잠이 보약이다
한여름 밤은 원래 짧다고 했다. 그러나 열대야가 이어지는 밤은 짧기는커녕 끝이 보이지 않는다. 창밖에서는 매미 소리가
지칠 줄 모르고 이어지고, 방 안에는 낮 동안 달궈진 열기가 쉽게 빠져나가지 않는다. 선풍기는 쉬지 않고 돌아가지만 시원
한 바람 대신 뜨거운 공기만 이리저리 밀어낼 뿐이다. 잠은 멀리 달아나고, 몸은 이리 뒤척 저리 뒤척하다 어느새 희미한
새벽빛을 맞는다.
며칠째 잠다운 잠을 이루지 못했다. 아침이면 몸은 천근만근이고, 책상 앞에 앉아 있어도 정신은 안갯속을 헤매는 듯 몽롱
했다. 글을 읽어도 눈에 들어오지 않고, 허리는 돌덩이를 매단 듯 무거웠다. 몸이 피곤하면 마음도 함께 지친다는 평범한
진리를 그제야 실감하게 되었다.
어젯밤에는 생각을 조금 바꾸었다. 팬 돌아가는 소리가 다소 거슬리더라도 에어컨을 켜 두고 잠을 청했다. 서너 시간 남짓
깊은 잠이었을 뿐인데 아침은 전혀 다른 세상이었다. 몸은 한결 가벼웠고 머리는 맑았다. 창밖에서 불어오는 바람도 어제
와 다르지 않았지만, 그것을 맞이하는 내 몸은 전혀 달라져 있었다. 겨우 몇 시간의 숙면이 사람을 이렇게 바꾸어 놓을 수
있다니, 새삼 잠의 힘 앞에서 고개가 숙여졌다.
사람들은 흔히 보약을 찾는다. 몸이 허하면 좋은 약재를 구하고, 이름난 명의를 찾아가기도 한다. 그러나 정작 우리 곁에는
돈 한 푼 들지 않는 가장 귀한 보약이 늘 기다리고 있다. 바로 깊고 편안한 잠이다.
잠든다는 것은 단순히 눈을 감는 일이 아니다. 지친 몸에게는 쉼을 허락하고, 메마른 마음에게는 위로를 건네는 일이다.
낮 동안 혹사당한 근육은 잠 속에서 다시 힘을 얻고, 복잡하게 얽혔던 생각들은 조용히 매듭을 푼다. 상처 난 마음도 잠을
지나고 나면 조금은 아물어 있고, 어둡던 마음도 새벽 햇살과 함께 다시 빛을 되찾는다. 그래서 잠은 의사보다 먼저 우리
몸을 치료하는 침묵의 명의인지도 모른다.
문득 학교에서 배웠던 '탄성한계'라는 말이 떠오른다. 아무리 단단한 쇠도 일정한 힘까지는 버티지만, 그 한계를 넘으면
다시는 원래 모습으로 돌아오지 못한다. 더욱이 한계에 이르지 않는 힘이라도 끝없이 반복되면 결국 피로가 쌓여 금속은
갈라지고 만다. 이를 금속의 피로라고 한다.
사람도 다르지 않다. 눈에 보이지 않는 스트레스와 걱정, 쉼 없이 이어지는 일상은 조금씩 마음을 닳게 하고 몸을 지치게
한다. 겉으로는 아무렇지 않은 듯 살아가지만, 속에서는 피로가 차곡차곡 쌓여 어느 날 문득 탈이 나기도 한다. 그래서
사람에게는 멈춤이 필요하고, 쉼이 필요하다. 그리고 그 쉼의 가장 깊은 형태가 바로 잠이다.
옛사람들은 많은 것을 경험으로 배웠다. 어려운 의학 용어도, 과학적인 설명도 없었지만 삶 속에서 얻은 지혜만큼은 누구
보다 깊었다. 그래서 "잠이 보배다."라고 했고, 또 "잠이 보약이다."라고 했다. 짧은 한마디지만 그 속에는 수많은 세월과
수많은 삶이 녹아 있다.
나이가 들수록 몸은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 하루를 무리하면 하루만큼의 피로를 요구하고, 잠을 빚지면 반드시 갚으라고
재촉한다. 젊을 때는 밤을 새워도 견딜 수 있었지만, 이제는 하룻밤의 숙면이 하루의 삶을 결정한다. 건강은 특별한 비법
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제때 쉬고, 제때 잠드는 평범한 습관에서 자란다는 사실을 몸이 먼저 가르쳐 준다.
오늘도 밤이 찾아올 것이다. 누군가는 더 많은 일을 하기 위해 잠을 미루고, 누군가는 걱정을 안은 채 뒤척일 것이다.
그러나 하루를 충실히 살아낸 사람에게 잠은 끝이 아니라 새로운 내일을 준비하는 가장 따뜻한 선물이다. 눈을 감는 것은
하루를 포기하는 일이 아니라, 내일을 살아갈 힘을 키우는 시간이다.
이제야 어른들의 말씀이 마음 깊이 스며든다.
잠은 시간을 허비하는 일이 아니라 생명을 채우는 시간이다.
그래서 잠은 보약이다.
아니, 어쩌면 세상에서 가장 값비싸면서도 누구에게나 공평하게 주어진, 하늘이 내려준 가장 따뜻한 보약인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