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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슬포.,산방산 앞바다
우도
우도 잠수함
제주도 섬속의 섬들.
문섬
문섬
마라도 & 가파도
우도
섭지코지
샤인빌 리조트
2017.07.19 제주시 인구 50만을
대비하여 체재 정비가 필요하다.
2017.01.09 뉴스 > 제주도민일보
지난해 제주인구가 월
1600여명이 증가하며
66만명을 넘어섰다.
9일 제주도 등에 따르면
지난해 말 기준 인구는
제주시 48만3325명,
서귀포시 17만7865명
등 66만1190명으로 집계.
이는 1년 사이에 1만9835명,
월 평균 1600여명씩 늘어난 셈.
읍면 지역에서는 제주시 애월읍이,
서귀포시 대정읍 상승폭이 가장 컸다.
동지역에서는 제주시 삼양동과
서귀포시 대륜동 상승폭이 높았다.
반면 제주시 일도2동, 용담동 등이 감소.
서귀포시 송산동, 중앙동,
천지동 등도 인구가 감소했다.
그러나 증가폭은 10월부터
둔화세로 돌아서며 제주살이
열풍이 한층 꺾였다는 분석이다
2016.06.09 제주 이민
열풍으로 인구 65만 돌파.
제주도 산방산 유람선.
용머리해안 앞바다
제주도 범섬 앞바다
제주도., 차귀도 앞바다 무인도들.
차귀도 독수리섬
차귀도 무인도서
차귀도 무인도
차귀도 앞바다
차귀도
차귀도
차귀도
무인도 차귀도.,옛 집터.
차귀도
차귀도
차귀도 앞바다
차귀도 죽도 와도
용머리해안 앞바다.
송악산 용머리해안., 앞바다.
성산포 유람선
서귀포 앞바다.,무인도 범섬
서귀포 앞바다.
서귀포 앞바다.,무인도 섭섬.
섭섬
섭지코지
우도 성산포 유람선
황우지해안
비양도(飛揚島)·우도(牛島)·
상추자도(上楸子島)·하추자도·
횡간도(橫干島)·가파도(加波島)·
마라도(馬羅島) 등 8개의 유인도와
54개 무인도로 이뤄진.,제주특별자치도.
제주도는 한반도 남단의 가장 큰 섬으로
선사시대로부터 조선시대에 이르기까지
제주의 유서깊은 전통문화가 이어져왔다.
갈색곰 뼈 덧무늬 토기와 누른무늬 토기
돌도끼. 돌끌, 공이, 등 제주세무서유적 출토.
긴돌칼 이음독널..빌레못동굴 구석기시대 유적.
'250만년전~ 만년 전.'., 구석기시대.
'약 7만년전 ~ 만년 전' 제주도 유물.
구석기시대부터 제주인의 정착과정과
탐라국이 탄생하기 전까지 문화 발전상.
'중국, 일본, 오키나와, 대만, 등을 잇는
동북아시아 해양문화 교류의 축.,제주도
목포에서 남쪽으로 141.6㎞,
부산에서 남서 방향으로 286.5㎞,
대마도(對馬島)에서 서쪽으로 255.1㎞.
동경 126°09′∼127°00′,
북위 33°10′∼34°35′.
면적 1,845.88㎢,
인구 604,670 명(2013년)
'민요 고장' 성읍민속촌,
'무속(巫俗)의 당공' 보성리 민속촌,
'연등(燃燈)의 제단' 월령리민속촌, 표선민속촌 등
민속 행사로는., '한라문화제, 삼성사제 및 삼성혈제' 등.
한라산 중심 아름다운 자연 경관으로.,관광업 발달.
제주 화산섬과 용암 동굴은 유네스코 세계 자연 유산.
대한민국 출범 전 전라남도에 속했으나 미군정 때 분리.
2006년부터는 특별자치도로 지정되어 자치경찰제 실시,
교육자치권 확대, 중앙권한 이양, 자치입법권, 자치재정권.
하위 기초지방자치단체를 두지 않은 단층제 광역지방자치단체
남북으로 두 개의 행정시
제주시와 서귀포시가 설치.
북제주 지방은 연평균기온이 14.7℃, 1월 4.8℃, 8월 25.8℃
남제주 지방은 연평균기온이 15.6℃, 1월 6℃, 8월 26.6℃이다.
연강수량 1,440㎜(제주시)∼1,688㎜(서귀포시).,국내 최다우 지역.
특히 7∼9월에는 '열대성저기압' 태풍의 영향으로 많은 비.
우리나라 최남단 해상에 있으며 연안에 난류가 흐르고 있어
고립된 섬이라 연중 바람이 불고 흐린 날이 많은 다변성일기.
연중 온난하고 기온의 연교차도 적은 해양성기후를 나타낸다.
해안지역에 위치한.,'산방산. 송악산(松岳山)·
성산일출봉, 두산봉(斗山峰), 당산봉 산굼부리.'
빗물이 절리(節理)를 통하여 지하로 쉽게 스며들어
하천 발달이 미약하며, 이 지역은 대부분.,건천(乾川).
하여, 한라산 남사면 지역 대부분 생활 용수도 귀한 곳.
북사면.,산지천(山池川)·도근천(都近川)·한천(漢川)과
남사면.,창고천, 천제천 등은 용천에서 물을 공급 받는다.
'서귀포칠십리' 일대는 주상절리를 따라서 높은 해식애 지역.
이 밖에 용암동굴로는
만장(萬丈) & 김녕(金寧)·
협재(挾才)·쌍룡굴(雙龍窟) 등
만장굴은 세계문화유산으로 등록된., 관광명소.
약 250만년 전 생성된, 세계 제일 규모.,용암동굴.
조선시대 출륙금지령으로 섬에 고립된 제주도민.
1629년(인조 7년) ~1823년(순조23년)까지 2백년간.
일제강점기에는 출륙 뿐만 아니라 일본으로도 진출.
제주도는 지역이 좁고 인구가 적은데 비하여
잡역.잡세가 많아.,도민들이 살아가기 힘들었다.
남자는 물론 여자도 군인 등 공역의 의무를 치뤘다.
이와 같은 사회적인 여건들은
제주도민을 파탄에 이르게 하였다.
제주도민들이 가장 꺼리는 6가지 고역.
목자역(牧子役)
과원직(果園直)
선격역(船格役)
답한역(畓漢役)
포작역(鮑作役)
잠녀역(潛女役)
이들은 조정에 바칠 전북 . 귤 . 말 . 약초 등
진상품을 채취하고 기르고 운반하던 부역자들.
이들은 정해진 수량을 채우기 위해 목숨을 내걸고
깊은 바다 속으로, 한라산 목초지로 나가야만 하였다.
조선시대 인구 10만이 넘은 적이 없던.,제주.
조선 말, 제주도민은 수차례 민란을 일으킨다.
조선왕실 및 조정에 대한 반감을 표출하였던 것.
1862년의 '강제검난',
1898년의 '방성칠난',
1901년의 '이재수난' 등
1945년 8월 15일 해방 직전까지
제주도 인구는 20만명 수준이었다.
태평양 전쟁에서 일본의 패색이 짙어지자
일본으로 건너갔던 재일 제주도민들이 귀환.
1944년 제주도민 인구는 22만 1,366명 이었다.
1945년 8·.15 해방 후, 1946년 인구는 26만 6,149명.
1948년에는 '4.3사태'로 상당한 인구 손실이 있었다.
약 30만 제주도민 가운데 2만 5천~3만명 학살 피해자.
당초 토벌대가 파악한 무장대 숫자는 최대 500명.
남한 단독정부 수립을 위한 1948년 5월 10일 선거가 예정되면서
남로당의 존립이 위협받게 되자 단독선거, 단독정부 반대 명분으로
김달삼 등은 남로당 중앙당과 협의 없이 독단적으로 무장폭동을 결정.
1948년 4월 3일 새벽 2시, 김달삼 등 350여 명이 무장
제주도 내 24개 경찰지서 가운데 12개 지서를 일제히 공격.
우익단체 요인들의 집을 습격한 것이 제주도 4.3 사건의 시작.
1948년 11월부터 중산간마을 강경진압 소개령으로 95% 소실.
삶의 터전을 잃은 주민 2만명이 무장대 일원이 되는 결과를 초래.
진압 군경은 가족 중에 한명이라도 없는 경우에 도피자 가족으로 분류.
부모와 형제자매를 대신 죽이는 '대살(代殺)'을 자행.
재판절차도 없이 주민들이 집단으로 사살되기도 하여
세화, 성읍, 남원 마을들은 무장대 습격으로 주민이 희생.
1954년 9월 21일 한라산 금족(禁足) 지역이 전면 개방됨
1948년 4.3 사태가 발발한후 7년 7개월 만에 막을 내렸다.
한편, 1950년 6.25 전쟁 전후 피난민들이 대거 유입되었다.
1951년 창설된 이후에 1956년 해체되기까지
제주도 서귀포시 대정읍 모슬포.,'육군 제1 훈련소'.
50만 장병이 이곳에서 훈련 받고 전선으로 투입되었다.
1951년 모슬포에 육군제1 훈련소가 들어섬에 따라
인구가 크게 늘어 1955년 인구는 28만 8,806명을 기록.
그러나, 곧 1945년 8.15 해방 직후 수준으로 줄어들었다.
그후, 제주도 인구는 지금까지 지속적인 증가추세를 보여왔다.
1960년대 말, 본격적인 관광 및 감귤 농원의 개발로 인구가 증가.
1960년 28만 1,723명, 1994년 51만 4,449명, 2007년 563,388명.,인구.
제주도는 여자가 많은 것으로 유명하다.
1995년 인구의 남녀비율은 98 :100 인데,
'15~24세' 연령은 남자가 여자보다 많았다.
전체 연령층에 있어서도 여초현상이 완화
50대 이상에서는 여전히 여성비율이 높았다.
하지만, 2007년 남녀 인구비율은 차이가 없다.
제주도는 육상자원이 빈약하여
취락지구는 수산물을 얻기 쉬운
해안 포구(浦口)를 중심으로 발달.
물이 귀한 제주도에서
해안은 용천(龍泉)이 솟아나
취락지역 입지조건에 유리하다.
애월 용천수& 제주도 용천수 분포도.
제주 용천수 노천탕
제주.,용천수
고려시대에 들어서는 반도부에서
전란과 사회적·경제적인 핍박을 피하여
제주도로 유입하는 사람들이 늘어남에 따라서
본섬 중산간지대 농경지 확장으로 거주지역도 확장.
원나라에 의해 목마장들이 설치됨과 동시에 형성된
목마촌(木馬村)도 중산간지대 취락 발달에 한몫 했다.
고려말에서 조선초에 이르는 기간에는
왜구의 잦은 침입으로 해안지대 취락들이
대거 중산간지대로 이주하여 정착을 하였다.
제주 성읍민속마을
성읍 민속마을이 조선시대 중산간지대 취락지역으로
본래 성산읍 고성리에 있던 정의현이 이곳으로 옮겨지고
성읍 민속마을 둘레에 성벽을 새로 축조함으로서 형성된 것.
대정읍 구억리.,봉천수.
중산간지대에는 물이 귀하여
빗물, 즉 봉천수(奉天水)가 식수.
1920년대에 해안을 따라 건설된 신작로(新作路),
즉, 일주도로는 취락의 분포에 큰 변화를 일으켰다.
일주도로가 경제활동 대동맥으로 중요도가 높아진 것.
이에 따라 중산간지대 취락들은 급격히 쇠퇴하는 한편
일주도로에 면한 해안지대의 취락들은 각종 공공기관과
시설들이 이전, 신설되면서 급속히 성장하여, 도시로 발전.
애월· 한림· 모슬포· 서귀포· 남원· 성산 등이 그러한 예이다.
제조업의 발달이 보잘 것 없는 이들 도시는 지역 중심지로서
주로 관광산업, 농수산업에 바탕을 두고 발전을 계속하고 있다.
1945년 일본패망과 1950년 6.25전쟁 이후,
1970/80년대 관광산업개발과 감귤산업 등
국가 주도의 정책 추진으로 인하여 인구증가.
1990년대에는 인구면에서 도시화가 극단적으로 진행되었다.
특히 제주시는 1970년대부터 추진된 신제주 개발로 급속히 성장.
제주시와 서귀포시는 인구가 지속적으로 계속 늘어나고 있는.,추세.
제주특별자치도에 따르면, 2010년 이후 매년 인구 증가 뚜렷.
2014년 8월 인구는 60만 up, 외국인 주민도 1만명 시대를 맞았다.
외국인 근로자 47.2%, 결혼 이민자 19.1%, 유학생 9.6%, 기타 24.1%.
제주특별자치도는 행정구역이 2개 행정시
7개 읍, 5개 면, 31개 동으로 구성되어 있다.
즉, 도시 인구비율이 높고 농촌 인구는 빈약한 편.
그러나, 읍급 도시들은 면적과 인구에 비해
중심지 시가의 발달이 빈약한 것이 보통이며,
주민의 대부분이 1차 산업에 종사하고 있는 편.
남원읍과 애월읍은 제주시 및 서귀포시와 면적이 비슷하고,
이들 읍과 시는 행정구역 안에 한라산 정상부를 포함하고 있다.
제주도는 동아시아 역사 상, 전술적인 요충지이자 태평양 전진기지.
육군제1훈련소 & 중공군 포로수용소.
'남제주 대정읍 상모리' 대한민국 육군 훈련소.
'모슬포 6823부대' 육군제1훈련소(일명 : 강병대)
'1910년~1945년' 일본군이 건설하고 주둔하였던 곳.
.........육군제1훈련소.......
1950년 7월 제5훈련소 제3교육대.
이후 육군 제1훈련소가 창설되었다.
초기에는 해병부대 주둔지역 중심으로 밀집 배치
훈련소 내 병력이 10만명을 넘으면서 안덕면 화순 및
서귀포까지 각개전투교장 및 병력 숙영지가 설치되었다.
위 치 : 상모리 일대(훈련소 정문 - 높이 5.8m, 폭2.5m)
창 설 일 : 1951. 3. 21(초대소장 백인엽 준장)
배출병력 : 500,000명 ('51. 3. 21 ∼ '55. 4. 30)
해 체 일 : 1956. 1월.
......................
제주.,육군 제5훈련소(1950.7.6 창설)
모슬포 육군 제1훈련소
육군제1훈련소 신병 모집
6.25전쟁때 설치된 제1훈련소 해체 후
논산에 들어선 제2훈련소가.,논산훈련소.
제1훈련소는 60만평 규모였지만
지금 남아있는 유적이 별로 없다.
대정여고 역시 제1훈련소 부지였다.
당시 98 의무대 건물이
지금도 실습실로 쓰인다.
강병대는 강한 병사를 키우는 터전이란 뜻이다.
모슬포 일제 강점기 때, 군사시설이 많았던 관계로
군사적, 지리적 중요성이 제주도 내에서는 제일이었다.
8. 15광복 후 대한민국 건국과
이데올로기 갈등으로 점철된 격동기와
4. 3 & 6.25를 거치며 모슬포는 군사도시.
1950년 6.25 발발 후 국군이 패퇴하여
간신히 낙동강 전선에서 버티게 되었다.
이 무렵 임시정부가 대구를 거쳐 부산까지 밀리자
나라를 지킬 병사 양성 및 훈련소가 급히 만들어졌다.
육군 제1훈련소가 대구5훈련소에서 제주도로 이전.
뒤이어 필요한 군 야전병원인 98병원까지 들어서고,
육군 제29사단이 최홍희 준장에 의해 이곳에서 창성.
그당시 전황은 맥아더 사령관이 직접 지휘한
인천상륙작전(1950.9.15)으로.,'9.28 서울 수복'.
90일 만에 국군은 연합군과 함께 북진을 시작하게 된다.
평양 탈환 압록강 초산까지 진격
우세한 연합군이 지원으로 많은 포로들을
생포 부산과 거제도에 포로수용소에 수용하였으나
포화상태여서 모슬포 3곳에 중공군 포로수용소가 들어섰다.
해군도 훈련장정과 전선으로 향하는 장병들을
수송하기 위한 항만 부대를 화순 백사장과
산방산 밑에 이르는 백사장지역에 배치했고,
훈련소에 물자수송을 담당했다.
이와 함께 공군도 공군사관학교를
대정초등학교에 임시로 이전하여
총 1,073명을 교육시켰다.
(대정초등학교에 공군사관학교훈적비 설립)
모슬포 알뜨르 비행장을 모슬포공항으로 부르면서
정부고위인사, 외국귀빈,장성들의 이동과 급한 물자를 수송.
모슬포비행장으로 인해
미 공군이 부대를 배치하여
미군들까지 모슬포에 주둔하게된 것.
수많은 피난민들과 훈련병 가족들이 연일 물려들어
모슬포를 중심으로 대정면 상주인구는 무려 7만 이상
제1훈련소는 경제, 산업, 사회, 교육, 의료,
문화, 예술 등 여러면에서 많은 영향을 끼쳤다.
육군 제1훈련소.,최초 해병대 여군들과 교관.
1950년 8월 30일 해병대 3,4기수로 입대한 여군.
126명 교육수료 76명은 현역복무, 나머지는 제대.
복무자는 헌병, 경리 병과에서 후방지원 업무를 담당.
......육군 제1훈련소......
1950. 6.25 6.25 동란 발발
1951. 3.21 육군 제1훈련소 모슬포에 창설(소장 백인엽 준장)
1952. 8.9 장도영소장 전출
1952. 8.14 오덕준 준장 부임 겸 제주지역위수사령관 취임
1952. 9.15 권준 소장 취임
1953. 1.21 육군제1훈련소를 강병대로 통칭 결정
1954. 7.27 이응준 중장 훈련소장 취임
1956. 1 해체
....................
제주 구 육군제1훈련소 지휘소(등록문화재 제409호)’
일제강점기 건립~ 광복 전까지 일본(오무라부대) 주둔,
1946년 육군 제9연대 창설 및
1951년3월31일 육군 제1훈련소 창설시
지휘소로 사용된 역사적 가치가 큰 시설물.
현재 '제주 구 육군 제1훈련소 지휘소는
서귀포시 대정읍 상모리에 위치하여 있다.
문화재로 등록된., 단층 건물 1동 637㎡
세면장 1동 117㎡ 등은 현재 국방부 소유.
또한 이번에 같이 문화재로 등록되는 ‘
제주 구 해병훈련시설(등록문화재 제410호)
인천상륙작전에 참전했던 해병 3기생들의 훈련소.
역사적인 군사 유적으로,
병사(兵舍)와 함께 세면장 등은
1950년 6.25 한국전쟁과 관련한 상징물.
특히, 광복 직후 한국군 창설과 훈련 상황을
이해하는데 중요한 유적으로 평가를 받고 있다.
대한민국 국군은 1946년 제9연대를 이곳에 창설.
......................
......................
원래, 이곳은 1926년부터 일본의 태평양전쟁 전진기지.
1937년 중일 전쟁 때 태평양전쟁 전진기지로서 사용.
1941년 미국이 일본을 제재하자 이곳에서 미국 진주만 공격
태평양전쟁 당시 일본군 점령지역.
미국이 태평양 전쟁에 참전 후,
1944년 8월 10일에 일본 '괌' 함락.
1944년 10월 26일에는 필리핀 함락.
1945년 1월 제주도에는 천명을 넘지않았던 일본군.
1945년 8월에는 7만, 곧 이어 36만 1481명으로 증가.
이때 일본군대 총 병력의 1/5이 제주도에 배치되었다.
미군이 규슈 북부에 상륙하려 한다면 제주도가 발판.
1945년 8월부터 제주도는 일본군의 주목을 받기 시작.
일본군은 정예 부대를 속속들이 제주도로 불러 모았다.
일본 본토 국민을 전쟁으로부터 보호 할.,목적.
그러나, 미국은 '히로시마'에 원폭을 투하한다.
1945년 8월 15일 일본 천황이 무조건 항복 선언.
제2차 대전 말, 창설된 일본 58 군이 주둔했었는데,
제58군 병기부장인 오무라 슈(大村修) 대좌가 사용.
1945년에 8.15 일본 항복 후, 철수하며 버려졌던 곳.
이곳 알뜨르비행장은 일제시대 도양폭격기지 외에도
태평양전쟁 말, 가미카제 자살특공대 전투기 격납고.
광복 이후에는 국방부가 이를 인가받아 지금까지 소유.
현재 이곳 일대는 국방부 허락을 받고
민간인들에 의해 밭으로 이용되고 있다.
주변에는 격납고 이외에도 일제가 사용했던 지하터널,
무기창고, 섯알오름 동굴진지, 고사포 진지, 해안동굴과
4.3 사태 학살 터, 백조일손지의묘, 흔적 등이 남아 있다.
제주 4.3사건 진상규명 및
희생자 명예회복 특별법'규정.
기념일 명칭 '4.3희생자 추념일'
1947년 3월 1일 경찰의 발포사건을 기점으로
1948년 4.3 도민 봉기사태와 1954년 9월 21일까지
무력충돌 진압과정에서 양민들이 희생당한., 4.3추념일.
조천면 북촌리.,'제주 4.3평화공원'.
2014년부터 정부주관행사 국가기념일로 지정되었다.
오늘날, 한국,중국, 일본은 과거사를 놓고 갈등이 고조.
독도, 이어도 등을 둘러싼 방공식별구역 갈등도 여전하다.
중국은 외환 보유를 바탕으로 여러나라와 영토 분쟁 중.
미국은 한미일 군사협력체로 그러한 중국을 압박하고 있다.
일본은 그 틈새를 역이용하여 한국과 독도 영토분쟁 시비 중.
제주특별자치도는 '특별자치행정구역' 세계평화의 섬.
서귀포시는 2018년까지 총사업비 80억 원을 투입하여
'다크투어리즘'을 추진한다고 2014년 12월 28일 밝혔다.
'전쟁 학살 등 비극적 역사의 현장들이 있어
엄청난 재난과 재해가 일어났던 곳을 돌아보며
교훈을 얻기 위하여 떠나는 여행.,다크투어리즘.
.
송악산 해안진지 동굴.
알뜨르 비행장 '가미카제' 격납고
1910년부터 1945년까지 일본군에서 건설하고 사용하였다.
당시 제주도에는 제2차 세계대전 말기에 연합국 몰락 작전에
대항하는 결호 작전으로 창설된 일본 58 군이 주둔했었는데,
제58군 병기부장 오무라 슈(大村修) 대좌가 사용해 오무라 병영
(
일본의 항복과 함께 일본군이 철수하면서 버려진 오무라 병영.
1945년 8.15 광복을 맞은 이후, 1946년 제9연대가 이곳에서 창설.
1948. 6. 27 대구광역시에서 제1훈련소 설립.
미국 제6보병사단 병기교육단에 의한 경기관총,
2.36인치 로켓포, 57mm 대전차포 운용교육을 했다.
이후 한국 전쟁이 발발한 같은 해 7월
대구광역시에서 창설된 제25교육연대가
1951년 1월 21일, 제주도 남제주군 대정읍
오무라 병영을 제1훈련소 본부로 삼으면서
제1훈련소가 이전되었으며, 3월 21일 거제도와
제주도에 있던 제3, 5 훈련소를 제1훈련소로 통합.
본격적 징병인원을 기초 군사 훈련하여 전선에 투입.
시설이 부족하여 10만 명 가량 수용하기 위해 천막을 쳤으며,
미국 육군 커리큘럼에 따라 16주 동안 소총병 기초훈련을 시행.
그러나, 전선이 급할때 빠르게 훈련을 시켜 훈련 신병을 조기 투입.
기초훈련을 마친 보병과 이외의 병사는
육지에 있는 각 병과 학교로 보내었다.
그러나 제주도 심한 기상변화 특성 상,
신병을 LST로 전선에 못 보내기도 했다.
약 50만 명을 훈련했으며, 휴전 이후 "제2훈련소"
(현재의 충청남도 논산시에 있는 육군훈련소)로
대부분의 교육 및 훈련 부대가 옮겨가고, 남은 부대가
강원도 춘천시 신북읍 용산리로 옮겨가 제1야전군 예하
"제102보충대대"가 되면서, 제1훈련소는 1956년 4월 30일 폐쇄.
현재 지휘소, 막사, 의무대 건물. 정문 기둥,
훈련병들의 종교시설로 이용된 강병대교회
(등록문화재 38호, 면적 594m2)가 남아 있다.
한국 전쟁에 관련된 역사적으로 중요한 사적지.
2008년 10월 1일 등록문화재 409호로 지정되었다.
맞은 편에는 옛 해병대 훈련소(등록문화재 410호)
두 등록문화재는 제91해병대대에서 관리하고 있다.
서귀포에서 서쪽으로 30km 떨어진 모슬포.
제주도에서도 손꼽히는 경치를 자랑하는 곳.
산방산 남쪽의 좁은 고개인 황우치를 지나면
제주도에서 보기드문 넓은 평야 지대가 나온다.
그 평야지대 중심이 모슬포.
일제 강점기 대정면 소재지.
서귀포시 서부의 중심 마을.
모슬포에 들어서게 되면 서귀포는 물론
제주 섬 어디서도 보기 어려운 군사시설들.
시가지로 들어가는 길목과 오름 위, 마을 주변
곳곳에 일제강점기부터 만들어진 시설들이 배치.
이는 제주도가 갖는 지정학적 위치에서 보면
어쩌면 자연스러운 것으로 생각할 수도 있다.
일제는 중국 본토 침공을 위한 중간기지 필요성에서
1931년부터 군사 시설을 설치하였고, 해방 직전에는
미군의 공격을 방어하기 위한 시설들을 추가한 것이다.
해방 직후 미군에 의하여 일제의 무기들은 해체되었으나
많은 시설들이 그대로 사용되어, 1946년 조선경비대 주둔지.
1951년 육군 제1훈련소로 한국전쟁 신병 훈련 공간의 필요성.
1956년 1월 훈련소가 해체될 때까지 50만 신병을 배출.
많을때 8만명 입소해 서귀포 상효동까지 훈련소를 확대
지금도 강병대 정문 기둥, 강병대 교회는 사용되고 있다.
태권도 발상단[일명 주먹탑] 등의
우리나라 육군의 유적이 남아 있다.
또한 격납고·통신시설·활주로 등
일제 강점기의 흔적이 남아 있어
‘다크 투어리즘’ 현장으로 최적지.
모슬포 유적을 볼 때마다 오키나와를 떠올린다.
오키나와는 1945년 봄, 미군과 일본군의 전쟁 과정에
주민 20여만 명이 희생된., 역사적 경험이 있는 곳이다.
제주도도 오키나와와 유사한 사례이다.
단지 제주에서 본격적인 전쟁이 벌어지기 전에
일제가 항복함으로써 그 화를 면하게 된 것일 뿐이다.
역설적으로.,전쟁을 준비하던 군사 시설이
인간에게 평화의 소중함을 가르치고 있는 것.
이와 관련하여 제주 지역의 예술가들도
전쟁 관련 유적을 활용한 전시회를 개최.
지금도 알뜨르 비행장 격납고 앞에
일제의 제로센 비행기 작품이 전시
제주를 찾는 탐방객을 맞이하고 있다.
[제주 구 육군 제1훈련소의 어제와 오늘]
일제는 1926년 군사 목적의 제주시 산지항 축항 공사.
이를 시작으로 제주도에 군사 기지를 계속 설치하였다.
모슬포에서는 1931년 3월부터 항공 기지를 건설하기 시작
5년 공사로 60만㎡ (1,400×70m 활주로) 알뜨르 비행장 준공.
이에 대해 1926년부터 공사시작 견해도 있어 심층 조사가 필요.
이 공사로 인하여 인근의 자연 마을인
저근개마을과 못마을 등이 소멸되었다.
1937년 8월 전면전으로 확대된 중일전쟁으로
일제는 중국 난징에 대한 항공 폭격을 시작했는데,
일본 본토 나가사키현 오무라 항공기지에서 이륙한
항공기가 난징을 공격한 후 알뜨르 비행장으로 귀환.
난징 공습이 성공한 후에는 오무라 항공대가
알뜨르에 주둔하여 중국항공 공격거점으로 이용.
또한 알뜨르 비행장을 40만 평으로 확대 확장 공사.
1937년 11월 오무라 항공대가
중국 상하이로 옮겨가게 되자
모슬포 알뜨리비행장 항공 기지는
제주도 비행 연습장으로 이용하였다.
1944년 10월에는 일제가 전세가 불리해지자
알뜨르 비행장을 220만㎡로 확장공사를 계획.
이 건설에는 제주도는 물론
육지부의 민간인들이 강제동원.
고된 강제 노역 노동에 시달렸다.
증언에 따르면,
알뜨르 비행장
확장 공사에 하루
4,500명 노동자 동원.
해방 이후 일제에 의해 건설된 군사 시설들은
미군정에 의해 파괴되었으나 몇몇시설들 재사용.
육군 제1훈련소 지휘소도 오무라 항공대 건물 재사용.
해방 후 오무라 항공대 건물은
대정공립초급중학교 개교 사용.
대정공립초급중학교는 1946년 11월 8일
오무라 항공대 군인막사 8동을 개조해 개교.
1947년 국방경비대 제9연대가 모슬포에 창설·
주둔하게 되면서 이곳으로부터 학교를 옮긴다.
원래 육군 제1훈련소는 대구에서 창설된 부대.
1950년 7월 11일 제25교육연대가 창설되었는데,
다음날 경북편성관구사령부 제7교육대로 개칭,
8월 14일에 비로소 국본 일반명령(육) 제46호로
육군본부 직할 육군 제1훈련소로 재창설되었다.
8월 21일에는 육군본부 직할에서 해편.
육군 중앙 훈련 본부에 속하게 되었으며
8월 26일에는 제1· 제2· 제3· 제5· 제6· 제7·
제8· 제9교육대의 편성을 완료하게 된다.
이때까지는 대구에서의 편성이며
명칭과 편제가 급하게 바뀌는 것은
당시 정황이 급박했던 것에 기인한듯.
한국전쟁 중 전방에서 사상자가 급증하면서
병력이 부족해지자 병력 보충 필요성이 부각되고,
후방의 안정적인 훈련소가 필요하여 제주도로 이동.
이는 중국의 참전으로 인하여
전황이 불확실해졌기 때문이다.
뒤이어 논산의 제2훈련소와
거제도 제3훈련소 추가 설치.
초기 훈련 기간은 16주였으나
3주로 단축되기도 하였으며, 때로는
3주도 채우지 않고 전방으로 투입되었다.
초기에는 하루 500명 정도가 입소했으나,
전방의 전투가 한창 치열할 때는 동시에
8만 명 정도의 병력이 입소하기도 하였다.
따라서 당연히 부대의 규모도 확대,
안덕과 화순, 서귀포까지 확대되었다.
서귀포시 안덕면
동광리에 제1숙영지,
상예동에 제2숙영지,
하원동 법화사에 제3숙영지,
상효동에 제5숙영지를 설치.
신병을 훈련시켰다.
또한 안덕면 서광리에는
하사관 교육연대 제1숙영지를
설치하여 중간 간부를 육성하였다.
그러나, 한국전쟁이 끝난 후
교통의 불편 등으로 해체되었다.
[제주 구 육군 제1훈련소의 재현 공간]
1. 육군 제1훈련소 정문.
훈련소 입구 일주 도로 좌우측에
각 1개의 기둥을 세웠으며,
지금도 남아 있다.
높이 7.8m,
기둥 사이 17m.
2. 육군 제98병원
훈련소 장병들의 질병이나
부상을 치료하기 위한 병원.
현재 대정여자고등학교 부지인
대정읍 하모리 1363번지이다.
정문 기둥이 남아 있다.
3. 강병대 교회
1952년 1월 10일 부임한
장도영 소장이 재임 시 건립하였다.
1965년부터 공군부대의 교회로 이용
되고 있으며 지금도 원형이 남아 있다.
4. 육군 제29사단 창설지
1953년 9월 최홍희 준장을 사단장으로 하여 창설된 부대.
이 부대는 태권도 보급부대로써 지금도 태권도의 발상지라는
근거가 되고 있으며, ‘발상단(發祥壇)-상모리 주먹탑’이 세워져 있다.
5. 임시 공군사관학교
1951년 2월 1일부터 4월 23일까지
대정읍 상모리 대정초등학교에 개설
이곳에서 1,073명의 생도가 수료하였다.
이를 기념하여 1987년 9월 30일
교정에 공군사관학교 훈적비가 세워졌고,
1995년 9월에는 대정초등학교와 공군 제8546부대
및 공군사관학교가 자매 결연을 맺어 매년 졸업식에서
공군사관학교 교장상과 장학금을 수여하고 있으며,
2008년 개교 100주년 때는 6학년 전체가
공군사관학교의 초청으로
육지부로 수학여행을
떠나기도 하였다.
6. 중국군 포로수용소
한국전쟁 기간 중에 포로가 되었던
중국군이 수용되었던 곳으로, 지금은
대정읍 상모리 산이수동에
석축 윤곽이 남아 있다.
7. 육군 제1훈련소 군예대
1951년 말 창설되었으며,
「전우가」·「제1훈련소가」
등을 만들었다.
군예대의 모체가 서라벌 악단으로
유호·박시춘·황금심·신카나리아·주선태·
구봉서 등 한 시대를 풍미했던
유명인들이 다수 포진하고 있었다.
[평화의 성지로 발전하는 모슬포]
현재 육군 제1훈련소 지휘소는
등록문화재 제409호로 지정되어
문화재청의 관리 대상이 되고 있다.
그러나 해군 부대 내에 있어
일반인의 출입은 자유롭지 않다.
과거 육군 제1훈련소의 창설은
피난민 증가와 더불어 지역 주민들에게
사회·경제적 측면에서 많은 변화를 주었다.
피난민은 지역주민에게 경제적 수입원과
선진 문화의 전수자 역할을 했던 것이다.
인구 증가로 인하여 ‘굴묵방
[난방을 위하여 집 밖에
만들어진 작은 공간]’,
‘쇠막방[외양간]’ 등이 주거용이 되었으며,
훈련병들이 몰래 가지고 나오는 군복이나 양말 등의
군용 물품들이 유통되어 거래가 활발히 이루어졌던 것이다.
이처럼 육군 제1훈련소를 비롯
서귀포시 대정읍 모슬포 지역에는
일제 강점기부터 한국 전쟁기를 거치면서
수많은 군사 유적지가 남아 있는 곳이다.
즉, 진지 갱도, 격납고, 제주4·3사건 학살터가 있으며
육군 제1훈련소 시설물과 흔적들이 곳곳에 남아 있다.
그리고
유적지에는
지역 주민은 물론
육지부 강제 징용자의
한과 눈물이 스며 있으며,
열악한
조건에서 훈련받고
전장으로 나갔던 사람들의
숭고한 정신이 살아 있다.
또한 제주 4·3사건의 아픔도 생생하게 살아 있다.
이를 증명하듯 현재 육군 제1훈련소 연병장 입구에는
대정역사문화연구회에서 2007년 건립한 ‘평화의 터’ 기념비
이런 아픔을
평화의 이름으로
담아내어야 할 것이다.
'다크 투어' 대표적인 현장으로···.
...............제주 4.3 사건...................
1947년 3월 1일부터 1954년 9월 21일까지
제주도에서 발생한 남로당 무장대와 토벌대
간의 무력충돌과 토벌대의 진압과정에서
다수의 주민들이 희생당한 사건.
광복 직후 제주사회는
6만명 귀환인구의 실직난,
생필품 부족, 콜레라의 창궐,
극심한 흉년 등으로 겹친 악재와
미곡정책의 실패, 일제 경찰의 군정
경찰로의 변신, 군정 관리의 모리(謀利)
행위 등이 큰 사회문제로 부각되었다.
1947년 3월 1일, 3·1절 기념
제주도대회에 참가했던 이들의
시가행진을 구경하던 군중들에게
경찰이 총을 발사함으로써 민간인
6명이 숨지는 사건이 발생했다.
3·1절 발포사건은 어지러운 민심을 더욱 악화시켰다.
이에 남로당 제주도당은 조직적인 반경찰 활동을 전개.
제주도 전체직장 95% 이상이 참여한 대규모 민·관 총파업.
미군정은 이 총파업이 경찰 발포에 대한
도민의 반감과 이를 증폭시킨 남로당의
선동에 있다고 분석했지만, 사후처리는
경찰의 발포보다는 남로당의 선동에
비중을 두고 강공정책을 추진했다.
도지사를 비롯한 군정 수뇌부들을
모두 외지인으로 교체했고 응원경찰과
서북청년회원 등을 대거 제주로 파견해
파업 주모자에 대한 검거작전을 벌였다.
검속 한 달 만에
500여 명이 체포됐고,
1년 동안 2,500명이 구금됐다.
서북청년회(이하 ‘서청’)는
테러와 횡포를 일삼아 민심을 자극,
구금자에 대한 경찰의 고문이 잇따랐다.
1948년 3월 일선 경찰지서에서
세 건의 고문치사 사건이 발생해
제주사회는 금방 폭발할 것 같은
위기상황으로 변해갔다.
1948년 4월 3일 새벽 2시. 총성과 함께
한라산 중허리의 오름마다 봉화가 타오르면서
남로당 제주도당이 주도한 무장봉기 신호탄이 올랐다.
350명의 무장대는 이날 새벽
12개의 경찰지서와 서청 등
우익단체 요인들의 집을 습격.
무장대는 경찰과 서청의 탄압중지,
단독선거·단독정부 반대, 통일정부
수립촉구 등을 슬로건으로 내걸었다.
무장봉기가 발발하자 미군정은
이를 치안상황으로 간주하고 경찰력과
서청의 증파를 통해 사태를 막고자 했다.
그러나 사태가 수습되지 않자
군대에 진압출동 명령을 내렸다.
.
당시 국방경비대 제9연대 김익렬 중령은
경찰·서청과 도민의 갈등으로 발생한 사건에
군이 개입하는 것은 적절치 않다며 귀순작전을 추진.
4월 말, 무장대측 책임자 김달삼과 평화협상을 벌였다.
그러나, 대동청년단원이
일으킨 오라리 방화사건으로
평화협상 결렬, 제9연대장은 교체.
.
미군정은 제20연대장 브라운 대령을
제주에 파견하여 5·10 선거를 추진했다.
5월 10일,
전국 200개
선거구에서
일제히 선거.
그러나 제주도의
세 개 선거구 가운데
두 개 선거구가 투표수
과반수 미달로 무효 처리됐다.
제주도가 남한에서 유일하게
5·10 선거를 거부한 지역으로
역사에 남게 되었다.
결국, 5.10 이후에
강도 높은 진압작전 전개.
마침내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자
제주도 사태는 단순한 지역 문제를
뛰어넘어 정권의 정통성에 대한
도전으로 인식되기에 이른다.
이승만 정부는 10월 11일
제주도에 경비사령부를 설치하고
본토의 군 병력을 제주에 증파시켰다.
1948년 10월 17일 제9연대장 송요찬 소령은
해안선으로부터 5㎞ 이상 들어간 중산간 지대를
통행하는 자는 폭도배로 간주해 총살하겠다는 포고문.
포고령은
소개령으로 이어졌고,
중산간 마을 주민들은
해변마을로 강제 이주됐다.
11월 17일
제주도에 계엄령이 선포된 이후,
중산간 지대는 초토화의 참상을 겪었다.
11월 중순께부터
이듬 해 2월까지
약 4개월 동안,
진압군은
중산간 마을에 불을 지르고
주민들을 집단으로 살상했다.
중산간 지대에서 뿐만 아니라
해안마을에 소개한 주민들까지도
무장대에 협조했다는 이유로 희생되었다.
그 결과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
입산하는 피난민이 더욱 늘었고,
추운 겨울을 한라산 속에서
숨어 다니다 잡히면
사살되거나
형무소 등지로
보내졌다.
4개월 동안 진행된
토벌대의 초토화 작전으로
중산간 마을 95% 이상이 방화되었고,
마을 자체가 없어져버린 이른 바
‘잃어버린 마을’이
수십 개에
이르게 된다.
1949년 3월
제주도지구
전투사령부가 설치되면서
진압과 선무를 병용하는 작전이 전개됐다.
신임 유재흥 사령관은
한라산에 피신해 있던 사람들이
귀순하면 모두 용서하겠다는 사면정책을 발표.
이때 많은 주민들이 하산했고,
1949년 5월 10일 재선거가
성공리에 치러졌다.
1949년 6월
무장대 사령관 이덕구가
사살됨으로써 무장대는
사실상 궤멸되었다.
그러나 6·25전쟁이 발발하면서
보도연맹 가입자, 요시찰자, 입산자 가족 등이
‘예비검속’이라는 이름으로 붙잡혀 집단으로 희생되었다.
또 전국 각지 형무소에 수감되었던 4·3사건 관련자들도 즉결처분.
.
1954년 9월 21일,
한라산 금족(禁足)지역이
전면 개방되면서 1947년 3·1절 발포사건과
1948년 4·3 무장봉기로 촉발되었던 제주 4·3사건은
7년 7개월 만에 비로소 막을 내리게 된다.
1980년대 이후 4·3사건의 진상규명을 위한
각계의 노력이 결실을 맺어 2000년 1월에
「4·3특별법」(제주4·3사건진상규명및
희생자명예회복에관한특별법)이 공포,
이에 따라 8월 28일
‘제주4·3사건진상규명및
희생자명예회복위원회’가 설치되어
정부차원의 진상조사를 실시하였다.
그 결과 2003년 10월 정부의 진상보고서
(『제주4·3사건진상조사보고서』)가 채택되고,
대통령의 공식 사과 등이 이루어졌다.
이후 4·3평화공원 등이 조성되었다.
진상보고서에 의하면,
4·3사건의 인명 피해는
25,000∼30,000명으로 추정되고,
강경진압작전으로 중산간마을 95%
이상이 불타 없어졌으며, 가옥
39,285동이 소각되었다.
4·3사건진상조사위원회에
신고 접수된 희생자 및 유가족에
대한 심사를 마무리한 결과(2011. 1. 26 현재),
희생자로 14,032명과 희생자에 대한 유족 31,255명이 결정.
4·3사건으로 인해
제주지역 공동체는
파괴되고 엄청난 물적
피해를 입었으며, 무엇보다
깊은 상처로 남아있는 참혹한
인명피해를 가져왔다.
..............................
4·3특별법 공포 이후
4·3사건으로 인한 갈등과
반목의 역사를 청산하고
화해와 상생의 정신으로
21세기를 출발하는 계기가
마련되었으며, 제주도는
2005년 1월 세계평화의 섬으로
지정되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