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지개아파트로 이사합니다
유영준
‘애용애용’ 구급차 소리가 집안 가득 울린다. 층간 소음 사고 뉴스가 머릿속으로 휙 스쳐 지나간다. ‘전전긍긍’하며 통합 주택 제어판을 바라본다. 관리사무소는 다행히 잠잠하다. 평화로웠던 토요일 아침도 오늘로 끝이다. 이제 난 끝나지 않을 것 같은 싸움을 시작하려 한다. 방 3개, 거실, 주방, 화장실 2개를 담은 네모난 25평 아파트는 혼자 살기엔 넓어 오랜 고심 끝에 세입자를 들이기로 했었다. 그 세입자가 이사 온 게 불과 어젯밤 일이다.
높다란 계단이 위태롭게 이어지는 골목 어귀에 행복식당이 있었다. 온 동네 주민들의 사랑방 같은 곳이라 퇴근 시간에 가면 자리가 없어 돌아 나오기 일쑤였다. 단골식당 사장님은 할머니, 아빠, 엄마와 똑 닮은 자녀를 둔 대가족을 세입자로 두고 있었다. 그래서인지 세입자를 구한다는 내 얘기를 자세히 듣고 계셨다. 그제는 달콤한 뚝배기 불고기, 오늘은 매콤한 닭볶음탕을 먹으며 몇 차례 밀고 당기기 끝에 세입자를 소개받기로 약속했다.
고급스러운 진회색 코트에 흰색 구두를 신고 온 세입자와 조심스럽게 눈을 보며 인사를 나누었다. 터키석같이 청량한 푸른빛이 가득한 눈은 끝없이 펼쳐지는 깊은 가을 하늘을 담았다. 서로의 눈을 깊게 들여다보자, 하늘 속 깊숙이 빨려 들어가는 듯했고 정신을 차리고 보니 이미 임대차 계약서에 도장을 찍은 후였다. 세입자는 평균 수면량이 12~16시간이라 하루 중 3분의 2는 잘 테니 정말 편할 거라는 행복식당 사장님의 웃음소리가 귓가를 맴돈다.
[임대차 계약서]
1조 갑(집주인)과 을(세입자)은 상호 평등하며 서로를 존중한다.
2조 갑은 을에게 따스운 밥과 찬물을 자율 급식한다.
3조 갑은 을에게 여름철 26도 이하, 겨울철 22도 이상 냉난방을 제공한다.
4조 을은 갑에게 출퇴근 시 ‘데굴데굴’ 애교를 3회 이상 보여준다.
5조 갑은 부드러운 수면용 바지를 착용해 을의 꾹꾹이 편의를 돕는다.
6조 갑은 을의 동의 없이 외박할 때 거실이 모래사장이 될 수 있다.
7조 계약 기간은 2년이지만, 서로의 동의로 평생 자동 연장된다.
앞으로 우리 서로를 뭐라고 부를까요? 탐색전이 시작되었다. 아직 상황판단이 안 끝난 세입자는 뭐라 대답하지 못했다. 이사 온 첫날 눈처럼 하얀 운동화를 신고 음속의 속도로 거실을 뛰어다니는 모습이 영국 프리미어리그 토트넘의 손흥민 선수를 닮아 ‘소닉..쏘니...소니’라 부르기로 했다. 세입자는 그 이름이 마음에 들지 않는 눈치다. 아무리 이름을 불러도 대답하지 않았다.
아침부터 세입자는 엄마 집에 가겠다고 떼를 쓴다. ‘애앵애앵’ 119 소방차가 장롱 밑으로 출동한다. ‘위용위용’ 112 경찰차는 화장실로 들어가고, ‘애용애용’ 129 구급차는 책상 아래 주차한다. 층간 소음, 반려동물 등 공동주택 거주자 예의를 강조하는 방송이 토요일 내내 스피커로 흘러나온다. 도둑이 제 발 저리듯 관리사무소에서 연락이 올까? 통합 주택 제어판만 바라본다. 일주일이 일 년처럼 더디게 지나갔다. 다행히 영국 왕실 표 갓 지은 밥과 남태평양산 참치가 들어간 디저트가 만족스러웠는지 세입자가 내 무릎 위로 폴짝 올라왔다.
질풍노도의 시기 세입자는 이름처럼 빨랐다. 현관부터 반대편 벽까지, 주방에서 베란다까지 쉴 틈 없이 ‘우다다다’ 달려댄다. 신발장 유리를 발판삼아 자유형 수영선수가 플립 턴(flip turn)을 하듯이 우아한 발차기로 추진력을 더해준다. 영국의 모험가 베어 그릴스(Bear Grylls)가 정글을 탐험하듯 냉장고 위, 책장 위, 심지어 방문 위까지 정복한다. 가끔 정복에 실패할 때도 있는지 집주인이 아끼던 본차이나 찻잔을 깨뜨리기도 하고, 그 대가인지 다리를 다쳐 피투성이가 되어 병원에 갔었다. 엑스레이를 촬영하니 다행히 인대나 뼈에 이상은 없었고, 소독약을 바르곤 치료가 끝났다. 집주인의 놀란 마음은 아는지, 처치실 구석에서 여유롭게 세수하느라 바쁘다.
어느 날 엔 팔굽혀펴기 운동을 하는 내 뒤통수를 냅다 후려치고 도망을 갔다. 분한 마음에 쫓아가면 골판지를 깔아 완충 효과가 있는 동그란 링으로 뛰어들어 권투장갑을 조이고 있다. 밀린 월세 지급과 계약조건 준수를 외쳐 보지만, 듣는 둥 마는 둥 골판지만 박박 긁어댄다.
'박박박박'
“바가지 긁지 말라고?”
이쯤 되면 어이가 없어 어의(語義)를 찾게 된다.
귓가를 때리는 코골이 소리에 밤잠을 설치고, 야간사냥으로 손발에 붙인 반창고 개수가 늘어가자 나는 지쳐버렸다. 묵시적 계약인 닝겐 조약을 자정부터 6시까지는 한시적으로 무력화하고 각자 영토에서 밤을 보내기로 했다. 사흘 동안은 긴장된 휴전상태가 유지되었다. 보름달이 환하게 비추던 어느 날 자정 무렵이었다. 편안한 침대에서 평정심을 찾던 그때 닫혀있던 안방 문고리가 돌아가는 소리가 났다. ‘스르르’ 방문이 열리고, 세입자가 눈을 반짝이며 방으로 들어왔다. 무조건 항복을 선언하고 24시간 국경을 개방했다. 다행인 건 가을이 오자 북방에서 날아온 두루미가 이성(理性)을 물어다 준 뒤부터 조금씩 철이 들었다.
진공청소기만 켜도 세입자는 날 선 항의를 퍼붓는다. 그래도 집주인의 폐(肺) 건강도 중요하니, 못 들은 척하며 밀어붙인다. 청소한 보답인지 가끔 긴 수염을 줍게 된다. 집주인 사이에만 전해지는 전설에는 세입자 수염을 주우면 행운이 온다. 높다란 타워에 오른 세입자가 불만이 가득한 표정으로 숱이 줄어든 수염을 정리하고 있다. 지갑에 넣어둔 5천 원이 생각나 주섬주섬 옷을 입었다. 아직 저녁 7시밖에 안 되었으니, 복권방에 갈 여유가 있었다. 이후 7번의 수염도 당첨이라는 기쁜 소식을 전해 주진 않았다. 아무래도 행운의 여신이 선택한 주인공은 집주인이 아니었나 보다.
하루면 없어지는 밥이 삼 일째 그대로다. 단식투쟁이라도 하는 걸까? 간식, 화장실, 장난감, 분명 무언가 마음에 안 든 모양이다. 협상 전문가가 필요했다. 흰색 가운을 입은 의사는 지난여름 이후 두 번째 만남이다. 미국(美國) 사례와 전문용어를 더해가며 복막염 진단을 내린다. 무미건조한 말투로 알약을 처방하는데 약을 삼키기 힘들어하면 특수 조제약으로 바꾸도록 안내했다. 처방전이 더해진 숫자만큼 간호사의 인사도 집주인의 한숨도 커진다. 북한산을 붉게 물들이던 단풍은 어느새 자취를 감추고, 북쪽에서 밀려오던 바람과 눈도 점차 기세를 잃어갔다. 계절이 저물고 교대하듯, 세입자도 묵묵히 계약일을 하루하루 채워갔다.
봄이 오고 따스한 햇살이 베란다에 들기 시작하자 세입자는 몸 상태가 좋아졌는지 연신 꽃단장하느라 바빠 보였다. 미세먼지 하나 없이 파란 하늘이 예쁜 날이었다. 가끔 밀린 월세로 티격태격하는 일은 부지기수였지만, 나름 평온한 일상이 계속되었다. 하루하루 따뜻한 기운이 성장하듯 이젠 계약조건에 무덤덤해졌는지 서로 존중하며 평화롭게 지낸다. 긴긴 수면시간도 ‘골골골’ 코골이 소리도 듣기 좋다.
삼월의 어느 새벽녘이었다. 잠결에 자리끼로 곁에 둔 물을 쏟았나. 잠옷을 스며드는 축축한 감각에 잠이 덜 깬 채 전등을 켰다. 세입자가 누워있던 자리가 동그랗게 젖어 있었다. 아기도 아니고 다 큰 애가 이불에 쉬를 하는 실수를 한다고, 옆집에 가서 소금을 얻어 오라며 혼쭐을 냈더니, 세입자는 말없이 조용히 자리를 옮겼다. 곰곰이 생각해 보니 이런 일은 처음이었다. 이부자리를 정리하고 괜스레 미안해 맛있는 간식을 내놓고 화해를 청한 게 벌써 일주일이 넘었는데 그릇에 담긴 간식은 줄어들지 않고 그대로였다. 이번엔 화해 전문가가 필요할 것 같다.
이른 아침 출근 준비 중, 누워만 있던 세입자가 걱정되어 조심스레 쓰다듬었다. 잘 마른 북어처럼 앙상해진 몸으로, 현관까지 따라 나와 배웅하던 모습이 어느 날부터 조금씩 줄어들었다. 주방 선반에는 유통기한이 얼마 남지 않은 간식이 자꾸만 늘어 갔다. 세입자는 전남 신안 천사대교 마라톤 대회를 다녀오느라 온종일 집을 비운 집주인을 오랫동안 기다렸나 보다. ‘냐오오옹…’ 나직한 목소리로 무지개 아파트로 이사를 간다고 조용히 속삭였다. ‘토닥토닥’ 봄비가 창문을 두드리는 새벽녘이었다. 하얀 보자기에 곱게 감싼 이삿짐을 남한강과 북한강이 만나는 두물머리 끝자락, 갈대와 부들을 엮어 지은 포근한 새집으로 옮겨다 주었다.
(끝)
첫댓글 냐옹이와의 동거, 그리고 이별의 모습을 잘 묘사했네요
질 읽었습니다
작가님 감사합니다. 아침식사 맛있게 하십시오.
갑을 관계가 아니고 그냥 집사 아닐까요?
시중 들어야 할 것이 많을텐데요.
어쨌거나 계속 함께 하지 못하고 떠났군요.
잘 읽었습니다.
감사합니다.작가님.. 집사 맞습니다. 점심식사 맛있게 하십시오.
아주 재미있어요. 여기서는 갑질이 아니라 을질 같네요.
나는 전에 살던 아파트가 좁아 주택단지로 이사왔는데 평수는 넓지만 엘리베이터가 없어 2층인데도 불편해요.
결국 2년 전엔가는 짐을 안고 굴러떨어지기도 했죠. 이후 계단 트라우마가 생겼어요.
재미있으셨다니 다행입니다. 행복한 저녁되십시오. 감사합니다.
음 ㆍ슬퍼유ㆍ
잘읽었어요ㆍ수필과 소설 사이ㆍ의 어떤 글이네요ㆍ
감사합니다. 작가님.
쏘니와 함께 한 시간이 너무 짧은 것 같아 아쉽네요.
쏘니가 두물머리 끝자락에서 편히 쉬길 바랍니다.
감사합니다. 작가님. 편안한 주말보내시길 바랍니다.
에구구 세입자가 고양이 소니였네요. 근데 무지개 아파트로 이사를 갔다니, 얼마나 같이 살았는지는 모르지만 정말 강아지나 고양이는 가족이나 다름없는데 위로의 말씀 드립니다. 무지개 아파트에 가서도 주인님 잘되시라고 복 많이 줄 거에요^^
안작가님. 따뜻한 말씀 감사합니다. 그 복 받아서 로또 다시 구입할까요? ^^ 복 많이 받으시는 주말 보내십시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