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구나무종*에게
나희덕
미안해요, 물구나무종이 되기에는
몸이 너무 무거워졌어요
머리에 피가 쏠리는 걸 견디기 어렵고
팔목은 발목보다 훨씬 취약해요
두 팔을 땅에 대고 한 걸음도 나아갈 수가 없어요
직립보행의 나날이 너무 길었나봐요
물구나무종, 당신은
손으로 걸어다니는 새로운 인류
땅을 향해 머리를 두고
나무들 사이에서 오래오래 물구나무 서 있는 사람
손바닥에서 뻗어나온 실뿌리들이
땅 속으로 뻗어갈 때
당신의 발끝에선 연록색 잎이 돋아날 것만 같아요
그러나 땅도 안전하진 않지요
당신은 기계들이 파놓은 구멍들을 곧 만날 거에요
검은 먼지와 열기가 뿜어져 나오는 구멍들을
몇 층으로 교차하는 지하의 터널들을
굉음을 삼키는 굉음
냄새를 삼키는 냄새
어둠을 삼키는 어둠
비명을 삼키는 비명
물구나무종이 되려 하던 저는
갑자기 당신 걱정을 하기 시작했어요
물 위의 나무처럼 깊고 고요할 수 없다는 생각에
나는 당신을 찾아 나가려 했어요
나뭇가지들 사이로 희미하게 보이는 당신의 두 발을
* 염지혜, 〈물구나무종(handstanderus) 선언〉
-계간 《포지션》 2022년 여름호
나희덕
충남 논산 출생. 1989년 〈중앙일보〉 신춘문예 시 당선.
시집 『뿌리에게』 『그 말이 잎을 물들였다』 『그곳이 멀지 않다』 『어두워진다는 것』 『가능주의자』 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