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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마경훈목사의 설교 카페 원문보기 글쓴이: 마경훈목사
그리스도인이 가지고 있는 세 가지 다림줄/ 아모스 7:7-9
(설교자: 마경훈목사, 비전교회)
https://www.youtube.com/watch?v=Lkz0X3FQoLo
아모스는 선지자는 독특한 선지자입니다. 아모스는 남왕국 출신으로 BC 8세기경에 북왕국에서 활동한 선지자입니다. 아모스라는 이름의 뜻은 “무거운 짐을 지고 나르는 자”입니다. 어떤 목사님은 그의 이름의 뜻에서 아모스가 당시의 무거운 짐을 온몸으로 짊어지고 예언을 했다고 풀이를 하셨는데, 저는 그의 이름의 뜻에서 그 당시 이스라엘을 바라보시는 하나님의 마음을 전달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사 1:14입니다. “내 마음이 너희의 월삭과 정한 절기를 싫어하나니 그것이 내게 무거운 짐이라 내가 지기에 곤비하였느니라” 이사야 선지자 당시에 유대인들의 신앙이 형식화 되어버렸습니다. 그들의 입은 하나님께 가까웠으나 마음은 하나님을 떠났습니다. 그런 유대인들의 월삭과 절기가 하나님에게는 무거운 짐이라고 하셨습니다. 마찬가지로 아모스 시대에 하나님께는 죄악에 깊이 빠진 이스라엘 백성들이 무거운 짐이셨을 것입니다.
아모스는 예루살렘에서 남쪽으로 10Km 정도 떨어진 드고아 라는 지역의 출신입니다. 그는 양을 치며 뽕나무를 기르는 농부였습니다. 평범하게 농사를 짓던 그가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아서 북왕국 이스라엘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했습니다. 당시 북왕국 이스라엘은 여로보암 2세라는 왕이 다스렸습니다. 이 때 이스라엘은 제2의 솔로몬 시대라고 할만큼 국가적으로 번성하고 평화를 누렸습니다. 그런데 영적으로는 가장 피폐하고 타락했습니다. 마치 이 시대 대한민국 같습니다. 지금 대한민국은 5천 년 역사상 가장 부요한 시대입니다. 세계 10대 강국입니다. 무역은 세계 7위이며, 군사력은 세계 6위입니다. 2021년 1인당 국민총소득은 3만5168달러였습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국민들은 하나님을 섬기지 않습니다. 교회는 세속화되었고, 교인들의 예배는 무너지고, 온갖 불의와 부정이 판을 치는 나라가 되었습니다.
하나님은 아모스 당시의 북왕국 이스라엘을 멸망시키시기로 결정하셨습니다. 그것을 알 수 있는 것이 아모스가 본 5대 환상입니다. 하나님은 아모스에게 패역한 이스라엘의 멸망을 보여주는 환상을 보여주셨습니다. 메뚜기 환상, 불 환상, 다림줄 환상, 여름 과일 광주리 환상, 그리고 성전 문지방이 부서지는 환상입니다. 모두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심판하시고자 하는 환상입니다. 본문은 아모스가 본 세 번째 환상으로 다림줄 환상입니다.
다림줄은 건축에서 벽돌을 쌓을 때 목수가 쓰는 측량기구입니다. 다림줄을 통해서 담이나 기둥이 수직으로 잘 세워졌는가를 측정합니다. 다림줄의 정확성은 건물의 안정성을 의미합니다. 다림줄의 측량을 무시하면 그 건물은 무너집니다.
이 환상에서 하나님은 다림줄을 가지시고 쌓아놓은 담 곁에 서계셨습니다. 여기서 쌓은 담은 이스라엘의 영적인 상태를 말합니다. 하나님께서 다림줄로 이스라엘을 측량해 보시니 그들의 상태가 너무나 패역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다시는 용서하지 않으시겠다고 하셨습니다. 9절을 보면 그들의 죄악이 나옵니다. 이삭의 산당과 이스라엘의 성소는 동의어로 사용했습니다. 70인역(LXX)은 ‘이삭’의 이름이 ‘웃음’이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는 것에 초점을 맞추어 ‘웃음의 산당’이라고 번역했습니다. ‘웃음거리가 된 산당’이란 뜻을 강조하기 위해서 이런 표현을 의도적으로 사용한 것 같습니다. 무슨 의미냐면 여호와만을 섬겨야 하는 경건한 장소에서 이방의 우상을 섬기는 일로 이방에서 웃음거리가 되어버린 이스라엘의 모습을 비난하는 것입니다.
당시 이스라엘은 우상숭배에 깊이 빠져서 하나님의 다림줄로 재어보니 기울어진 담이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칼로 여로보암의 집을 치시겠다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말씀대로 하나님은 B.C 721년에 앗수르를 통해서 이스라엘을 멸망시키셨습니다.
하나님은 언제나 다림줄을 잡고 서계십니다. 우리는 담과 같은 존재들입니다. 우리는 신앙의 담을 쌓고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에게도 하나님의 다림줄이 필요합니다. 우리가 아무리 열심히 벽돌을 쌓아도 하나님의 다림줄이 없으면 신앙의 담을 수직으로 세울 수 없고 결국 어느 순간 벽이 무너지듯이 우리의 신앙도 우르르 무너질 것입니다.
저와 여러분은 하나님의 다림줄로 재어봤을 때에 기울어지지 않은 건강한 신앙이 되기를 바랍니다. 그렇다면 우리의 신앙의 기준을 잡아주는 하나님의 다림줄은 무엇일까요? 오늘 설교는 그리스도인이 가지고 있는 세 가지 다림줄을 다루겠습니다.
1. 양심의 다림줄
한 대학교가 건물을 짓는데 10억 원 정도가 부족했습니다. 그 대학 총장님이 재정 때문에 고민하고 있는데 정부고위관리로부터 한 가지 제안이 들어왔습니다. 2장의 서류에 총장님이 사인만 하면 정부고위관리에게는 약 30억 정도의 돈이 생기고, 총장님에게는 건축에 필요한 10억의 돈을 후원하겠다는 제안이었습니다. 그 제안을 받고 총장님이 서류를 자세히 검토해보니 사실이 아닌 것을 사실인 것처럼 꾸민 위조서류였습니다. 총장님은 고민에 빠졌습니다. ‘눈을 감고 사인을 두 번만 하면 학교 건물을 완성할 수 있는 돈이 생기는데…’ 고민하던 총장님은 결국 정부고위관리의 청을 거절했습니다. 총장님은 양심을 따라 행동했습니다. 총장님은 하나님이 주신 양심의 다림줄로 자신을 바로 세운 것입니다.
[영에 속한 사람]이라는 책에 보면 사람의 영은 세 가지 주요 기능을 가지고 있습니다. 편의상 순서는 바꾸어서 설명하겠습니다.
①영교입니다. 영교는 하나님을 예배하는 것입니다. 혼의 기관은 하나님을 예배하는 데 무력합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생각이나 느낌이나 의도에 의해 이해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오직 영으로만 직접적으로 알 수 있는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예배하는 것이나, 하나님이 우리와 교통하시는 것은 영 안에서만 있을 수 있는 일입니다.
②직관입니다. 직관은 인간의 영에 속한 감각 기관입니다. 이것은 육체적 감각이나 혼적 감각과는 전적으로 다릅니다. 직관은 외부의 영향과 무관하게 직접적으로 감지하는 것입니다. 지성이나 감정이나 의지의 도움이 없이 직관적으로 오는 것입니다. 우리는 직관을 통하여 확실히 압니다.
③양심입니다. 양심은 옳고 그른 것을 구분하는 분별기관입니다. 양심은 마음에 쌓아놓은 지식의 힘으로 되는 것이 아니고 즉각적이고 직접적인 판단에 의한 것입니다. 양심은 외부의 의견에 굽히는 법이 없습니다. 만일 사람이 그릇 행하면 양심은 비난의 음성을 발할 것입니다.
양심은 하나님께서 우리 안에 주신 다림줄입니다. 시 16:7입니다. “나를 훈계하신 여호와를 송축할지라 밤마다 내 양심이 나를 교훈하도다” 이 말씀에 보면 다윗은 양심이라는 다림줄로 날마다 자신을 재정비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양심이라는 다림줄로 다윗을 훈계하셨고, 다윗은 밤마다 양심의 교훈을 받았습니다. 행 23:1입니다. “바울이 공회를 주목하여 이르되 여러분 형제들아 오늘까지 나는 범사에 양심을 따라 하나님을 섬겼노라 하거늘” 바울은 범사에 양심을 따라 하나님을 섬겼습니다.
양심은 하나님이 주신 다림줄이지만 완전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양심은 변질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성경에는 선한 양심, 착한 양심, 청결한 양심이라는 표현도 사용하지만 화인 맞은 양심, 상한 양심, 약한 양심이라는 표현도 사용하고 있습니다.
양심은 변질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사람의 양심은 온전하지 못한 것입니다. 엔도슈사꾸의 단편 「독약」에 보면 2차 세계대전 당시 생체실험을 하던 로데라는 의사가 주인공으로 나옵니다. 그는 살아있는 사람의 간을 자르고 폐를 잘랐을 때 어떤 현상이 일어나는가를 관찰했습니다. 처음에는 그의 양심의 고통 때문에 견디기 힘들었습니다. 그런데 이것이 반복되고 100번이 되면서 양심의 고통이 사라졌습니다. 그의 양심은 반복적인 악으로 무뎌졌습니다.
사람의 양심은 그리스도 안에서 회복 됩니다. 히 9:14입니다. “하물며 영원하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흠 없는 자기를 하나님께 드린 그리스도의 피가 어찌 너희 양심을 죽은 행실에서 깨끗하게 하고 살아 계신 하나님을 섬기게 하지 못하겠느냐”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면 죽은 양심이 살아나고 더러워진 양심이 깨끗해집니다.
거듭난 그리스도인에게는 완벽하지는 않지만 양심이 다림줄입니다. 모든 사람들이 양심을 따라 살기만 해도 이 세상은 많이 공의로워질 것입니다.
박대선 목사님이 연세대학교 총장으로 재직하실 때, 그분의 아들이 합격 점수에 약간 미달되어 연세대학에 낙방하였습니다. 그때 교수회에서 점수 차이가 큰 것이 아니고 총장의 아들이니 입학시키자는 의견의 일치를 보고 총장께 보고를 드렸습니다. 그랬더니 박대선목사님은 두말없이 총장 사직서를 제출했습니다. 그리고 하시는 말씀이 “내 아들을 떨어진 대로 놔두든지 내 사직서를 받든지 둘 중의 하나를 택하시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결국 총장님의 아들은 연세대학교에 입학을 하지 못하고 경희대학교에 입학하였습니다. 그래서 그 아들은 연세대학교 캠퍼스 안에 총장 공관에서 살면서 경희대학교를 졸업하였습니다. 박대선 총장님은 지극히 선한 양심을 따라 살았던 것입니다.
저는 양심은 하나님의 신호등이라고 표현합니다. 저와 여러분은 무슨 일을 하든지 양심의 신호등을 보고 행동해야 합니다. 양심의 신호등에 빨간불이 들어오면 멈춰야 합니다. 양심의 파란불이 들어오면 행동하십시오. 저와 여러분은 사도 바울처럼 범사를 양심을 따라 행하기를 축복합니다.
2. 하나님의 음성의 다림줄
두 번째 다림줄은 하나님의 음성입니다. 여기서 하나님의 음성이란 하나님이 자신의 뜻을 우리에게 가르쳐주시는 모든 방법을 말합니다. 하나님은 성경을 통해서 우리에게 구원에 필요한 모든 것을 완전하게 계시해주셨지만 여전히 우리에게 음성을 들려주시며 우리를 인도하십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하나님의 음성을 들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법’의 저자 찰스 스탠리(Charles Stanley) 목사님의 간증입니다. 목사님은 교회에서 땅을 사기 위해서 땅 주인을 만나 계약하려고 했습니다. 땅 주인이 말했습니다. “이 땅을 구입하는데 얼마나 예산하십니까?” 그 때 성령께서 “대답하지 말라”고 목사님에게 이르셨습니다. 그래서 목사님은 침묵했습니다. 주인은 계속 말하였지만 한마디도 하지 않았습니다. 결국 땅주인이 값을 내렸고, 가격이 적당하기에 목사님이 동의하였습니다. 성령님은 우리의 영적 생활을 도우시는 것만 아니라 우리의 생활 전반에 걸쳐서 우리를 도우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의 도움을 받아야 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도움을 받으려면 우리가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줄 알아야 합니다.
그리스도인들 중에는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것을 부정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제가 볼 때는 고정관념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성경을 통해서 말씀하셨으니 더 이상 말씀하지 않는다는 주장입니다. 우리가 상식적으로 생각해도 이런 주장은 맞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살아계시고 지금도 우리 가운데 역사하시기 때문입니다.
비유를 들어보겠습니다. 방학을 맞이한 아들에게 아빠가 방학생활을 어떻게 해야 할지를 큰 종이에 빼곡히 기록하였습니다. 그 내용에는 아빠의 모든 뜻이 다 담겨있습니다. 아빠는 아들에게 읽게 하고는 그 종이를 책상 앞에 붙여두었습니다. 자! 이렇게 하면 아빠는 방학 내내 아들에게 아무 말도 하지 않을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아들이 종이에 적힌 내용대로 행동하면 아빠는 잘했다고 칭찬해줄 것입니다. 아들이 종이에 적힌 내용을 어기면 아빠는 그렇게 하지 말고 종이에 적힌 대로 행동하라고 할 것입니다. 큰 종이에 아빠의 뜻을 다 기록했어도 아빠는 아들에게 필요한 때마다 말할 것입니다. 하나님도 마찬가지입니다. 성경을 통해서 우리를 항한 하나님의 뜻을 완전하게 계시하셨지만 여전히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분입니다.
아주 귀가 어두운 한 영감님이 산에 나무를 하러 갔다가 꿩알을 주웠습니다. 나무도 하고 꿩알도 주운 영감님은 너무 기분이 좋았습니다. 돌아오는 길에 마을 청년을 만났습니다. 할아버지를 보고 청년이 묻습니다. “할아버지, 나무해 가지고 오세요?”, “꿩알이다.”, “할아버지, 나무해 가지고 오시느냐구요?”, “열 두 개다.”, “아니, 할아버지. 나무해 가지고 오시느냐구 여쭈었습니다.”, “이놈아, 그런다고 내가 안 먹고 너 줄 것 같으냐?” 결국 영감님과 청년은 더 이상 대화를 할 수 없었습니다. 이 할아버지의 문제는 말하는 것이 아니라 듣지 못하는 것이었습니다. 우리가 영적으로 이 할아버지처럼 되어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실 때 들어야 합니다. 내가 하고 싶은 말만하면 안 됩니다. 하나님의 음성을 들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음성은 우리 속에서 들립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성령으로 우리 안에 거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성경도 성령의 음성이 우리 속에서 들린다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마태복음 10:19-20입니다. “너희를 넘겨 줄 때에 어떻게 또는 무엇을 말할까 염려하지 말라 그 때에 너희에게 할 말을 주시리니 20 말하는 이는 너희가 아니라 너희 속에서 말씀하시는 이 곧 너희 아버지의 성령이시니라” 주님께서 제자들을 파송하시면서 하신 말씀입니다. 제자들이 복음을 전하다가 잡히면 무엇을 말할까 염려하지 말라고 하십니다. 왜냐하면 그때에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할 말을 주시기 때문입니다. 그때 말하시는 이는 우리가 아닙니다. 우리 속에 거하시는 아버지의 성령이십니다.
잠 20:5입니다. “사람의 마음에 있는 모략은 깊은 물 같으니라 그럴지라도 명철한 사람은 그것을 길어 내느니라” 사람의 마음에는 모략이 있습니다. 여기서 모략은 이사야 11장에 나오는 성령님의 특징 중에 하나인 모략의 영에 사용된 단어인데 히브리어로 עֵצָה(에차 etsah)이며 의미는 ‘충고, 조언, 의논’입니다. 그러니까 사람의 마음에는 하나님의 충고와 조언이 있다는 말입니다. 명철한 사람은 두레박으로 우물 속에 있는 물을 길어내듯이 자기 마음속에서 들리는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음성은 특징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잘 알아듣게 말씀하십니다. 백발의 장로님이 어린이 설교를 하셨습니다. 아이들이 장로님의 설교에 전혀 집중하지 않고 옆에 있는 친구들과 큰 소리로 떠드는 것이었습니다. 장로님이 화가 나서 강대상을 탕탕 치면서 “아동들이여 논쟁하지 말고 정숙하시오”라고 했습니다. 아이들이 장로님의 설교를 듣지 않고 친구들과 떠들었던 이유는 장로님이 아이들이 알아듣지 못하게 말했기 때문입니다. 장로님과 아이들의 수준차이가 너무 심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하나님의 수준은 어떻습니까? 하나님의 수준은 너무 높아서 측량할 수 없습니다. 감사한 것은 하나님은 자신의 수준을 내려놓으시고 우리 수준에 자신을 맞추신다는 사실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알아듣도록 말씀하십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하나님은 지금도 말씀하신다는 사실을 믿고, 마음을 열어 귀를 기울이면 하나님의 음성을 풍성하게 들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모든 것의 주인이십니다. 우리의 인생도, 우리의 시간도, 우리의 계획도 하나님의 결재와 인도와 도우심을 받아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 우리는 하나님의 음성에 귀를 기울여야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하라시면 해야 합니다. 하나님이 하지 말라시면 하지 말아야 합니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의 음성 자체를 부정하기 때문에 기도하면서도 하나님의 인도를 받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음성에 불순종하기 때문에 하나님의 다림줄로 재어보면 부족한 것입니다. 그래서 결국 인생이 꼬이고 고통을 당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음성을 잘 듣기 위해서는 하나님께 묻는 생활을 해야 합니다. 하나님께 묻는 생활은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데 있어서 대단히 중요합니다. 기도할 때 이렇게 물어보십시오. “하나님! 이 상황을 통해서 하나님은 우엇을 말씀하시고 계십니까? 이 상황에서 제가 어떻게 해야 하나요?”
우리가 하나님께 묻는 생활을 하는 것은 하나님 보시기에 좋습니다. 반면에 하나님께 묻지 않는 것은 교만함을 드러내는 것이며, 하나님은 그런 사람을 미워하십니다. 역대상 10:13-14입니다. “사울이 죽은 것은 여호와께 범죄하였기 때문이라 그가 여호와의 말씀을 지키지 아니하고 또 신접한 자에게 가르치기를 청하고 14 여호와께 묻지 아니하였으므로 여호와께서 그를 죽이시고 그 나라를 이새의 아들 다윗에게 넘겨 주셨더라” 여호와께서 길보아산 전투에서 사울을 죽이셨습니다. 사울을 죽이신 이유는 여호와께 범죄 하였기 때문이었습니다. 사울은 여호와께 세 가지 범죄를 저질렀습니다. ①여호와의 말씀을 지키지 않았습니다. ②무당을 찾아갔습니다. 신접한 자에게 가르치기를 청했습니다. ③여호와께 묻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사울을 죽이시고 이스라엘 나라를 하나님께 잘 묻는 다윗에게 넘기신 것입니다. 사울은 하나님의 음성의 다림줄로 재어보니 부족했습니다. 그래서 심판을 받은 것입니다.
3. 성경의 다림줄
정통 유대인들은 왼쪽 팔과 이마에도 테필린이라는 성구함을 묶어서 착용합니다. 테필린은 양피지에 쓴 성구 두루마리를 넣은 작고 검은 가죽 박스입니다. 가로, 세로, 높이가 3-5cm 상자입니다. 그런 상자를 머리에 달고 팔에 감고 다니니 모양이 우습지만 의미가 있습니다. 머리에 착용한 테필린의 내부는 네 칸의 방이 있습니다. 각 방에는 네 종류의 두루마리가 담겨있습니다. 팔에 착용하는 테필린은 방이 하나입니다. 거기에는 머리에 착용하는 테필린에 있는 네 개의 말씀이 한 장에 적혀있습니다.
테필린을 하는 목적은 모든 행동과 생각의 기준이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것을 고백하는 것입니다. 팔에 차는 테필린을 셀 야드(Shel yad)라고 합니다. 이것은 팔의 위쪽부터 7바퀴 감으면서 내려와서 손가락으로 잡도록 합니다. 유대인들은 팔에 테필린을 착용하면서 “모든 행동의 기준은 하나님의 말씀입니다.”라고 고백합니다. 유대인들은 머리에는 셀 로쉬(Shel rosh)라는 테필린을 착용하고 다닙니다. 이것은 두 눈 사이의 미간에 위 이마에 부착합니다. 머리 선 아래로 내려가면 안 됩니다. 만약 나이를 먹어서 대머리가 되면 소년시절의 머리 선을 기준으로 삼아 아래에 위치하도록 합니다. 유대인들은 머리에 테필린을 착용하면서 “모든 생각의 기준은 하나님의 말씀입니다”라고 고백합니다. 이러한 고백은 죽을 때까지 이어집니다. 유대인들에게는 성경이 인생의 다림줄입니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유대인들은 복음을 깨닫지 못해서 구약만 성경으로 인정합니다. 우리는 신약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리고 신약으로 구약을 재조명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다림줄로 인생의 기준을 삼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것은 너무나 중요하고 귀한 일입니다. 하지만 영적인 체험에는 항상 위험성이 따릅니다. 왜냐하면 사람은 실수가 있고, 마귀도 음성이나 신비로운 체험으로 사람을 미혹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음성을 분별하는 확실한 다림줄이 필요합니다. 그것이 성경입니다. 성경이 양심의 기준이고 모든 체험의 기준입니다.
성경이 하나님의 다림줄인 이유는 성경의 특징 때문입니다. 성경은 어떤 책인가요? 간략하게 몇 가지 나누겠습니다.
①성경은 사람이 기록했지만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디모데후서 3:16입니다.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기록된 것입니다. 약 40명의 저자가 기록했지만 그들이 성령의 영감을 받아서 기록했기 때문에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성경이 하나님의 감동으로 기록되었기 때문에 성경을 읽는 사람들도 하나님의 영감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전기가 흐르는 전선을 만지면 전기가 통하듯이 성령께서 감동하여 기록한 성경에는 성령의 영감이 흐르고 있습니다. 그래서 성경을 읽으면 성령의 역사를 체험할 수 있습니다.
②성경은 예수 그리스도를 보여주는 책입니다.
요 5:39입니다. “너희가 성경에서 영생을 얻는 줄 생각하고 성경을 연구하거니와 이 성경이 곧 내게 대하여 증언하는 것이니라” 예수님이 직접 하신 말씀입니다. 성경은 예수님을 보여주는 책입니다. 그래서 성경이 중요합니다. 성경이 생명의 근원이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보여주기 때문에 성경을 읽으면 믿음이 생기고 그 믿음으로 구원을 받는 것입니다.
③성경은 사람을 변화시키는 능력이 있습니다.
디모데후서 3:17입니다. “이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하게 하며 모든 선한 일을 행할 능력을 갖추게 하려 함이라” 여기서 ‘이는’은 성경을 말합니다. 성경은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하게 하며 모든 선한 일을 행할 능력을 갖추게 합니다. 성경은 사람을 변회시킵니다.
④성경은 영혼의 양식입니다.
마태복음 4:4입니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기록되었으되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입으로부터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 것이라 하였느니라 하시니” 우리의 몸은 밥을 먹고 사는 것처럼 우리의 영혼은 하나님의 말씀을 먹어야 삽니다.
군포제일교회 권태진 목사님의 글을 소개합니다.
살아 있는 것들은 무엇인가를 먹고 삽니다. 소는 풀을, 호랑이는 고기를 먹습니다. 사막식물 웰위치아는 이슬을 먹고 천년을 삽니다. 구원받은 성도는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을 먹고 삽니다.
언제부턴가 정치권은 여론을 먹고 삽니다. 옳고 그릇된 것을 분별하는 수고가 없습니다. 다수의 주장을 따르려 합니다. 큰 목소리를 내는 소수에게 귀 기울입니다. 여론을 움직이는 쉬운 길을 택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진리에 붙잡힌 사람은 다릅니다. 여론의 힘에 의해 쉽게 지배되지 않습니다. 2000년 전, 군중들의 여론이 예수님을 골고다 십자가 형틀에 달았습니다. 그릇된 여론입니다. 그 결과 헤롯과 빌라도는 영원한 실패자가 되었습니다. 예수님은 부활하시어 영원한 승리자가 되셨습니다. 오늘날 하나님은 어떤 자를 찾으실까요. 여론을 먹이로 삼는 자가 아닙니다. 견고한 자세로 진리를 힘입는 자입니다.
저와 여러분은 하나님의 말씀을 먹고 살아야 합니다. 그래야 견고합니다. 그래야 흔들림이 없습니다.
⑤성경은 영적 싸움의 무기입니다.
엡 6:17입니다. “구원의 투구와 성령의 검 곧 하나님의 말씀을 가지라” 그리스도인은 영적인 군사입니다. 군인이 전쟁을 할 때는 완전무장하는 것처럼 성도는 영적인 전신갑주를 입어야 합니다. 전신갑주는 한 가지만 빼고 다 방어무기입니다. 전신갑주에서 공격용 무기는 오직 하나님의 말씀 하나 뿐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성령의 검입니다. 성령의 검으로 승리하는 저와 여러분이 되기를 바랍니다.
오늘 설교는 그리스도인이 가지고 있는 세 가지 다림줄을 말씀드렸습니다.
1. 양심의 다림줄입니다. 2. 하나님의 음성의 다림줄입니다. 3. 성경의 다림줄입니다. 하나님께서 저와 여분 곁에 서셔서 측량하실 때 기울어지지 않는 신앙인들이 되기를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