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견토지쟁(犬兎之爭)
개와 토끼의 다툼이라는 뜻으로, 두 사람의 싸움에 제삼자가 이익을 봄을 이르는 말이다.
犬 : 개 견(犬/0)
兎 : 토끼 토犬(儿/5)
之 : 의 지(丿/3)
爭 : 다툴 쟁(爪/4)
(유의어)
방휼지쟁(蚌鷸之爭)
전부지공(田父之功)
어인지리(漁人之利)
어인지공(漁人之功)
어인득리(漁人得利)
어옹지리(漁翁之利)
어부지리(漁父之利)
좌수어인지공(坐收漁人之功)
견토지쟁(犬兔之爭)이란 개와 토끼의 다툼이라는 뜻으로, 양자의 싸움에서 제3자가 이익을 본다는 말이다.
개가 토끼를 쫓아 산을 돌고 돌다가 둘이다 지쳐 죽었으므로 농부가 주워 갔다는 말이다.
즉, 대립하는 두 세력이 다투다가 결국은 구경하는 다른 사람에게 득을 주는 싸움을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이다.
전국책(戰國策) 제책(齊策) 선왕편(宣王篇)에 출전(出典)을 둔 견토지쟁(犬兔之爭)의 배경은 다음과 같다.
전국시대, 제(齊)나라 왕에게 중용된 순우곤(淳于髡)은 원래 해학과 변론의 재능이 뛰어난 세객이었다.
齊나라 왕이 위(魏)나라릏 치려고 하자 순우곤은 이렇게 진언했다.
한자로(韓子盧)라는 매우 발빠른 명견이 동곽준(東郭逡)이라는 썩 재빠른 토끼를 뒤쫓았사옵니다. 그들은 수십리에 이르는 산기슭을 세바퀴나 돈 다음 가파른 산꼭대기까지 다섯 번이나 올라갔다 내려오는 바람에 개도 토끼도 지쳐 쓰러져 죽고 말았나이다. 이때 그것을 발견한 전부(田父; 농부)는 힘들이지 않고 횡재[田父之功]하였나이다. 지금 齊나라와 魏나라는 오랫동안 대치하는 바람에 군사도 백성도 지치고 쇠약하여 사기가 말이 아니온데 서쪽의 秦나라나 남쪽의 楚나라가 이를 기화로 전부지공(田父之功)을 거두려 하지 않을지 그게 걱정이옵니다.
이 말을 듣자 왕은 魏나라를 칠 생각을 버리고 오로지 부국강병에 힘썼다.
부국강병으로 패권을 차지하기 위한 치열한 전쟁을 일으키던 전국시대 당시의 대치상황은 크게 전국칠웅(戰國七雄)으로 불리던 齊, 趙, 魏, 漢, 燕, 楚, 秦의 7국이 각축전을 벌이던 와중에 서쪽의 秦은 특히 나머지 6국에게 두려운 존재였다.
여기에서 제자백가(諸子百家) 사상가들 중 종횡가의 활약이 특히 명성을 날렸는데, 소진(蘇秦)을 필두로 한 합종책(合縱策)파와 장의(張儀)를 필두로 한 연횡책(連衡策)파가 큰 성과를 올리게 된다.
6국이 연합해서 강한 秦을 막아내야 한다는 합종책과 6국이 화평하게 秦과 교류하여 선린을 유지하자는 연횡책의 대립이 팽배했기 때문에, 그로 인해 사상 학파의 명칭도 종횡가로 불리게 된다.
앞서 논한 燕과 趙를 유세했던 어부지리(漁父之利)나 입술이 없으면 이가 시리다는 논리인 순망치한(脣亡齒寒)등도 견토지쟁(犬兔之爭)과 함께 모두 강한 秦을 상대하기 위해서는 6국이 연합해야 한다는 합종책의 주장이다.
특히 소진은 자신의 합종책으로 6국을 모두 설득시켜 6국의 재상이 되었으며, 그의 동생들인 소대(蘇代), 소려(蘇勵)등도 모두 소진과 함께 당시에 명성을 날린 인물들이다.
하지만 뒤에 秦을 도운 장의(張儀)의 연횡책에 의해 합종책은 깨어지고 6국은 모두 강한 秦의 시황(始皇)에 의해 멸망당하고 말았다.
당시의 백가쟁명(百家爭鳴)은 동양의 오랜 전통적 사상이 활발하게 전개되어 고대의 동양사상의 기틀을 완성하기에 이르렀고, 중세 동양사상의 바탕을 두게 된 왕성한 사상의 시대라고도 할 수 있다.
물론 중세의 동양사상은 크게 공맹(孔孟)을 필두로 한 유가사상과 노장(老莊)을 필두로 한 도가사상의 큰 줄기로 발전되어 오지만 그 출발점이자 사상적 기반은 모두 춘추시대와 전국시대의 제자백가에 모태를 삼고 있다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혼란한 시대적 배경 속에서 찬란한 사상적 발전을 이룬 백가쟁명의 사상가들을 볼 때, 오히려 작금의 힘들고 어려운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들도 이 시대적 상황을 전화위복의 기회로 삼는 지혜를 발휘해 보아야 할 것입니다.
양자의 다툼에 제삼자가 힘들이지 않고 利를 봄을 비유한 우화로 어부지리(漁夫之利), 방휼지쟁(蚌鷸之爭)과 비슷한 말이다.
견토지쟁(犬免之爭)
토끼와 개가 다투니 농부가 횡재를 얻었다.
1. 끝없는 다툼의 시대에
뉴스 접하기가 두렵다. 세상은 싸움의 연속이다. 최근 몇 년간의 상황을 놓고 보면, 세계 도처에서 전쟁과 테러가 일어났다. 우리의 경우 여당과 야당의 싸움은 그냥 일상이 되었다. 국민의 이익과 나라의 발전이란 대의의 정치적 지향보다는 당리당략에 빠져 상대를 공격하는 소인의 정치가 판치고 있다. 거기다가 자기들의 이익과 기득권 확보를 위한 공통분모가 발생하면 일시적인 화해를 한다. 그들은 세비를 올린다거나 특권을 유지하는 일에는 화합한다. 그리고 또 대립한다.
당 내부에서도 마찬가지이다. 지금 여당은 당 대표 선출을 놓고 시궁창에 들어가기 일보 직전에 있다. 서로 비난과 폭로 전, 보이지 않는 손의 압력과 권모술수는 한도를 넘어서고 있는 듯하다. 이러한 내부의 치열한 싸움은 결국 상대 당에 이익을 준다. 상대 당은 은근히 그것을 비난하면서도 조장하고 다투기를 원한다. 상대 당의 내분과 다툼은 나와 우리 당의 불로소득이 되기 때문이다.
지난 문재인 정권은 순전히 박근혜 정부의 실책에 대한 프리미엄이었다. 박근혜 정부가 무너진 것은 권력에 자아도취 되어버린 박근혜 전 대통령과 그 아류들이 빗어낸 결과였다. 거기에 박근혜 전 대통령의 “배신의 정치”라는 말에 담긴 내 집안에서의 비 충성자 내치기에 의한 이탈이었다. 만약 “배신의 정치”라는 말로 그들을 길들이며 꼼작 못하게 장악하려 하지 않았다면, 링컨처럼 그들을 더 강한 친구로 만들 수 있었다면, 국정농단이란 실정을 저지르지 않았을 수도 있고, 촛불혁명이란 엄청난 사태를 초래하지 않았을지 모르며, 국회에서 탄핵이 가결되지 않았을지 모른다. 그들은 자당 내의 권력다툼으로 파멸했다. 그리고 그 파멸은 국민에게 엄청난 실망을 안겨 주었다. 이를 반면교사로 잘 활용하는 것은 현재의 야당인 더불어민주당이다.
현 정부가 들어선 것도 윤석열이라는 후보가 뛰어나서나 국민의 힘의 역량이 마음에 들어서가 아니었음은 누구나 다 아는 일이다. 문재인 정부와 더불어민주당의 폭주에 실망한 국민의 또 다른 돌파구에 불과했다. 지난 선거 때 더불어민주당의 대통령 후보경선 과정에서 터져 나온 이재명 후보에 대한 각종 의혹에 대한 의구심도 한몫을 했다. 이재명 대표의 성남 FC 의혹, 대장동 의혹 등도 사실은 그 당시 자기 당의 후보경선 과정에서 상대 후보가 들고나온 의혹이었다. 그 이득을 국민의 힘이 톡톡히 본 것이었다.
이런 일은 개인 간의 문제에서도 마찬가지다. 개인 간의 송사가 지나치면 그 두 집안은 망하고 변호사만 돈을 번다. 우리나라 6.25 전쟁은 민족끼리의 싸움이었다. 그 싸움의 와중에 이득을 취한 것은 일본이었다. 패전의 수렁에 빠진 일본에게 한국 전쟁은 산업과 경제 재건의 발판이 되었다. 미국은 그것을 허용했으며 일본은 그것을 잘 활용하였다. 일본국민들은 모두 기이하게도 천황이 무조건 항복을 외치고 무장 해제를 명하자 하나같이 따랐으며 심지어는 점령군 사령관 맥아더에게 찬사와 감사의 편지를 보내며 그들의 살길을 찾았다. 일본국민의 단합된 모습을 본 맥아더는 어리둥절하였다. 하여 그들은 천황을 전범의 대열에서 살려냈고 일본의 정체성을 찾았으며 그들의 역사를 지켰다. 싸움만 지속하는 국민과 싸움을 하더라도 화해와 단결을 할 줄 아는 국민이 겪는 결과는 엄청난 차이를 가져온다.
개인과 개인의 싸움이든 국가와 국가의 싸움이든 화해를 모르고 싸움만 지속하면 둘은 지치고 제삼자가 이득을 본다. 그런 싸움은 결국 제 살 깎아 먹기이며 그 이유는 돈과 권력에 집착한 확증편견이 그들을 지배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들은 자기들이 죽는 줄도 모르고 끊임없이 싸움을 계속한다. 그리고 그 싸움판을 구경하며 지켜보는 제3자는 이득을 보게 마련이다. 지금 우리 대한민국은 그런 끝없는 다툼의 현장에 서 있는 것 같다.
2. 견토지쟁(犬免之爭)의 유래와 의미
견토지쟁(犬免之爭), 이 말은 ‘토끼와 개가 다투니 농부가 횡재를 얻었다.’는 데서 유래되었다. 그리하여 뒷날 둘이 다투다 보면 제3자가 쉽게 이득을 본다는 뜻으로 전이 되었다.
전국시대였다. 나라와 나라 간의 전쟁이 하루도 끊기지 않았다. 어제의 적국이 오늘의 동맹국이 되고 오늘의 동맹국이 내일의 적국이 되는 일은 다반사였다. 서로 천하의 주인이 되고 권력을 극대화하기 위해 싸우고 또 싸웠다.
전씨 제나라의 5대 군주 선왕(宣王) 때의 일이었다. 그는 호방하였고 학문과 유세를 좋아했다. 그래서 추연, 순우곤, 전병, 접여, 신도, 환연 등 유세가를 좋아해 집을 내리고 대부로 봉했으며, 고자, 송견, 윤문, 팽몽, 계진, 맹자 등에게 자유로운 학문 논쟁을 권장하여 제자백가 문화의 절정을 이루었다. 제 선왕의 재위 시절에 해학과 변설에 매우 뛰어난 순우곤(淳于髡BC 385〜305)이란 세객(說客)이 있었다. 그는 순우곤을 우대하였으며 나라의 중대한 결정이 있을 때 그의 말을 경청했다.
선왕이 위(魏)나라를 치려고 계획하고 있었다. 이를 몇 세객들에게 물었다. 이때 순우곤이 나서서 다음과 같이 변설하였다. “옛날에 한자로(韓子盧)라는 세상에서 가장 빠르다는 사냥개와 동곽준(東郭逡)이라는 세상에서 가장 빠르다는 토끼가 있었습니다. 어느 날 날쌘 한자로(韓子盧)가 교활한 토끼인 동곽준(東郭逡)을 잡기 위해 뒤를 쫓았습니다. 그들은 수십 리에 이르는 산자락을 쫓고 쫓기면서 세 바퀴나 돌았고, 가파른 산꼭대기까지 다섯 번이나 오르락내리락하면서 조금도 양보없이 달렸습니다. 둘은 지치고 지쳤습니다. 그러나 계속 달리고 달렸습니다. 그러다가 동곽준(東郭逡)이 힘이 빠져 한자로(韓子盧) 앞에 쓰러져 죽고 말았습니다. 그런데 한자로(韓子盧)도 힘이 빠져서 동곽준(東郭逡)을 바로 눈앞에 두고 그 자리에 쓰러져 죽고 말았습니다. 이때 거기를 지나가는 농부가 있었습니다. 농부는 그것을 발견하고 힘들이지 않고 토끼와 개를 모두 얻는 횡재를 하였습니다. 지금 제나라와 위나라는 오랫동안 대치해 왔습니다. 그 과정에서 병사들은 지칠 대로 지쳐 있고 백성들의 생활도 피폐해 있습니다. 우리 옆에는 서쪽에 진나라가 있고 남쪽에 초나라가 있습니다, 만약 지금 위나라를 정벌한다면 서쪽의 강한 진(秦)나라나 남쪽의 큰 초(楚)나라가 이를 기회로 전부지공(田父之功)을 거두려 하지 않을까 걱정이 됩니다.”
韓子盧者, 天下之疾犬也. 東郭逡者, 海內之狡兎也. 韓子盧逐東郭逡, 環山者三, 騰山者五. 兎極於前, 犬廢於後. 犬兎俱罷, 各死其處. 田父見之, 無勞倦之苦, 而擅其功. 今齊魏久相持, 以頓其兵, 弊其衆. 臣恐强秦大楚承其後, 有田父之功. - 戰國策, 齊策 -
이 말을 들은 제 선왕은 위나라 정벌의 뜻을 접고 내치에 치중하여 부국강병에 더욱 힘을 쏟았다.
이 이야기는 전국책 제책(齊策-제나라의 이야기를 쓴 글)에 나오는 것이다. ‘견토지쟁’은 둘의 치열한 다툼이 발생하면 제삼자가 힘들이지 않고 이익을 얻는 것을 비유하는 말로 전하게 되었다. 이 말과 통하는 성어로 전부지공(田父之功), 어부지리(漁夫之利) 방휼지쟁(蚌鷸之爭) 등이 있다.
3. 계속되는 견토지쟁의 역사
조선의 역사는 당쟁이란 집안싸움으로 얼룩진 역사였다. 그 집안싸움으로 비틀어지기 시작한 것은 수양대군의 계유정난(癸酉靖難)으로부터 시작된다. 이 정난은 그 이전의 집안싸움과 양상이 달랐다. 그 집안싸움으로 상당수가 부패 권력의 중심에 서게 되고 부패 권력을 세습하게 되었다. 그리고 선조 때는 치열한 당파 싸움으로 임진왜란을 겪으면서 전국이 초토화되는 지경에 이르렀다. 그러고도 정신을 못 차리고 치열하게 싸우는 과정에서 병자호란을 맞게 되고 나라는 청국의 속국이 되어버렸다. 청국에서 벗어난 것은 300년이 지난 구한 말이었다.
그러나 구한말은 집안싸움이 더 치열했다. 대원군을 중심으로 한 일파와 민비를 중심으로 한 일파의 집안싸움은 결국 나라를 망하게 했다. 민씨 일파와 고종이 장악한 대한제국은 부정부패와 탐관오리들의 수탈로 더욱 피폐해졌고 동학혁명이 일어났다. 그러나 조정은 동학혁명군의 요구를 해결하려는 뜻이 전혀 없었고 오로지 난의 진압에만 관심이 있었다. 그렇다고 진압할 힘도 없었다. 고종은 당시 대신인 우의정 정범조와 좌의정 조병세 등의 ‘외세를 불러들이면 나라는 그들의 밥이 된다’는 강력한 반대 상소도 물리치고 청나라와 일본을 불러들였다. 결과는 일본의 조선 침략의 교두보를 마련해 주었고 결국 대한 제국은 망했다. 그래서 조선 백성은 피투성이가 되어 죽어갔고, 이득은 고스란히 일본이 본 것이었다.
일제로부터의 독립운동 과정에서도 우리는 좌우로 혹은 지역별로 나누어져서 다투었다. 그 이득은 고스란히 일제가 본 것이었다. 일제는 그것을 충분히 활용했다. 해방 후의 조선은 둘로 갈라져 치열하게 싸웠다. 그 이득은 소련과 미국 등이 보았으며 특히 가장 큰 이득을 본 것은 스탈린의 지령을 받은 김일성 정권이었다. 그 덕택으로 김일성 정권은 지금까지 제왕적 세습체제를 유지하고 있다.
해방 후 둘로 갈라진 이 땅은 6. 25라는 피를 흘렸지만, 다툼은 끝이 없다. 거기다가 남쪽은 끊임없는 정쟁을 그칠 줄을 모른다. 민주주의 사회에서 정쟁은 필수적이나 그것이 한계를 넘어서면 견토지쟁이 되어버린다.
그러한 양상은 2020년대인 지금도 마찬가지다. 지난 대선전의 양당의 모습 또한 마찬가지였다. 지금의 여당이 된 국민의 힘의 대통령 후보 경선 과정에서도 그랬지만 특히 지금 야당이 된 더불어민주당의 대통령 후보 경선 과정에서 온갖 비방과 네거티브는 더 난무했다. 지금 검찰을 맹비난하며 대립의 각을 세우는 이재명 대표의 성남 FC 의혹, 대장동 의혹 등도 사실은 그 당시 자기 당의 후보경선 과정에서 상대 후보가 들고나온 의혹이었다. 집안싸움에서 나온 의혹이었다. 그것이 지금은 국민의 상당수를 창과 방패로 만든 꼴이 되었다. 기이한 것은 상당수의 국민이 그들의 창과 방패가 되어 반목한다는 점이다. 그런데 국민이 왜 그들의 창과 방패가 되어야 하는가? 그리고 그들은 검찰과 사법부의 판단마저 지지와 불신의 대열에 서 있다. 사법부의 판단마저 믿을 수 없을 때 나라는 망국의 늪 바로 앞에 서 있는 것이나 다름없다. 이 기이한 현상을 어떻게 해석할까?
그 모든 것의 기저에는 권력과 돈이라는 함수관계가 작용한다. 인간이 가진 욕망의 중심에서 그 욕망을 강하게 조종하는 것 중에 대표적인 것이 리비도(성애적 본능)와 권력 욕망이다. 거기에 돈은 필수적인 매개체이며 도구이다. 그것은 본질적이면서도 공격적 야만성을 가지고 있어서 삐뚤어지게 발휘되면 상대를 공격하게 된다. 그리고 자신은 물론 세상에 엄청난 상처를 남기게 된다. 그리고 그것이 지나치면 국민도 편을 나누어 그에 편승하게 되고 세력화되어 다투게 된다. 지금의 대한민국이 그렇게 되었다.
4. 슬로건 뒤에 숨겨진 야만
그런데 그들은 모두 국가와 국민을 위한다는 나름의 슬로건과 명분을 내세우고 있다. 그들이 내세우는 슬로건과 명분의 뒤에는 권력욕이라는 야만이 도사리고 있는데 국민은 그것을 모르고 그들의 슬로건만 믿는 경우가 많다. 그리고 상당수는 그 슬로건에 지지를 보내면 패를 이룬다. 이 또한 기이한 일이다.
구한 말 외세를 불러들인 고종과 그 아류들은 조선 반도의 평화를 위해 외세를 불러들였다고 한다. 일본도 마찬가지였다. 일본이 조선이 들어와 동학혁명군을 처참하게 학살한 것도, 조선을 식민지화하여 오랫동안 지배하며 수탈해 온 것도, 그들의 슬로건에 의하면 한반도의 평화와 번영을 위한 지배였지 침략이 아니었다.
일제 강점기의 친일파들은 일제의 슬로건에 박수를 보냈다. 동족이야 죽든 말든 그들은 그들 나름의 확증편견으로 동족이 흘리는 피눈물을 외면했다. 수많은 독립지사가 독립과 진정한 삶을 외치며 죽어가는 데도 그들은 아랑곳하지 않았다.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했을까? 이 또한 기이한 일이며 국민은 거기에 속아 넘어가는 경우가 허다하였다.
우리는 모든 회사나 국가 등 그들이 내세우는 슬로건에 속아 넘어가서는 안 된다. 히틀러 치하의 독일 국민이 나치에게 그토록 많은 지지를 보낸 것도 나치의 슬로건에 속아 넘어간 것이었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그토록 이성적이라는 독일 국민이 어떻게 히틀러의 그 위장된 슬로건에 속아 넘어갔을까? 한때 히틀러의 지지율은 95%에 육박하였다. 이성을 자랑하는 독일 국민 거의 모두가 히틀러의 슬로건에 속아 넘어간 것이었다. 그리고 그렇게 속아 넘어간 대가는 엄청났다.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했을까?
이런 형상을 보면, 인간을 이성적 동물이라고 하며 이성이 있기에 올바른 판단을 하고 행동할 것이라는 믿음은 산산조각이 난다. 이런 형상은 이성적이든 비이성적이든 그와는 큰 관계가 없는 듯하다. 중요한 것은 그 중심에 도사린 것이 무엇이냐의 문제이다. 히틀러가 평화와 위대한 독일 재건의 슬로건을 내세웠지만, 그 이면에는 나치의 영원한 지배라는 음모가 숨겨져 있었다. 일제가 조선 평화를 외쳤지만, 일제의 번영과 아시아의 영구적 지배를 향한 음모가 숨겨져 있었다. 그리고 사람들은 그것을 의심하면서도 그저 끌려갔다.
그러면 국민은 왜 그들의 야만을 모르고 혹은 눈치챘더라도 개의치 않고 그 슬로건에 열광하며 패를 나누어 싸우게 될까? 여기에는 그들의 꿈의 좌절과 그들이 처한 삶의 상황이 복합적으로 작용한다. 그것은 시대의 흐름과 국민 대중이 겪는 시대 상황에서 희망과 분노, 좌절과 기대라는 욕망의 꼬임이 발생하여 나타난 것이다. 이성적인 국민의 대명사라는 독일 국민이 히틀러 치하에서 열광하였던 것은 세계 제1차 대전의 패배로 인한 삶의 초토화 속에서 희망적인 삶의 열망과 민주주의를 꿈꾸었다. 그러나 바이마르 공화국은 살인적 인플레이션과 실업난이 극에 달했으며, 공산당의 활동은 극성을 부리고 정쟁은 끊어질 날이 없었다. 국민뿐 아니라 청년들마저 꿈의 좌절과 욕망의 꼬임이 극에 달했다. 그때 나타난 것이 히틀러였다. 히틀러는 그것을 채워줄 것으로 믿었다. 또 믿고 싶었다.
지금 한국 사회는 대립만 연속하는 것 같다. 구한 말에는 권력과 이익을 앞에 놓고 심하게 다투는 과정에서 선량한 백성을 그토록 많이 죽이고 결국 일제가 나라를 몽땅 삼키게 하더니 일제 강점기에는 독립 투쟁의 방식을 놓고도 좌우로 갈라져 대립을 연속하였다. 그리고 해방 후에 지금까지 우리가 사는 이 한반도는 이념이란 늪에 빠져 계속 대립하고 있다. 그 바람에 6.25란 엄청난 희생을 겪었다. 그러나 그 대립은 지금도 언제 끝날지 모른다. 대한민국은 삶의 본질적인 이유보다는 사상과 이념의 편견이란 허상에 사로잡혀 계속 대립하고 있다. 현실 정치에서는 각자가 만들어 놓은 이념의 감옥에 자기를 가두어 놓고 상대를 향해 끊임없는 삿대질만 해 댄다. 확증편견이란 감옥에 자기를 가둔 대립은 그 확증편견의 감옥을 벗어나지 않는 한 대립은 영원할 수밖에 없다.
지금 한국 사회가 이토록 국민까지 편을 갈라 창과 방패를 들고 대립하는 것도 독일 국민이 겪은 욕망의 꼬임과 분노와 좌절, 그리고 막연한 기대심리와 다르지 않은 것 같다. 우리는 그토록 염원하던 잘 사는 나라를 위해 허리띠를 졸라맸다. 그러나 그 결과는 경제적으로는 잘살게 되었지만, 개발독재로 인해 민주주의의 후퇴를 가져왔다. 다행스럽게 중산층의 성장으로 민주주의에 대한 열망은 더 커졌고 80년의 봄을 맞이했으나 신군부의 등장으로 민주주의에 대한 열망의 좌절을 또 맛보았다. 그후 치열한 싸움으로 얻은 민주주의가 제대로 정착하는가 했더니 온갖 질곡을 겪고 있다. 특히 최근에 이르러 국정농단과 촛불시위 등을 겪으면서 실업과 경제적 어려움까지 더해졌다. 이에 대한 좌절과 분노는 욕망의 꼬임을 가져왔다. 그래서 많은 사람이 ‘오지 않는 은마’를 기다리듯이 누군가에게 매달려 온갖 희망을 다 걸게 되었다. 그러다 보니 그가 어떤 사람인지는 그리 따지지 않는다. 다만 나의 희망을 채워줄 수 있으면 된다는 기대심리만 크게 작용한다, 거기에는 이성적 사고보다는 왜곡된 감정이 작동한다. 그것은 확증편견을 낳고 그 확증편견이란 인지적 오류의 감옥에 스스로를 가두어 버린다. 그리고 그것은 이념의 수준에까지 이르게 된다. 확증편견이 이념의 수준에까지 이르면 팬덤화되어 상대에게 창을 들게 된다. 지금 한국 사회가 그런 꼴이 된 것 같다. 그리고 정치인들이 그것을 조장하고 있다.
인간이 확증편견이란 감옥에 자기를 가두는 큰 이유는 권력과 돈에 대한 집착과 그에 편승한 파장효과 때문이다. 권력과 돈을 향한 투쟁의 중심에 있는 사람들과 그것을 추종하는 사람들은 양상이 다르다. 그것의 중심에 있는 사람들은 그것을 쟁취하므로 그 권력과 돈을 향유할 수 있지만, 그것을 추종하는 수많은 대중은 그 직접적인 만족조차 누리지 못하고 그 파장만 느낄 뿐이다. 그들은 다만 만족을 누릴 수 있을 것이라는 희망과 그들이 장악한 돈과 권력을 보고 대리만족을 누릴 뿐이다. 그럼에도 확증편견에 빠지면 사이비 종교에 빠져 어우적거리듯 자신의 이성을 잃고 허우적거리게 된다. 그리고 끝없이 공격성을 드러낸다.
5. 견토지쟁을 넘어 화해와 상생의 세상으로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가 그의 명상록에서 “인생은 투쟁이며, 또 나그네가 임시로 쉬는 곳이다.”고 했다. 산다는 것은 끊임없는 싸움이다. 그 싸움을 어떤 양상으로 이끌어 가느냐에 따라 인생은 달라진다. 그 싸움은 자기 자신과 싸움이며 세상과 싸움이기도 하다. 그 싸움에서 정당하게 승리한 자는 인생의 참맛을 볼 수 있지만 비굴한 자는 인생의 의미를 상실한다.
인생의 싸움은 방향과 힘과 속도가 매우 중요하다. 그리고 그것을 결정하는 것 역시 자기 자신이다. 싸움은 싸움으로만 이어지면 영원한 투쟁 속에 자신은 파멸되어 간다. 싸움은 화해로 나아가는 길목이며 화해를 전제로 한 상생의 씨앗이다. 그렇지 않을 때 싸움은 파멸의 늪이 된다. 그것은 그 싸움이 자기 자신과 싸움이든, 타인과 싸움이든, 내가 속한 집단 내에서의 싸움이든, 다른 집단과 싸움이든, 마찬가지이다.
삼라만상의 모든 사물과 현상은 대립과 화해의 양면성을 함께 지니고 있다. 사물은 각자의 특징을 가지기에 대립하게 된다. 그러나 그것이 대립만 연속하면 서로 극복하려고만 하기에 상처와 반목을 통해 공멸의 길을 걷게 된다. 그러나 삼라만상의 모든 사물과 현상에는 강한 화해의 특징을 지닌다. 그것은 각자가 가진 공통분모이며 그것이 있기에 자연과 세상은 부대끼며 상생 발전하게 된다.
인간의 삶 또한 이와 같다. 인간 하나하나는 각자 개별적인 특질을 지니기에 다르다. 그 다름의 특징만 내세우며 자기의 특징만 앞세우면 다툼만 일어나고 결국은 투쟁의 연속이 된다. 그러나 인간은 그 개별적인 특질 이상으로 공통분모를 가지고 있다. 그 공통분모는 화해를 향한 손짓이다. 그 손짓을 잘 발휘하게 되면 개별성은 발전의 촉매제가 되며 이들이 화합할 때 시너지 효과는 그 어떤 사물보다 뛰어나게 된다. 그러나 인간에게 이기적 욕망이란 것이 있어서 이것이 지나치게 발휘되면 상생의 특질을 짓밟아 지속적인 투쟁만 일삼게 된다. 그래서 인간사회에 필요한 것이 이기적 욕망을 초월하는 화해의 윤리이며 그 화해의 윤리가 바로 인간다움의 길로 안내하는 도(道)이다. 그리고 인간사회는 대립과 화해를 통해 지속적인 발전을 이루게 된다. 그래서 화해는 대립물인 인간이 가져야 할 최고의 윤리이며 지혜이다.
전국책에 나오는 견토지쟁에 관한 고사는 우리에게 이것을 가르쳐 준다. 싸우기만 하면 서로 지쳐서 함께 죽는다. 그리고 그 이득은 엉뚱한 사람(엉뚱한 나라)이 본다. 개인 간에도 그렇고 집단 간에도 그렇고 국가 내부에서도 그렇다. 지금 대한민국 국민은 이성적 사고로 되돌아가야 한다. 특히 정치 지도자들이 그래야 한다. 분노와 좌절, 욕망의 꼬임이 가져다준 확증편견에서 벗어나야 한다. 우리를 구제할 ‘은마’는 오지 않는다. 그 ‘은마’는 우리 손으로 만들어야 한다. 이제 지난날 분열과 대립으로 겪었던 질곡의 역사는 종식하여야 한다. 우리의 이성으로 우리의 화합과 상생을 살려내야 한다. 대한민국은 행복해야 한다. 거기에 정치인과 지도자들이 앞장서야 한다.
▶️ 犬(개 견)은 ❶상형문자로 犭(견)은 동자(同字)이다. 犬(견)은 개의 옆 모양을 본뜬 글자이다. 한자는 그것의 제일 두드러진 곳을 강조한 것이다. 소와 양은 뿔을, 말은 갈기를 개는 짖는 입을 각각 특징으로 본뜬 자형(字形)이다. 犬(견)은 다른 글자의 변이 되면 개사슴록변(犭=犬; 개)部로 쓴다. ❷상형문자로 犬자는 '개'라는 뜻을 가진 글자이다. 갑골문 이전의 문자라고도 하는 도문(陶文)에도 犬(개 견)자가 발견될 정도로 개는 인류와 매우 친숙한 동물이었다. 그래서인지 갑골문에서는 마치 재롱을 피우듯이 꼬리를 추어올린 개가 그려져 있었다. 犬자는 이렇게 꼬리가 강조된 개를 그린 것으로 다른 글자와 결합할 때는 '개'나 '개의 행동', '짐승'과 관련된 뜻을 전달한다. 犬자가 부수로 쓰일 때는 犭자로 바뀌기도 하며 狐(여우 호)자나 狼(이리 랑)자처럼 개와 비슷한 부류의 동물을 뜻하기도 한다. 그래서 犬(견)은 ①개(갯과의 포유류) ②겸칭(謙稱), 자신(自身)이나 자식(子息)을 낮춤 ③하찮은 것의 비유 ④남을 멸시(蔑視)하는 말 ⑤서쪽 오랑캐의 이름 따위의 뜻이 있다. 용례로는 개와 말을 견마(犬馬), 송곳니를 견치(犬齒), 개가죽을 견피(犬皮), 개와 고양이를 견묘(犬猫), 개와 원숭이를 견원(犬猿), 개가 짖음을 견폐(犬吠), 주인에게 충실한 개를 충견(忠犬), 사냥 때 부리는 매와 개를 응견(鷹犬), 군사 목적에 쓰이는 특별히 훈련된 개를 군견(軍犬), 사나운 개를 맹견(猛犬), 사랑하는 개를 애견(愛犬), 이름난 훌륭한 개를 명견(名犬), 개끼리 싸움으로 붙임 또는 거기에 쓰이는 개를 투견(鬪犬), 개와 원숭이의 사이처럼 매우 사이가 나쁜 관계를 일컫는 말을 견원지간(犬猿之間), 개나 말의 하찮은 힘이라는 뜻으로 임금이나 나라에 충성을 다하는 노력 또는 윗사람에게 바치는 자기의 노력을 낮추어 말할 때 쓰는 말을 견마지로(犬馬之勞), 개와 토끼의 다툼이라는 뜻으로 양자의 싸움에서 제3자가 이익을 봄을 이르는 말을 견토지쟁(犬兔之爭), 개나 말이 주인을 위하는 마음이라는 뜻으로 신하나 백성이 임금에게 충성을 다해서 몸을 바치는 자기 마음을 겸손하게 이르는 말을 견마지심(犬馬之心), 자기 나이를 낮추어 일컫는 말을 견마지년(犬馬之年), 개나 말의 정성이라는 뜻으로 임금이나 나라에 바치는 정성 또는 남에게 자기가 바치는 정성을 아주 겸손하게 일컫는 말을 견마지성(犬馬之誠), 개나 말이 하는 일없이 나이만 더하듯이 아무 하는 일없이 나이만 먹는 일 또는 자기 나이를 겸손하게 이르는 말을 견마지령(犬馬之齡), 개나 말이 하는 일없이 나이만 더하듯이 아무 하는 일없이 나이만 먹는 일 또는 자기 나이를 겸손하게 이르는 말을 견마지치(犬馬之齒), 개나 말의 봉양이라는 뜻으로 부모를 봉양만 하고 경의가 없음 또는 봉양만 하는 것은 효도가 아니라는 뜻을 이르는 말을 견마지양(犬馬之養), 개와 토끼의 다툼이라는 뜻으로 두 사람의 싸움에 제삼자가 이익을 봄을 이르는 말을 견토지쟁(犬兎之爭), 개의 어금니가 서로서로 맞지 않는 것같이 국경선이 볼록 나오고 오목 들어가 서로 견제하려는 형세를 일컫는 말을 견아상제(犬牙相制), 원래의 뜻은 동쪽 닭과 서쪽 개가 우는 소리가 들린다는 뜻으로 닭 우는 소리와 개가 짖는 소리가 여기저기에서 들린다 하여, 인가가 잇대어 있음을 이르는 말을 계견상문(鷄犬相聞), 폭군 걸왕의 개도 성왕 요임금을 보면 짓는다는 뜻으로 윗사람이 교만한 마음을 버리고 아랫 사람을 진심과 믿음으로 대하면 아랫사람은 자기 상관에게 충성을 다하게 된다는 것을 이르는 말을 걸견폐요(桀犬吠堯), 고을 개가 무리지어 짖는다는 뜻으로 소인들이 남을 비방함을 이르는 말을 읍견군폐(邑犬群吠), 가라말이 울고 개가 짖는다는 뜻으로 들을 가치가 없는 이야기나 보잘것없는 문장을 이르는 말을 여명견폐(驪鳴犬吠) 등에 쓰인다.
▶️ 兎(토끼 토)는 상형문자로 兔(토)는 본자(本字)이다. 그래서 兎(토)는 ①토끼 ②달(달 속에 토끼가 있다는 뜻에서 달의 별칭이 됨) 따위의 뜻이 있다. 용례로는 사냥하러 가서 토끼를 잡으면, 사냥하던 개는 쓸모가 없게 되어 삶아 먹는다는 뜻으로 필요할 때 요긴하게 써 먹고 쓸모가 없어지면 가혹하게 버린다는 뜻 또는 일이 있을 때는 실컷 부려먹다가 일이 끝나면 돌보지 않고 헌신짝처럼 버리는 세정을 비유해 이르는 말을 토사구팽(兎死狗烹), 그루터기를 지켜 토끼를 기다린다는 뜻으로 고지식하고 융통성이 없어 구습과 전례만 고집함을 일컫는 말을 수주대토(守株待兎), 개와 토끼의 다툼이라는 뜻으로 두 사람의 싸움에 제삼자가 이익을 봄을 이르는 말을 견토지쟁(犬兎之爭) 등에 쓰인다.
▶️ 之(갈 지/어조사 지)는 ❶상형문자로 㞢(지)는 고자(古字)이다. 대지에서 풀이 자라는 모양으로 전(轉)하여 간다는 뜻이 되었다. 음(音)을 빌어 대명사(代名詞)나 어조사(語助辭)로 차용(借用)한다. ❷상형문자로 之자는 '가다'나 '~의', '~에'와 같은 뜻으로 쓰이는 글자이다. 之자는 사람의 발을 그린 것이다. 之자의 갑골문을 보면 발을 뜻하는 止(발 지)자가 그려져 있었다. 그리고 발아래에는 획이 하나 그어져 있었는데, 이것은 발이 움직이는 지점을 뜻하는 것이다. 그래서 之자의 본래 의미는 '가다'나 '도착하다'였다. 다만 지금은 止자나 去(갈 거)자가 '가다'라는 뜻으로 쓰이고 之자는 주로 문장을 연결하는 어조사 역할만을 하고 있다. 그래서 之(지)는 ①가다 ②영향을 끼치다 ③쓰다, 사용하다 ④이르다(어떤 장소나 시간에 닿다), 도달하다 ⑤어조사 ⑥가, 이(是) ⑦~의 ⑧에, ~에 있어서 ⑨와, ~과 ⑩이에, 이곳에⑪을 ⑫그리고 ⑬만일, 만약 따위의 뜻이 있다. 용례로는 이 아이라는 지자(之子), 之자 모양으로 꼬불꼬불한 치받잇 길을 지자로(之字路), 다음이나 버금을 지차(之次), 풍수 지리에서 내룡이 입수하려는 데서 꾸불거리는 현상을 지현(之玄), 딸이 시집가는 일을 일컫는 말을 지자우귀(之子于歸), 남쪽으로도 가고 북쪽으로도 간다는 뜻으로 어떤 일에 주견이 없이 갈팡질팡 함을 이르는 말을 지남지북(之南之北), 주머니 속에 있는 송곳이란 뜻으로 재능이 아주 빼어난 사람은 숨어 있어도 저절로 남의 눈에 드러난다는 비유적 의미의 말을 낭중지추(囊中之錐), 나라를 기울일 만한 여자라는 뜻으로 첫눈에 반할 만큼 매우 아름다운 여자 또는 나라를 위태롭게 한다는 말을 경국지색(傾國之色), 일을 맺은 사람이 풀어야 한다는 뜻으로 일을 저지른 사람이 그 일을 해결해야 한다는 말을 결자해지(結者解之), 알을 쌓아 놓은 듯한 위태로움이라는 뜻으로 매우 위태로운 형세를 이르는 말을 누란지위(累卵之危), 어부의 이익이라는 뜻으로 둘이 다투는 틈을 타서 엉뚱한 제3자가 이익을 가로챔을 이르는 말을 어부지리(漁夫之利), 반딧불과 눈빛으로 이룬 공이라는 뜻으로 가난을 이겨내며 반딧불과 눈빛으로 글을 읽어가며 고생 속에서 공부하여 이룬 공을 일컫는 말을 형설지공(螢雪之功), 처지를 서로 바꾸어 생각함이란 뜻으로 상대방의 처지에서 생각해 봄을 이르는 말을 역지사지(易地思之), 한단에서 꾼 꿈이라는 뜻으로 인생의 부귀영화는 일장춘몽과 같이 허무함을 이르는 말을 한단지몽(邯鄲之夢), 도요새가 조개와 다투다가 다 같이 어부에게 잡히고 말았다는 뜻으로 제3자만 이롭게 하는 다툼을 이르는 말을 방휼지쟁(蚌鷸之爭), 부모에게 효도를 다하려고 생각할 때에는 이미 돌아가셔서 그 뜻을 이룰 수 없음을 이르는 말을 풍수지탄(風樹之歎), 아주 바뀐 다른 세상이 된 것 같은 느낌 또는 딴 세대와 같이 많은 변화가 있었음을 비유하는 말을 격세지감(隔世之感), 쇠라도 자를 수 있는 굳고 단단한 사귐이란 뜻으로 친구의 정의가 매우 두터움을 이르는 말을 단금지교(斷金之交), 때늦은 한탄이라는 뜻으로 시기가 늦어 기회를 놓친 것이 원통해서 탄식함을 이르는 말을 만시지탄(晩時之歎), 위정자가 나무 옮기기로 백성을 믿게 한다는 뜻으로 신용을 지킴을 이르는 말을 이목지신(移木之信), 검단 노새의 재주라는 뜻으로 겉치례 뿐이고 실속이 보잘것없는 솜씨를 이르는 말을 검려지기(黔驢之技), 푸른 바다가 뽕밭이 되듯이 시절의 변화가 무상함을 이르는 말을 창상지변(滄桑之變), 호랑이를 타고 달리는 기세라는 뜻으로 범을 타고 달리는 사람이 도중에서 내릴 수 없는 것처럼 도중에서 그만두거나 물러설 수 없는 형세를 이르는 말을 기호지세(騎虎之勢), 어머니가 아들이 돌아오기를 문에 의지하고서 기다린다는 뜻으로 자녀가 돌아오기를 기다리는 어머니의 마음을 이르는 말을 의문지망(倚門之望), 앞의 수레가 뒤집히는 것을 보고 뒤의 수레는 미리 경계한다는 뜻으로 앞사람의 실패를 본보기로 하여 뒷사람이 똑같은 실패를 하지 않도록 조심함을 이르는 말을 복거지계(覆車之戒) 등에 쓰인다.
▶️ 爭(다툴 쟁)은 ❶회의문자로 争(쟁)의 본자(本字)이다. 손톱 조(爪)와 또 우(又) 그리고 물건을 가리키는 갈고리 궐(亅)을 합친 글자로서, 위와 아래에서 손으로 물건을 잡고 서로 잡아당기며 다툰다는 뜻으로 쓰인다. ❷회의문자로 爭자는 ‘다투다’나 ‘경쟁하다’라는 뜻을 가진 글자이다. 爭자는 爪(손톱 조)자와 又(또 우)자, 亅(갈고리 궐)자가 결합한 모습이다. 爪자는 ‘손톱’이라는 뜻이 있지만, 여기에서는 단순히 ‘손’의 동작으로 쓰였다. 갑골문에 나온 爭자를 보면 소의 뿔을 놓고 서로 잡아당기는 모습이 그려져 있었다. 금문에서는 소뿔 대신 쟁기가 그려져 있었지만 서로 다투고 있다는 뜻은 같다. 爭자는 이렇게 무언가를 놓고 서로 다툰다는 의미에서 ‘다투다’나 ‘경쟁하다’라는 뜻을 갖게 된 글자이다. 그래서 爭(쟁)은 ①다투다 ②논쟁하다 ③다투게 하다 ④간하다(웃어른이나 임금에게 옳지 못하거나 잘못된 일을 고치도록 말하다) ⑤경쟁하다 ⑥모자라다 ⑦차이(差異) 나다 ⑧다툼 ⑨싸움 ⑩어찌 ⑪어떻게 ⑫하소연(딱한 사정 따위를 간곡히 호소함) 따위의 뜻이 있다. 같은 뜻을 가진 한자는 다툴 경(競)이다. 용례로는 서로 다투는 중요한 점을 쟁점(爭點), 싸워서 빼앗아 가짐을 쟁취(爭取), 서로 다투어 무슨 사물이나 권리 따위를 빼앗는 싸움을 쟁탈(爭奪), 서로 다투며 송사를 일으킴을 쟁송(爭訟), 서로 자기의 의견을 주장하여 다툼을 쟁의(爭議), 서로 권리를 다툼을 쟁권(爭權), 앞서기를 다툼을 쟁선(爭先), 우승을 다툼을 쟁패(爭覇), 일을 먼저 하기를 서로 다툼을 쟁두(爭頭), 서로 다투어 토론함을 쟁론(爭論), 같은 목적을 두고 서로 이기거나 앞서거나 더 큰 이익을 얻으려고 겨루는 것을 경쟁(競爭), 싸움으로 무력으로 국가 간에 싸우는 일을 전쟁(戰爭), 상대를 쓰러뜨리려고 싸워서 다툼을 투쟁(鬪爭), 얼크러져 다툼이나 말썽을 일으켜 시끄럽게 다툼을 분쟁(紛爭), 말이나 글로 논하여 다툼을 논쟁(論爭), 버티어 다툼을 항쟁(抗爭), 말로써 옥신각신 함을 언쟁(言爭), 여러 패로 갈라져 다툼을 분쟁(分爭), 당파를 이루어 서로 싸움을 당쟁(黨爭), 말로써 굳게 간하여 실수를 바로잡고 잘못을 고치게 함을 간쟁(諫爭), 앞서기를 다투고 뒤처지는 것을 두려워 한다는 쟁선공후(爭先恐後), 서로 장점과 단점을 가지고 다툼을 이르는 말을 쟁장경단(爭長競短), 고기를 잡으려는 사람은 물에 젖는다는 쟁어자유(爭魚者濡) 뼈와 살이 서로 다툼의 뜻으로 형제나 같은 민족끼리 서로 다툼을 골육상쟁(骨肉相爭), 도요새와 조개의 싸움으로 어부에게 잡히고 말았다는 뜻으로 제3자만 이롭게 하는 다툼을 이르는 말을 휼방지쟁(鷸蚌之爭) 등에 쓰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