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잊혀져가는 광주인물들
1.정충신 (1576~1636)
본관 금성. 자 가행. 호 만운. 시호 충무.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 때 권율의 휘하에서 종군 중, 그의 장계를 가지고 의주에 갔다가 이항복의 주선으로 학문을 배웠다. 그해 무과에 급제한 뒤 1621년(광해군 13) 만포첨사로 국경을 수비하고, 1623년(인조 1) 안주목사 겸 방어사가 되었다.
이듬해 이괄의 난 때 전부대장으로 황주와 서울 안현에서 싸워 이겨서 진무공신 1등에 책록되어 금남군에 봉해지고, 이어 평안도병마절도사 겸 영변대도호부사가 되었다.
1627년 정묘호란 때 부원수가 되고, 1633년 조정에서 후금과 단교하려는 데 반대하여 당진에 유배되고, 후에 장연에 이배된 뒤 풀려났다. 이듬해 포도대장·경상도병마절도사를 지냈다.
천문·지리·복서·의술 등 다방면에 해박하고, 청렴하기로도 이름이 높았다. 광주의 경렬사에 배향되었다. 문집에 《만운집》, 저서에 《백사북천일록》 《금남집》 등이 있다.
광주시에서는 광주의 중심가(도청에서 유동삼거리)를 금남로로 이름하여 장군의 업적을 기리고 있다.
2.곽재구 (1954~ )
1954년 광주광역시에서 출생하여 전남대학교 국문과를 졸업하였다. 1981년 《중앙일보》 신춘문예에 시 〈사평역에서〉가 당선되어 문단에 등단하였다. 1980년 5월 탄생한 '오월시'의 동인이며, 《오월시》 3집에 시 〈그리운 남쪽〉을 발표하였다. 2004년 현재 순천대학교 문예창작과 교수로 있다.
처녀시집 《사평역에서》는 고통받는 민중의 억압된 삶을 서정적으로 승화하였는데, 1983년 5월 초판을 발행한 뒤 10만 부가 팔리는 스테디셀러를 기록하고 있다. 김지하·황지우·이성복 등 시인 78명의 시 80편을 여행을 통해 일상의 삶과의 만남을 형상화한 기행산문집 《별밭에서 지상의 시를 읽다》(2004)가 있다.
주요 작품에 시집 《사평역에서》(1983), 《전장포 아리랑》, 《한국의 연인들》(1986), 《서울 세노야》(1990), 《참 맑은 물살》(1995)이 있으며, 어른을 위한 동화 《낙타풀의 사랑》(2001), 산문집 《내가 사랑한 사람 내가 사랑한 세상》(1999), 《곽재구의 포구기행》(2003), 《곽재구의 예술기행》(2003), 동화 《아기 참새 찌구》(1992), 《세상에서 제일 맛있는 자장면》 등이 있다.
1992년 제10회 신동엽창작기금을 받았으며, 1996년 제9회 동서문학상을 받았다.
3.박인홍 (1954.10.11~ )
1954년 10월 11일 광주광역시에서 출생하였다. 숭문고등학교를 중퇴하였다. 1983년 무크지 《우리세대의 문학》에 《파리들은 쉬지 않는다》를 발표하여 문단에 등단하였다.
문체의 형식을 파괴하고 과격한 문학적 실험을 시도하는 작가로 알려져 있다. 1984년 《설경》을 발표하고, 1987년 《나무》, 《의자왕의 표변과 백제의 멸망에 관한 허구적 고찰》을 발표하였다. 1988년 《벽 앞에서의 사랑을 위한 밑그림》과 《파란 불꽃》, 《향(向)》을 발표하였다.
1989년 소설집 《벽 앞의 어둠》이 출간되었으며, 1991년 《남원에서는 아무 일도 없었다》를 발표하였다. 1994년 소설집 《명왕성은 눈물을 흘리지 않는다》를 발표하였다. 영화평론과 문학평론, 영화와 문학에 대한 단상 등을 기록한 문화평론서 《섹스, 깨어진 영상 그리고 진정성》(1999) 이 있으며, 산문집 《사랑은 박멸되어야 한다》 등이 있다.
4.김승희 (1952.3.1~ )
1952년 광주광역시에서 태어나 1970년 숙명여고를 졸업하고 서강대학교 영문과에 입학하였다. 1979년 서강대학교 대학원 국문과를 졸업했다.
중학교 2학년 때 이상의 시 《절벽》을 읽고 ‘인간이라는 모순과 인생이라는 절망을 자기 언어로 노래한다’는 것에 매력을 갖게 되었다. 그녀는 이상과 니체의 실존적 고뇌에 대해 철학적 관심을 가졌다. 1973년 《경향신문》 신춘문예에 《그림 속의 물》이 당선, 등단했다. 서강대학교 국문학과 강사를 거쳐 미국 캘리포니아대학교 한국학과 전임강사로 있다가 1999년 현재 서강대학교 국어국문학과 교수로 재직 중이다. 1994년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산타페로 가는 사람》이 당선, 소설가로 데뷔했으며 1999년 현재 시와 소설을 오가는 왕성한 활동을 하고 있다.
첫시집 《태양미사》(고려원, 1979)는 희랍적 우주관을 바탕으로 한 이국적 정취가 돋보이는데 현대인이 잃어버린 꿈을 그리스신화에 담긴 용기로써 새롭게 일깨워주었다. 혈육의 죽음을 본 그녀는 그 고통과 절망을 담아 《왼손을 위한 협주곡》(문학사상사, 1983)을 펴냈다. 이 시집에는 광기와 신들림, 죽음이 가득 차 있다.
1987년 펴낸 《미완성의 연가》는 이전의 주관적 경향에서 벗어나 객관적 거리를 두고 문명을 비판했다. 《달걀 속의 생》(1989)은 차갑고 어두운 세상 속에서 새롭게 태어나고자 하는 기도를 담은 시집이다. 《어떻게 밖으로 나갈까》(1992)도 자아성찰을 통해 기존의 제도와 질서로부터 탈출을 시도하고 있다. 원초적인 여성상을 희구한 내용과 외국 체험에서 비롯된 이국적 정열을 담은 소설 《산타페로 가는 사람》(1997) 은 묵직하고 선이 굵으면서도 서정적이다.
‘불의 여인’, ‘언어의 테러리스트’, ‘초현실주의 무당’으로 불리는 김승희는 동시대의 다른 여성 시인들과 달리 사변적 시나 페미니즘적 시를 쓰지 않았다. 그녀는 현실과 문명에 대한 강렬한 비판의 시를 썼으며, 제도와 인습으로부터 탈출을 시도하는 모험을 감행했다. 시적 아이러니를 통해 ‘당연과 물론의 세계’를 거부하는 진정한 인간성 해방을 노래했다. 그녀는 뜻밖의 낱말, 엉뚱한 표현, 당돌하고 거침없는 비유, 상상치 못했던 형상들을 통해 ‘꿈을 찾기 위한 현실과 절망에 도전’하는 여성 전사와도 같다. 관념적이라는 비판을 받기도 했으나 지적이고 재치 있으며, 날카로운 현실 분석은 현대시사에 확고한 자리를 차지했다. 1994년 이후 발표된 그녀의 소설도 이러한 시적 경향을 산문의 영역으로 확대시킨 것이다.
그 밖의 저서로 시집 《세상에서 가장 무거운 싸움》(세계사, 1996), 산문집 《벼랑의 노래》(동문선, 1984), 《넝마로 만든 푸른 꽃》(세계사, 1990), 장편소설 《왼쪽 날개가 약간 무거운 새》(열림원, 1999), 이상 평전 《제13의 아해도 위독하오》(문학세계, 1982) 등이 있다.
5.박봉우 (1934.7.14~1990)
광주광역시 출생. 호 추풍령. 전남대학교 문리대 수학. 대학 재학시 《영도》 동인이었으며, 1956년 《조선일보》 신춘문예에 시 《휴전선》이 당선되어 등단했다. 그 뒤 《나비와 철조망》(1956) 《눈길 속의 카츄사》(1957) 《과목과 수난》(1957) 등을 발표하여 시단의 주목을 받았고, 첫시집 《휴전선》(1957)에 이어 《겨울에도 피는 꽃나무》(1959), 《4월의 화요일》(1962)을 간행하였다.
1962년 이후에는 《신춘시》 동인으로 활약했으며, 1962년에 《현대문학》 신인상을 수상했다. 선적인 동양정신을 바탕으로 한 새로운 서정세계를 추구했으며, 그 서정을 통하여 문명비평을 시도한 것이 특징이다. 마지막 작품집으로 《황지(荒地)의 풀잎》이 있다.
6. 정지 (1347~1391)
본관 하동. 초명 준제. 시호 경렬. 1374년(공민왕 23) 중랑장으로서 왜적을 평정할 계책을 왕에게 올려 전라도안무사가 되고, 1377년(우왕 3) 순천도병마사가 되어 순천·낙안 등에 침입한 왜적을 토벌하였다.
다음해 영광·광주(光州)·담양 등에 침입한 왜구를 소탕하여 전라도순문사가 되고, 1380년 원수가 되어 배극렴 등과 사근내역에서 왜적과 싸웠으나 패하였다.
1381년 밀직으로 해도원수가 되어, 이듬해 남원에 침입한 왜적을 격퇴하고, 1383년 남해 관음포로 쳐들어온 왜적을 대파하였고 문하부지사로서 해도도원수, 양광·전라·경상·강릉도 도지휘처치사가 되고, 1384년(우왕 10) 문하평리를 지냈다.
1388년 요동정벌 때 안주도도원수로 출전했다가 이성계(李成桂)의 위화도회군에 동조하고, 다시 왜적이 창궐하자 양광·전라·경상도 도절제체찰사가 되어 공을 세웠다.
1390년(공양왕 2) 김저의 옥사 때 유배되었으나 곧 풀려나 위화도회군의 공으로 2등공신에 책록되었다. 그해 이초의 옥에 연루되어 청주옥에 갇혔다가 홍수로 석방되었다. 이듬해 개성부판사가 되나 부임하지 못하고 병사하였다.
7. 범세동 (?~?)
선생은 고려말의 충신이요 학자로 자는 여명이요, 호는 복애며 시호는 문충이다. 공민왕18년(1396년)에 식년시 문과에 급제하여 덕령부윤을 지내고 문하부 낭사의 간쟁책임자인 간의대부라는 중책을 맡았다.
그런데 이성계일파의 위화도회군을 계기로 고려가 쇠망의 길을 걷게되자 선생은 세상을 등지고 신규, 조의생, 임선미, 이경, 맹호성, 고천상, 서중보 등 72인과 같이 두문동에 몸을 숨겨버렸다.
고향땅으로 내려온 선생은 태조가 여러번 불렀으나 나가지 않았고 화동인물기와 같은 책을 만들고, 화해사전을 편찬하여 동방성리학의 근원을 밝히는데 힘을 쏟았다. 선생의 불굴의 정신과 바른 저술은 사육신과 백성들의 숭앙의 대상이었으며 선비정신의 본보기가 되었다.
8.김덕령 (1567~1596)
본관 광산. 자 경수. 시호 충장. 광주 출생.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담양부사 이경린 ·장성현감 이귀의 천거로 종군 명령이 내려졌으며, 전주의 광해분조로부터 익호장군의 군호를 받았다.
1594년 의병을 정돈하고 선전관이 된 후, 권율의 휘하에서 의병장 곽재우와 협력하여, 여러 차례 왜병을 격파하였다. 1596년 도체찰사 윤근수의 노속을 장살하여 체포되었으나, 왕명으로 석방되었다. 다시 의병을 모집, 때마침 충청도의 이몽학 반란을 토벌하려다가 이미 진압되자 도중에 회군하였는데, 이몽학과 내통하였다는 신경행의 무고로 체포 ·구금되었다. 혹독한 고문으로 인한 장독으로 옥사하였다.
1661년(현종 2) 신원되어 관작이 복구되고, 1668년 병조참의에 추증되었다. 1678년(숙종 4) 벽진서원에 제향되었고, 1681년 병조판서에 가증되었다. 영조 때 의열사에 형 덕홍 ·아우 덕보와 병향되었고, 1788년(정조 12) 좌찬성에 가증되었다. 1974년 광주 충장사를 복원하여 충훈을 추모하고 있다. 생애와 도술을 묘사한 작자 ·연대 미상의 전기소설 《김덕령전》이 있다.
1975년에 국가와 후손들이 무등산에 충장사를 세우고 광주시는 광주의 가장 번화가를 충장로라 이름하여 장군의 나라 사랑 정신을 추모하고 있다.
9.전상의 (1576~1627)
본관은 천안이다. 전용의 아들이다. 1603년(선조 36) 무과에 급제한 뒤 여러 관직을 거쳐 1627년(인조 5) 구성부사로서 좌영장을 겸하였다. 이 때 건주의 야인이 침입하여 안주성을 포위하자 평안도병마절도사 남이흥, 안주목사 김준과 더불어 야인을 격퇴하기 위해 안주성의 백상루 밑에 포진하였다. 적병이 가까이 오자 일시에 공격하여 승리하는 듯 했으나 야인이 전열을 가다듬어 다시 침범하여 남이흥과 김준이 전사하였다. 또한 군량이 고갈되고 원병이 오지 않자 모든 장병과 함께 죽기를 결의하고 싸우다 전사하였다.
병조판서에 추증되었으며, 1684년(숙종 10) 안주의 민충사, 광주의 경렬사, 제주의 귤림서원 등에 제향되었다. 1903년(광무 7) 청원군 북일면 구성리에 충신각을 세웠다.
10.양진여 (1862.5.11~1910.5.30)
광주군 서양면 니동(현 광주시 중흥동)에서 태어났다. 1907년 군대해산이 강행된 후 1908년 7월 아들 상기와 함께 광주에서 격문을 살포하고 의병을 모집, 의병장으로 추대되어 박성일·김익오로부터 군자금과 군량을 징발하는 등 주로 광주·창평·나주·장성 등지에서 활동하였다.
같은 해 11월 광주 대치산에서 일본군수비대와 싸워 큰 전과를 올리고, 이어 그 일대의 의병부대와 연합하여 추월산에서 전투를 치렀으나 패하였다. 1909년 또다시 의병 100여 명을 인솔, 강사문·전수용 의진과 함께 장성·담양을 습격하고 계속하여 일본군의 본거지인 광주를 공격하려고 계획하였으나 이미 광주에는 일본군의 대병력이 배치된 후였으므로 실행하지 못하였다. 이해 10월 담양군 남면 무동리에서 일본군수비대와 교전하다 체포되어 1910년 3월 대구공소원에서 교수형을 선고받고 순국하였다. 1977년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다.
11.양상기 (1883~1910)
광주에서 양진여의 아들로 출생했다. 광주경찰서 순사(로 있다가 1908년(융희 2) 80여 명의 동지를 모아 광주를 근거로 의병을 일으켰다.
광주·담양·창평·동복·장성 등지에서 일본기관을 파괴하고 친일파를 처단하는 전과를 올렸고, 1909년 3월 담양군 정면에서 일본경찰과 교전하다가 많은 동지를 잃고 체포되었다. 1977년 건국포장이 추서되었다
첫댓글 박봉우, 김승희, 곽재구를 누가 잊었다고 하는가?
그들이 광주를 잊지 않고 살듯이
광주는 그들을 잊지 않는다, 결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