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쉬타임
시나리오 작가 출신 데이비드 메이어의 감독 데뷔작 [하쉬타임]은, 반전영화는 아니다. 전쟁씬은 단 한 번도 등장하지 않는다. 주인공 짐(크리스찬 베일)이 전직 군인이었다는 사실만 언급된다. 아프카니스탄에 파병된 그가, 미국을 위해 영웅적인 행동으로 아랍 테러리스트들을 잔혹하게 살해한 사진들만 몇 장 비친다. 그것도 정면이 아니라 슬쩍 지나가듯이 조금만 보여준다. 그런데도 나는 이 영화가 가장 뛰어난 반전 영화에 속한다고 생각된다. 데이비드 메이어 감독은 체제에 적응하지 못하고 폭력적으로 변한 참전용사 짐을 통해 전쟁의 내상을 겪은 젊은이의 방황과 좌절에 관한 가슴 시린 이야기를 꺼내놓는다. 짐이 격렬하게 사회에 반항하는 이유가 전쟁 때문이라고 노골적으로 주장하지는 않지만, 짐의 황폐화 된 내면이 전쟁 때문이라는 것을 짐의 친구들도, 그리고 우리들도 모두 알고 있다.
덴젤 워싱턴에게 아카데미 남우주연상을 안겨준 [트레이닝 데이]의 각본가로 이름을 떨친 데이비드 메이어는, 이 영화 [하쉬타임](2005년)으로 데뷔를 한 후, [스트리트 킹](2006년) 등을 만들었다. 감독 데뷔 이전 그는 [분노의 질주]나 [S.W.A.T 특수기동대]같은 잘 나가는 영화의 시나리오 작가였지만, 그가 야심을 갖고 쓴 [하쉬타임]에 투자하겠다는 사람은 없었다. 결국 그는 영화를 직접 만들겠다는 꿈을 포기하지 않고 자신의 집을 저당잡히고, 주인공 짐 역으로 캐스팅 제의를 한 크리스찬 베일이 제작지휘를 맡으면서 영화가 완성된다. [하쉬타임]은, 예를들면 마틴 스코세즈의 [택시 드라이버]나 [비열한 거리]의 연장선상에 있는, 사회적 비주류와 아웃사이더에 속하는 젊은 계층의 분노에 찬 목소리의 최신 버전이다.
[하쉬타임]은 군더더기 없이 깔끔하고 세련된 연출, 인물의 복잡한 내면을 솜씨있게 잡아내는 카메라, 그리고 언제 폭발할지 모르는 시한폭탄같은 긴장감으로 극을 끌고가는 놀라운 각본이 잘 조화된, 인상 깊은 작품이다. L.A에서 성장한 데이비드 메이어 감독 자신의 직간접적 체험이 녹아 있는 이 영화는, L.A를 배경으로 한 많은 작품들 중에서도 가장 L.A적이다. L.A의 비열한 거리에서 만난 두 남자의 우정을 축으로 전개되는 이야기 속에는, 사회적 성공을 위해 좌충우돌하는 젊은이들의 현실적 리얼리티와,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에 대한 삶의 본질적 고뇌가 담겨 있다.
걸프전에 참전한 군인의 신분이었다가 다시 평범한 현실로 돌아온 짐은, 쉽게 사회에 적응하지 못한다. 그는 L.A 경찰이 되고 싶어하지만 우수한 체력조건과 야망에도 불구하고 신뢰도 면에서 낮은 점수를 받고 탈락한다. 그러나 미 정부에서는 마약 소탕을 하고 있는 중남미 콜롬비아로 파견할 연방요원을 찾다가 걸프전 당시 짐의 잔혹한 행동에 주목한다. 마약 성분을 검출하는 소변 테스트를 거쳐 그는 연방요원으로 채용되기 위한 마지막 면접을 본다. 대마초를 피웠지만 교묘하게 소변 테스트를 통과한 짐은 이제 마지막 거짓말 테스트를 남겨놓는다. 그러나 신뢰도 -5라는 최악의 점수를 받고 탈락의 위기에 처하지만 콜롬비아 파트의 팀장은 그를 특별히 채용 결정한다.
짐의 유일한 친구 마이크 역에는 프레디 로드리게즈, 마이크의 여자 친구 실비아 역에는 에바 롱고리아가 캐스팅되었다. 짐의 강렬한 캐릭터와 크리스찬 베일의 카리스마 넘치는 연기가 돋보이기는 하지만, 마이크는 짐 역 못지않게 비중이 크다. 마이크도 직업없이 백수로 여자 친구 실비아의 집에서 얹혀 산다. 어떤 측면에서는 [하쉬타임]의 내러티브는 백수 청년 짐과 마이크의 직장 구하기이다. 짐은 경찰 시험에서 낙오된 뒤 연방요원이 되기 위한 테스트를 남겨 놓고 있다. 마이크는, 짐과 하루종일 붙어다니며 여자친구 실비아에게는 여기저기 입사원서를 돌리고 다녔다고, 몇 군데서 관심을 보여 면접을 보기로 했다고 거짓말한다. 집 전화기에 녹음된 면접요청 전화는 짐이 목소리를 속여 거짓말로 꾸민 것이고 실비아는 마이크의 거짓말을 알고 절망한다.
짐은 연방요원으로, 마이크는 3개월 후 고정직으로 전환될 수 있는 좋은 조건의 파트타임으로 각자 직장을 구한다. 기존 체제 내의 편입을 앞두고 그들은 멕시코로 여행을 떠난다. 멕시코에는 짐의 애인인 마타가 있다. 하지만 짐은 연방요원 면접에서 멕시칸인 마타와의 결혼을 허락하지 않자 그녀와의 결혼을 포기한 상태다. 그런데 마타가 짐의 아이를 임신했다고 말하자 짐은 격정적인 반응을 보인다. 멕시코 여행에서 급격한 정신적 파탄 증세를 보이는 짐의 혼란이야말로 이 영화가 노리는 가장 중요한 부분이다.
삶은 예약되어 있지 않다. 예정된 코스로만 진행되지도 않는다. 언제나 시행착오 투성이고 예기치 못한 일들이 독버섯처럼 피어난다. [하쉬타임]은 사회에 적응해 보려는 두 백수들의 눈물겨운 투쟁기이자, 체제 내로 편입되려는 아웃사이더들의 슬픈 러브레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