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문을 펼치면 시간이 열린다
새벽은 언제나 신문과 함께 왔다.
학생 시절의 새벽은 유난히 설레었다. 대문 앞에 '툭' 하고 떨어지는 신문 소리만 들리면 잠결에도 벌떡 일어나 신문을
집어 들었다. 정치도 경제도 아니었다. 가장 먼저 펼친 것은 신문 연재소설이었다. 김용의 무협소설 《비호》는 하루
하루가 기다림이었다. 한 회를 읽고 나면 다음 이야기가 궁금해 견딜 수 없었고, 그 기다림이 오히려 행복이었다.
그 무렵 나는 학교 도서관에서 《삼국지》와 《서유기》, 《수호전》을 닳도록 읽었다. 책장을 넘길 때마다 영웅들은
천하를 누볐고, 협객들은 불의를 응징했으며, 의리는 목숨보다 귀한 가치였다. 현실은 평범한 학생이었지만 마음만은
이미 강호를 떠도는 소년이었다.
친구 가운데는 무협지라면 넋을 잃는 녀석도 있었다. 책 대여방에서 무협소설을 보따리째 빌려 와 며칠 밤을 새우곤 했다.
지금 생각하면 우리는 무협을 읽은 것이 아니라 정의를 읽었고, 모험을 읽었으며, 젊음을 읽었던 것인지도 모른다.
그렇게 반세기가 흘렀다.
세상은 너무도 많이 변했다. 신문보다 스마트폰이 먼저 눈에 들어오고, 활자보다 영상이 먼저 말을 건다. 종이신문은
인터넷 신문이 되었고, 도서관보다 검색창이 더 많은 것을 알려주는 시대가 되었다. 이제는 손가락 하나만 움직여도 지구
반대편의 소식을 실시간으로 만난다.
그런데도 나는 아직 종이신문을 구독한다.
누군가는 굳이 왜 불편한 종이를 고집하느냐고 묻는다. 인터넷이 훨씬 빠르고, 필요한 기사는 복사하여 파일로 저장하면
검색도 쉽지 않으냐고 한다. 맞는 말이다. 나 역시 인터넷에서 기사를 저장해 두면 언제든 찾아볼 수 있다는 편리함을 잘 안다.
하지만 편리함이 모든 가치를 대신하지는 못한다.
신문을 펼치는 순간 손끝에 전해지는 종이의 감촉, 바스락거리는 소리, 한 면 한 면을 넘기며 우연히 마주치는 기사들. 화면
에서는 목적한 것만 찾아 읽지만 종이신문에서는 생각지도 못했던 글과 눈이 마주친다. 그 우연한 만남이 때로는 하루를
바꾸기도 한다.
그래서 나는 마음에 남는 기사를 오려 스크랩을 한다. 언젠가는 정리해야지 하면서도 차일피일 미루다 보니 종이상자 몇
개가 어느새 방 한쪽을 차지하고 있다. 아마 내가 세상을 떠난 뒤에는 그 상자들도 폐지와 함께 쓰레기차에 실려 갈 것이다.
누군가에게는 낡은 종이일 뿐이겠지만, 내게는 지나온 세월의 조각들이다.
신문 한 장에는 그날의 역사가 담기지만, 내게는 그날의 삶도 함께 접혀 있다.
유신의 엄혹한 시대에도 신문에는 사람들의 마음을 일으켜 세우는 글이 있었다. 김수환 추기경의 칼럼은 자유를 갈망하는
이들에게 한 줄기 샘물과도 같았다. 세상이 아무리 답답해도 양심의 목소리는 살아 있다는 믿음을 주었다.
지금은 표현의 자유가 훨씬 넓어졌다고 하지만 이상하게도 마음은 더 허전하다. 나라를 걱정하는 어른의 무게도, 언론의
사명을 끝까지 붙드는 기자의 고집도 좀처럼 만나기 어렵다. 기술은 놀라울 만큼 발전했지만 사람의 신뢰와 품격은 그만큼
자라났는지 선뜻 대답하기 어렵다.
그래서일까.
나는 매일 아침 신문을 펼치면서 오늘의 뉴스만 읽는 것이 아니다. 그 속에서 어제의 나를 만난다. 새벽마다 연재소설을
기다리던 소년을 만나고, 정의로운 세상을 꿈꾸던 청년을 만나고, 세월을 견디며 살아온 오늘의 나를 만난다.
신문을 펼친다는 것은 종이를 펼치는 일이 아니다.
시간을 펼치는 일이다.
바스락거리는 종이 한 장이 반세기를 건너 어린 시절의 아침으로 나를 데려간다. 잉크 냄새는 이미 희미해졌지만 추억의 향기는
아직도 선명하다. 세상은 디지털이라는 이름으로 쉼 없이 앞으로 달려가지만, 나는 가끔 종이신문 한 장 앞에서 걸음을 늦춘다.
빠르게 사는 것보다 깊게 기억하는 것이 더 소중한 날이 있기 때문이다.
아마 내가 종이신문을 끝내 놓지 못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을 것이다. 세상의 소식을 읽기 위해서가 아니라, 지나온 내 삶의 흔적을
다시 읽기 위해서.
오늘도 나는 신문을 펼친다.
그리고 한 장의 종이 위에서, 흘러간 시간이 조용히 다시 살아나는 소리를 듣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