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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성환의 권선서 간행과 세속 윤리의 탄생
글쓴이 김선희 / 등록일 2024-11-01
'조선’과 ‘도교’의 조합은 낯설다. 유교 국가 조선에서 도교는 언제나 이단이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흥미롭게도 이 두 극을 연결하는 흥미로운 매개가 있다. 조선 후기에 유행한 ‘권선서(勸善書)’다. 권선서란 주로 도가 계열에서 비롯된 일종의 계율서이자 계몽서로, 주로 복선화음과 권선징악적 관념에 기초해 생활상을 규율하는 성격의 글들을 말한다.
권선서는 일찍부터 중국을 중심으로 동아시아 전체에 확산되었는데, 특히 명청대에 유불도가 융합된 형태로 발전했다. 권선서가 유행한 것은 대중들의 독서욕이 증가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많은 권선서가 사회적 균형이 깨지고 기강이 흔들리던 혼란의 시대에 등장했기 때문에 권선서의 유행 자체를 세기말적 현상으로 해석하기도 한다.
권선서, 도가 계열 계율서이자 계몽서
19세기 중반 조선에서도 여러 종류의 도교 권선서가 간행되고 유통되었다. 이 시기 조선에서 도교 권선서가 다수 간행되고 유통되었던 것은 실체를 확인할 수 있는 사실이지만, 학계의 연구를 제외하고는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알려져 있지 않다. 19세기 도교 권선서의 간행과 확산은 그 자체로 마지막 전근대 조선을 재구성할 수 있는 숨은 그림 중 하나다.
이 시기 도교 권선서 유행의 중심을 이루던 인물이 있다. 대대로 무관을 지낸 중인 출신 무관 최성환(崔瑆煥, 1813-1891)이다. 그는 무관을 역임하다 헌종의 제안으로 제도개혁론을 다룬 『고문비략(顧問備略)』을 저술했고, 시사(詩社)를 조직한 뒤 중인의 시를 포함해 중국과 조선의 시를 모아 『성령집(性靈集)』을 편찬했으며, 김정호와 함께 『여도비지(輿圖備誌)』라는 지리서를 간행했다. 그는 평생 많은 이들과 교유하며 다양한 분야에서 활동했지만, 그의 이력 가운데 가장 독특한 것은 평생에 걸쳐 도교 권선서를 간행했다는 점이다.
시집의 간행이나 실용적 목적의 지리서 간행은 당대 지식인에게 선택 가능한 영역이었다 하더라도, 유교적 교양을 갖춘 무관이 도교 권선서를 간행했다는 것은 유사한 사례를 찾기 어렵다. 무관으로서 헌종과 독대하기도 했던 최성환은 젊은 시절부터 서적의 간행을 통한 백성의 계도와 교화에 큰 관심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도교 권선서 간행 역시 같은 맥락에서 비롯된 실천일 것이다.
최성환, 도교 결사에 참여하면서 권선서에 적극
권선서 간행에 관한 그의 노력과 시도는 30대부터 나타나지만, 본격적으로 권선서를 간행하게 된 것은 그가 ‘무상단’이라는 도교 결사에 참여한 이후였다. 본래 불교 결사에서 출발했다가 1877년 도교 결사로 성격을 바꾼 무상단은 좌반과 우반 총 8명으로 이루어진 도교 결사로, 최성환은 묘허자(妙虛子) 최황(崔晃)이라는 이름으로 청허자(淸虛子) 정학구(丁鶴九)와 함께 좌우반의 영수로 활동했다. 이들은 조선에 전파되지 않았던 삼성(三聖) 신앙, 즉 관성제군, 문창제군, 부우제군에 대한 신앙을 전파하는 한편, 중국에서 권선서를 들여와 조선에서 간행했다.
최성환은 무상단이 결성되기 이전부터 『태상감응편(太上感應篇)』, 『태상감응편도설(太上感應篇圖說)』, 『각세신편팔감상목(覺世新編八鑑常目)』 등 당시 중국에서 유행하던 대표적인 권선서들을 펴냈는데, 이후 무상단에 합류하면서 더욱 적극적으로 도교 권선서를 출판했다.
이 지점에서 확인할 것이 있다. 19세기 도교 권선서 간행에 상층 사대부 유학자들 역시 참여했다는 사실이다. 대표적인 개화파인 박규수(朴珪壽, 1807-1876), 한성부판윤을 지낸 관료 김창희(金昌熙, 1844-1890), 장신(將臣)이었던 신헌(申櫶, 1811~1884)의 아들 신정희(申正熙, 1833~1895), 문장으로 이름났던 이건창(李建昌, 1852-1898), 대제학을 역임한 남병철(南秉哲, 1817-1863)과 같은 이들이다.
이들은 주로 서문이나 발문을 통해 권선서 간행에 조력했는데, 이 교유의 중심은 아마도 최성환이었을 것이다. 당시 최성환이 조정에서 혹은 시사 활동을 통해 남병철, 박규수, 이유원, 신헌 등과 교류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도교 결사의 도교 권선서 간행에 당시 상층부 관료 지식인들이 참여했다는 것은 매우 흥미로운 지점이다. 이들은 왜 이단의 서적에 서문을 지어준 것일까? 이는 도교 권선서에 이들이 참여할 수 있었던 모종의 절충점 혹은 점이 지대가 있었음을 보여준다.
관왕, 관제, 관성으로 불렸던 관우는 그 자체로 충의의 상징이었으며, 문창제군 역시 학문과 과거 시험에 관련된 상징적 존재였다는 점에서 유학자들이 삼성 신앙을 유가적으로 활용할 수 있었다. 박규수는 『관성제군성적도지전집(關聖帝君聖蹟圖誌全集)』이라는 책에 서문을 써주며 “나는 약관의 시절부터 관성제후를 경모하여 띠풀로 길흉을 점치다가 꿈 속에서 만났는데 마치 정성스럽게 계고하고 지도해주는 것 같았다”며 관왕에 대한 추존을 밝히기도 한다.
유교·도교 결합한 세속 윤리, 일상적 실천을 기대
충의와 학문 등 삼성 신앙이 내세우는 이념들은 유학자들도 수용가능한 보편적 가치였다. 한편 이들은 단순히 관성제군과 문창제군의 상징을 활용하는데 머물지 않았다. “집집마다 깨우치고 암송하여 신복하여 경외함으로써 권선징악하기를 바란 것이다. 풍속을 돈후하게 하고 교화를 돕는 것이 매우 성대하다”는 박규수의 말로 알 수 있듯, 이들은 권선서를 통해 백성들을 적극적으로 계도하고 교화하고자 했다.
이들은 도교 권선서가 풍속을 돈독하게 하고 교화를 도울 수(敦風裨敎) 있으며, 이를 통해 전형적인 유교 윤리의 가치들 역시 확보될 수 있다고 믿었던 듯하다. 이들은 관제의 가르침이 궁극적으로는 유가로 귀결되며, 이를 통해 백성들이 정치적으로 교화될 수 있으리라 기대했다. 이를 통해 19세기 말에 유교와 도교가 결합된 새로운 세속 윤리가 제안되었음을 알 수 있다. 19세기 후반의 조선 지식인들은 변화하는 시대 상황에 맞추어 이념적인 도덕률이 아니라 실질적이고 현실적인 도덕률을 제안해서 세상의 타락과 혼란을 막고자 한 것으로 보인다.
이런 맥락에서 19세기 중반에 유행했던 권선서는 당시 조선 사회에서 추상적인 도덕적 질서 대신 현실적인 윤리적 실천의 기제가 나타나고 있음을 보여주는 하나의 창 역할을 한다. 성리학이 보편적 이념을 바탕으로 사회 구성원들에게 이념적으로 유일한 ‘하나의 도덕’을 제안했다면, 최성환이 간행한 권선서들은 일상적 실천에 ‘복선화음’이라는 현실적이며 세속적인 기준을 도입함으로써 행위 간의 관계에서 실질적인 실천들이 추동되는 윤리 규약을 제시하는 방식으로 새로운 도덕의 언어를 추동하고 있었던 것이다.
■ 글쓴이 : 김 선 희 (이화여자대학교 철학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