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18 장 내 이름은 김모래
공항에서 혼자 최대한 시간을 보내다가 밤이 되서야 기숙사로 돌아올 수 있었다.
다음날 아침 눈을 뜨니 일요일 아침 텅 빈 기숙사가 내 마음을 더 헛헛하게 만들고 있었다. 하지만 잠시 후면 기숙사는 다시 돌아온 아이들로 북적댈 것이었다. 왠지 이 기숙사를 떠나면 이곳을 아주 많이 그리워할 거라는 예감이 들었다.
학교 뒷산으로 올라갔다. 나도 모노처럼 전망대에 올라 명상에 잠기고 싶은 심정이었다. 그러나 거기엔 이미 누군가가 있었다. 30대 초반으로 보이는 깔끔한 정장차림의 남자가 학교전경을 관망하고 있었다. 인기척을 느끼고 그가 나를 보았다.
그런데 난 왠지 그가 목이 마를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모르겠다. 그 순간에 왜 그런 뜬금없는 생각이 들었는지..그에게 가방에 있던 생수를 내밀었다.
“물...드실래요?”
그가 환하게 웃었다.
“대단해. 내가 목이 마른 걸 알고 여기로 온 거지?”
“네? 아니에요. 전 ..전 이 학교 기숙사에 있어요. 그냥 산책 나온 거예요.”
그가 물을 벌컥 벌컥 마시고 말했다.
“과연 그럴까? 난 지금 몹시도 목이 마르다고 이 학교를 향해 신호를 보내고 있었는데 말이야. 학생이 내 신호를 들은 게 아닌 게 확실해?”
이건 뭐지...별 이상한 사람이 다 학교에 들어와서 설치고 있구나 싶었다.
“십이 년만인데..모든 게 다 그대로야.”
“혹시..여기 졸업생이세요?”
“빙고.”
빙고?
“볼일 있어서 며칠 귀국했지. 잠깐 시간을 내서 이렇게 모교도 와보고...참 좋다.”
“네에...”
더 이상 뭐라고 할 말이 없었다. 난 고개를 꾸벅 숙이고 돌아섰다.
“학생은 왜 이 학교에 온 거지?”
그의 뜬금없는 질문에 다시 그를 향했다.
“네?”
“학생은 이 학교에 왜 온 거냐고?”
이건 교장과의 면접과도 비슷하다. 대충 미래에 대한 포부와 성공적인 삶에 대해서 주저리 주저리 떠들까 하던 찰나에 그가 말했다.
“아..알았다. 학생 눈을 보니까...”
그가 내 앞으로 다가와서 내 눈을 바라보았다.
“음..맞아. 학생은 사랑 때문에 여기로 왔어.”
사랑?
“학생은 너무 외로웠어. 그래서 사랑을 찾아서 여기로 온 거야. 아주 어른스러운 척 강한 척 하지만 학생은 너무나 외롭고 힘들었어. 그래서 사랑을 찾아 아주 먼 곳에서 여기로 왔지.”
난 침을 꿀꺽 삼켰다. 이런 사기꾼 같은 점쟁이에게 속을 내가 아니다.
“관상을 전문적으로 보시나 봐요.”
“그렇게 보여? 하하하하.”
난 다시 꾸벅 고개를 숙이고 몸을 돌렸다.
“올 해 빨간 책은 누가 가졌지?”
난 가방을 바닥에 떨어트렸다. 더 이상 이 사람에게 돌아설 필요가 없었다. 이 사람이 빨간책에 관한 모든 궁금증을 해결해 줄 열쇠를 쥔 사람이란 직감이 왔다. 그가 놀란 표정으로 말했다.
“아차, 지금 몇 시지?”
그가 시계를 봤다.
“이런... 비행기 시간이 다 됐다. 그럼 공부 열심히 하고. 안녕.”
그가 내가 말릴 틈도 없이 계단을 날라서 뛰어가고 있었다.
나도 그를 따라 뛰었다. 정원을 가로질러 그가 학교 앞에 서있던 택시에 올라탔다. 택시가 출발하고 나도 뒤이어 온 택시를 탔다. 드레곤이 오토바이를 타고 오다가 날 보았다. 난 마음이 급해서 그에게 아는 척을 할 겨를도 없었다.
“아저씨, 저 택시 공항 가거든요? 저도 공항으로 가요. 절대로 저 택시 놓치면 안돼요.”
공항 안에서 그를 놓쳤다가 다시 남자 화장실에서 나오는 그를 발견했다. 뛰어가서 그의 옷자락을 잡았다.
“저기요.”
그가 깜짝 놀라 돌아다보았다.
“그 책...그 책에 대해 말해주세요.”
“응?”
“그 빨간 책요. 알아요. 지금 비행기 타셔야 하는 거 그러니까 시간 딱 5분만 주세요. 그 책이 도대체 뭐죠?”
그가 의아하게 눈썹을 치켜 올렸다.
“크라운학교 학생이라면서 그 책이 뭔지 모른다고?”
“아니요. 들었어요. 매년 선배로부터 물려받는 책이라는 정도는요. 하지만 제가 알고 싶은 건 그 책의 내용이에요.”
“책을 갖고 있는 사람에게 물어보면 되잖아. 미안하지만 난 지금 바빠서 이러다 비행기 놓치겠어요.”
“그 책을 누가 갖고 있는지 우리가 어떻게 알겠어요? 그렇게 비밀리에 전달되는데...게다가 그 책의 내용은 책의 주인 외에는 절대 아무에게도 공개되지 않는데요.”
“그러니까 학생 말은 크라운의 3학년 학생들도 누가 올해의 빨간 책의 주인공인지 모른다는 건가?”
“네.”
“아직..까지는요.”
라고 대답한 건 드레곤이었다.
“드레곤!”
드레곤이 오토바이로 내 뒤를 쫒아오고 있는 줄은 꿈에도 몰랐다. 드레곤이 남자에게 말했다.
“그 책의 주인공이 누구인지는 아직 아무도 모릅니다. 하지만 결국에 알게 되겠죠. 아주 바람직하지 않은 방법으로요.”
바람직하는 않은 방법?
“그게 무슨 말이야? 드레곤?”
남자가 우리를 번갈아 보다가 말했다.
“아무래도 다음 비행기를 타야 되겠군.”
남자와 드레곤과 난 공항의 한적한 레스토랑에 마주 앉았다. 드레곤이 입을 열었다.
“그 책은 기숙사에 있는 티오피 클럽 아이들에게만 전해져오고 있습니다. 그래서 모두들 티오피 그룹에 들고 싶어 난리가 나죠. 티오피는 갈수록 기고만장해졌고요.”
남자가 입을 열었다.
“말도 안 돼.”
“게다가 그 책을 가진 아이의 정체는 그 아이가 사고를 당하면서 밝혀지죠.”
‘사고? 설마..아닐 거야. 빨간 책은 지금 모노에게 있는데…’
남자가 한숨을 쉬었다.
“도대체 왜 그 지경이 된 거지?”
드레곤이 그에게 물었다.
“선배님도 그 책의 주인이었죠?”
남자는 고개를 끄덕였다.
“처음에 그 책을 손에 넣은 건 우연이었어. 12년 전 난 지독한 우울증에 시달리는 고 3이었지. 매일 약을 먹고 수업시간엔 잠만 자는 아이였어. 뒷산 전망대는 내 유일한 쉼터였는데 그러다 어느 날 문득 매일 같이 보던 전망대 한 쪽 벽이 그날따라 유달리 달라 보이는 거야. 그리고 그 벽에 네모난 틈이 있는 걸 발견했지.”
남자의 이름은 이중언이었다. 그는 그 네모난 틈에서 상자를 발견했다. 그 상자 안에는 금박으로 7이라는 선명한 숫자가 찍힌 빨간 표지의 책이 있었다.
그로부터 한시간 동안 우린 그의 이야기를 들었다. 마치 그 빨간 책을 다 읽은 그런 기분이었다. 그가 다음 비행기를 타러 자리에 일어섰을 때 드레곤과 나는 머리가 멍해져 있었다.
공항을 나와 드레곤의 오토바이를 타고 학교로 돌아오는 길에 드레곤이 갑자기 바다 쪽으로 방향을 돌렸다. 드레곤이 바다 앞에 오토바이를 세웠다. 드레곤과 난 바다 앞에서 말없이 서로를 마주보았다. 먼저 입을 연 사람은 드레곤이었다.
“이대로 학교에 갈 순 없었어. 널....”
“...”
“널 이제부터 애기라고 불러야 할지, 모진이라고 불러야 할지....모라누나라고 불러야 할지 몰라서 말이야.”
왠지 그의 이 말이 놀랍지가 않았다. 나도 느끼고 있었다. 드레곤이 날 알고 있다는 것을. 내가 모라누나라고 소개를 할 때부터 드레곤의 눈은 내 눈동자 안 깊숙한 곳 김모래가 숨어 있는 곳을 찾아냈기 때문이다.
“난 김모진도 아니고 김모라도 아니고 ...내 이름은 김모래야. 모노의 친누나, 김모래.”
드레곤의 얼굴에 충격이 흘렀다. 그가 잠시 고개를 숙여 자신의 얼굴에 드러난 배신감을 감추려는 게 보였다.
“모노와는 12년 전에 어쩔 수 없이 헤어져야 했던 이복누나, 24살 김모래. 그게 나야.”
그가 마침내 고개를 들었다.
“각오는 했지만 ...생각보다 충격이 크다.”
드레곤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가자, 학교에.”
“아니, 다 얘기할게. 내 얘기 들어줘. 제발...”
난 그에게 모든 것을 얘기했다. 엄마가 양아빠를 만나게 된 일부터 모든 걸 전부 다.
마지막으로 내가 덧붙였다.
“하지만 내가 모진이로서 한 말과 행동은 다 진심이었어. 비록 19살 남자인 척은 했지만 내 마음은 너희를 속이지 않았어. 어제...어제 네가 만난 모라누나도 나야. 내가 누구인 척 했든 널 대하는 내 마음은 다르지 않았어.”
내 말에 드레곤이 허탈한 미소를 지었다.
“그런 비슷한 소리 전에도 들은 적이 있다.”
“...?”
“재작년에 아버지가 우리 가족을 떠났어. 다른 여자랑 살기 위해서 엄마와 날 떠난거야. ‘승호야, 아빠는 너를 사랑해. 아빠는 떠나지만 널 사랑하는 마음에는 변함이 없다‘ 그런 말도 안되는 소리 들어본 적 있어? ”
그건 다르다고 소리치고 싶었다. 하지만 인정해야 했다. 정도는 다르지만 그에게 배신감을 안겨준 건 마찬가지니까...그가 헛헛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오늘을 절대 잊지 못할 거야. 빨간 책의 비밀에 대해서도 알게 된 날이고...너에 대해서도 알게 된 날이니까.”
그가 날 아직도 ‘너’라고 부르는 것에 기뻤다.
“미안해.”
라고 드레곤에게 말했지만 내가 하고 싶은 말은 ‘너를 좋아해’ 였다.
드레곤의 오토바이 뒤에 앉아서 학교로 돌아왔다. 그런데 학교 앞이 난리였다. 경찰차와 구급차가 있었고 학교 관리인들과 티오피 아이들이 다 모여 있었다.
우린 그들에게 달려갔다.
“무슨 일이야? 또 불이 난거야?
현준이의 표정이 모든 걸 말해주고 있었다.
난 재빨리 구급차로 달려갔다. 구급차 안에는 모노가 의식을 잃은 체 머리에 피를 흘리며 누워 있었고 구급요원이 모노에게 산소 호흡기를 끼우고 있었다.
“모노야!!! 모노... 어떻게 된 거에요? 모노야!”
구급요원이 날 밀어냈다.
“들어오면 안 돼. 자, 출발이요.”
구급요원이 차 문을 닫고 차가 출발했다.
현준이 다가왔다.
“모진아....싸이보그가 119에 신고했어. 기숙사 옥상에서 떨어지는 걸 봤대.”
“...어쩌다..어쩌다가...”
병원에 어떻게 도착했는지 기억은 없지만 수술실 앞에 길모어 교장이 나타나고 모노의 외가댁 사람들이 도착해서야 난 정신을 차렸다. 교장은 우리에게 기숙사로 돌아가서 연락을 기다리라고 말했다.
“싫어요, 전 여기 있을 거예요.”
내 대답에 모노의 외삼촌인 듯 남자가 말했다.
“걱정해주는 건 고맙다. 하지만 우리 가족들이 있으니까 너희들은 가는 게 좋겠어. 수술실에서 나오는 대로 연락해주마. 모진이라고 그랬나? 모노는 참 좋은 친구를 뒀구나.”
그제야 눈물이 흐르기 시작했다.
기숙사 방으로 돌아와서 드레곤과 현준이과 함께 전화를 기다렸다. 현준은 따뜻한 차를 가져왔고 드레곤은 계속 내 전화기를 들고 쳐다보고 있었다.
드디어 전화가 왔다. 드레곤이 나를 보았다. 두려움에 전화를 받을 수가 없었다. 어머니가 사고를 당했다고 걸려온 전화는 아무것도 모르고 받았지만 이건 ....심장을 조이게 만드는 전화였다. 드레곤이 내 대신 전화를 받았다.
“여보세요?....네.....네.”
침착한 드레곤의 목소리를 통해선 아무것도 짐작할 수 없었다. 마침내 드레곤이 전화를 끊고 나를 바라보았다.
“수술...잘 됐대. 지금 회복실에 있대.”
“...정말? 너 거짓말 하는 거 아니지?”
“2층이어서 다행이었고 밑에 나무가 있어서 다행이었어. 몸이 건강한 상태였으니까 회복도 빠를 거래.”
난 손에 얼굴을 묻었다. 현준은 조금 당황해했고 드레곤이 나를 안아 주었다. 난 드레곤의 품에서 한참을 울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