며칠전 인천 엄마와 통화하면서 난 어린시절 외갓집을 향해 뛰어가고 있었다.
내 어린시절 외갓집은 우리집 인천 송도역에서 수인선 통통 기차를 타고 몇 간이역을 지나 기적소리를 내면서 내리던 일리역,
지금은 안산의 상록수 역이다.
그곳에서 외삼촌은 돌아가시고 혼자 계신 외숙모 팔순 잔치를 한다는데 다른집은 자식들이 다들 부모님을 모시고 간다는데
난 자식이 너무 멀리 산다고 투덜(?)되는 엄마께 까짓, 가지 뭐 엄마도 딸내미 있는데...
그러면서 외숙모 팔순 잔치를 생각하며 어린시절 그리운 추억을 떠올리며 편지를 썼다.
사실 이날은 내 사랑하는 친구 어벙이가 딸 하희를 입양하고 첫 돌을 맞는 날이기도 하다.
난 금요일... 이틀을 집을 비우면서 남편과 아들을 위해 카레를 만들고, 닭볶음탕을 만들고, 머핀을 굽고, 쿠키를 굽고
정신없이 준비를 하면서 하희와 외숙모를 위해 편지를 써야지 하는 생각을 계속 하고 있었다.
하지만 시간은 참 빨리도 흘러 아이들과 수업을 하면서 짬을 내 예쁜 꽃편지지에 2장씩 편지를 썼다.
외갓집을 생각하니 어느새 난 초등학생이 되어 있었다.
우리 외갓집엔 외할아버지가 계셨던 사랑방, 집에서 조금 걸어가면 수박밭과 참외밭 그리고 과수원,
집안에 소들에게 여물을 주던 모습, 그리고 아궁이 불을 피던 외숙모 모습,
대문 밖에 거적을 열고 들어가는 옛날 나무판자 뒷간, 그리고 자두나무...
갑자기 내 눈 앞에 그려진 30-40년 전 모습이 눈에 선하다.
외숙모 팔순 잔치는 토요일 12시, 어벙이 딸 하희 돌 잔치는 저녁 6시,
난 딸내미 예린이와 금요일 막차로 서울 남부터미널로 날아갔다.
서울에 도착하고 전날 연락한 대학 친구들이 내가 금요일 밤밖에 시간이 없다는데도 모였다.
그래서 12시부터 5시 반까지 아직 결혼하지 않은 친구집에 모여 각자 사는 모습들을 들여다 보며 어루만져 주었다.
나중엔 눈을 감고 친구 얘기를 듣다가 코를 골기도...
하지만 친구들은 토요일 아이들을 깨워 밥챙겨 먹여 학교에 보내야 한다고 떠났다.
22살 때 만났던 친구들이 어느새 오십을 바라보면서도 그리운 친구를 보러 내가 서울 올라갈 때면 다들 모여 주는 게
정말 눈물나도록 고마웠다.
친구들을 보내고 새벽녘에 잠이 들어 단잠을 자고, 성내에서 상록수까지 전철을 갈아타고 출발, 엄마가 기다리고 계셨다.
외숙모 팔순잔치는 내 그리움을 채우기에 부족하지 않았다.
나를 30년 만에 본다는 이종사촌, 그보다 칠순이 다된 울 엄마의 고모는 지금 90이 넘으셨단다.
그렇게 많은 할머니들을 한꺼번에 뵙기는 처음이었다. 그 속에 내 어린시절도, 내 노년의 모습도 숨어있었다.
엄마는 나를 데리고 가셔서 아주 행복하게 친척들에게 멀리사는 딸이 왔다고 자랑(?)을 끊이지 않았다. 나도 더없이 행복했다.
상록수에서 인천터미널에 와 내일 광양으로 내려올 표를 예매하고 친구 어벙이 딸 하희의 돌잔치를 하러 주안으로 향했다.
어벙이는 작년에 2년을 기도하고 준비하더니 마흔 다섯에 딸을 입양했다.
사랑의 교회를 다니는데 그 교회에서는 입양모임도 있고, 아주 행복하다고 자랑을 늘어놓는다.
토요일엔 친정 식구들과 잔치를 하고 주일에 서울에서 교회 식구들과 시댁 식구들과 잔치를 조촐하게 한다고 했다.
난 '하나님의 기쁨' 인 하희에게 편지를 전해 주었다.
친척들 속에 유일하게 있는 친구인 나와 울 엄마...
사실 이 친구는 보통 친구가 아니다. 고등학교 1학년 짝인데 수업시간에도 공부는 안하고 그림만 그리던 친구인데
누구에게 돈을 빌려주고 돌려 줘도 뭐야 하며 어벙한 짓을 하던 친구다.
그게 문제는 아니다. 그친구는 내가 예린이를 낳고 한달반만에 아빠가 돌아가셨을 때
회사를 휴가내고 아가씨로서 우리 딸 예린이를 5일동안 밤낮으로 봐 주던 친구다. 물론 그 부모님도...
그리고 내가 결혼해 멀리가 살자 울 엄마 생신, 어버이날, 등을 나보다 잘 챙겨주는 눈물겨운 친구다.
이야기가 이상하게 간다. 용서하기길...
그 친구가 38에 28과 결혼 한다고 했다. 그리고 결혼해 아들을 낳아 지금 초등 1학년이다.
내가 고등학교 대학교 다닐 때는 어벙이는 하나님을 몰랐다.
그런데 어느날 내가 오랫동안 자기를 위해 기도해서 그렇다고 하면서 신앙생활을 잘 하고 있다.
지금은 내가 사이비고 그 친구가 더 열심이다.
남편과 아이들을 위해 새벽기도를 다닌다고 해서 가슴이 뭉클하게 하기도 한 친구다.
아묻튼 그 친구의 딸 하희가 세상에서 많은 사랑을 받고 행복한 아이로 자라길 기도했다.
토요일 너무 많이 전철을 타고 걸어선지 인천 엄마 집에 와서는 그냥 쓸어져 잤다.
엄마는 내가 와서 집안 청소할까봐 싱크대와 가스렌지며 깨끗이 닦아 놓으셨다.
난 주일 아침 교회를 가지 않았다. 엄마와 텃밭에서 고추를 따고 단호박을 따고 엄마의 넋두리를 들었다.
그리고 엄마가 싸주신 고추장, 된장, 고춧가루, 콩, 단호박, 김치...
마다하지 않고 양손가득 들고 광양으로 돌아왔다.
하루가 지났다.
그런데 아직 난 팔순잔치와 돌잔치를 하며 만난 하나님의 모습에 취해 있다.
그리움을 만난 예배였다.
첫댓글 ^^ 으으 아깝다. 언니의 예배에 출연할 수 있었는데!
아` 저도 바쁘게 서울 인천 주안을 소나무님과 함께 다녀 오게 됩니다~ 그리움도 있고 제 어린시절과 노년의 모습이 함께 있는~ 저 이제 쓰러져 자요~감사합니다~
저는 마음이 일찍 늙어서 그런가 젊은 분들이 연세 드신 분들의 마음속을 헤아리고 맞춰주고 찾아와 주고 하면 그 분들이 얼마나 기쁘실까가 실감이 납니다. 좋은 예배를 드리셨네요. 경기도가 그날은 조금 따뜻했었겠어요.
그리움을 만난 예배!!! 소나무님,정말 좋았겠어요! ^--^
어린 시절을 추억할 수 있는 '고향'이 있는 분은 참 좋겠어요. 저는 초등학교만 다섯 학교를 다닌 데서 짐작할 수 있듯이 '고향'이 없어요. 그리움을 찾아가는.만나는 예배를 드릴 수 있어서 행복하셨겠어요.
믿거나 말거나 고향이 없는 사람은 자신이 그냥 고향입니다! 나는 내가 고향이라 좋아요. *^-^*
지금은 사라진 송도역 기찻길이 눈에 선하네... 아직도 어머니는 씩씩하실 것만 같아! 고향내음 뫔에 배었겠군, 축하해^^&
그대도 나의 고향이고 그리움입니다. 평안하십시요. 사랑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