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옹진군 문갑도
지도
문갑도
개요
인천 옹진군 덕적면 문갑도는 면적 3.49km2, 해안선길이 11km, 최고점 276m, 63가구 111명이 살고 있다.
덕적도 남서쪽 3km 해상에 있으며 인천에서 54.6km 떨어져 있다.
명칭의 유래를 보면 한자상의 표기는 다르지만 섬의 생김새가 선비의 책상 문갑(文匣)과 같다 하여 문갑도라 불렀다고 전해진다. 조선시대에는 독갑도(禿甲島)라고도 불렸는데, 섬의 형태가 ‘장수가 투구를 쓴 모양’이라는 뜻을 가진 것으로 전한다. 조선시대 말에 간행된 ‘조선지지자료’에는 인천부 덕적면 문갑리로 표기되어 있으며, 1914년 부천군에 편입되었고, 1973년 7월 1일 옹진군에 편입되었다가 1995년 3월 1일 인천시로 통합되었다.
이 섬은 온통 산악으로 이루어져 구릉의 기복이 심하고 섬 전체가 소나무 군락을 이루고 있으며 경지면적이 부족하다. 주민들은 어업과 농업에 종사하고 있다. 근해에서 꽃게와 새우, 우럭 등이 많이 잡히며 돌김, 자연산 굴 채취도 활발하다. 깃대봉 정상에는 삼신샘이 있는데 이 마을 사람들이 해산을 하면 이 우물을 길어다가 떠놓고 복을 빌었다고 한다. 배가 닿은 선착장 동쪽 해안에 길이 700m, 너비 50m 규모의 문갑해수욕장이 있다.
문갑도 둘러보기
여객선을 타고 문갑도에 들어가면 동쪽으로 모래해변이 길게 이어져 있다. 그다지 높지 않은 산봉우리가 몇 개 있고 좌우로 길게 이어진 모래해변 뒤로 마을이 포근하게 앉아 있다. 선착장은 왼쪽 끝, 즉 섬의 남쪽에 마을과는 제법 떨어진 지점에 있다. 그래서 차를 타고 마을로 이동한다. 모래해변의 길이만큼 떨어져 있다.
방파제의 길이도 상당하다. 두 개의 방파제가 있는데 바깥쪽 즉, 동쪽 방파제가 선착장이고 그 반대쪽은 안방파제. 오른쪽으로 색깔 있는 철제 난간을 둘렀고 맞은편 화단에는 여름 꽃들이 활짝 피었다. 여기서 조금 더 가면 마을 입구, 마을안내도가 있다. 토탈디자인빌리지 조성사업의 일환으로 세워진 안내도. 그 옆으로 표지석이 있다. 표지석에는 ‘제1회 대한민국 경관대상’ 농산어촌 경관부문 최우수상 동판이 부착되어 있다.
문갑도는 2010년 ‘토탈 디자인 빌리지 사업’의 일환으로 돌담 쌓기, 호수공원 등을 조성했다. ‘토탈디자인 빌리지 조성사업’은 옹진군 문갑마을을 대상으로 종합적인 경관계획을 수립하고 경관협정을 체결해 지속적으로 마을경관이 유지되도록 하는 마을경관 조성사업이다. 특히 계획수립부터 준공까지 주민들의 적극적인 참여가 이루어져 전국의 경관사업을 대상으로 한 공모에서 우수한 평가를 받았다. 지난 2011년 대한민국 경관대상 농산어촌 경관부문에서 최우수상을 수상한 바 있다.
마을 외곽을 따라 위쪽으로 올라가면 등산로 안내표시가 있다.
문갑도의 장점은 덕적군도의 섬들 중에서 유일하게 논농사가 있는 곳이다. 높은 산과 구릉의 기복이 심해서 경지면적은 부족하지만 논농사를 지을 수 있다. 이 섬의 풍족한 물 때문이다. 화유산의 작은 계곡에는 가재와 도룡뇽이 살 정도로 물이 깨끗하다. 화유산의 정상 깃대봉에 처녀바위가 북쪽에 서 있다. 고기를 잡으러 바다에 나간 아비를 멀리서 바라보는 모습이라고 하는데 보기에 따라 해석은 각각 다르다.
아름다운 두 개의 해수욕장
문갑도는 덕적군도의 5개 나래호 항로 중에서 굴업도 다음으로 많은 피서객이 방문하는 섬이다. 덕적도와 가까워서 교통이 좋고 풍광이 좋은 길이 700m, 너비 50m의 문갑해수욕장과 한월리해수욕장 덕분이다. 높이 276m의 화유산과 왕복 8km의 산책로가 있다.
문갑해수욕장의 모래는 미세하고 곱다. 여기서 모래해변은 계속 이어진다. 사람이 다니는 해안도로는 온통 모래로 뒤덮여 노랗게 보인다. 그 끝자락에 언덕을 넘어가는 길이 있는데 이 길이 북쪽 해변으로 가는 길이다. 북쪽 해변 역시 모래해안이다. 한월리해수욕장은 단단한 모래질 해변으로 유명했던 곳이다. 하지만 매년 모래언덕이 80cm 이상 없어지고 있다고 한다. 동네에 있는 문갑 해수욕장보다 한월리 해수욕장이 더 크고 좋았다. 해변에는 곰솔이 펼쳐져서 녹음이 울창하다.
자연이 살아있는 문갑도는 비록 크지 않지만 계곡이 깊어서 옛날부터 물이 풍부했다. 조선시대 말엽에 가뭄이 들면 인근에 사는 승봉도, 지도, 굴업도에서 물을 길으려고 문갑도로 왔다고 한다. 물이 풍부한 섬으로 문갑도를 물갑도라고 불리울 정도로 높은 산에서 계곡을 따라 흐르는 물이 마르지 않았다.
문갑도의 화려했던 과거
문갑도 어촌계장의 이야기를 들어보았다. 예전에는 경기도 부천군 소속으로 문갑도는 부천에서 2번째 잘 나가는 부자동네였는데 어선이 많았기 때문이다.
1960년대 섬 근해에서 새우와 민어, 조기가 많이 잡히는 풍요로운 섬이었다.
문갑도 앞바다는 새우어장의 터전으로 어선 100여 척이 몰려들어 새우잡이를 했다. 찢어지게 가난했던 그 시절 먹고살기 위해 주변섬 사람들이 새우잡이 배를 타려고 문갑도까지 몰려왔다. 매년 열리는 풍어제 날은 마을의 커다란 축제였다. 마을 앞 해변에서 오색 깃발을 펄럭이면서 정박한 배들이 장관을 연출했다고 한다. 한국 전쟁 이후에 이북에서 내려온 수많은 피난민들도 내려와 이곳에 정착했다. 이들과 선원들을 위해 해변가에 술집 2곳이 생겨났다. 섬의 노인들의 말에 의하면 “고기는 잘 안 잡고 맨날 술만 먹고 취해 있었다”고 했다. 당시 이북에서 피난 온 박씨가 운영하던 술집은 외상으로 먹은 술값을 대신해 어선을 받아서 팔아았다는 이야기도 전해 내려오고 한다.
화가 난 문갑 마을 부녀들이 술집으로 쳐들어가 술독과 내부의 집기를 때려 부셨다. 그 후 40-50년 동안 섬에 술이 없는 전통을 유지했다고 한다.
지금 생각하면 재미있는 이야기이지만 문갑도가 그만큼 활기가 넘쳤다는 얘기다. 현재 문갑도는 어선 몇 척이 남아 있다. 문갑도 앞 바다에서 ‘그물이 터질 만큼’ 잡히던 새우와 조기와 민어는 씨가 말라버린 지 오래다.
30년 전만 해도 마을에서 두레굿이 열렸다고 한다. 주민들은 창호지에 자기의 소원을 적고 난 다음 이것을 다 모아서 지푸라기로 만든 조각 배에 넣고, 이 배를 바다에 띄워 멀리 보내는 마을 잔치였다고 한다. 위도의 띠뱃놀이 수준은 아니지만 좀 비슷한 것 같기도 하다.
문갑도의 가장 큰 변화는 1997년 발전소가 생기면서 하루 24시간 전기를 쓴 뒤부터였다. 이전에 자가발전기를 돌려서 오전 5~10시, 오후 6~12시까지 전기를 사용할 수 있었다고 한다. 현재 마을 해수욕장 근처에 있는 문갑내연발전소가 전력을 생산한다. 문갑분교는 1999년 폐교 되었다.
새우젓 독아지
문갑도가 번성할 수 있었던 것은 문갑도와 선갑도 사이와 무인도인 각흘도 주변에서 새우가 많이 잡혔기 때문이다. 문갑도와 소야도, 이작도 사이의 바다를 반도골이라 하는데 여기서 민어가 많이 잡혔다.
그 당시 범선이 아침 일찍이 나가서 오후에 새우를 잡아서 가득 싣고 들어오면 즉시로 소금에 절여서 창고에 보관하고 한편에서는 끓는 물에 삶아 쪄서 말리기도 하여 인천으로 내다 팔았다. 부두에는 풍선들이 많이 몰려들어 정박하기가 어려울 정도였다.
한월리 해변 끝자락에 독아지를 만드는 공장이 있고 거기에는 10명의 일꾼들이 기거하는 숙소도 있었다.
독을 만드는 데 쓰이는 진흙은 충남에서 배로 싣고 와서 공장으로 하역한 다음, 물과 혼합해서 새우젓 독을 구웠다. 독을 굽던 토굴의 흔적이 지금도 남아 있다. 그러나 독 공장의 운영은 오래 가지 못했다. 무게가 무겁고 잘 깨지는 단점 때문이었다. 양철로 만든 값싼 가격의 드럼통이 대량으로 생산 유통되면서 결국 공장은 문을 닫게 되었다.
문갑도의 비극
덕적군도 근해에는 1950~70년대 국내 최대의 조기와 민어 새우 어장터였다.
그물을 바다에 내리면 고기가 그물이 찢어질 정도로 많이 잡혔다. 이 소문이 전국적으로 퍼져서 전국 각지에서 문갑도로 사람들이 몰려 왔다. 그러나 바다는 그렇게 호락호락하지 않는 곳이다. 늘 날씨가 좋다가도 겨울에는 내내 계절풍이 불어오고 봄부터 가을까지는 한 달에 4-5일 정도 심한 바람이 불어온다. 이것이 자연의 현상이다. 바다는 늘 넉넉하게 베풀어 주기만 하는 것은 아니다. 고기를 많이 잡아서 싣고 가다가, 야간 항해를 하다가, 어로 작업 중에도 사고가 나기도 한다.
풍랑과 태풍이 몰아쳐 오면 생명줄인 배는 한순간에 파괴되어 목숨까지 잃어 버린다. 바다에서 풍어는 신기루 같은 것이다. 그래서 수많은 사람들이 바다에서 배를 잃고 사업은 망했다. 덕적군도는 또 하나의 숨겨진 얼굴이 있다.
휴전선과 가깝기 때문에 어민들이 종종 본의 아니게 강제로 납북이 되어서 돌아오면 간첩이라고 ‘주홍글씨’가 씌워진다.
문갑도의 비극은 1972년 군경이 들어와 간첩을 잡는다고 섬 일대를 샅샅이 수색했다. 그래서 납북어민들은 그 수색 대상이었다. 간첩 누명 쓰고 평생을 살아온 79세 어민 김◯◯과 다른 사람들도 이 사건의 희생자이다.
김씨는 반공법 위반으로 사형을 선고 받고 무기징역을 살다가 15년형으로 감형받았다. 그는 22세에 감옥에 들어가 살다가 37세에 풀려났지만 모진 고문으로 몸은 망가졌고, 간첩으로 낙인이 찍혀 지금까지 살아왔다.
그 당시 이러한 의심을 받은 집안들은 산산이 부서지고 고향 문갑도를 떠나 인천으로 이사를 갔다. 그러나 그들에게는 연좌제라 또 하나의 굴레가 따라붙었다. 비단 이것 뿐이겠는가. 수많은 사람들이 감시와 연좌제에 걸리고 누명을 쓰면서 매우 비참하게 살았다. 뿐만 아니라 납북어민들은 주변에 사는 사람과 지금도 보이지 않는 경계 속에 살아간다고 한다. 그래서 그들은 이웃과 단절된 채 살아갈 수밖에 없는 것이다. 이것이 남북 분단으로 인한 비극의 현실이다. 물론 이러한 현상은 다른 나라에도 있다. 나라를 지키기 위해서는 어느 정도 필요한 일이기도 하다.
섬에서 태어난 필자의 아버지는 배를 가지고 사업을 하였지만 남쪽이라서 어린 비극은 피해갔다고 본다. 이런 사건은 우리의 현실 속에서 결코 남의 일이 아니고 내게도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직도 남북은 휴전선을 두고 극한 대치 상태에 있다. 이것이 분단의 아픔을 안고 살아가는 우리의 현실임을 새롭게 인식하게 하는 기회가 되었으면 한다.
옹진군 선갑도
지도
선갑도
망망대해 한가운데 기암 절경 차려 입고 님 오시길 기다리네
기호일보 기사 입력일 . 2017.04.07.
글 : 이우평 인천섬유산연구회 회원/인천해송고 교사
정리=최유탁 기자
우리나라의 많은 섬 가운데 사람이 살지 않는 가장 큰 섬이 인천 앞바다에 있다. 덕적군도를 이루는 여러 섬 중에 바로 ‘선갑도’가 그 주인공이다. 선갑도는 덕적군도 한 중심에 자리 잡고 있어 행정구역상 덕적면에 속할 것으로 생각한다. 하지만 실제로는 자월면에 속한다. 이는 선갑도가 1970년까지 승봉도 주민 35명의 공동 소유지였기 때문이다. 1992년 정부가 선갑도를 굴업도와 함께 핵폐기물 처리장 후보지로 검토하면서 과학기술부에서 매입했으나 추진이 어렵게 되자, 1996년 한국해양연구원에 매각했다. 이후 2007년 ㈜S공영에서 매입해 현재 개인 소유의 무인도가 된 것이다.
선갑도는 개인 사유지이기 때문에 사전 입도 허락을 받아야 한다. 그리고 인천항에서 직접 가는 배편이 없기 때문에 덕적도에 도착한 후 별도의 배편, 즉 어선 등을 섭외해서 가야만 한다.
선갑도에 다가서면 해식 절벽을 이루는 기괴한 암석의 비경에 놀라지 않을 수 없다. 마치 성냥개비를 줄지어 세워 놓은 듯 5~6각형의 기둥 모양의 갈라진 암석들이 병풍처럼 펼쳐지는데 그 풍광이 그야말로 장관이다. 바로 화산지대에서 볼 수 있는 ‘주상절리(柱狀節理)’이다.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주상절리는 제주도 서귀포 중문 지삿개 해안, 강원도 철원과 포천의 한탄강 주변, 광주 무등산의 서석대와 입석대 등의 암석에서 볼 수 있다. 그런 주상절리가 우리가 살고 있는 인천 앞바다 선갑도에 이렇게 즐비하다는 사실을 아는 이는 그리 많지 않다.
‘선갑도(仙甲)’ 란 이름은 신선 ‘선(仙)’자와 갑옷 ‘갑(甲)’자로, 섬 모양이 선녀가 갑옷을 입고 있는 것 같다고 해 유래됐다. 이는 해안의 주상절리의 형태가 마치 갑옷을 연상케 하는 데서 비롯됐을 것으로 추정된다. 주상절리는 화산 지형의 하나로, 선갑도에 발달한 주상절리는 선갑도가 화산 분출과 관련해 형성됐음을 말해 준다.
그렇다면 주상절리는 어떻게 만들어지는 걸까? 주상절리는 지하 깊은 곳에서 지표로 분출한 뜨거운 고온의 마그마가 차가운 바닷물이나 강과 호수 등을 만나 급격히 냉각되는 과정에서 형성된다.
냉각될 때 마그마 내부를 구성하는 여러 광물질들 가운데 서로 같은 성분과 종류의 광물들이 짝을 지어 5~6각형의 형태를 띠며 모이면서 고화가 진행된다. 이후 파랑과 해풍의 지속적인 침식을 받아 5~6각형의 갈라진 틈을 따라 암석의 일부들이 하나둘씩 떨어져 나가면서 지금의 주상절리가 형성된 것이다.
선갑도를 포함한 주변의 문갑도·굴업도·백아도·울도·지도 등을 구성하는 섬들의 지질이 모두 화산 폭발에 의해 화산재와 화산력들이 쌓여 형성된 응회암과 집괴암이 주를 이루고 있다.
화산 분출 시기, 즉 선갑도가 지금의 형태를 갖추기 시작한 것은 한반도에 공룡들이 살았던 시기인 중생대 백악기 약 1억~9천만 년 전으로 추정된다. 특이한 점은 선갑도를 하늘에서 바라보면 마치 커다란 하나의 화산체 분화구가 아닌가 하는 생각을 갖게 되는데, 이와 관련해서는 정확한 지질조사가 진행돼야 할 것으로 생각한다.
한편, 선갑도와 주변 덕적군도의 생성과 관련해 ‘망구 할매 전설’이 전해지고 있다.
"옛날에 망구 할매가 섬 안에 선갑산을 쌓아 올리다가 ‘백 번째 골짜기’에서 한 골짜기 부족한 아흔 아홉 골에서 산이 무너져 화가 난 망구 할매가 주먹으로 섬을 내리쳐 산을 부쉈단다. 그때, 사방으로 퍼져 나간 ‘선갑도’의 조각들이 지도·울도·백아도·장구도·못도·가도·각흘도·굴업도·선단여 등이라고 한다. 망구 할매가 주먹으로 내리친 자국이 서쪽의 선갑도 만이라는 것이다."
현재 주상절리가 빚어낸 비경을 간직한 선갑도는 바람직하지 못한 개발 압력에 시달리고 있다. 섬의 소유주인 ㈜S공영이 섬 안쪽 37만6천㎡ 일원의 골재 생산(1천276만9천㎥) 인허가를 받아 사업을 추진하려고 하기 때문이다. 1994년 핵폐기물 처리장으로 논란을 겪었던 굴업도에 이어 선갑도가 또다시 논란의 한 중심에 서게 된 것이다.
골재 생산과 관련해 옹진군에서는 경제적 이득을 목적으로 찬성하고 있으나, 어업권 피해와 환경 파괴를 우려하는 섬 주민과 환경단체에서는 반대하고 있다.
다행히 상급 기관인 인천시에서 환경 훼손을 우려해 반대를 하고 있으나 그 갈등이 어떻게 해결될지 미지수다.
2015년 민속식물연구소(소장 송흥선)의 조사에 의하면 선갑도는 세뿔석위·가침박달을 비롯한 한반도의 희귀식물 11종의 식물이 자라고 있는 것으로 보고됐다. 아울러 선갑도가 위치한 인근 대이작도 해역은 해양수산부가 고사한 생태보전지역으로 아직까지 훼손되지 않은 천혜의 자연유산을 간직하고 있다. 선갑도를 접근하는데 있어 경제성을 고려한 골재 채취를 명분으로 한 개발 논리보다는 자연유산을 보존하면서 관광 자원으로 개발해 활용하는 지속가능한 보존 방안을 모색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본다.
선갑도가 지닌 비경은 관광 자원으로서 무한한 잠재력을 지니고 있다. 만약 인천에서 1시간 거리 내에 입도가 자유로운 섬이었다고 한다면 몸살을 앓았을 만큼 매일 같이 탐방객이 넘쳐 났을 것으로 생각한다. 선갑도를 사람들이 찾는 인천의 대표적인 자연 유산으로 개발하는 방안을 마련하기 위해 개발 주체와 구성원 모두가 한자리에 모여 지혜를 찾아야 할 것으로 생각된다.
<이우평 인천섬유산연구회 회원/인천해송고 교사>
정리=최유탁 기호일보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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