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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서, 귀주, 중경, 무한 여행기 9 장강 유람과 삼협댐(长江游览和三峡大坝:창지앙 유람과 산시아 따빠)
만주 부두에 내려 안내자를 따라 갔다. 몇 분 걸어서 바로 부두에 도착했는데, 수 많은 배가 강가에 정박하고 있었다. 일단 어떤 배에 올라가서 그 배를 통과하여 다음 배로 이동하고, 또 그 배를 통과하여 다음 배로 계속 걸어갔다. 다시 말하면 배들이 뗏목처럼 서로 묶여 있어서, 강에 떠 있는 배들이 통로의 구실을 하고 있었다. 따라서 강가에 정박한 배는 강의 중심부에 위치한 배가 떠나야 비로소 움직일 수가 있었다.
그때 나에게 가장 큰 관심은 '저 많은 배 중에서 내가 탈 배가 과연 어떤 배일까'였다. 한참을 갔는데, 근사한 배가 있어서, 이 배일까 생각했는데, 그게 아니었다. 순간 돈도 조금 내 놓고 욕심이 과하셔, 라는 생각이 들었다. 조금 더 가니 아주 초라한 배가 있었다. 그러나 다행스럽게도 그 배를 통과하여 계속 사람들의 물결이 움직였다. 기대와 낙심이 몇 번 계속 되더니 드디어 내 앞 사람이 선실로 들어갔다. 과연 내가 탄 배는 다른 배에 비해 아주 초라하게 보이는 배였다. 그러나 돈을 조금 주고 탔으니 당연시했다. 우리가 비행기를 탈 때, 돈 많은 사람은 비즈니스 석에 타고 돈 없는 사람은 이코노미 석에 타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뭐 이틀만 고생하면 50만원의 돈을 버는 것이나 마찬가지인데, 아니 여기까지 구경오지 못한 사람이 얼마나 많은데, 좋은 배 타령을 하랴" 라는 생각이 들어 스스로 위로하고 만족하려고 했다.
우리는 2등석 4인실을 예약했었는데, 약간 좁다는 느낌이 들었다. 그러나 바깥에 나가 구경을 하면서 대부분의 시간을 보낼 생각을 하면서 스스로를 위로했다. 문제는 화장실이었다. 4인실 안에 화장실이 있는데, 화장실과 거실 사이의 벽이 너무 얇아서 화장실에 있는 사람의 숨소리조차 들리는 듯, 모든 소리가 귀에 선명하게 들렸다. 화장실이 다른 사람들로부터 시야를 가리는 것만 중요한 것이 아니라, 청각을 차단해야 한다는 것도 그때 처음 뼈저리게 느꼈다. 결국 우리는 4인실 내부에 있는 화장실을 거의 사용하지 못하고 바깥에 있는 공중 화장실을 사용해야만 했다. 이 배의 설계자의 치명적인 실수가 바로 이 화장실 문제라는 생각을 했다. 실내의 화장실을 모두 없애고, 외부 화장실의 숫자를 늘려야 했었다.
<우리가 탄 배 선부(先富)호>
점점 날이 어두워져 거의 아무 것도 보이지 않는데, 안내자가 노크를 하고 들어왔다. 밖에 좋은 경치가 있으니 나와 구경하라는 것이었다. 우리가 한국인임을 안 그녀는 말을 하다가 멈추었다. 자기의 말이 쓸 데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우리가 조금 중국어를 한다고 하자, 그때서야 비로소 얼굴이 표정이 밝아지며 말을 계속 이어갔다. 그러자 그녀의 핸드폰이 울렸는데, 전화음이 "붕자자짝, 오빤 강남 스타일 ~"하며, 사이의 강남 스타일 노래가 나오고 있었다. 우리를 보고 웃던 그녀는, 전화를 받고 나서 다시 말을 이어갔다. 선택관광인 백제성과 소삼협 관광을 하겠냐는 것이었다. 우리의 주 목적은 그것을 보는 것이기에 당연히 '그렇다'라고 대답했다. 결국 우리는 그녀가 요구한 금액 백제성 140위엔((25,200원), 소삼협 200위엔(36,000원) 합계 340위엔(61,200원)을 지불했다.
갑판 위에는 이미 많은 사람이 나와 강 양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안내양이 뭐라 말을 했지만, 잘 알아듣지 못하고, 또 날이 어둡기도 하고 춥기도 해서, 바로 선실로 돌아왔다. 돌아와서 아래 매점에서 더운 물을 가져와서 컵라면과 술을 마셨다. 이 배에는 식당과 매점이 있지만 값이 비싸고 품질도 좋지 않다는 것을 미리 알고 있었기에, 승선하기 전에 우리는 총칭에 있는 까르프에 가서 3일 동안 먹고 남을 만한 음식을 바리바리 싸들고 배를 탔던 것이다.
그때 또 다시 안내양이 노크를 했다. 기본 관광에 포함된 장비사당을 갈테니 밖으로 나오라는 것이었다. "장비사당은 기본 요금에 포함되었으니 별로 볼 것이 없을 것이다" 라는 생각이 들었다. 더군다나 그때 시각이 밤 11시쯤이고, 술도 취하고, 찬바람도 불어서 아무도 나갈 사람이 없었다. 우리가 가지 않겠다고 하니, 가이드는 고개를 갸우뚱 하면서 밖으로 나갔다.
하루가 너무 길어서 일까, 아니면 너무 긴장을 해서일까, 몸이 피곤하고 졸음이 엄습해 왔다. 졸음을 참을 아무런 이유가 없는 우리는, 바로 잠자리에 들었다. 잠을 자려고 눈을 감으니 금방 잠이 오는 것이 아니었다. 배의 발동기 소리가 들렸고, 화장실에서는 물이 완전히 잠그어지지 않아 조금씩 물 흐르는 소리가 들렸다. 어쩌다가 잠이 들었는데 다음 날 우리 배는 무산(巫山)에 도착해 있었다.
<가운데 섬이 바로 백제성이다>
다음 날, 즉 11월 27일, 아침 일찍 눈을 떴다. 아침부터 관광이 시작되었다. 백제성 관광을 간다고 했다. 백제성 관광은 선택 관광인데, 배에 남는 사람은 거의 없는 듯 했다.
역시 내릴 때는 다른 배로 이동하고, 그 배에서 또 옆 배로 이동해서 육지에 닿았다. 육지에는 이미 여러 대의 버스가 대기하고 있었다. 버스로 약 20분 가서 내린 곳이 바로 백제성이라는 곳이었다.
<백제성이란?>
백제성의 이름이 처음 등장한 것은 서한말기였다. 왕망이 왕위를 찬탈했을 때 그의 수하 공손술은 사천지역을 점령하고 있었다. 그의 세력은 점차 커져 그는 황제가 될 야심에 불타 있었는데 취탕협(=백제성 옆에 있는 계곡)에 이른 그는 지세를 둘러보고 난공불락의 요새가 될 자리라 여겼다. 그는 성을 쌓고, 방비를 굳게 하였는데 성 안에는 백학정이라는 우물이 있었다. 이 우물에서는 늘 흰 안개가 피어올랐는데 그 모양이 용과 같아서 이것을 본 공손술은 자신이 황제가 될 징조라 여겼다. 그래서 그는 스스로를 백제(白帝)라고 칭하고 자신의 성을 백제성이라 불렀다. 서기 36년 공손술과 유수는 천하를 다투었지만 공손술이 패하여 백제성은 잿더미가 되었다. 그러나 공손술 덕분에 평화를 누릴 수 있었던 사람들은 그를 위해 사당을 짓고 백제묘(白帝廟)라 불렀다.
그 뒤 세월이 흘러 삼국지 시대로 돌아간다. 전쟁에서 패배한 유비는 백제성으로 도망쳐왔으나 신하들을 마주할 면목이 없었다. 그래서 백제성을 수리하고 영안궁을 지어 머무르게 되었다. 그러나 근심에 사로잡혀 있던 유비는 얼마 지나지 않아 세상을 떴고, 정권(政權)과 자기의 아들을 제갈량에게 맡겼다. 이 일을 유비탁고(劉備托孤=유비가 고아를 맡기다)라고 하는데 백제묘 내에는 유비가 아들을 맡기는 장면이 꾸며져 있다. 처음에는 공손술을 모시던 사당이었다가, 명대에 들어 촉한의 유비, 제갈량, 관우, 장비를 모시는 사당이 된 것이다. 하지만 사당의 주인이 바뀐 후에도 공손술을 기리기 위해 이름만은 백제묘라 하였다고 한다.
양자강에서 가장 유명한 관광지 중 한 곳인 이곳에, 이백, 두보, 백거이, 육유 등 중국의 유명시인들은 모두 시를 지어 남겼다. 그래서 백제성에는 시성(詩城)이라는 별칭이 생기기도 하였다. 본래 이곳은 산을 등지고 3면이 강과 마주한 모양이었는데 삼협댐에 의해 수위가 높아지면서 섬이 되었다.
<유비탁고: 백제성에서 촬영한 사진. 유비가 죽어가고 있고 그 앞에 제갈량이 부채를 들고 서 있다. 땅에 업드린 두 아들을 제갈량에게 맡기는 장면이다.>
<백제성으로 가는 다리>
<백제성 입구에 있는 제갈량의 출사표>
원래 출사표(出師俵)는 신하가 적을 정벌(征伐)하러 가면서 황제나 왕에게 올리던 글이다. 제갈량은 관우 장비에 이어 유비마저 백제성에서 죽은 후, 17세 된 유선을 황제로 모시고 자신은 승상(丞相)이 되었다. 제갈공명은 그 당시 실질적인 촉한의 권력자였으나 끝까지 유비와의 약속을 지켜 스스로 패권을 잡지 않고 묵묵히 유비의 어린 아들 유선을 보필하여 진정 충성스럽고 신의 있는 사람으로 추앙(追仰)받게 되었다.
이 출사표는 서기 223년 위나라를 치려고 떠나기 전, 유비의 아들 유선에게 올린 글이다. 위의 사진을 보면 알겠지만 先帝創業未半 而中道崩殂 ~로 시작되는 전 출사표의 첫 구절만 해석하면 이렇다. “선제께서 창업을 반도 이루지 못하고 중도에 돌아가시어 천하는 셋으로 나뉘고 익주는 피폐해져 진실로 위급한 때입니다. 그런데도 조정의 신하가 게으름을 피우지 않고 충직한 장수가 밖에서 몸을 사리지 않는 것은 선제의 각별한 우대를 잊지 않고 섬돌 아래 엎드려 보답하기 때문입니다." 이어서 말을 이어간다. "신은 본래 남양에 묻혀 밭이나 갈며 난세에 목숨이나 부지하기를 바랄 뿐 조금이라도 이름이 제후의 귀에 들어가 그들에게 쓰이게 되기를 바라지 않았습니다."<파란색으로 된 중국 역사에 관계된 부분: 여러 인터넷 사이트에서 인용하여 필자 나름으로 재구성>
구당협(瞿塘峽: 백제성에서 바라보는 장강 삼협 중의 하나). 안쪽으로 들어가면 대단한 협곡이 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댐으로 인해 지금은 옛날만 못하다고 한다.
<기문(夔门:쿠이먼) 본래 험준하기로 유명하였다고 하나 지금은 물이 차 올라와서 험준한지 아닌지 알 길이 없다.>
<정상에 많은 장수들의 동상을 제작하여 세워 놓았는데, 그 중의 한 사람이다.>
<백제성에 있는 수 많은 시비나 또는 돌에 새긴 그림을 탁본 뜨는 장면이다. 글씨 위에 종이를 올려놓고 붓으로 살살 문질러서 그대로 종이에 복사한다. 이런 탁본은 바로 옆에 있는 매점에서 판매한다.>
백세성이 역사적으로 유명하다고 하나 실제로 가 보면 별로 볼 것이 없다. 역사의 의미를 부여하여 놓고 보니까 볼 만한 것이지, 그저 구경하는 사람의 입장으로는 25,200원의 값어치가 있는지 의문이다. 물론 중국인들에게는 충분히 의미있는 것이겠지만, 역사도 다르고 생각도 다른 나에게는 25,200원의 값어치는 없는 듯 보였다. 2500원 입장료가 적절한 듯이 보였다. 마치 경주의 첨성대를 보았을 때, 우리에게는 의미가 있을 것이나, 과연 중국인이 그것을 보고 감탄을 할지는 알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일 것이다.
또 한 가지, 산샤댐의 건설로 수 많은 문화재와 비경이 사라져 버렸고, 수 많은 사람이 삶의 터전을 잃어 버렸다. 우리가 갔던 백제성도 댐 건설 이전에는 깎아지른 듯한 절벽으로 기가 막힌 경치였다고 하나, 지금은 산꼭대기만 조금 남아서 관광지라고 하기에도 좀 멋 적은 모습이다. 그저 끝만 조금 남은 허접한 봉우리에 지나지 않는 것처럼 보였다. 소문난 잔치에 먹을 것 없다는 말은 이런 때 써야 될 말이다. 하지만 이것은 나의 개인적인 생각이다. 백제성을 보고 말로 형언할 수 없는 기쁨으로 감격해서 돌아올 사람이 있는지는 모르겠으나, 내가 그날 본 중국인의 표정에서도 그런 것은 읽을 수 없었다.
다시 우리의 배로 돌아와 갑판에 올라가 보았다. 갑판 한 가운데 방 하나가 있고, 그 주위를 돌아다니면서 구경을 하도록 설계되어 있었다. 의자가 있거나 편의 시설이 있어서 안락한 것이 아니라, 한참 동안 서 있다가 추우면 다시 실내로 들어가야만 했다. 하기야 비슷한 경치가 이어져 있어서 오랫 동안 그곳에 서 있을 필요도 없었다. 중국인들도 가끔 나왔다가 사진 몇 방 찍고 다시 실내로 들어갔다.
갑판의 한 가운데 있는 방에서 여자를 포함한 몇 사람이 있었다. 그들은 마작을 하고 있었는데, 아침부터 밤까지 구경이고 나발이고 아예 제껴 놓고 마작 게임에 몰두하고 있었다. 어깨 너머로 보는 마작 게임은 정말 재미있는 듯이 보였다. 그렇지만 많은 돈을 내 놓고 와서 커튼을 치고 마작만 하는 사람들을 조금은 이해하기 어려웠다. 마치 세상은 별별 사람으로 구성되어 있다는 것을 웅변으로 증명하는 듯 했다. 하기야 한국에서도 등산을 가면 산에 올라가지 않고 아래에서 고스톱만 치다가 오는 사람이 있다고 하는데, 역시 사람은 저 좋으면 그만이요, 제 잘난 맛에 사는가 보다.
<하루 종일 마작만 한다. 이들은 경치를 보는 사람보다 더 행복해 보인다.>
배 안에 매점이 있었는데, 한 할머니가 운영을 했다. 각종 음식에서부터 슬리퍼까지 없는 물건이 없었는데, 특이한 것은 틈만 나면 할머니가 성경을 읽는다는 것이었다. 나는 이런 공공 장소에서 성경을 읽는 중국인은 처음 보았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중국어로 된 성경을 읽는 할머니가 부럽고 대단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언제 중국어 성경을 읽어볼 수 있는 날이 올지 모르겠다.
낮 12시 반, 이제 배를 옮겨 타고 가장 유명하고 가장 비싸다는(입장료 1인당 36,000원) 소삼협 유람을 시작한다. 계곡이 좁아서 계곡만 들어가는 배가 따로 있다. 여러 배에서 온 여행객이 이 배로 옮겨타고 함께 소삼협으로 들어간다.
멀리 계곡으로 들어가는 입구에 붉은 색을 칠한 다리가 무지개처럼 걸쳐 있다. 이 관광 배에는 옥상에 차를 마실 자리를 마련해 놓고 입장료를 받았다. 우리는 좀더 잘 보기 위해 30위엔(5400원)의 입장료를 내고 올라갔다. 종업원 아줌마는 차 주전자 하나와 잔 두 개를 갖다 주었다. 차를 다 마시면 계속해서 더운 물을 부어 주었다.
드디어 아름다운 단풍이 나타나기 시작한다. 날씨는 쌀쌀했지만, 한창 단풍철이었다. 멀리서 보아 확인할 수 없지만, 단풍나무가 우리나라의 단풍나무와 같은 것인지 다른 종류인지 알 수 없었다. 특징이라면 우리 나라처럼 큰 나무가 아니라, 키가 작은 단풍나무가 땅에 깔려서, 마치 봄철 자운영이 피어 있는 논처럼 보였다. 이런 단풍 밭은 입구에서부터 거의 계곡 끝까지 펼쳐져 있었다. 나무가 위로 뻗지 못하는 이유가 산이 높아서 인지, 아니면 토양이 좋지 않아서 인지, 아니면 본래 종자가 그런 것인지 알 수 없는 일이었다.
앞에서도 말했지만, 여기 장강 유람을 올려고 했다면 산샤댐이 건설되기 전에 왔었어야 했었을 것 같았다. 계곡 저 아래에서 하늘 위로 쭉쭉 뻗어 있는 기암괴석과 단풍을 함께 보았어야 하는데, 이제 대부분 물에 잠기고, 산의 상층부만 보니, 어디 옛날의 감흥만 하겠는가? 하지만 어디를 간다 해도 이렇게 광범위하게 붉은 단풍밭이 있는 곳은 아마 없을 것이다. 가끔 가다 우리보다 빨리 다니는 쾌속선이라도 지나가면, 배가 출렁거려서 경치는 더욱 아름답게 보였고, 그럴 때면 불타는 산에 직접 올라가 사랑하는 사람과 손을 잡고 한 없이 걷고 싶은 충동에 빠지기도 하였다.
<사진 찍는 장소에 오자 전문 사진사가 사진을 찍어주고 있었다.>
이 강은 그저 배만 타고 산과 물만 구경만하는 것은 아니다. 강의 깊이가 175미터가 된다는 표시가 보인 지점을 중심으로 마을이 형성되어 있었다. 아이들이 놀다가 우리를 바라보고 손을 흔들었다. 조금 가면 강가에 허름한 집이 나타난다. 또한 강에서 고기를 잡는 어부가 보이고, 먼 마을에서는 한줄기 파릇한 연기가 굴뚝에서 모락모락 나오기도 한다.
거의 끝 지점에 도착하면 이제 새로운 배를 갈아타고 아주 좁은 협곡으로 들어간다. 아주 조그만 배는 50 명 정도가 타는 것으로 보였는데, 천장에 대나무를 대고 그 위에 비닐을 깔아서 햇빛과 비를 피하도록 하였다. 이 작은 배를 타고 계곡을 올라가면서 어떤 사람이 대단히 관광객을 웃기는데, 그렇게 해 놓고는 결국 열쇠고리 같은 허접한 물건을 거의 강매하다시피 한다. 그리고서는 한 사람씩 앞으로 나와 사진을 찍을 기회를 준다. 가끔 가다 강 옆에 몇몇 사람이 숨어 있다가 우리가 지나가면 이상한 악기를 연주하기도 하고, 이상한 소리를 내기도 하고, 노래를 부르기도 한다. 하지만 여기 경치도 그렇게 빼어난 것은 아니고, 앞서 보았던 경치의 아류에 지나지 않는다.
<배 안에서 무지하게 말을 안 듣는 아이가 있었는데, 내가 부모라면 아마 반쯤 죽여 놨을 터인데, 부모는 곧잘 참았다.>
낮 12시 30분에 출발한 배는 거의 오후 5시가 되어야 배를 바꿔 탄 지점에 돌아오게 된다. 다시 본래의 배로 걸어서 돌아온다. 돌아오는 길에는 상인들이 물고기 튀김이나, 계란, 게 등을 파는데, 나는 먹기 힘든 음식으로 보였다. 하지만 중국인들은 경쟁적으로 사서 먹기도 하고 서로 권하기도 하였다.
우리는 우리 방에 들어가자마자 맥주와 백주를 섞어서 마시기 시작했다. 저녁 식사와 안주로는 고구마, 귤, 돼지고기, 밥, 멸치조림, 무 장아찌 등이 있었는데, 너무나 많이 준비해와서 이것을 다 먹으려면 일주일은 선상 유람을 했어야 했다.
내 옆에 있는 H형은 마침 핸드폰을 꺼내 며칠 전에 헤어진 KC와 통화를 했다. KC는 그때 중국의 시솽반나에 있었는데, 날씨가 좀 덥다고 전했다. 시솽반나에 여행하고 있는 사람들 중에는 내가 아는 사람도 있었고, H형이 아는 사람도 있었는데, 어떤 사람은 더위 속에 있고, 어떤 사람은 같은 이국 땅 강 위에 있고, 참으로 삶이란 묘한 것이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다음 날 즉, 11월 28일은 오전에 마지막 관광지인 구원계(九畹溪)로 떠났다. 마치 거북선과 같이 요상하게 생긴 배로 갔는데, 목적지에 도착하면 강위에 놓여진 잔교를 타고 일정한 코스를 돌게 되어 있다. 거기에서 되돌아 오면 공연장이 있는데, 중국의 전설을 연극으로 꾸며놓은 극이었다. 안내에는 그곳에 대단히 유명한 사람이 출연하는 것으로 되어 있었지만, 중국인들은 그런 것에 별 관심이 없었다. 한참 공연이 진행되는데 한 사람이 나가니까 다른 사람들이 우르르 몰려나갔다. 공연을 하던 배우들이 얼마나 황당했을까 싶었는데, 그들은 끝까지 공연을 했다. 중국인들의 관람태도도 문제지만, 이미 야외에 나와 마음이 들뜬 사람들에게 고대 역사극을 보여주는 주최측도 사람의 심리를 몰라도 너~~~무 몰랐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날 11시 30분쯤 우리의 배는 산샤댐 근처에 도착했다. 이제 마지막 산샤댐을 보면 우리의 장강유람은 모두 끝나는 것이었다. 그 동안 정이 들었는지, 안내양의 얼굴이 낯익었고, 음성이 낯익게 들렸다. 손을 흔드는 그녀의 모습이 조금 쓸쓸하게 느껴진 것은 사실은 내가 조금 쓸쓸해 졌다는 뜻이다.
<가운데 붉은 옷을 입고 종이를 든 여자가 안내양이다.>
이제 버스가 바뀌었고 안내양도 바뀌었다. 중간 지점에서 철저한 짐수색과 몸 수색이 있었다. 그 뒤, 버스는 산샤댐을 볼 수 있는 작은 언덕을 향해 출발했다. 중간에 버스는 잠시 멈추어 화물선이 댐 위에서 아래로 내려가는 장면을 볼 수 있도록 몇분간 시간을 준다. 물론 버스에서 앉은 그 상태로 멀리에서 감시하는 중국 공안의 눈치를 보면서 힐끗힐끗 보는 것이다.
사실 나도 여기 산샤댐에 오기 전까지는 이 과정이 궁금했었다. 즉 총칭에서 배를 타고 이창에 왔을 때, 계속 그 배를 탁고 상해까지 가는 것인지, 아니면 배를 바꿔 타고 가는 것인지, 아니면 못 가는 것인지가 궁금했던 것이다. 그런데 실제 이곳에 와보니, 배를 타고 사람이 갈 수 있는 구간은 총칭에서 산샤댐까지뿐이다. 화물선은 물을 채워서 배를 아래로 내리는 복잡한 과정을 거쳐 계속 아래로 내려갈 수 있다. 하지만 적어도 겉보기에 이것도 그렇게 활성화 된 것 같지는 않았다. 결론적으로 사람은 총칭에서 산샤댐까지만 배로 갈 수 있다.
작은 언덕 근처에서 에스컬레이터를 타고 언덕의 정상에 올라가게 된다. 언덕의 정상에서 보면 눈 아래 산샤댐이 보인다. 뿌연 안개 속에 웅장한 모습으로 떡 버티고 서 있다. 정상에 있는 건물에 들어가면 산샤댐의 역사 현황을 알 수 있는 설비가 마련되어 있고, 각종 기념품을 파는 가게도 있다. 거기에서 얼마간의 시간을 보낸 뒤 걸어서, 산샤댐을 바로 눈앞에서 볼 수 있는 지점까지 가게 된다.
<정상에 있는 안내 건물 안>
<정상에 있는 표지석>
<배를 댐 위에서 댐 아래로 내리는 장면: 실제 장면인지 그냥 보여주기 위함인지 알 수 없다.>
<댐 근처에서 체조를 한다.>
<산샤댐 바로 앞에서>
이제 마지막으로 산샤댐을 눈 앞에서 보게 된다. 댐으로 만들어진 호수가 눈에 보이지 않는 곳까지 펼쳐져 있고, 그 너머에 이름을 알 수 없는 도시가 보인다. 물은 말이 없이 그저 갈 길을 잃고 갇혀 있을 뿐이다. 전하는 말에 의하면 이 댐으로 일년 내내 흐리고 안개가 끼는 등 기후 변화가 일어나고 있고, 바다도 강물의 공급을 받지 못해 염분이 증가하고 있다고 한다. 만약 지진이라도 일어나 이 댐이 붕괴된다면 이것은 수소폭탄의 위험보다도 훨씬 더 큰 인류 최대의 대재앙이 될 것이라고 한다. 만약에 중국이 대만을 강제 통합한다면, 대만은 이 댐을 붕괴시키겠다고 위협한다는 말도 들린다. 다행히 지금까지는 별 무리 없이 잘 운용되고 있으나 이 댐의 앞날은 아무도 장담할 수 없는 일이다.
<산샤댐에서 근무하는 근무병의 눈초리가 무섭다.>
이제 막지막으로 우리의 버스는 댐 아래로 간다. 광고와는 달리 그날 물을 방출하지 않아서 특별히 볼 것은 없었다. 그저 보통의 댐 아래에서 보는 것과 별 차이가 없었다.
<댐 아래에서 본 모습>
우리를 이창으로 실어갈 4번 버스가 기다리고 있었다. 사실 그날 여러대의 버스가 있었는데, 같이 유람한 사람 중 일부는 다시 만주나 중경으로 돌아가고, 일부는 그곳에서 각자 알아서 집으로 가고, 일부는 우리처럼 버스를 타고 이창까지 가는 사람들이었다. 특별히 우리가 탄 버스는 앞 창문에 공산당 시범이라고 써 있었는데, 공산당원이 이용하는 것인지, 공산당원과 관계 있는 사람만 타는 것인지 알 수 없었지만, 우리는 '공산당원과 관계없는 사람'이 타는 것으로 이해하고 버스에 올랐다. 그리고 곧 이창으로 출발했다. 그때가 2012년 11월 28일 오후 2:30분이었다.
<후기> 본래 우리가 총칭에서 여행사와 계약할 때, 유료 관광지 중 이미 요금에 포함된 관광지는 장비묘(张飞庙), 구원계(九畹溪), 삼협댐 (三峡大坝)세 곳이었다. 그런데 나중에 입장표를 받아 알게 된 것이지만, 기본 요금으로 포함된 장비묘나 구원계, 삼협댐의 입장료도 만만치 않게 비쌌다. 특히 삼협댐에서는 여러 번 표를 받았는데, 삼협댐에서 이창까지 무료 버스도 이용했다. 이 모든 것을 금액으로 환산하면, 실제로 2박 3일 동안 우리가 무료로 이용한 금액은 거의 7-10만원은 되든 듯 했다. 그렇다면 결국 배 운임만을 계산한다면 거의 5-6만원 정도밖에 되지 않는다는 생각이 들었다. 2박 3일에 실제 배삯이 그 정도라면 대단히 저렴하다는 생각에 도달했고, 똑 같은 코스를 개인적으로 왔다면, 우리가 단체 관광으로 지불한 금액보다 훨씬 돈이 많이 들었을 것으로 생각되었다.
어떻든 결론적으로 우리가 여행사에 낸 800위엔과 선택관광으로 가이드에게 낸 340위엔 합계 1140위엔(205,200원)에 2박 3일 동안 모든 관광지를 다 구경하고, 양자강 유람을 하고, 이창까지 가게 되었다. 이 글을 읽고 장강 유람을 생각하는 사람들 중, 돈을 아끼려는 사람은 우리와 비슷한 선택을 하면 좋을 것이고, "짧은 인생 화끈하게 써버려"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인터넷으로 예약하고 지갑에 꽤 많은 돈을 넣어 가야 할 것이다. 그런데 솔직히 말해서 양자강 유람은 그렇게 많은 돈을 들여 여행할만한 값어치는 없다고 본다. 그리고 5일 동안 중경에서 이창까지 갈 필요도 없다. 만주에서 이창까지가 적절하다. 사실은 2박 3일도 길다면 길다. 좀더 줄여서 핵심 1박 2일이면 충분하다. 앞으로 그런 프로그램이 나온다면 그것을 이용하기 바란다.
(2013년 1월 27일 작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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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좋은 글과 사진을 봅니다....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아직 장강삼협은 가보지를 못했습니다. 좋은 곳 다녀오셨습니다.
잘 읽었습니다.
잘 계시는지요. 건강 조심하세요.
좋은 구경하고 갑니다.
감사합니다.
중국여자들...마작에빠지면..날샙니다..ㅎ
남녀가 다 그런 것 같습니다.
아! 안녕하세요. 서재익입니다.
저도 지난 5월에 2박3일 장강크루즈를 했는데 같은 종류의 배와 프로그램같네요.
저는 매우 좋았었는데 곽선생님은 단풍철이라 더 멋있었겠어요.
사진을 잘 찍으시니 더 멋있고 그때 생각납니다.
아, 오랜만이네요.
네팔에서 헤어진후 뵙지봇했습니다.
언제 한번 뵙겠습니다.
좋은 사진 정성스런 글 잘 봤습니다.
다른 후기도 부탁드립니다...^^
그럴 일이 있으면 해야죠. 감사합니다.
단풍과 장강의 모습....... 구경할 날이 오겠찌요? ㅎㅎㅎ 동시간 더운 시솽반나에서의 1인...4분생각 많이 났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