 말겠다는 예언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여호와 강한 손을 쓰실 때 바로는 두 손을 들고 항복할 수 밖에 없도록 치신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스라엘 백성들을 그 땅에서 쫓아내듯이 그들을 보낼 것입니다.
여호와의 능력의 손은 애굽나라의 어둠의 세상 권세를 정복하는 손입니다.
인간의 힘으로는 이 바로의 권세를 정복할 수 없는 것입니다. 여호와 하나님의 능력의 손으로만 정복할 수 있는 것입니다. 애굽 사람들은 생각하기를 바로의 권세는 무너지지 않을 것으로 믿어 온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능력의 손앞에는 무너지지 않을 세력이 없는 것임을 보여준 것입니다.
여호와의 능력의 손은 바로의 교만을 꺾으시고야 마는 것입니다. 바로는 얼마나 교만했는지 모릅니다. 자신(自身)이 신(神)이었습니다.
애굽인들은 그렇게 믿었고 따랐으며, 그를 신(神)으로 섬겼습니다. 그러므로 애굽나라에서는 바로의 명을 어기면 살수가 없었습니다. 그러한 바로의 교만을 하나님이 기뻐하실 수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사람의 교만을 싫어하십니다.
(삼상2:3)의 말씀에 "심히 교만한 말을 다시 하지 말 것이며 오만한 말을 너희 입에서 내지 말지어다! 여호와는 지식의 하나님이시라 행동을 달아보시느니라" 고 했습니다.
(시31:23)의 말씀에 "너희 모든 성도들아 여호와를 사랑하라! 여호와께서 성실한 자를 보호하시고 교만히 행하는 자에게 엄중히 갚으시느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잠16:18)의 말씀에 "교만은 패망의 선봉이요 거만한 마음은 넘어짐의 앞잡이니라" 고 했습니다.
(벧전5:5)의 말씀에서는 "젊은자들아 이와 같이 장로들에게 순복하고 다 서로 겸손으로 허리를 동이라 하나님이 교만한 자를 대적하시되 겸손한 자들에게는 은혜를 주시느니라" 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능력의 손은 바로의 불신을 꺾으실 것을 가르쳐 주셨습니다
불신은 믿지 않는 것을 말합니다. 바로는 하나님의 주권을 믿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자신이 주권자로 생각하고 있는 것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생명의 주권자이십니다. 그는 물질의 주권자이십니다. 그는 시간의 주권자이십니다.
2. 고역에서 건져주시겠다고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이스라엘 자손에게 말하기를 나는 여호와라 내가 애굽 사람의 무거운 짐 밑에서 너희를 빼어 내며 그 고역에서 너희를 건지며 편 팔과 큰 재앙으로 너희를 구속하여, 너희로 내 백성을 삼고 나는 너희 하나님이 되리니 나는 애굽 사람의 무거운 짐 밑에서 너희를 빼어낸 너희 하나님 여호와인줄 너희가 알지라"(출6:6-7) 고 했습니다.
고역에 신음하는 주의 백성들을 치료하시는 것입니다. 성도는 여호와 우리 하나님께 위로와 치료를 받아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결심은 그의 능력의 손으로 치료하시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애굽의 모든 고역에서 건져주시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 이유는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을 알고 또 하나님의백성임을 알 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하나님의 강한 손은 모세와 이스라엘 백성들을 치료하시는 손을 보여주십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이 썩어질 세상의 종살이만 한다면 하나님께서 슬퍼하실 일입니다. 사람의 묶여있으면서 하나님을 노엽게 하는 백성으로 세월을 보내고 있다면 불쌍하고 슬픈 일입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해방시키시려고 모세를 그들에게 보냈습니다만 모세가 바로에게 나아가서 하나님의 백성을 해방 시켜달라고 말하자 바로는 더욱 강퍅한 폭군이 되는 것입니다. 모세는 큰 상처를 안고 돌아오고 말았습니다. 여호와의 강한 팔로 절망중에 빠진 이스라엘 민족을 구원하시겠다는 약속을 하신 것입니다.
여호와의 강한 손을 펴신 것은 절망중에 있는 모세와 이스라엘 백성들을 불쌍히 여기시고 치료하시려고 말씀하십니다.
우리가 어떤 가운데 있을지라도 이스라엘 백성들처럼 하나님께 부르짖을 때 하나님께서 우리를 건져주실 줄 믿습니다.
여호와의 강한 손은 바로와 그의 백성들과의 싸움에서 승리하게 하는 손입니다.
하나님의 종 모세 역시 패배의 어두운 그림자에 짖눌러서 절망한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능력의 손은 여호와 닛시로서 주의 백성들을 바로와 애굽의 싸움으로부터 승리하게 하시는 능력의 손입니다.
애굽인의 무거운 짐 밑에서 빼어 내시겠다는 것입니다. 여호와의 강한 손은 주의 백성 이스라엘 민족들을 축복하시는 손입니다. 하나님은 주의 백성들을 그의 강한 손으로 그 백성들을 고역에서 너희를 건지신다는 것입니다.
얼마나 큰 축복입니까? 편 팔과 큰 재앙으로 너희를 구속하겠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너희로 내 백성을 삼고, 나는 너희 하나님이 되리라고 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약속한 땅으로 인도하여 그 땅을 기업으로 너희에게 주신다는 것입니다.
이 얼마나 신령한 축복입니까?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강한 팔은 주의 백성들에게 구원의 손이요 치료의 손이요 승리의 손이요 축복의 손이 되는 것입니다.
여호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애굽 사람들의 무거운 짐 밑에서 빼어 내며 그 고역에서 너희를 건지며, 편 팔과 큰 재앙으로 너희를 구속하여.." 라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께서 다시 확인해 주시는 구원 약속입니다.
이스라엘이 의심할 때마다 몇 번이고 다짐하시는 것입니다. 내가 너희를 빼어낸다. 내가 너희를 건진다. 내가 너희를 구원하여 낸다. 그렇게 말씀하고 계십니다.
내가 너희를 건져낸다. 그렇게 말씀하신 것이 벌써 몇 번쨉니까? 그런데 여전히 의심하고 걱정하고 반발하고 원망하고 있으니 하나님이 얼마나 답답하시겠습니까?. 그럼에도 하나님은 짜증내지 않으시고 다시 말씀하십니다. "내가 너희를 빼내고, 건지고 구속할 것이다." 우리는 하나님을 그만 답답하게 합시다.
정말 하나님을 믿는 그리스도인들이 됩시다. 말로만이 아니고 정말 하나님이 계시는 것과 그 분이 약속을 반드시 이행하심을 믿고 살아갑시다.
샤를르 푸코 라는 분은 "하나님을 믿는 그리스도인들에게 있어서 가장 어려운 일은 하나님을 믿는 것이다" 라고 말했다고 합니다. 지금 몇 번쨉니까? 내가 너희를 구원할 것입니다.
3. 약속하신 땅으로 인도해 주시겠다고 하셨습니다.
"내가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주기로 맹세한 땅으로 너희를 인도하고 그 땅을 너희에게 주어 기업을 삼게 하리라 나는 여호와로라 하셨다 하라"(8) 고 했습니다.
새 땅은 ①하나님이 예비하신 땅입니다. 하나님을 위해서 사는 자가 이 땅을 소유할 수 있습니다.
②젖과 꿀이 흐르는 땅입니다. 다시 말하면 영육간에 풍성한 생활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고향에 있는 아브라함을 부르시면서 가나안 땅을 유업으로 주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하나님의 부르심과 약속은 분명 축복입니다. 그 후 자손을 애굽 이방인의 땅에서 400년 동안 훈련시키고 가나안 땅으로 인도하셨습니다. 그동안 하나님은 기다렸습니다. 무화과 나무가 열리기를 3년 동안 기다린 주인이 열매가 없다고 베어 버릴려고 합니다. "주인이여 금년에는 그대로 두소서."라는 예수님의 말씀은 또 한번 기다리겠다는 하나님의 뜻을 전달하였습니다.
본문을 통해서 작정하신 일을 이루시리라고 하는 하나님의 그 강한 의지를 볼 수가 있습니다.
모세가 하나님을 향하여 두려움으로 호소 할 때, 하나님께서는 모세에게 나타나셔서 다시 말씀해 주시고 약속하셨는데 6장 1절의 말씀을 보니까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이제 내가 바로에게 하는 일을 네가 보리라 강한 손을 더하므로 바로가 그들을 보내리라 강한 손을 더하므로 바로가 그들을 그 땅에서 쫓아 내리라" 말씀 하셨습니다.
이 한 절의 말씀에서 하나님은 그 강한 의지가 세 번이나 표현하셨습니다. "네가 보리라", "바로가 그들을 보내리라", "바로가 그들을 그 땅에서 쫓아 내리라" 하나님께서 반드시 그렇게 만드시겠다는 강한 의지를 보여주신 것입니다. 그러면서 하나님께서는 모세에게 호렙산에서 해 주신 그 말씀을 다시 하셨습니다.
"나는 여호와로라 내가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전능의 하나님으로 나타났으나 나의 이름을 여호와로는 그들에게 알리지 아니하였고 가나안 땅 곧 그들의 우거하는 땅을 주기로 그들과 언약하였더니 이제 애굽 사람이 종을 삼은 이스라엘 자손의 신음을 듣고 나의 언약을 기억하노라" 하나님은 여호와, 언약의 하나님, 신실하신 하나님이시니, 그 언약을 기억하고 반드시 이루시겠다고, 그 이름을 걸고 다짐해 주셨습니다.
이 일을 이루시겠다는 하나님의 그 뜻이 얼마나 강열하고 분명합니까? 하나님께서 작정하시면 누가 막을 수가 있겠습니까?
계3:7에서는 주님을 가리켜서 "열면 닫을 사람이 없고 닫으면 열 사람이 없는" 분이라고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삶 속에 역사하셔서 우리를 구원하셨으니 우리에게 열려진 이 구원의 문을 닫을 자가 없다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께서 우리 삶을 인도하시기고 우리를 통하여 일하시기로 작정하셨다면 아무도 그것을 막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일하시고자 하시는 그 강한 의지가 오늘 우리들을 통해 나타나기를 바랍니다.
천국에 가면 3번 놀란다고 합니다.
첫째, 나하고 대판 싸운 교인도 천국에 왔으니까
둘째, 저런 믿음을 가진 사람도 천국에 왔어? 평소에 엉망진창인 줄 알았던 사람도...
셋째, 가장 쇼크인 것은 바로 나도 천국에 왔다는 거. 얼마나 쇼크를 먹었으면 오른 쪽 어깨를 쳐다보면서(어깨를 들썩이며) "에구 나도 왔네." 왼쪽 어깨를 쳐다보면서 "이게 꿈이냐 생시냐." 라고 한다는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바울사도를 통하여 약속하셨습니다.
로마서 8장을 보십시오. "또 미리 정하신 그들을 또한 부르시고 부르신 그들을 의롭다 하시고 의롭다 하신 그들을 또한 영화롭게 하셨느니라. 그런즉 이 일에 대하여 우리가 무슨 말을 하리요. 만일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시면 누가 우리를 대적하리요."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끓으리요. 환난이나 곤고나 핍박이나 기근이나 적신이나 위험이나 칼이랴" "내가 확신하노니 사망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권세자 들이나 현재 일이나 장래 일이나 능력이나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아무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 그러므로 우리도 담대히 말하십시다. "주는 나를 돕는 자시니 네가 무서워 아니하겠노라. 사람이 내게 어찌 하리요" 그리고, 찬송가에 있는 말씀과 같이 "온 세상 다 버려도 주 예수 안 버려" 주님께서는 우리를 버리지 아니합니다. "태산을 넘어 험곡에 가도 빛 가운데로 걸어가면 주께서 아니 버리시기로 약속한 말씀 변치 않네" ...라고 말입니다. 그렇습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어려운 일이 있을 때에는 이스라엘 백성들처럼 하나님께 부르짖어 하나님의 약속을 받아 승리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제 목 : 바람직한 교회(2)
성 경 : 6: 1-8
미국 보스턴 해변 어느 한 곳에는 한 노인이 싱싱한 새우가 가득 담긴 통을 들고 날마다 같은 시간이면 어김없이 나타나서 갈매기들에게 나누어주는 광경을 볼 수 있다고 합니다. 갈매기들도 그 시간이면 그의 발 앞에 모여들었고, 어떤 갈매기들은 친해져서 노인의 어깨 위에 앉기도 합니다. 갈매기들에게 새우를 나누어주는 동안 노인의 얼굴에는 환한 웃음이 떠나지 않았습니다. 갈매기들은 노인이 나누어주는 고급 요리를 마음껏 즐깁니다. 사람들은 매일 매일 일어나는 이 광경에 흥미와 궁금함을 가지고 바라보고 있었는데 비싼 새우를 아무 쓸데없는 새들에게 낭비한다고 비난하는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 노인이 이런 일을 하는 이유를 알고 나서부터 사람들의 비난은 사라졌고 반응은 달라졌습니다.
그 노인은 2차 세계대전 당시 미 해군 장군이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장군의 배가 독일군의 어뢰에 격침되어 부하 몇 명과 함께 간신히 구명정에 올라탈 수 있었습니다. 그들은 수일간 뜨거운 태양과 거센 파도와 싸우며 목숨을 이어갔지만 이것도 잠시뿐 비상식량까지 바닥이 났기 때문에 함께 탔던 부하들이 한 사람 한 사람씩 죽어가기 시작했습니다. 장군도 기력이 점점 떨어지기 시작하더니 마침내 정신이 희미해져서 쓰러지고 말았습니다. 죽음이 눈앞에 다가온 바로 그 때에 쓰러져 있던 장군 눈에 작고 흰 물체 하나가 안경을 통해서 보였습니다. 바로 갈매기였습니다. 갈매기는 움직이지 않았습니다. 장군은 떨리는 손으로 조심조심 갈매기를 잡았습니다. 아니 갈매기가 잡혀 주었습니다. 그 갈매기는 장군으로 하여금 몇 시간 더 수면을 취하게 해주었고, 연장된 몇 시간 동안 장군은 섬을 발견하고 구조되었습니다.
이제 사람들은 갈매기에게 그 값비싼 새우를 대접하는 장군을 더 이상 비난하지 않습니다. 새우 한 조각 한 조각마다 죽음의 고난 가운데 함께 하신 하나님께 대한 감사가 있다는 것을 사람들은 잘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이집트에서 많은 고난 중에 있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아시면서도 그들을 위하여 적극적으로 개입하시지 않으셨고 하나님의 시각에 맞추셨습니다. 그리고 어떤 영문인지 모세가 하나님의 백성들을 위하여 일하면서부터 그들의 고난은 더해지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이스라엘 사람들은 모세와 아론을 향하여 너희가 우리로 바로의 눈과 그 신하의 눈에 미운 물건이 되게 하고 그들의 손에 칼을 주어 우리를 죽이게 하는도다(출5:21) 하고 불평하면서 비난하였고 모세도 견디지 못하여 하나님 앞에 주여 어찌하여 이 백성들로 학대를 당케 하셨나이까? 어찌하여 나를 보내셨나이까? 내가 바로에게 와서 주의 이름으로 말함으로부터 그가 이 백성을 더 학대하며 주께서도 주의 백성들 구원치 아니하시나이다(출5:22-23) 하고 하소연하였습니다.
이들의 불평을 들으신 하나님께서는 어떤 조치를 취하시는 것이 아니라 반드시 바로가 하나님의 백성들을 내어 보내 줄 것이니 다시 들어가라고 말씀하십니다(1-8절). 이스라엘 백성들의 고통을 어떻게 해소해줄 것인가에 대해서 말씀하시지 않고 결과가 이렇게 날 것이니 그 결과만 보라는 것입니다.
모세가 하나님의 이 말씀에 어쩔 수 없이 다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말하지만 이스라엘 백성들은 들을 리가 없습니다 (9절). 하나님께서 돌보아 주신다고 하셨기에 그렇게 믿었는데 오히려 그들의 고난이 더하였으니 그들은 마음이 상해있었던 것입니다. 모세도 그들과 같은 마음이었으므로 하나님께 그 일을 할 수 없다고 말하였습니다.
여러분, 얼마든지 하실 수 있으신 하나님께서 왜 이렇게 하나님의 백성들의 간절한 기대를 저버리시는 것일까요? 이 부분을 볼 필요가 있습니다.
여러분은 이미 하나님께서 바로가 그들을 그 땅에서 쫓아낼 것이라는 결론을 보았습니다(1절). 그리고 모세에게 그 땅으로 들어가라고 말씀하셨으므로 시작도 하셨습니다. 이제 남은 것은 과정밖에 없습니다. 이 과정 중에 하나님께서 무엇인가 필요하신 것이 있으므로 이렇게 일하시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손을 보는 믿음
그리스도인들은 전능하신 하나님의 손을 보는 믿음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인생을 살아오면서 절망 중에 빠져 보신 일은 없으십니까? 인생들의 삶 속에는 대적하는 사람들 때문에 절망에 빠질 수 도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심한 미움을 받으면서 절망 중에 빠질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사업의 실패 때문에 절망에 빠지기도 합니다. 때로는 사람이 영육의 질병으로 인하여 절망에 빠지기도 합니다. 이성의 문제 때문에 절망에 빠지기도 합니다.
주님은 절대 택한 백성을 결코 홀로 두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말씀과 성령에 절대 순종하는 자가 가나안의 입국자가 될 것입니다. 출애굽기 15:26에 보면 "너희가 너희 하나님 나 여호와의 말을 청종하고, 나의 보기에 의를 행하며, 내 계명에 귀를 기울이며, 내 모든 규례를 지키면 내가 애굽 사람에게 내린 모든 질병의 하나도 너희에게 내리지 아니하리니, 나는 너희를 치료하는 여호와임이니라."고 말씀했습니다. 우리는 마음의 치료를 받고, 영의 치료를 받고, 육신의 치료를 받아야 됩니다.
신명기 28:1에도 보면 "네가 네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을 삼가 듣고 내가 오늘날 네게 명하는 그 모든 명령을 지켜 행하면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를 세계 모든 민족 위에 뛰어나게 하실 것이라."고 말씀했습니다. 우리가 이 세상을 사는 동안에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살면 염려할 것이 없습니다. 우리를 지으신 하나님이 우리를 책임져 주시기 때문입니다.
영국의 유명한 죠지 뮬러는 '신앙이 시작되는 곳에는 염려가 끝이 나고, 염려가 시작되는 곳에는 신앙이 끝이 난다.'고 말했습니다. 오늘 여러분은 지금 신앙과 염려 둘 중에서 무엇에 사로잡혀 있습니까? 예수를 믿으면서 염려에 사로잡혀 있다면 여러분 신앙이 지금 염려 속에 갇혀 있는지도 모릅니다. 만일 여러분들이 믿음에 사로잡혀 있다면 염려는 그 안에 포로가 될 것입니다.
이 세상에서 큰 위력을 발휘하는 천둥과 번개, 벼락보다 더 강한 것은 피뢰침입니다. 그 어떤 번개도 피뢰침이 다 흡수해버리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이 땅에 어떤 어려움이 있다 할지라도 지붕 위에 세우는 피뢰침은 그 불같은 폭탄과 같은 벼락이 떨어져도 그 피뢰침이 다 소화시킵니다. 우리가 볼 때는 조그마한 쇠덩어리 하나 같은데도 거기에는 그 벼락을 소화시킬 수 있는 그런 위대한 힘을 가지고 있습니다.
우리 신앙인들은 인간이 상상할 수 없는 그 어떤 것도 무산시킬 수 있는 능력이 나타내는 것입니다. 우리가 말씀과 성령에 순종할 때에 하나님이 우리에게 이 능력을 주실 것입니다.
오늘의 본문 말씀은 이스라엘의 지도자 모세가 절망 가운데 놓인 사실을 보여줍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동족들을 바로에게서 해방시키라는 소명을 받아 가지고 바로에게 나아갔던 것입니다. 하지만 바로를 대적하여 싸워야 할 모세의 느낌은 마치 계란으로 바위치기와 같은 절망감을 느끼게 된 것입니다. 출5:22-23의 말씀 중에 "모세가 여호와께 돌아와서 고하되 `주여, 어찌하여 이 백성으로 학대를 당케 하셨나이까? 어찌하여 나를 보내셨나이까? 내가 바로에게 와서 주의 이름으로 말함으로부터 그가 이 백성을 더 학대하며 주께서도 주의 백성을 구원치 아니하시나이다' "
이런 절망에 빠진 모세에게 여호와 하나님은 바로에게 강한 손을 펴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하나님의 강한 손은 대적자 바로와 그의 백성들에게 무섭고 두려운 심판자의 손으로 나타나신 것이요 모세와 이스라엘 백성에게는 구원자의 손으로 나타내신 것입니다.
제비의 고민
어떤 사람이 산에 가서 새알을 3개 주어왔습니다. 때마침 제비가 처마에 집을 짓고 알을 품고 있었습니다. 제비가 자리를 비운 사이 그 새알을 제비 둥지에 넣었습니다. 어느 날 보니까 새알이 먼저 부화되어 새끼 새가 나왔습니다. 어미 새가 품고있던 알이었던 모양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그 날부터 제비는 알을 품지 않고 벌레를 잡아다가 새끼 새를 먹이는 것입니다. 더욱더 놀라운 것은 어느 날 제비가 알을 둥지에서 밖으로 밀어내어 떨어뜨렸습니다. 그리고 부지런히 먹이를 물어다가 새 새끼를 먹여줍니다. 아마 제비는 그 새 새끼가 제 새끼인줄 아는 모양입니다. 새 새끼가 점점 자라납니다. 어떻게 될 것인가를 생각하며 관찰하며 마냥 신나고 재미있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순간에 가서 제비가 먹이를 물고 와 서로 달라고 입을 벌려 짹짹거리는 새에게 먹이를 주지 않고 고개를 갸우뚱갸우뚱하다가 먹여주고 가곤 합니다. 갈수록 그러한 현상이 뚜렷하게 나타납니다. 새가 날갯짓을 할 무렵 어미 제비는 돌아오지 아니했습니다. 그 이듬해도 제비는 돌아오지 아니했습니다.
그 제비가 무엇 때문에 고개를 갸우뚱거렸을까요? 그 제비의 고민의 소리를 들을 수 있습니다. "아, 이상하다 이것이 아닌데, 이건 분명 내 모습이 아니야, 무엇이 잘못되었어. 다시 시작해야돼. 더 늦기 전에 다시 시작해야 해. 아니야 결단해야해." 하며 고민했던 것이 분명합니다.
교회에 대해서 관심을 가지고 기도하고 생각하는 사람들이면 대부분 공통적으로 가지는 고민과 느낌이 있다면 이와 같은 제비의 고민이 아닐까요? 아무리 보아도 오늘날의 교회의 모습이 성경에 나타난 교회의 모습과 너무나 다른 것이 아닐까요?
성경에 나타난 교회의 참 모습, 바람직한 모습을 찾아 그 모습을 배우고 닮아 가는 교회가 되고자 합니다. 오늘날 교회의 개혁을 부르짖고, 교회의 변화를 부르짖고 있습니다만 참된 교회개혁이 무엇이고, 올바른 교회의 변화가 무엇입니까? 교회의 개혁과 변화는 성경으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요시아의 개혁도, 루터의 개혁도, 성경으로 돌아가자는 것이었습니다.
혁명과 개혁은 다릅니다. 혁명은 다른 사람을 쳐서 고치는 것이고, 개혁은 자기를 쳐서 고치는 것입니다. 종교개혁이니 교회개혁이니 하는 것은 자신을 쳐서 하나님의 뜻에 복종시켜 성경의 뜻을 따르는 것입니다. 변화와 변질은 다릅니다. 성경중심으로 변하는 것은 변화요 성화입니다. 그러나 성경을 떠난 변화는 변질이요 타락입니다. 따라서 교회의 참된 개혁과 변화는 성령의 교회모습을 찾고 그 모습을 회복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성경에 나타난 교회의 참된 모습, 바람직한 모습이 무엇일까요?
출애굽교회의 모습
우리가 교회의 모델로 사도행전교회를 생각하게 되고 또한 사도행전에서만 교회의 모델과 모습을 찾으려고 하는 실수를 할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교회의 참된 모델과 모습은 신구약성경에 광범위 숨겨져 있습니다.
오늘 본문말씀은 출애굽교회의 참 모습, 바람직한 모습을 나타내주는 말씀이기도 합니다.
출애굽교회는 억압에서 탈출하는 교회입니다.
애굽의 정치적 억압에서 해방되어 탈출하여 자유한 상태에서 약속의 땅으로 향하여 행진하는 것이 출애굽교회의 모습입니다. 오늘 본문에 보면 여호와 하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나는 애굽사람의 무거운 짐 밑에서 너희를 빼어낸 너희 하나님 여호와인줄을 너희가 알지니라(출6:7)" 고 합니다. 여기서 애굽사람의 무거운 짐이란 애굽의 정치적 억압을 의미합니다. 교회의 참 모습은 억압에서 해방된 모습입니다.
교회가 자유해야 한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율법주의에서의 자유입니다. 율법주의란 공리주의입니다. 인간의 노력과 고행으로 구원을 얻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루터가 로마에 있는 스칼라쌍타에 가서 결단을 무릎으로 기어오르면서 기도를 합니다. "스칼라쌍타란" 거룩한 계단이라는 뜻인데 그 계단이 아주 가파릅니다. 기도하며 무릎으로 기어올라갔다 내려올 때도 기도하며 무릎으로 뒷걸음질치며 내려옵니다.
그러한 고행을 통해 인간은 거룩해지고 거룩해져야 구원을 얻는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에게는 항상 갈등이 있었습니다. 이것이 과연 구원의 방법인가? 루터는 이러한 고민 중에 고행기도를 하다가 문득 롬1:17이 생각났습니다.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그 즉시 일어나 계단을 내려왔습니다. 구원은 나의 노력이나 율법을 지키므로 구원 얻는 것이 아니라 오직 믿음으로 구원을 얻는다고 외쳤습니다.
에베소서 2:8-9의 말씀과 같이 오직 은혜로, 오직 믿음으로 구원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아직까지도 교회들이 율법으로 얽어매고 공리주의 사상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율법과 공리주의에서 벗어나 믿음과 은혜의 진리 안에서 자유하는 것이 교회의 참 모습입니다.
이방문화에서의 탈출하는 교회입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백성을 애굽에서 탈출시킨 것은 이스라엘 백성을 애굽의 문화에서 탈출시키기 위한 것입니다. 애굽의 우상문화와 미신문화에서 탈출시키기 위한 것이며, 애굽의 인본주의문화와 이방사상과 가치관에서 탈출시키기 위한 것입니다. 참된 교회의 모습은 이방문화 속에 살면서도 그 문화에 침식당하지 않고 그 문화에 물들지 않고 구별되게 살아가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을 갈대아 우르에서 불러내어 그곳을 떠나게 하신 하나님의 뜻이 무엇입니까? 갈대아 우르의 인본주의 이방문화에서 탈출하여 새로운 신본주의 문화를 형성하여 살게 하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오늘날에는 교회와 사회가 다른 것이 무엇인가를 생각합니다. 행복의 가치판단이나, 성공의 기준이 교회에서 말하는 것이나 사회에서 말하는 것이 꼭 같다는 말입니다. 가치판단 삶의 질과 기준이 무엇이 다릅니까? 돈으로 모든 것을 할 수 있다고 하는 황금 만능주의적 세속적 문화가 교회에 침투하여 교회의 참 모습을 퇴색시키고 있습니다. 그리하여 어떤 이들은 교회생활은 열심이면서도 자기가 교회에 도움이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왜 그러느냐고 물으면 헌금 못해서 그렇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황금만능주의 사상입니다. 교회에서 헌금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다른 면으로 봉사하는 것도 가치 있고 중요한 것입니다. 여기서 교회는 탈출해야 합니다. 무조건 권력을 추앙하고 추구하는 잘못된 사상이 교회의 감투싸움을 가져오게 했습니다. 오죽하면 제비 뽑아 총 회장을 세우자고 하겠습니까?
무조건 돈 많이 벌어 큰 집 짓고 큰 차 타고 다니면서 호화롭게 살면 성공했다는 지극히 세속적이요 이방적인 정신적 문화가 교회에 들어와 큰 교회 짓고 많이 모이고 예산 많으면 성공한 교회요 성공한 목사라고 판단하는 교회풍토와 문화를 만들었습니다.
대학 나오고 공부 많이 해서 박사가 돼야 성공한 사람이고 위대한 사람이라고 하는 잘못된 평가기준의 문화가 교회를 스며들어와 비판의 대상이 되기도 했습니다. 아직도 세상의 미신문화와 무당문화가 교회에 자리잡고 있어 예수 무당, 예수 점쟁이라는 신종 어가 나오기까지 했습니다.
값진 은혜
값싼 은혜는 교회의 치명적인 적입니다. 오늘날 우리는 값진 은혜를 얻기 위해 싸우고 있습니다. 값싼 은혜는 회개 없이 죄의 사유가 가능하다는 설교이며, 교회의 규율을 무시한 세례요, 죄의 고백 없이 베푸는 성만찬이요, 개인적인 죄의 고백 없는 면죄의 확인입니다. 순종 없는 은혜, 십자가 없는 은혜, 살아계신 예수 그리스도 없는 은혜입니다.
값진 은혜는 밭에 감추인 보물입니다. 이 보물을 얻으려는 사람은 자신이 가진 모든 것으로 기쁘게 땅을 삽니다. 장사꾼이 전 재산을 내어줄 수 있는 귀한 진주, 이것이 값진 은혜입니다. 값진 은혜는 왕이신 그리스도의 다스림입니다. 이를 위해 만일 자신의 눈이 자신을 실족하게 하면 눈을 뽑을 것입니다. 값진 은혜는 제자들이 그물을 버리고 즉석에서 따라간 예수 그리스도의 부르심입니다.
그리스도인은 자신을 포기하고, 자신을 드러내지 않고, 자신의 삶을 세상의 삶과 구별해야 합니다. 또한 은혜를 은혜답게 유지하여 값없이 받은 은혜의 선물을 세상에서 쏟아버리지 않도록 주의해야 합니다. 제자의 길과 십자가 / 디트리히 본회퍼
우리가 신앙생활을 하면서 경계해야 할 세 가지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첫째는 성경을 지식화 하는 바리새인이 되지 말아야 합니다. 두 번째는 신앙이 미신화에 빠지지 아니해야 합니다. 셋째는 믿음이 율법주의나 공리주의에 빠지지 않도록 해야 합니다.
근래에 교회개혁이니 갱신이니 하며 교회 변화를 주장하는 자들이 세상의 쾌락주의 문화까지 무분별하게 교회에 끌어들여 자기도취와 만족에 빠져 생명 없는 죽음의 예배를 드리는 것을 보게 됩니다. 이것은 교회의 참 모습이 아닙니다. 우리는 이러한 이방문화에서 과감하게 탈출하여 보다 차원 높은 문화를 창출해야 합니다. 출애굽교회 참모습은 애굽의 이방문화를 탈출하는 탈출문화입니다. 인본주의 문화를 탈출하는 것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세상사람의 생각을 초월해야 합니다. 믿지 않는 사람의 인생관, 가치관, 생활관을 초월하여야 합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마음과 생각과 인생관과 가치관과 생활관을 가져야 합니다. 눈에 보이고 귀에 들리고 손에 잡히는 것만 기뻐하고 그것만 추구하는 세속문화에서 우리는 탈출해하여야 합니다. 참된 그리스도인은 만져지지 않고 보이지도 않고 들리지도 않는 영적 세계를 추구하며 그 안에서 기쁨과 보람을 찾는 것입니다. 이것이 세속문화를 탈출하는 출애굽교회의 참 모습입니다.
우리나라 기독교인은 전체 인구중의 25%라고 합니다. 그런데 형무소에 복역하고 있는 자들을 조사해보니 그 중에 기독교인이 25%로 나타났다는 것입니다. 이는 예수 믿는 자와 믿지 아니한 자의 다른 점이 없었음을 보여주는 증거입니다. 왜 이러한 현상이 나타납니까? 기독교인들이 세속문화를 탈출하지 못하고 그들의 가치관, 그들의 사상, 그들의 생활관을 그대로 답습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출애굽교회의 참된 모습은 정치적 억압에서 탈출하고 당시 애굽의 우상과 미신문화에서 탈출하는 것이었습니다. 오늘날 우리 교회도 탈출하는 교회가 되어야 합니다. 율법과 공리주의에서 해방되어 오직 은혜, 오직 믿음 안에 거하고 세속적인 문화 즉 눈에 보이고 귀에 들리고 손에 잡히는 것만을 추구하는 자들의 가치관과 인생관과 생활관에서 탈출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인생관과 가치관과 생활관을 가지고 살아야 합니다.
잘못된 의식과 제도에서 풀려나야 합니다.
우리는 지나친 형식과 의식과 제도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카톨릭교회에서는 성만찬을 거행할 때 화체설을 주장합니다. 떡과 포도주를 놓고 기도하면 그것이 예수님의 살과 피로 변한다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그들은 성찬식을 하고 남은 것을 버리지 못하고 창고에 쌓아두었습니다. 쥐가 창고에 들어가 떡을 먹었습니다. 쥐가 떡을 먹었으니 구원 얻었느냐 못 얻었느냐 논쟁을 했고, 세례 줄 물에 파리가 빠져 죽었는데 파리가 성화 되었느냐 아니냐를 놓고 장시간을 싸웠습니다.
중세기 카톨릭교회는 자기들이 만들어 놓은 제도와 의식에 꽁꽁 매여 그것에 시간을 허비하고 세월을 보내다가 교회는 부패하여 몰락하게 된 것입니다. 교회학자들에 의하면 지금 북미와 남미의 문화적 차이는 남미는 성경을 가지고가 의식화하였고, 북미는 성경을 가지고 그 말씀으로 삶의 지표를 삼아 생활화했다는 것입니다.
성경을 우리에게 주신 것은 그 의식과 제도에 얽어매기 위한 것이 아니고 생활화하기 위한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의 출애굽사건은 이방인들의 잘못된 의식과 제도에서 벗어나 삶의 중심으로서의 변화를 의미합니다. 의식중심의 신앙의 제도에서 벗어나 삶의 중심의 신앙으로 전환해야 합니다. 교회의 참 모습은 생활하는 믿음입니다. 거룩하고 장엄한 예배는 있는데 생활하는 신앙의 모습이 없다면 이는 교회의 참된 모습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교회의 참 모습은 율법주의적 억압에서 벗어나 오직 믿음과 은혜 안에 살기 위하여 이방문화에서 탈출하여 진리 안에서 참 자유를 누리는 것입니다. 우리 교회가 이러한 출애굽교회의 참 모습, 바람직한 교회의 모습을 회복하는 축복이 있기를 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