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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1만 리 한반도 둘레길 호태왕 길
압록강 철교에서 상류 강변길을 따라 잠시 이동하면 강 건너 시야에 들어오는 섬이 위화도다,
위화도는 면적 11.2㎢ 섬 길이 9km로 토질이 비옥해 조, 옥수수. 콩 등 밭작물이 대부분이며 의주군의 곡창 제대로
조선 시대 당시 검동도, 어적도와 함께 삼도(三島)라 부르며 중요시했다고 한다.
강폭이 황금평 하류보다 많이 좁고 깊이도 얕다. 강 건너 강가에는 많은 사람들이 업 드려 골뱅이를 줍고 있다.
60년대 당시 남쪽의 정겨운 풍경들이다. 자연산 골뱅이로는 저들의 주린 배를 채울 수 없다
질보다는 양이 필요할 것이다.
위화도는 고려 우왕 14년 5월(음력)에 위화도 회군(1388년)으로 널리 알려진 섬이다. 당시 이성계는 이곳에서
상국(명나라)의 땅을 침범한다면 천자에게 큰 죄를 짓는 것이며 나라와 백성들에게 큰 재앙이 올 것이라며
왕의 명을 거역하고 요동정벌의 칼 끝을 주군에게 돌리며 반역의 명분으로 남긴 말이다.
도둑에게 날 선 칼을 쥐어준 꼴이다.
승자들의 기록에서 회군이나 이성계는 엄연히 쿠데타 주도 세력이며 반역의 집단으로 전형적 사대주의 무리들이다.
이성계는 600여 년이 지난 지금까지 우리 사회 곳곳에 사대주의를 뿌리 깊이 남겨놓았다
당시 최영 장군은 요동정벌의 필요성을 네 가지 말한다.
첫째, 명나라가 크다지만 북원과의 관계가 있어서 요동까지 신경 쓸 여유가 없다.
둘째, 현재 요동의 방비가 매우 허술하다
셋째, 요동은 매우 기름진 땅이므로 여름에 공격하면 가을에 필요한 군량을 얻을 수 있다.
넷째, 명나라 군사들은 장마철에 싸우기를 좋아하지 않는다,, 요동을 쳐서 땅을 되찾을 때는 바로 지금이다.
그러나 이성계는 쿠데타를 실행한다. 반역이 성공하자 이성계는 고려를 무너뜨리고
왕관을 덮어쓰고 명나라에 작은 머리를 조아 f리고 조공을 갖다 바치고 사대 예를 다하며 신하의 나라라는
역사에 씻지 못할 큰 오점을 남겼다.
압록강 철교 앞에서 강변길을 따라 약 11km 지점이 위화도 상류 끝부분이다 검동도와 마주한 지점에서 물길이 위화도를
감싸며 두 갈래로 갈라져 위화도 끝부분에서 다시 만나 한줄기로 흘러간다.
박작성
위화도 상류 끝부분에서 강변둑길이 끝나고 좌측 내륙 길로 접어들자 도로 우측에
압록강을 등지고 고구려 박작성이 나온다.
광개토대왕은 국내성에서 이곳 박작성을 거쳐 요동성과 안시성을 넘나들며 영토를 대륙으로 확장해 갔다.
이곳에서 국내성 내왕길은 당시나 지금도 이길 외는 따로 없다.
우리는 지금 그 외길을 따라가고 있다.
서백두 제운봉과 남백두 사이에서 발원된 하나의 큰 산줄기가 뻗어 내려 장백현과 송강하를 잇는
백두령(1776m)이 솟았다. 백두정간이다, 백두정간의 산줄기는 장백현을 거쳐 압록강을 따라 2.000리(800km)를
길게 뻗어 내려 어적도를 앞에 두고 이곳 박작성에서 끝난다.
1991년 박작성을 발굴 조사한 중국 학술 조사단은 쐐기돌로 쌓은
고구려의 석축과 대형 우물터를 발견하고 이곳이 고구려 성터 자리라는 발굴 조사 결과를 발표했다.
1994년 요녕성 박물관장 왕면후가 집필한 고구려 고성 연구 논문에서도 고구려 ‘박작성은 이곳 산성이리는 결론을
내린다.
하지만 중국 공산당은 자국 학자들의 학설까지 뒤엎고 동북공정 프로젝트의 완결판을 그려 가고 있다.
645년(보장왕 4년) 당태종은 대규모 군사를 동원해 박작성을 공격했으나 침략이 실패하자 3년 후 다시
설만철에게 3만의 군사를 내줘 박작성을 재 공격하게 했다. 당시 박작성 성주 소부손이 1만여 명의 군사로 성을 지키다.
위험에 처하자 안시성 군사를 지원받았다는 내용들이 삼국사기에서 전하고 있다.
90년대 들어 중국 공산당은 동북공정의 프로젝트를 실행하면서 고구려 역사 왜곡에 박차를 가하며 같은 시기 박작성을
발굴 복원한다. 발굴 과정에서 고구려 유물이 대량 출토되었으나 중국 공산당은 이를 철저히 숨기고 만리장성의 석축과
같은 계통의 돌멩이
하나 발견했다고 발표하면서 만리장성 동쪽 끝이 박작성(호산장성)이라며 소가 웃을 주장을 펼친다.
즉 만리장성의 동쪽 끝이 압록강 박작성이므로. 만리장성은 2만 리(8.000km) 장성이 다며 괴변을
늘어놓는다. 제대로 된 보고서 하나 없고 학술적 증거는 더더욱 없다. 이들의 의도는 고구려와 발해는 자신들의
지방 정부라는 억지 논리를 내세워
동북공정의 완결 편을 그리고 있다는 것을 새머리도 알 수 있다.
늘어난 2만 리 장성에는 산성뿐 아니라 만주 벌판까지 포함돼 있다. 만리장성 서쪽 끝 지점 간수성 자위관에서
동쪽 지점이 끝나는 허베이 성 산하이관까지로 실제 만리가 되지 않는다 중간중간 지선까지 합쳐 만리장성이라고 한다.
끝없는 만주 벌판에 산성이 가당찮은가??. 산에서 벌판으로 다음은 강이다..
압록강에 장성이 놓이고 평양성까지 만리장성 동쪽 끝이라는 발표가 나오지 않는다는 보장도 없다. 백두산에서 남쪽으로
뻗어간 백두대간은
장백산에서 뻗어 갔으니 자신들의 장백대간이라며 지리산 천왕봉이 이들의 마지막 목표인지 모른다.
우리 여행객들은 현장을 접하고도 제대로 된 용어나 올바른 역사를 알지 못하고 만리장성 끝
호산장성(박작성)을 다녀왔다고 온 동네
자랑을 늘어놓는다. 소리 없는 동북공정이 무서운 이유가 여기 있고 우리 역사를 올바르게 접하지 못한 조선족 가이드들
또한 한몫 거들고 있다. 이들의 정신 세게는 중국이라는 사실. 우리 여행객들은 반드시 알아야 한다.
쓰레기통에서 계란도 만들어내는 이들이 이 정도의 왜곡은 사람이 숨 쉬는 것보다 쉬울 것이다
이들의 주장대로라면 적을 등지고 성문이 만들어진 곳은 지구에서 이곳 박작성이 유일하다.
성문은 근래 중국 측 입맛대로 복원되고. 성문 뒤쪽이 압록강이다.
박작성 내부 동쪽 산기슭과 어적도 서쪽 끝이 1m 정도의 도랑 하나를 사이에 두고 북 중 국경을 접하고 있다. 단동시
정부에서는 이곳에 일보과라는 토끼 발바닥만 한 비석을 하나 세워놓고 한 발짝 뛰면 북녘 땅이라며 한국 여행객들을
유혹하고 있다.
박작성
삼각산
박작성에서 잠시 후 삼거리가 나오고 우회전길에 접어들자 작은 언덕 우측에 기와로 지어진 팔짝 지붕의 성루 망대가
하나 우뚝 솟아 있다 맞배지붕 형태로 지어진 성문의 건축 기법과는 확연히 다르다, 고구려 건축 기법이라고 한다.
이곳을 지나면 작은 언덕길이 하나 나오고 언덕을 내리면 우측 강변에 작은 선착장이 한 곳 있다.
압록강 철교 아래 선착장처럼 이곳 선착장에서도 사파리 관광이 성업 중이며 한국 여행객들이 가장 많이 찾는 곳이다.
이곳에서 모터보트를 타고 압록강으로 들어가는데 좌측 섬이 구리도. 우측 섬이 어적도다.. 전방은 평안도 의주군의
삼각산으로 3면이 북한 영토에 둘러싸인 북녘 땅 중심에 들어간 것이며 강폭은 3~400m 정도다. 어적도는 상류 쪽
구리도와 하류 쪽 검동도 사이에 있는 섬으로. 토질이 비옥해 조 옥수수, 콩, 수수 등 밭작물이 대부분이며 섬에는
북한의 국경 수비대가
주둔하고 있다. 전방 삼각산에 작은 정자가 하나 보인다 통곡정(통군정)이다.
삼각산은 수많은 선구자들의 발길이 닿은 곳으로 시국이 하 수상해 가노라 삼각산아!! 이제 가면 올둥말둥하네 라는
한 시대 유행어를 만들며 수많은 선구자들이 이곳에서 조국을 등지며 망국의 한을 삭이며 부르던 노래다.
통곡정은 관서팔경 중 하나다.
임진왜란 당시 이곳까지 도주한 선조는 명나라에 도움을 요청하고 명나라 지원군을 기다리고 있었는데. 명나라 장수가
도착해 선조를 만났는데 당시 선조는 키도 작고 몰꼴이 말이 아니었다.
명나라 장수는 이렇게 못난 사람을 임금으로 섬기는 조선을 구해 줄 가치가 없다며 그 자리에서 회군을 결정한다.
지켜보던 선조는 너무 슬퍼 울음을 터뜨린다. 이때 신하들이 정자에 올라가 큰독을 뒤집어쓰고 울어라고 한다
선조가 정자에 올라가 큰독을 뒤집어쓰고 울음을 터뜨리자 그 울음소리가 크고 우렁차게 들렸다
군사들을 이끌고 회군하던 명나라 장수가 선조의 울음소리를 듣고 임금의 꼴은 보잘것없는데 울음소리 하나 우렁 차구나
하고 다시
군사를 끌고 와 조선을 도와주었다고 한다. 이후 이곳 정자를 통곡정이라 불렀다고 전해진다
백성과 도성을 버리고 임진강을 건너 이곳까지 야반도주한 선조와 국군이 지금 북으로 진격하고 있다,
서울 시민 여러분.. 안심하고 생업에 종사하길 바란다며 대국민 사기극을 치고 그 날밤 한강다리를 폭파하고
부산까지 야반도주한 무능한 독재자 이승만은 쌍둥이 같은 닮은 꼴이다...
어적도는 60년대 우리 농촌 풍경을 그대로 옮겨놓은 듯. 소 물 먹이는 농부의 모습들
강가 얼음을 께고 빨래하는 어적도 아낙들. 시간이 멈춰버린 듯. 하다.
어적도
어적도 강가에서 북녘 동포들을 가장 근거리에서 만날 수 있다..
모타보트에 올라타면 중국 보트 기사는 한국 관광객들의 감정을 자극해. 담배나 과자류 등을 즉석에서 팔아
많은 이익을 남긴다. 여행객들이 이것을 강변에 던져놓으면 빨래하던 아낙들이나 아이들과 군인들까지 주워간다.
1차 팀이 어적도 강가에서 10여 분 넘게 북녘의
비참한 현실을 접할 수 있었는데 이들이 잠시 배를 채울 수 있으나 대안은 될 수 없었고 보트 기사와 여행객들이
함께 어우러져 잠시 기획된 합작품으로 동전 하나 더 가진 자들의 무서운 횡포였다
언론 가져가라는 손짓에 우리가 거지 메까라고 외치는 이들의 마지막 자존심이 살아 있었다.
북녘의 비참한 현장 어적도를 뒤로하고 수풍댐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수풍댐
어적도에서 수풍댐까지 약 150리(63km)다. 강변길과 내륙이 교차하면서 가는 길 내내 복숭아 집산단지로 산기슭 강변가에는
대부분 복숭아 밭이 자리하고 있고 장뇌삼 집단 재배단지도 시이사이 시야에 들어온다.
복숭아꽃 필 무렵 이곳에서 압록강 복숭아꽃 축제가 열린다.
연분홍 복숭아꽃은 압록강 봄의 전사로 슬픔을 가득 안은 압록강을 만나 환상적 조화를 이룬다.
이 길은 현재 중국의 10대 아름다운 길로 지정돼 있다.
수풍댐은 행정구역상 평안북도 삭주군에 속하며.
댐 길이 900m 낙차고도 106m 댐 내 수면 면적이 345㎢에 달하며 저수량이 남쪽 소양감댐 다섯 배가 넘는다.
압록강은 백두산정계비가 자리하던 장군봉 아래 서쪽 능선의 분수령에서 발원돼 압록강 가장 상류도시 혜산에서
작은 개울을 이루다 장진천 등 몇 개의 지류가 합쳐지고 하천 폭은 조금씩 넓어진다. 중강진에서 하천 폭이 더 넓어지고
더 많은 지류들이 합류해 강깊이도 깊어지고 강물도 많아져 호수 같은 곳을 많이 접할 수 있다.
1937년 10월에 압록강 수력발전 주식회사와 당시 만주국이 공동 투자해 댐 공사를 시작해 1941년 8월 5일 1호기
공사를 완료했고. 당시 하루발전량 10만 kW를 생산했다... 당시 단일기로는 세계 최대 발전량이라고 한다... 첫 전력은 만주국으로 보냈고 한반도에는 9월 1일부터 첫 송전 했다.. 이어 2~6기가 추가 건설되고 1943년 11월부터는 60만 kW를 생산하게 되고.
당시 세계 최대 전력 생산지였다고 한다...
광복 이후 북한이 단독으로 인수해 생산된 전력은 남북이 공동으로 함께 사용했으나 6.25 전쟁 당시 댐 시설 70%가 파괴되고.
1954년 소련의 지원으로 완전 복구 되지만 북, 중 국경 수계점이 강 중앙이다. 때문에 1955년 북, 중간 압록강 수력발전 회사를 공동 설립(1955년)해
양국이 공동 관리 하면서 생산된 전력은 지금까지 중국과 반씩 나누고 있다..
60년대 후반 까지는 북한이 남한보다 전력 사정이 매우 좋았다.
수풍댐 건설 전까지는 사람이나 화물 등 이동수단 대부분이 압록강 뱃길이다, 댐이 건설되고 조선 민초들의
애환이 깃든 강촌마을 포구들이 하나 둘 역사 속으로 사라진다.
압록강 물길이 서해 바다와 만나는 신도군 비단섬에서 만포시까지 7백50(304km)리 뱃길의 마지막 포구가 만포시다.
당시 포구 모습이 일정 부분 남아 있다는 현지 조선족들의 말을 듣고 택시를 타고 압록강변 둑길을 다니며 찾았으나
찾는 데 실패했다. 다음 차 또 한 번 시도할 것이다.
수풍댐
수풍댐 조금 못 미쳐 삼거리가 나온다. 좌측 도로를 따라 내륙 산골짝 길이 국내성 가는 길이며
국내성(집안시)까지는 550리(222km)다.
백두산에서 압록강을 따라 뻗어 내린 좌측 편 백두정간 너머 환인현에 졸본성이 자리하고 있고. 우측 산줄기는 백두정간의 작은 지맥으로
압록강을 가로막고 있다. 두 산줄기 사이 산골짝을 따라 도로는 국내성까지 이어진다.
삼거리에서 우측길을 따라 잠시면 거대한 수풍댐 상부가 나오고 강변도로는 이곳에서 끝난다. 댐 상부에서 다시 돌아 나와
삼거리 우측길로 접어들고 얼마 지나지 않아 작은 고갯길이 하나 나온다 좌측의 백두정간에서 뻗어 나온 산줄기로
우측 산줄기로 이어주는 고갯길로 H 형태다. 이곳 고갯길을 넘자 산골 곳곳에는 소, 염소 등 가축들이 방목돼 있고
벼. 옥수수 등이 익어가고 있다.
많이 본듯한 풍경들이다, 보통 5~10여 km 정도 지나면 면소재지 정도의 작은 마을이 하나씩 나오고 시골 장터가 열려 있다.
국내 시골 장터를 옮겨놓은 듯 남쪽 시골 장터 풍경 그대로다, 노점에서 갖가지 채소 등을 파는 할매들의 모습도
남쪽 시골 장터 할매들의 모습과 같다. 장거리도 같다,
산골을 따라 비루수(혼강)가 흘러 수량이 풍부해 토질이 다 비옥하다 북간도 연변 지역의
척박한 토질과는 확연히 다르다
양세봉 장군
이곳 산골은 두만강에 이어 2기 항일 무장투쟁이 가장 치열하게 전개된 곳으로 당시 독립군들이 국내 진공 작전을
펼치며 본부 근거지가 자리한 곳이다.. 조선혁명군 총사령부와 참의부 등이 이곳에 자리하고 있었고
양세봉. 이진용. 양기하. 양하석. 백광운. 유인석. 김학규 등의 신출귀몰한 무장 독립투사들이 조국 광복에 목숨을 내놓고
대일 항전을 펼치던 곳이다 낯에는 이곳 산속에 숨어 지내고 어둠이 내리면 압록강을 건너가 일본군 파견 부대나
지서등을 습격하고 동이 트기 전 다시 강을 건너 이곳 산골 근거지로 돌아온다.
특히 양세봉 장군은 이곳에서 국내 진공작전을 지휘하며 수많은 전공을 세우며 독립운동사에 전설처럼 전해지고 있으나
남쪽에서는 많이 알려지지 않은 인물이다.
양세봉 장군은 동작동 국립 현충원 애국지사 묘역과 평양 애국지사 묘역에
나란히 모셔져 있다. 국립현충원에 모신 양세봉 장군의 묘는 가묘이나 평양 애국지사 묘역에는 목이 유기된 양세봉 장군의
주검이 안치돼 있다. 남, 북이 함께 국립묘지에 안치된 독립투사는 양세봉 장군이 유일하다. 중국에서도 그를 기리는
공원이 조성돼 있다. 1995년 중국 신빈현 인민 정부는 양세봉 장군의 항일 투쟁을 기리기 위해 석상을 건립했다.
중국에서 한국 독립 운동가를 기리기 위해 석상을 세우는 일은 매우 이례적이라고 한다.
압록강의 명장 양세봉 장군의 일대기를 출간한 중국인 조문기(57세 신빈현 거주)씨는 당시 조선 혁명군 주둔지 인근 신빈현을 비롯
관전현 집안현, 환인현에서 살고 있던 중국 인민들은 당시 하늘에 별이 떨어졌다고 슬퍼하며 양세봉 장군의 항일 무장투쟁을
기리는 민요를 지어 불렀는데 지금 것 이곳에서 전해 내려온다며 압록강 항일무장 투쟁의 영웅 양세봉 장군에게 한국 정부가
건국훈장 독립장 3급을 수여한 것은 수긍하기 어렵다며 고개를 젓는다.
조선혁명군을 지휘한 양세봉 장군은
1895년 평안북도 철산군의 작은 산골에서 소작농의 아들로 태어나. 1917년 13살 되던 해 북간도 이주 행렬을 따라 가족과 함께
압록강을 건너와 이곳 요녕성 신빈현에 정착하게 되고 3년 후 16세 때 대한독립단에 가입한다.
1923년 조선혁명당 정의부가 조직되고 소대장으로 국내 진공작전을 펼치며 명성을 떨치다. 1929년 신빈현에서
무장 항일 단체 조선혁명군이 결성되자 1 중대장을 맡았고 1931년에 광복군의 전신인 조선혁명군의 총사령관이 된다.
이후 김학규장군을 참모로 두고 항일무장 투쟁을 진두지휘 하며 80여 차례나 전투를 벌이며 일본군과 순사 수백 여 명을 사살하는
전과를 거둔다. 고구려 연구재단 장세윤 연구 위원은 양세봉장군을 압록강의 전설적인 장군으로 기술하고 있다.
만주사변 이후 일본은 간도 특설대와 관동군을 앞세워 항일무장 독립군에 대한 대대적 검거 작전에 들어간다.
이때 사회주의 항일 무장독립군 대다수가 중국 공산당에 들어갔고 민족 계열 지도부는 두만강 인근 봉오동과 청산리
전투 이후 러시아나 상해 등으로 다 떠난 뒤였다..
당시 양세봉 장군이 이끄는 조선혁명군이 유일하게 이곳에 남아 항일무장 투쟁을 벌이는데
양세봉 장군이 마지막까지 일본군에게 큰 피해를 주고 조선인과 중국인들의 두터운 신망을 얻자 일본군은 양세봉 장군을 제거할
음모를 꾸민다 친일부역자 조선인 박창해를 앞세워 양세봉 장군 유인 작전을 펼친다.
중국 마적단이 조선 혁명군과 연합할 의향이 있다며 이 문제를 같이 논의 하자며 양세봉 장군을 유인한다. 양세봉 장군은
불행히도 여기 걸려들었고 옥수수밭에 매복해 있던 일본군의 총탄에 양세봉 장군은 그 자리에서 숨을 거둔다.
1934년 추석 3일 전의 일이다. 양세봉 장군은 39세의 나이로 조국 광복을 보지 못하고 신빈현 소황구 산골에서 눈을 감는다.
양세봉 장군의 호위 군사들이 겨우 시신을 거두어 신빈현 산골에 묻었는데 이를 탐지한 일본군이 무덤을 파헤쳐 양세봉 장군의
목을 유기해. 퉁화역 광장에 걸어두었다
이후 양세봉 장군의 참모이던 김학규 장군은 조선혁명당을 대표해 김구 선생의 상해 임시정부 한국독립당과 당 통합을 추진해
상해 임시정부에 합류하여 이청천 등과 함께 광복군을 창군한다.
1941년 광복군 3 지대장으로 1 지대장 이청천과 함께 항일 무장 투쟁의 선두에 서 광복군을 지휘하며 대일 선전,
정보수집 등을 통해 유격전을 전개하여 많은 전공을 세운다. 주중 미군과 합동 작전의 특수부대(OSS)를 만들어
국내 진공작전을 도모하던 중 광복을 맞이한다.
김학규 장군은 광복 이후 한국독립당 만주 특별당 부위원장에 취임하여. 조선인들의 생명과 재산 보호와 안전한 귀환을 도우며
3년에 걸쳐 상해 텐진 등에서 미군 비행기로 3만여 명의 조선 민초들을 무사히 귀국시킨다.
이때 박정희는 일본군에서 탈영. 해 자신의 신분을 속이고 독립군 패잔병으로 위장해 이곳을 찾았고
김학규 장군의 도움을 받아 무사히 귀국할 수 있었다..
박정희는 이때 김학규 장군을 만난 인연을 갖고 자신이 독립군 일원이었다며 소문을 낸다..
이후 임무를 마친 김학규 장군은 1948년 4월에 귀국해 김구 선생이 주도하던 한국독립당 조직 부장에 취임한다.
다음 해 김구 선생이 암살되자 이승만 독재 정권에 반대하다 체포돼 백선엽 등 간도특설대 출신들이 주도하던
군법회의에 넘겨져 15년 형을 선고받는다. 친일 반민족 행위자들이 독립 영웅을 심판한 것이다
이것이 해방전후 대한민국 근대사의 팩트다.
당시 또 남로당이 주도한 파업에 연루 됐다는 이유를 들어 약산 김원봉 선생이 체포된다. 일제 강점기 당시
서울 종로 경찰서 고등계 순사 출신으로 악명을 떨친 노덕술에게 체포된 것이다. 그날 밤 김원봉 선생은 빨갱이 두목이라며
노덕술에게 뺨을 세 차례나 얻어맞는다 며칠 후 김원봉 선생은 풀려나지만 조국은 아직 해방되지 않았다며 3일 밤을
지새우며 울었다고 한다.
김원봉 선생이 누구더냐
상해 임시정부 국무위원으로 광복군 부사령관과 의열단 단장으로 일본 수뇌부들이 가장 두려워하던 요주의 인물로 일본이 내건
현상금이 김구 선생의 20배 이상 높고 당시나 지금까지 세계 기록을 가진 인물이다.
목숨을 내놓고 되찾은 조국에서 친일 반민족 행위자인 일개 일본 순사 출신에게 수모를 당한 것이다.
곧이어 여운형 선생이 이들에게 암살되고 김원봉 선생의 신변에도 점차 위험이 좁혀오고 있었다. 곧이어 김구 선생이 주도한 통일정부 남북회담에 김구 선생과 함께 남쪽 대표로 참석한다.
평양에서 회담을 마쳤지만 끝내 김원봉 선생은 돌아오지 않는다.. 돌아온 김구 선생은 곧이어 이들에게 암살당한다.
다음 해 6,25 전쟁이 일어났고 김원봉 선생의 동생들인 김구봉 김용봉 김봉기 김덕봉 4형제들은 경남 밀양의 자택에 들이닥친
노덕술계 순사들에게 체포돼 아무런 영문도 모른 체 주변 산속으로 끌려가 바로 총살형으로 즉결처형 된다
친일 반민족 행위자들이 무능한 이승만을 앞세워 김구 선생의 상해임시정부 계열과 김원봉 선생 일가의 씨를 말려 놓은 것이다.
이것이 당시 친일 부역자들과 공모하여 대한민국 정부를 수립한 이승만 독재정권의 적나라한 모습이다..
김학규 장군은 이후 이승만 정권에서 살해될 것을 우려한 군부 내 독립군 옛 동지들이 중심이 돼
부산 피난처로 데려갔고 이후 휴전이 되고 서울로 돌아와 다시 복역하게 된다.
김학규 장군은 이승만 정권 내내 투옥되는 비극을 맞이한다
이승만 정권이 무너지고 김학규 장군은 곧바로 풀려나지만 10년 넘는 옥고에 지치고 병든 대한독립 영웅은
1967년 마포구 자택에서 쓸쓸히 눈을 감는다. 당시 박정희 정권에서 사회장을 치르고 동작동 국립묘지에
안장한 뒤 건국훈장 독립장(3급)을 수여한다..
광복 후 북한은 신빈현 산골에서 양세봉 장군의 시신을 거두어 평양 근교로 이장했고. 1966년 다시 평양 애국지사 묘역에
이장해 안치하고 양세봉 장군의 부인 임재순과 외아들 양의준을 평양으로 불러 극진히 예우하며 끝까지 도와주었다고
전해진다. 당시 박정희 정권은 김학규 장군과 함께 1962년 건국훈장 독립장(3급)을 수여했다. 압록강 최고의 독립 영웅에게
고작 독립장 3급을 준 것이다. 북간도에서 일본군 박정희(다까키마사오) 행적을 너무 잘 알고 있던
당시 독립군출신들은 박정희 정권 내내 껄끄러운 존재들로 미운털이 박혔다.
본 글의 자료들을 검색하며 근대사에 대한 진실을 좀 더 깊이 알 수 있었다
첫 단추를 잘못 낀 근대사 중심에는 무능한 이승만 독재자와 친일 반민족 행위자 박정희(다까키마사오)가 있었다.
이승만은 미국 유학파로 미국의 지원으로 정권을 잡고 김구 선생과 달리 자신의 세력이 없었다
이승만은 친일 부역자들과 함께 권력을 나눠 가질 수밖에 없었고 이들을 단죄하기는커녕 노덕술과 같은
친일 부역자 집단을 앞세워 반민특위(친일 반민족 행위자 처단 특별 위원회) 본부 사무실을 야밤에 습격해 이들을 체포하고
본부조직을 강제해산 시켜버린다. 우리 근대사에 두고두고 한으로 남는 부분이다.
이승만은 당시 이들을 감싸 안고 권력의 핵심 내지 사회 요소요소에 포진시켜 면죄부를 주었고 이들의 가슴에 훈장까지
주렁주렁 달아주고 이들을 전면에 내세워 상해 임시정부 독립운동가 출신들을 탄압하며 자신의 독재정권 지키기에 급급했다.
1970년대 초반에만 해도 우리 사회서는 순사(경찰) 온다고 하면 우는 아이 울음도 뚝 그친다는 웃지 못할 유행어가 있었다..
일제 강점기 당시 유행어로 광복 후에도 30여 년 넘게 우리 사회서 통용되고 있었다.
당시 유행어가 말해 주듯
이들의 갖은 악행은 광복 이후에도 지능적으로 발전되고 지속적으로 저질렀다는 사실들이. 우리는 많은 사건 등을 보면서
알 수 있다. 80년대 민주화 운동 당시 서울대 학생 박종철을 잡아다 갖은 폭행과 물고문 등 전기고문치사 사건을 두고
탁자를 툭 치자 억 하고 죽었다는 웃지 못할 코미디까지 우리는 볼 수 있었고
2012년 대선 결과에 직접 영향을 미칠 수 있는 국가정보기관의 불법댓글 사건 수사 당시 투표일 3일을 앞두고 야밤에
기습적으로 중간수사 결과를 왜곡 조작 발표하여 대선 결과에 직접적 영향을 미치고 박근혜 정권 만들기 1등 공신이 된다.
이들은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탈취한 권력을 사유화하고 국민을 개돼지로 취급하며 권력을 휘두르지만,
어리석은 민초들은 오히려 이들의 든든한 동조 세력이 되고 완장 하나씩 얻어 차고 개돼지소리 들으며 노예생활을 하지만
이들은 현실을 인지하지 못한다 빨갱이 석 자만 외치면 이들에게 밥이라도 얻어먹고 중산층 보수라는 착각 속에
이들은 깊이 빠져 들어있다
노블레스오블리주
한국 보수의 원조 노블레스 오불리주를 300여 년 행동으로 실천한 경주 최부자댁 가훈이다
1. 과거는 보되 진사 이상 벼슬은 하지 마라.
2. 1만 석 이상의 재산은 사회에 환원하라.
3. 흉년기에 땅을 늘리지 마라.
4. 집에 찾아온 과객은 후하게 대접하라
5. 집 주위 100리 안에 굶어 죽는 사람이 없게 하라
6. 시집온 며느리들은 3년간 무명옷을 입혀라
이것이 한국의 보수다.
최 부자는 일제 치하 36년간을 사재를 털어 상해 임시정부에 적지 않은 군자금을 보내며 조국 광복에
일익을 담당했다. 광복 이후 암울했던 지난 36년을 회상하며 미래 조국을 새롭게
짊어지고 갈 인재 양성을 목적으로 전 재산을 털어 대구대학 및 청구대학을 인수해 합병하여 영남대학교를 설립한다.
곧이어 박정희는 총으로 강탈한 국가 권력으로 최 부자 댁 영남대학교를 강탈해 간다..
이후 300여 년 넘게 이어진 한국의 보수 경주 최 부자 댁 노블레스 오블리주는 맥이 끊어진다.
일제 강점기 당시 일본은 이순신 같은 영웅을 다시는 조선에 태어나지 못하게 한다며 백두대간
중요지점 곳곳에 쇠말뚝을 박고 한반도 백두대간의 신성한 에너지를 다 끊어 놓은 지난 역사가 있었다..
박정희 또한 같은 맥락으로 한국 보수의 맥을 다 끊어놓은 것이다.
이때부터 한국의 보수 노블레스 오블리주는 우리 사회서 실종되고 어리석은 민초들은 박정희를 한국 보수의 원조로 착각에
빠져들고 박정희를 신격화하면서 집단 동조 세력들이 하나둘 등장하기 시작한다.
이 무렵 박정희는 일본군 시절 학습한 사무라이 공작 정치를 벌인다,
인혁당. 동백림 사건. 민청학련 등 많은 사건들이 왜곡 조작되고 빨갱이 집단보다 더 무서운 사무라이 방식이 등장한다.
많은 정적들과 무고한 민간인들이 어느 날 갑자기 의문사당하고. 당시 김대중 전 대통령은 일본에서 중앙정보부
비밀요원들에게 납치돼 배에 실려 망망대해 동해 바다에서 팔다리가 묶인 채 수장되기 직전 사전에 첩보를 입수한 미국 CIA가
공중에 헬기를 띄어 경고 방송을 하면서 수장 직전 겨우 살아남는다,
당시 또 인혁당 사건은 빨갱이 수법 그대로 인민재판이 열리고 선고 하루 만에 다 죽임을 당한다.
국제 법학자협회서는 이 날을 세계 사법 암흑의 날로 선포하기까지 이른다.
당시 이병철의 삼성그룹 사카린 밀수 사건 등 희대의 부정한 방법들이 재벌과 나눠 먹기식 정경유착의 원조가 되고
전경련이 등장하면서 자금줄이 생겨나고 조직화되는 친일잔재 가짜 보수정치 집단 동조 세력들이 우후죽순처럼 등장한다
이때 박정희는 또 대국민 안보 팔이 세뇌교육을 시작한다.
김일성은 목에 도깨비 뿔 난 가짜 김일성이다.
때려잡자 김일성
쳐부수자 공산당
빨갱이 신고는 112
빨갱이들은 자수하여 광명 찾자,, 등 수많은 포스터를 전국 곳곳에 담벼락이나 전봇대 등에 붙여두고
아이들을 동원해 전국 초, 중등학교등에서는 공산당이 싫어요 빨갱이는 싫어요 때려잡자 김일성 등의 주제로
매일같이 웅변대회가 열리고 전국 대회까지 열었다,
당시 아이들에게 안보팔이 빨갱이 교육은 박정희 정권 18년 내내 학습되고 빨갱이를 아이들 머리에 깊이 심어 놓았다.
당시 학생들이 지금 꼰대 소리 듣는 연령대로 반세기 가까이 지나서도 이들은 아직 것 빨갱이를 머리에서 지우지 못하고
빨갱이. 좌파를 외치며 태극기를 들고 친일 가짜 보수정치 세력들의 홍위병이 돼 남북통일을 방해하고 미래청년 세대들이
살아갈 토양마저 오염시켜 놓았다.
잘못된 세뇌교육이 무서운 이유가 여기 있고 지금 이 들은 공산당 독재자 김일성 세습을 욕할 자격조차 없다
자신들 스스로가 김일성 공산당 빨갱이 집단보다 더 무서운 일본군 사무라이 정신을 어린 시절 박정희로부터 학습되고
아직 것 깨어나지 못하고 있고 이들은 또 한술 더 떠 우리들을 이만큼 먹여 살린 것도 박정희라며 반세기 넘게 박정희를
신격으로 추앙해 그의 후처 딸 박근혜를 내세워 2대 세습 왕조를 완성시키는데 결정적 역할을 했다..
70년대 초기만 해도 당시 우리 사회는 국민 대다수가 기근에 허덕이던 보릿고개라는 것이 있었다 가을에 추수한 쌀이
다음 해 봄도 오기 전에 쌀이 떨어지고 굶주림에 기다리던 6월에 겨우 생산한 보리쌀로 꽁 보리밥을 해 먹으며 주린배를
반은 물로 채우고 고픈 배를 움켜쥐고 가을 추수를 또 기다리며 기근에 허덕이던 시절이 있었다. 당시를 보릿고개라고 했다.
부모들은 자식들에게 뛰 놀지 말고 일찍 자거라 배 꺼진다는 유행어가 이때 나온 것이다. 찰기는 없고 소화가 잘되는
꽁 보리밥을 먹고 아이들이 뛰 놀면 금세 소화가 돼 또 배가 고프다는 뜻이다. 실지 당시 대부분이 그랬다.. 당시 한국 사회는 6.25 전쟁의 폐허 속에 국민소득(GNP) 79달러로 세계에서 가장 빈국으로 밥이나 꽁보리밥과 미국에서 지원하는
밀가루를 배급받아 각 가정에서 해 먹는 손국수 외는 특별히 먹을 것이 없었다. 당시 마을 구판장이나 학교 앞 구멍가게등에서 판매되는 건빵과
왕눈깔사탕. 말표사이다 등이 간식용으로 전부다 이것도 상대적 부잣집 아이들이 몇 개 사 먹을 수 있었고 보통 가정집 아이들에게는 그림의 떡으로
가을 운동회나 봄가을 소풍 때나 겨우 몇 개 맛볼 수 있었다.
이 무렵 장면 정부에서부터 농대 교수들과 학자들이 10년을 넘게 심혈을 기울여 탄생시킨 개량품종 통일벼가 1972년에 나오고 전국 농촌에 공급된다. 기존 토종 품종을 대신한 일본산 아끼바리에 비해 밥 맛은 덜해도 쌀 수확량은 3~4배에 가깝다.
획기적인 쌀 수확으로
단숨에 배불리 먹는 것이 해결되고 대한민국 성장의 동력이 된다 이것을 박정희가 먹여 살렸다며 반세기 넘게
무지한 노인들이 돼지 멱따는 소리를 지금 것 내고 있는 것이다.
독재자 김일성은 그래도 일제 강점기 당시 항일 무장투쟁 최고 수준의 독립 운동가로 북한 지도자가 될 이유라도 찾을 수
있지만. 박정희는 일본군 장교 출신으로 총 칼로 정권을 탈취한 도둑놈으로 반민족 행위자 일뿐인데 똥인지 된장인지
구분조차 하지 못하는 무지한 노인들이 지금 태극기를 들고 우리 사회 곳곳에서 목에 핏대를 내고 있는 것이다.
이들이 또 청렴하다던 박정희는 자신의 큰딸 박재옥을 쫏아내듯자신의 부관 출신인 한병기와 일찍 혼인시켜 1971년 설악산 국립공원 내
권금성 케이블카 허가권을 내줘 큰딸의 입을 닫게 하고 친모와 천륜을 저버리게 한다. 이후 박재옥은 반세기 가까이 불황 없는
사업으로 부를 누리고 자식들에게 대물림해 가족 기업으로 지금도 호황을 누리며 성장하고 있다.
설악산 권금성 케이블 산업은 당시 한국 농경사회에서 가장 큰 알자 베기 산업으로 수백억이 들어간 큰 사업이지만 당시
박정희는 소 팔고 감자등.. 강넹이까지 내다 판 민초들의 혈세와 국가 권력을 동원한 부정한 방법으로 자신의 큰딸 박재옥을
통 크게 챙겼으나 당시나 지금도 어리석은 노인들은 눈 감은 부처님이다. 자신에게 버림받은 본처 김호남은 결국 속세와
인연을 끊고 비구니가 된다..
본처를 버리면 한강물을 건너지 못한다는 옛 속담이 있지만. 박정희는 당시 본처를 버리고 후처 육영수와 박근혜를 데리고
용감히 한강을 건너가 5.16 군사 반란을 성공시키고 옛말도 갈아치우는 큰 인물이 된다
이후 자신도 가난한 농부의 아들이라며 전임 민주당 정부에서 기획해 둔 새마을 사엽을 들고 나와
일하러 가자며 낯에는 밀짚모자를 덮어쓰고 농민들과 막걸리잔을 기울이고 밤이면 청기와 지붕 아래
아방궁에 틀고 앉아 남자 아랫도리 이야기는 술자리 외는 논하지 말라며 어린 여대생들과 시바스 리갈에
그때 그 사람을 찾으며 망국의 술판을 벌인다.
결국 더 이상 사기극을 지켜볼 수 없었던 동향의 후배 김재규 장군의 결단으로 10.26 혁명이 일어난다.
박정희가 죽고 후처 딸 박근혜는 박정희가 장물로 남긴 영남대학교 이사장에 취임해 대학 운영에 깊이 관여해
대학을 마치 자신의 개인 소유물로 당연시한다 결국 부정입학 등 온갖 비리에 연루돼.
대학 구성원들에게 쫓겨나는 수모를 당하고. 이후 정수 장학회 및 육영재단과 MBC 주식 등 수십 조가 넘는
박정희 장물을 두고는 소유권 등 재산권 다툼으로 현대판 왕자 공주 부마 등이 뒤 얽혀 난이 일어난다.
당시 대군(큰집 조카) 2명이 의문의 살해를 당하는 등 사극 드라마 같은 사건이 21세기 서울 한복판에서 벌어졌다.
지금도 조국 광복에 목숨을 내놓은 독립투사들은 차디찬 만주 벌판 구천을 떠돌고 겨우 명줄이 붙어있는
마지막 독립 영웅들은 조국을 부르며 북간도와 우리 사회 곳곳에 떠 돌고 있고 자식들은 어릴 적부터 가난을 대물림받아
빈곤에 허덕이는데 친일 부역자들과 그 2세들은 이승만. 박정희, 전두한. 이명박근혜로 이어진 가짜보수 정치 세력들의
정권에서 중요 요직을 다 차지하고 정치권, 학계. 재계, 언론 등 우리 사회 곳곳에서 카르텔을 형성해 더 많은 부를 축적하여
자식들에게 대물림하고 어리석은 민초들을 꼬드겨 빨갱이 타령을 재탕 삼탕 우려먹고 자신들의 과거와 현재의 진실을
숨기는데 목을 걸고 있다. 그 대표적 사례가 이승만과, 박정희 미화 작업으로 박근혜 공주병에서 온 삐뚤어진 효심을 들 수 있다.
대한민국 건국일 조작, 국정교과서 왜곡 편찬과, 이승만이 박정희 동상 세우기. 구미 생가 성역화 작업등. 영남 모 대학을 박정희
새마을 대학으로 개명 시도 등 이루 헤아릴 수 없다
이들 집단들이 이승만을 건국의 아버지로 목을 매는 것도 이승만이 좋아서가 결코 아니다.
자신들에게 면죄부를 준 이승만은 자신들의 꼭두각시 무능한 독재자라는 사실을.. 이들은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
그러나 이승만을 또 앞세워 1948. 8. 15일이 대한민국 건국이라는 조작질을 완성시켜야 일제 치하 36년은 무 정부가 되고
일본에 부역한 군인과 순사 및 관료 등 모든 친일 부역자들이 면죄부를 받게 된다 박정희 또한 일본군 입대도 정당화된다.
상해 임시정부를 부정하고 당시 무정부 상태가 되었을 때 김구 선생이 지휘하는 대한민국 상해 임시 정부는 일개 테러리스트
지휘부가 되는 것이며 상해 임시정부의 지휘를 받는 모든 무장 독립투사들은 테러리스트가 돼 버리는 것이다.
이 엄청난 역사의 패륜을 지금 우리 사회 곳곳에서 박근혜를 중심으로 가짜 보수 정치 세력들이 어리석은
노인들을 꼬드겨 지금 것 패륜의 굿판을 벌이고 있는 것이다.
이들의 끈질긴 방해와 저항 속에 반민특위 (반민족 행위자 처벌 특별 위원회) 해체 이후 반세기를
훌쩍 넘겨 이제 겨우 이들을 역사에 고발한 친일인명사전.. 노무현 대통령의 용기와 열정이 있어 발간할 수 있었다.
여기에는 박정희. 백선엽 등 수많은 똥별들과 북간도 일본 군관학교 출신자 대다수가 함께 기록돼 친일 반민족 행위자로 역사에 고발되었다.
역사의 관용은 또 다음 역사를 되풀이한다.
우리는 반드시 이들을 기억해야 한다.
5월이면 그 사람이 보고 싶다.
그 사람은 지키지 못했으나 그 사람의 정신만은 주권자인 민주시민들이 함께 지켜 나가야 할 것이다.
지금 우리 사회서는 어둠을 빛이라고 주장하는 많은 위정자들을 지켜볼 수 있다..
2009년 봄날 남쪽의 평화로운 작은 산자락에서 어둠의 집단들이 저지른 역사의 패륜을 전 국민들이 함께 지켜보았다.
광화문 광장에서 그의 마지막 길 노제 지구 역사에 유례가 없었던 500만의 추모 인파가 모여 지켜주지 못해 미안했다며 목놓아 울었다. 하늘도 울고 오색 무지개다리를 수놓으며 한 시대 풍운아를 맞이해 갔다
어리석은 국민들을 요란스럽게 깨워놓고 운명이다, 누구도 원망하지 마라 그는 홀연히 그렇게 우리 곁을 떠났다,
이후 글에 문외한이던 필자도 온라인상 두서없는 글을 쓰기 시작했고. 많은 악플을 받으며 2015년 7월 당신의 홈페이지에
본 글이 2개월 넘게 핫이슈 글로 대문에 걸려 큰 영광을 얻었다. 이후 신변의 위험까지 당시 8월 3차 당시 러시아 불 라디 보스토크에서 귀국길
동해 뱃길 크로즈에서 세월호가 떠오르는 하룻밤의 악몽 별 희한한 꼴을 내가 당했지만 결코 어둠은 오래가지 않았다,
한 권의 책이 탄생했다..
어둠은 빛을 이길 수 없다.
3차 8월
목숨을 내놓고 벌인 무장 독립투쟁의 본부 근거지가 자리했던 긴 산골 중간쯤 관전현이 나온다. 이곳에서 서쪽 능선길에
접어들자 능선 길 산 아래로
비류수(혼강)가 흘러 고구려 싹이 움트고 있다
대륙을 말 달리듯 고구려의 더 높은 기상이 걸린 듯 혼강이 감아 돌며 한 폭의 그림처럼 다가온다.
힘이 넘치는 산세
어리석은 만초들아 께어나 거라 긴 잠에서 께어나 거라 한바탕 호통을 친다.
대한민국 주인은 네들이다. 대한민국 모든 권력은 주권자인 네들에게 있다.
또 한 번 호통을 친다.
강물처럼...
참 아름답다
. 정상부에 자리한 가핏골이다. 잡초와 나뭇가지에 가려진 양하산 장군의 비석과 흉상을 겨우 찾는다
식별이 어렵고 안내 표지판 하나 없다
잠시 나뭇가지 등을 제거하자 양하산 장군의 흉상이 모습을 드러낸다.
양하산 장군은 무장독립 투쟁가로 일본군과 전투 중 이 자리에서 순국했다고 한다
얼마 전 양하산 장군의 손자들과 뜻을 모은 현지인들의 도움으로 비석과 흉상을 세웠는데
누구 한 사람 찾는 이가 없다고 한다. 타국의 숲 속에서 아직껏 외롭다.
혼강만이 조국 광복에 몸 바친 항일 독립투사들의 아픈 역사를 안고 유유히 흐르고 있다.
꼭 다시 찾겠다며 양하산 장군의 흉상을 뒤로하고 다시 관전현 하로하로 내려온다. 하로하서 약 5분 여 거리에 도로변
좌측에
삼도하 조선족 민속촌이 자리하고 있다. 19세기 말엽 기근에 허덕이던 함경도 민초들아 압록강을 건너와.
이곳에 모여들고 조선인 집단 거주 터가 형성되었고.. 번성기에는 조선족 자치촌이었는데. 90년대 들어 젊은 조선족들이 도시나 한국으로 다 빠져나가 산골 노령화가 급속히 진행되고 현재 자치촌이 취소되었다고 한다.
사극 드라마를 보듯 디딜방아로 찧은 메밀반죽을 나무판에 눌러 면을 뽑아낸다. 10여 명 넘는 마을 처녀들이 선발돼
우리 팀을 맞이해 온갖 정성을 다한다. 정겨운 도랑물에 씻은 신네이도 상에 올라온다.
참 특별한 맛으로 송이까지 곁들인다.
조선족 처녀들은 이곳 산골에서도 귀하다고 한다. 우리 팀을 맞이한 처녀들은 모두 한족들이며 팀장만이
관전현 조선족 소학교에서 음악을 가리키는 조선족 여선생이다
디딜방아
민속촌에서 1박 한 후 특식의 조식을 나누고 우리 팀은
다시 국내성으로 올라간다.
도로 좌측으로 혼강이 따라오고 국내성과 관전현 중간쯤 혼강이 압록강에 합류하기 직전 혼강의 마지막 하류 지점이다.
지난 6월 공무원 초급 간부들이 국내성 역사 탐방 길에서 사고를 당한 곳이다.
사고 지점은 과속 카메라 등이 설치돼 있어 과속이 허용되지 않는 구간이다. 좌측 혼강 하류를 따라 직선으로 난 강변도로인데
이곳에서 좌측으로 90도 꺾인 다리로 핸들을 꺽지 못하고. 바로 직진하여 다리 입구 난간을 들이박고 강바닥에 떨어진
사고다. 우리 팀이 고인들의 명복을 빈다.
해가 저물고 우측 산줄기가 끝나고 압록강이 다시 나온다. 강 건너 북녘 땅이 펼쳐지고.
좌측 전방에는 국내성이 자리한 집안시도 함께 나타난다.
어둠이 살짝 내리고 있으나 산을 일군 뙈기밭 아래 북녘 농부들은 아직도 밭일을 멈추지 않고 있고 소달구지도 보인다.
압록강 폭이 많이 좁고 물의 깊이도 얇아 보인다.
압록강
방천둑길을 따라 10여 분 후 국내성과 북녘의 만포시와 마주한 압록강변에 도착한다. 강물은 여울을 만들며 시냇물처럼
정겹게 흐르고 있는데. 다리를 걷고 금세라도 건널 수 있을 것 같다.
1차 때 만난 탈북자는 우리 팀이 입국할 당시 동강항에 마중을 나왔고 지금 것 일정을 함께 하고 있다..
결국 1개월 전 엄마는 돌아가시고 강 건너 산 아래 작은 무덤을 가리키며 엄마의 무덤이라고 한다.
얼마 전 북녘에 남은 여동생이 엄마의 부고를 전해 왔는데. 통곡을 했다며..
먼저 장례비용을 인편으로 보내고 중국령 강가에서 바라볼 수 있게 강변가 산비탈에 묻어달라고 했다
장례식날 강가에 상을 차려놓고 엄마의 마지막 하관을 지켜보면서 다시 통곡을 했다. 탈북 후 따뜻한 밥 한 상
차려 올리는 게 소원이었지만 결국 주검 앞에 상으로 대신했다며 울먹인다. 그것도 강 건너에서..
서러움에 북 바친 이 친구. 자전거 통행증을 요구하는 나라는 지구상에 저곳밖에 없을 것이라며 두 주먹을 불끈 쥔다.
3류 소설보다 더한 서러움이 지금 이 시간에도 북녘 땅 곳곳에서 벌어지고 있다.
강 건너 만포시 전체가 암흑 속 백열등 몇 개 깜박인다. 비극의 현장이다.
집안시 중심가에 자리한 숙소로 접어들자 화려한 오색빛 내온 등이 북녘의 만포시와 큰 대조를 이룬다.
호텔에 짐을 풀고 북녘의 외화벌이 식당 묘향산으로 이동해 석식을 마치고 다시 숙소로 돌아온다.
우리 팀이 국내에서 어렵게 갖고 온 헌 옷가지들이 12박스나 된다. 남쪽에서 가져온 작은 선물이다.
북녘 동포들에게 잘 전달해 달라며 간단한 전달식을 갖고 오늘 일정을 마무리한다
팔공산 자락에서
이정우
백두산과 1만 리 한반도 둘레길 어느 구간이던 정보가 필요하신 단체 개인등 연락 주세요
현지정보 및 교통 숙박 숙식등 상세한 정보 나누겠습니다
많은 분들이 함께 하시길 기대합니다.
E_mail : kdjj80@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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