Jesus saith unto him, Have I been so long time with you, and yet hast thou not known me, Philip? he that has seen me hath seen the Father; and how sayest thou then, Shew us the Father?
예수님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빌립아, 내가 이렇게 오랫동안 너희와 함께 있었으되 네가 아직도 나를 알지 못하느냐?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거늘 어찌 네가 말하기를, 우리에게 아버지를 보여주소서, 하느냐?
(요한복음 14:9)
(4211) [놀라운 이적을 행하시는 하나님으로 미래에 나타나시는 모습만을 우리는 바라고 있지만, 하나님은 지금 이 시간 우리와 함께 하고 계십니다.] Our Lord must be repeatedly astounded at us-astounded at how "unsimple" we are. It is our own opinions that make us dense and slow to understand, but when we are simple we are never dense; we have discernment all the time. Philip expected the future revelation of a tremendous mystery, but not in Jesus, the Person he thought he already knew. The mystery of God is not in what is going to be-it is now, though we look for it to be revealed in the future in some overwhelming, momentous event. We have no reluctance to obey Jesus, but it is highly probable that we are hurting Him by what we ask-"Lord, show us the Father..."(14:8).
(4212) [우리는 주님이 자신을 주님의 자녀들인 우리에게 보여 주시기를 원하나, 주님은 항상 주님의 자녀안에서 그 자신을 드러내십니다. 우리는 주님의 자녀로서 우리 안에서 주님이 하시는 일을 알고자 하나, 우리의 경험은 주님을 알아가는 완전한 방법이 아닙니다.] His response immediately comes back to us as He says, “Can't you see Him? He is always right here or He is nowhere to be found." We look for God to exhibit Himself to His children, but God always exhibits Himself in His children. And while others see the evidence, the child of God does not. We want to be fully aware of what God is doing in us, but we cannot have complete awareness and expect to remain reasonable or balanced in our expectations of Him. If all we are asking God to give us is experiences, and the awareness of those experiences is blocking our way, we hurt the Lord. The very questions we ask hurt Jesus, because they are not the questions of a child.
(4213) [주님은 근심하지 말라고 말씀하셨는데, 우리는 근심함으로써 주님께 상처를 입히고 있지는 않습니까? 우리가 주님을 믿고 그분의 하시는 일을 믿는다면, 우리들의 그러한 음에 걸맞은 삶을 우리는 살고 있습니까? 근심걱정으로 나의 마음을 괴롭게 하거나 건전하거나 적절하지 않은 의심들이 마음속에서 생겨나도록 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Let not your heart be troubled..." 27). Am I then hurting Jesus by allowing my heart to be troubled? If I believe in Jesus and His attributes, am I living up to my belief? Am I allowing anything to disturb my heart, or am I allowing any questions to come in which are unsound or unbalanced?
(4214) [주님에게서 오는 그 형태로서 모든 것을 받아들이는, 주님과의 절대적이고 의심 없는 관계를 맺는 단게에 이르러야 합니다. 주님께서는 미래의 어느 시점에 우리를 인도해 주실 것이 아니고, 오늘 이 시간 우리와 함께하고 계십니다. 주님께서 지금 우리와 계심을 믿으세요, 그리며 바로 자유롭게 됩니다.
세속주의적 신본주의- 우리의 우리 각자의 마음에 속에 들어와 계신 하나님의 성령에 따라서 하나님을 알게 되고 믿게 됩니다. 현재의 이슬람 국가들처럼 국가나 왕이 종교와 정치를 같이 지배하는 신정 <신본주의> 사회에 살고 있지 않습니다. 우리는 현재의 세속주의적 신본주의 사회에서, 자유로운 신앙을 가질 수 있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께로부터 온 그 모습대로 절대적이고 의문점이 없는 관계를 하나님과 맺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자연이나 우상을 섬기지 않고 창조주이신 하나님을 섬기고 예배해야 합니다. 그러면 바로 자유함을 가지게 됩니다.] I have to get to the point of the absolute and unquestionable relationship that takes everything exactly as it comes from Him. God never guides us at some time in the future, but always here and now. Realize that the Lord is here now, and the freedom you receive is immediate.
(42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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ㆍ날 짜 : 2014-04-21 Mon. |
ㆍ조회수 : 11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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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2014-04-21 Read: John 5:24-3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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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짜: 2014-04-21 말씀: 요한복음 5:24-30 |
Victory Over Death!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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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을 이긴 승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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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hour is coming in which all who are in the graves will hear His voice and come forth. —John 5:28-2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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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덤 속에 있는 자가 다 그의 음성을 들을 때가 오나니......나오리라 —요한복음 5:28-29 |
Hymn 15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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찬송가 15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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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n ancient painting I saw recently made a deep impression on me. Its title, Anastasis, means “resurrection,” and it depicts the triumph of Christ’s victory over death in a stunning way. The Lord Jesus, newly emerged from the tomb, is pulling Adam and Eve out of their coffins to eternal life. What is so amazing about this artwork is the way it shows how spiritual and physical death, the result of the fall, were dramatically reversed by the risen Christ.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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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에 보았던 오래된 그림 한 폭이 나에게 깊은 인상을 남겼습니다. “부활”이라는 뜻을 가진 ‘아나스타시스’라는 제목의 그 그림은 죽음을 이기신 그리스도의 승리를 놀라운 방법으로 묘사하고 있습니다. 무덤에서 새로 일어나신 주 예수님이 아담과 하와를 그들의 관으로부터 끌어내어 영원한 생명으로 이끌고 계십니다. 이 예술작품이 그토록 놀라운 것은 타락의 결과인 영적 죽음과 육체적 죽음이 어떻게 해서 다시 살아나신 그리스도에 의해 극적으로 역전되었는지를 표현하고 있는 방식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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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rior to His death on the cross, the Lord Jesus predicted a future day when He will call believers into a new and glorified existence: “The hour is coming in which all who are in the graves will hear His voice and come forth” (John 5:28-2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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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자가에서의 죽음에 앞서, 주 예수님은 믿는 자들을 새롭고 영광된 존재로 부르실 미래의 날에 대해 미리 말씀하셨습니다. “무덤 속에 있는 자가 다 그의 음성을 들을 때가 오나니......나오리라”(요한복음 5: 28-2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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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ecause of Christ’s victory over death, the grave is not final. We naturally will feel sorrow and grief when those we love die and we are separated from them in this life. But the believer does not grieve as one who has no hope (1 Thess. 4:13). The witness of Jesus’ resurrection is that all Christians will one day be taken from their graves to be clothed with glorified resurrection bodies (1 Cor. 15:42-44). And so “we shall always be with the Lord” (1 Thess. 4:17). —Dennis Fishe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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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께서 죽음을 이기셨기 때문에, 무덤이 끝이 아닙니다. 우리가 사랑하는 사람들이 죽어 이 세상에서 그들과 헤어질 때 우리는 자연스럽게 애통함과 슬픔을 느끼게 됩니다. 하지만 믿는 사람은 소망 없는 다른 사람과 같이 슬퍼하지 않습니다(데살로니가전서 4:13). 예수님의 부활은 언젠가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무덤으로부터 나와 영광스러운 부활의 몸으로 옷 입게 될 것을 증거해줍니다(고린도전서 15:42 -44). 그리고 “우리가 항상 주와 함께 있을”(데살로니가전서 4:17) 것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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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ear Lord, thank You for sacrificing Your life for our sins so that we might live. We’re thankful that because You died and rose again, we can have assurance that one day we’ll be with You in a place of no more death.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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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하는 주님, 저희의 죄 때문에 주님이 희생 하심으로 저희가 살게 해주시니 감사합니다. 주님이 죽으시고 다시 사심으로 저희가 언젠가는 더 이상 죽음이 없는 곳에서 주님과 함께 있게 되리라는 확신을 주시니 감사합니다. |
Because Christ is alive, we too shall live.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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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이 살아 계시므로 우리도 살 것이다. | |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