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주께 부르짖으나 돌아보지 아니하시나이다 (욥기 30장 1절 – 31절) 30:1 그러나 이제는 나보다 젊은 자들이 나를 비웃는구나 그들의 아비들은 내가 보기에 내 양 떼를 지키는 개 중에도 둘 만하지 못한 자들이니라… 8 그들은 본래 미련한 자의 자식이요 이름 없는 자들의 자식으로서 고토에서 쫓겨난 자들이니라 9 이제는 그들이 나를 노래로 조롱하며 내가 그들의 놀림거리가 되었으며 10 그들이 나를 미워하여 멀리 하고 서슴지 않고 내 얼굴에 침을 뱉는도다 11 이는 하나님이 내 활시위를 늘어지게 하시고 나를 곤고하게 하심으로 무리가 내 앞에서 굴레를 벗었음이니라… 15 순식간에 공포가 나를 에워싸고 그들이 내 품위를 바람 같이 날려 버리니 나의 구원은 구름 같이 지나가 버렸구나 16 이제는 내 생명이 내 속에서 녹으니 환난 날이 나를 사로잡음이라 17 밤이 되면 내 뼈가 쑤시니 나의 아픔이 쉬지 아니하는구나… 19 하나님이 나를 진흙 가운데 던지셨고 나를 티끌과 재 같게 하셨구나 20 내가 주께 부르짖으나 주께서 대답하지 아니하시오며 내가 섰사오나 주께서 나를 돌아보지 아니하시나이다 21 주께서 돌이켜 내게 잔혹하게 하시고 힘 있는 손으로 나를 대적하시나이다… 23 내가 아나이다 주께서 나를 죽게 하사 모든 생물을 위하여 정한 집으로 돌려보내시리이다 24 그러나 사람이 넘어질 때에 어찌 손을 펴지 아니하며 재앙을 당할 때에 어찌 도움을 부르짖지 아니하리이까 25 고생의 날을 보내는 자를 위하여 내가 울지 아니하였는가 빈궁한 자를 위하여 내 마음에 근심하지 아니하였는가 26 내가 복을 바랐더니 화가 왔고 광명을 기다렸더니 흑암이 왔구나 27 내 마음이 들끓어 고요함이 없구나 환난 날이 내게 임하였구나… 29 나는 이리의 형제요 타조의 벗이로구나 30 나를 덮고 있는 피부는 검어졌고 내 뼈는 열기로 말미암아 탔구나 31 내 수금은 통곡이 되었고 내 피리는 애곡이 되었구나 (개역개정) 오늘의 성경 본문은, 욥이 당한 고난의 원인을 두고 친구들 간에 벌어진 3차 변론(22-31장)의 마지막 부분(26-31장) 중에서, 욥의 독백 부분(29-31장)으로 재앙으로 과거의 영광을 잃어버리자 태도가 돌변한 사람들의 조롱과 경멸을 당해야하는 정신적 고통과 함께 자신이 직면한 육체적 영적 고통을 호소하며 하나님의 구원을 갈망하는 내용입니다. 29장에서 욥이 “나는 지난 세월과 하나님이 나를 보호하시던 때가 다시 오기를 원하노라!”(29:2)고 했던 것은, 하나님이 함께 하실 때 번영과 축복의 은혜를 누렸고, 이렇게 주어진 축복과 힘을 자신만이 아니라 힘없고 가난한 사람들을 돕는데 사용했으며, 이로 인해 사회적인 권위와 명예를 누렸던 영화로운 시절로의 회복을 욥은 갈망했습니다. 단지 번영과 축복된 생활로의 회복이 아니라 하나님과 함께하는 은혜 가운데 사는 삶에 대한 갈망이었습니다. 오늘 본문인 30장에서는 그러한 과거의 영광을 회상하던 욥이 그 영광이 사라질 때 사람들의 태도가 어떻게 돌변했는가와, 지금 현재 욥이 당하고 있는 육체적인 질고의 고통을 호소합니다. 그러나 욥은 단지 자신이 당하는 고통만을 호소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이 모든 것이 그 이유가 왜인지는 모르지만 하나님이 자신과 함께 하지 않음으로써 벌어지는 고통임을 증언합니다. 그래서 욥이 끊임없이 하나님 앞에 호소하며 부르짖지만, 욥이 직면한 또 다른 고통을 “내가 주께 부르짖으나 주께서 대답하지 아니하시오며, 내가 섰사오나 주께서 나를 돌아보지 아니하시나이다”(30:20)라고 호소합니다. 이것은 고통과 고난의 깊은 터널을 통과해본 사람은 모두가 동일하게 고백하는 내용입니다. 수많은 신앙의 선배들이 마치 그 순간에는 하나님이 안 계신 것처럼 느꼈다고 고백합니다. 그러나 이런 고백을 하면 욥의 세 친구같이 도식적인 인과응보나 율법적 논리만을 주장하는 이들은, 이들을 믿음이 없는 불신앙적인 존재라고 공격합니다. 그러나 믿음이 없기 때문이 아니라, 그 순간에 직면한 깊은 고통의 심연에서 터져 나온 신음입니다. 1. 욥은 재앙을 당하자 어떻게 전락했습니까? 욥은 “하나님이 나를 보호하시던 때에”(29:2) 베푸신 번영과 축복의 은혜를, 자기만이 아니라 어렵고 힘든 이들을 위해서 사람들을 차별하지 않고 베풀었음을, “나는 늘 정의를 실천하고, 매사를 공평하게 처리하였다.”(29:14,새번역)고 고백했습니다. 이로 인해서 욥이 사람들에게 어떠한 공경을 받았는지를, “그 때에는 내가 성문 회관에 나가거나 광장에 자리를 잡고 앉으면, 젊은이들은 나를 보고 비켜서고, 노인들은 일어나서 내게 인사하였건만. 원로들도 하던 말을 멈추고 손으로 입을 가렸으며, 귀족들도 혀가 입천장에 달라붙기나 한 것처럼 말소리를 죽였건만.”(29:7-10,새번역)이라고 회상했습니다. 그런데 욥이 예기치 않은 갑작스러운 재앙으로 고난을 당하자, 놀랍게도 사람들의 태도가 바뀌었음을 “그러나 이제는 나보다 젊은 자들이 나를 비웃는구나!”(30:1)라고 탄식합니다. 상황이 바뀌었다고 과거에 베풀었던 은혜를 망각하고 조롱과 멸시를 일삼는 저들을 가리켜서, 욥은 “그들의 아비들은 내가 보기에 내 양 떼를 지키는 개 중에도 둘 만하지 못한 자들이니라”(30:1) 곧 “내 양 떼를 지키는 개들 축에도 끼지 못하는 쓸모가 없는 자들의 자식들까지 나를 조롱한다.”(새번역)며, 천박하고 파렴치한 이들에게까지 조롱당하는 참담한 마음을 토로합니다. 욥이 이렇게까지 저들에게 분노한 것은 “조롱” 그 자체 때문이 아니라, 은혜를 원수로 갚은 행태 때문이었습니다. 때로는 도와줄 가치가 없어 보이는 이들도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조건 없이 안타까운 마음으로 도와줄 때 그 도움이 아무런 의미가 없는 이들이 있습니다. 그것을 오늘 욥은 “내 양 떼를 지키는 개들 축에도 끼지 못하는 쓸모가 없는 자들”이라며, 그 “자식들까지”도 똑같다는 표현을 사용했습니다. 저들은 아무리 도와줘도 자기 삶의 방식과 생각을 변화시키지 않다보니, “그들의 기력이 쇠잔하였으니, 그들의 손의 힘이 내게 무슨 소용이 있으랴?”(30:2) 곧 “젊어서 손에 힘이 있을 듯하지만, 기력이 쇠하여서 쓸모가 없는 자들이다.”(새번역)라며, 아무런 힘도 능력도 없는 무기력한 자들일 뿐이라고 했습니다. 욥에게 무례하게 행동한 이들이 영적 도덕적으로도 부패하고 타락해서 자기 생명력을 잃어버린 이들이기 때문이었습니다. 이 때문에 이들이 극도의 빈곤 상태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미천한 상태를 욥은 어떻게 증언합니까? 첫째로, 저들의 비천한 삶의 상태를 “그들은 곧 궁핍과 기근으로 인하여 파리하며, 캄캄하고 메마른 땅에서 마른 흙을 씹으며, 떨기나무 가운데에서 짠 나물을 꺾으며 대싸리 뿌리로 먹을거리를 삼느니라”(30:3-4)고 증언합니다. “마른 흙을 씹으며”는 “방랑하며”(새번역)라는 의미도 있습니다. 욥이 이들이 경제적으로 빈궁하다는 것 때문에 차별하는 발언이 아니라, 사람들의 도움조차도 받지 못하는 밑바닥의 삶을 살아가는 저들을 도왔지만, 돌아온 것은 저들에게까지 수모를 당해야 하는 자신의 서글프고 비참한 처지에 대한 탄식이었습니다. 둘째는, 저들이 사람들과 정상적으로 어울려 살 수 없는 패역한 부류였다는 것을, “무리가 그들에게 소리를 지름으로 도둑 같이 사람들 가운데에서 쫓겨나서, 침침한 골짜기와 흙구덩이와 바위굴에서 살며, 떨기나무 가운데에서 부르짖으며 가시나무 아래에 모여 있느니라”(30:5-7)며, 자신들의 잘못으로 사람들의 눈길을 피하여 들짐승과 다를 바 없는 비참한 삶을 영위하는 자들이라고 증언합니다. 왜 욥이 “내 양 떼를 지키는 개들 축에도 끼지 못하는 쓸모가 없는 자들의 자식”(30:1,새번역) 곧 ‘개만도 못한 이들’이라고 말했던 것인지를 알만합니다. 따라서 욥은 이들의 실체를, “그들은 본래 미련한 자의 자식이요, 이름 없는 자들의 자식으로서, 고토에서 쫓겨난 자들이니라”(30:8)고 밝힙니다. “미련한 자”는, 단순히 우매한 자가 아니라 의도적으로 하나님을 거부하며 도덕적으로 타락한 자를 가리킵니다. “이름 없는 자”는, 그 사람의 인격과 사회적 위치와 가문이 없는 “비천한 자”(개역)로서 사회에서 냉대와 조롱을 받는 이들을 가리킵니다. 이 때문에 “고토에서 쫓겨난 자들”은, 자신들이 행한 악행으로 사람들로부터 배척을 받아 “제 고장에서 쫓겨난 자들”(새번역)을 가리킵니다. 결국 하나님과 사람들로부터 버림받은 사람들이 겪어야 할 고통과 비참함을 묘사하면서, 그러한 그들에게까지 “조롱”받는 자신의 비참한 현실을 욥은 토로하고 있었습니다. 욥은 재앙을 당했다는 이유 하나로 어려움에 처한 자신을 “비웃는”(30:1) 배은망덕한 이들을 “내 양 떼를 지키는 개들 축에도 끼지 못하는 쓸모가 없는 자들의 자식”(30:1,새번역)이라고 했던 그들의 악행을 어떻게 토로합니까? “이제는 그들이 나를 노래로 조롱하며, 내가 그들의 놀림거리가 되었으며, 그들이 나를 미워하여 멀리 하고, 서슴지 않고 내 얼굴에 침을 뱉는도다”(30:9-10)라고 했습니다. 아마도 “제 고장에서 쫓겨난” 저들이 가끔 구걸을 위해서 마을로 들어오며, 이제는 더 이상 자기들을 도울 수 없는 여건이 된 욥을 동정하기보다 저주하고 조롱하며, 주저하지 않고 침마저 뱉었던 것 같습니다. 멸시와 경멸의 극치를 당해야했던 욥으로서는 자신이 하루아침에 전락한 처절한 현실을 실감해야했고, 그것이 또한 욥에게는 참을 수 없는 극심한 정신적인 고통이었을 것입니다. 심지어 “그들이 내 오른쪽에서 일어나 내 발에 덫을 놓으며, 나를 대적하여 길을 에워싸며, 그들이 내 길을 헐고, 내 재앙을 재촉하는데도 도울 자가 없구나! 그들은 성을 파괴하고, 그 파괴한 가운데로 몰려드는 것 같이 내게로 달려드니”(30:12-14)라며, 단지 자신을 “조롱”하는 것으로 끝나지 않고, 더 철저한 파멸을 조장하는 세력이 되었다고 탄식합니다. 한편에는 고통 받는 욥을 계속해서 압박하는 세 친구들에 대한 비유적 표현으로도 보입니다. 이러한 상황으로 인하여 욥이 느끼는 두려움의 감정을 “순식간에 공포가 나를 에워싸고, 그들이 내 품위를 바람 같이 날려 버리니, 나의 구원은 구름 같이 지나가 버렸구나!”(30:15) 곧 “나는 두려워서 벌벌 떨고, 내 위엄은 간곳없이 사라지고, 구원의 희망은 뜬구름이 사라지듯 없어졌다.”(새번역)라고 호소합니다. 옛날의 풍요와 영광은 사라지고 없고 남은 것은 “공포가 나를 에워싸고” 있고 “나의 구원은 구름 같이 지나가 버렸구나!”라는 절망감만을 토로할 수밖에 없었던 욥의 심정이 어떠했겠습니까? 그럼에도 욥이 “이는 하나님이 내 활시위를 늘어지게 하시고, 나를 곤고하게 하심으로, 무리가 내 앞에서 굴레를 벗었음이니라”(30:11) 곧 “하나님이 내 활시위를 풀어 버리시고, 나를 이렇게 무기력하게 하시니, 그들이 고삐 풀린 말처럼 내 앞에서 날뛴다.”(새번역)라며, 자신에게 벌어지고 있는 모든 일이 하나님의 절대적 주권에 의한 것이라고 하는 하나님을 향한 신뢰의 고백을 어떻게 생각합니까? “늘어지게 하시고”는, 축 늘어진 육체의 연약함을 나타내며, 질고로 생명력을 잃어가고 있는 상태를 의미합니다. 2. 욥은 자신의 고통을 어떻게 호소합니까? 오늘 본문에서 욥은 “이제는”(30:1,9,16)이라는 말을 반복합니다. 과거 하나님의 은혜로 영화롭게 살던 때와는 달라진 상황의 변화를 의미합니다. 칭송과 존귀를 받던 상황에서 조롱과 멸시를 받는 상황으로의 변화, 세 친구들이 사람들을 돕는 선한 삶을 살면 복을 받는다고 강조했던 현세적 인과 응보론과 달리 조롱과 고통만이 연속되는 상황의 탄식과 반론이 제기됩니다. 첫째로, 욥은 “이제는 내 생명이 내 속에서 녹으니, 환난 날이 나를 사로잡음이라. 밤이 되면 내 뼈가 쑤시니, 나의 아픔이 쉬지 아니하는구나.”(30:16-17) 곧 “나는 이제 기력이 쇠하여서, 죽을 지경에 이르렀다. 지금까지 나는 괴로운 나날들에 사로잡혀서, 편하게 쉬지 못하였다. 밤에는 뼈가 쑤시고, 뼈를 깎는 아픔이 그치지 않는다.”(새번역)라며, 끊임없이 계속되는 육체적 정신적 고통을 호소합니다. 계속되는 고통으로 모든 기력이 소모되고 삶에 대한 소망마저 끊어져버린 비참한 상태로, 내적 외적 고통으로 정신과 육체가 쇠약해지고 혼미해졌음을 나타냅니다. 둘째로, 욥은 “그가 큰 능력으로 나의 옷을 떨쳐 버리시며, 나의 옷깃처럼 나를 휘어잡으시는구나”(30:18)라며, 하나님의 특별하신 섭리로 욥에게 생긴 악창으로 흘러나온 고름과 상처가 굳은 딱지가, 볼품없는 옷처럼 그의 온 몸을 뒤덮고 있는 육체적 고통을 비유적으로 표현합니다. 자신이 이처럼 고통당하는 근본적 원인이자 결과로서 “하나님이 나를 진흙 가운데 던지셨고, 나를 티끌과 재 같게 하셨구나”(30:19)라며, 과거와 달리 하나님께 버림받는 영적 교제가 단절되어 끊어짐으로 인해 자신이 고통을 받게 되었다는 정신적 영적 고통을 호소합니다. 알 수 없는 하나님의 섭리로 자신이 극심한 고통의 밑바닥에 떨어졌다는 고백입니다. 극심한 심적 고통과 신앙적 곤핍의 토로였습니다. 욥이 이전에 하나님과 함께 하며 누리던 영적인 은혜가 끊어지면서, 이제는 오히려 하나님께서 욥을 적대하여 고난을 주신다는 생각에 사로잡혀 고통스러워하는 인간 현존의 문제를 호소하고 있었습니다. 욥은 단지 현실적인 물질적 육체적 고통만이 아닌 하나님과 분리되고 단절되었다고 하는 정신적 영적인 외로움의 고통을, “내가 주께 부르짖으나 주께서 대답하지 아니하시오며, 내가 섰사오나 주께서 나를 돌아보지 아니하시나이다.”(30:20) 곧 “주님, 내가 주님께 부르짖어도, 주님께서는 내게 응답하지 않으십니다. 내가 주님께 기도해도, 주님께서는 들은 체도 않으십니다.”(새번역)라고 호소합니다. 욥은 하나님의 침묵을 하나님께 버림받은 비극적 상태로 고백했습니다. 참으로 이 순간이 모두에게 가장 견디기 어려운 순간 아닌가요? 많은 사람들이 이 과정을 통과합니다. 지독한 고통 가운데서도 부르짖기를 계속하는 욥의 믿음을 발견합니다. 그러나 기도는 했지만 침묵하시는 하나님 앞에, 응답받지 못하는 절망적 상황에 대한 욥이 느끼는 영적 고통을 토로합니다. 우리는 이러한 연단의 과정을 통해서 성숙하고 성장해가는 믿음을 체험하게 됩니다. 예수님께서도 이 땅에 인간의 몸으로 오셔서 사람들을 사랑한 것 밖에 없는데, 믿는 자들이 정치적 종교적 죄목을 뒤집어 씌워서 아무 죄 없이 십자가에 매달아서 사형 집행을 처할 때, “제 구시쯤에 예수께서 크게 소리 질러 이르시되,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하시니, 이는 곧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하는 뜻이라”(마27:46,시22:1인용)며, 그 마지막 순간에 느끼는 극심한 고독감을 아버지 하나님 앞에 토로했습니다. 욥이나 예수님이나 그 순간에 믿음이 없어서가 아니라, 오직 하나님만을 의지하려는 고백이었다는 것을 아십니까? 하나님 앞에 솔직한 사람들이, 사람들 앞에서도 솔직합니다. 하나님 앞에 위대한 사람들은, 엄청난 많은 일을 했거나 대단한 체 하는 사람들이 아니라, 하나님과 사람 앞에 솔직한 사람들이라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이들이 영적으로 위대한 사람들입니다. 언제나 교회가 부흥할 때의 특징은, 교회가 대단한 일을 한 때가 아니라 연약하지만 솔직한 사람들의 공동체일 때였습니다. 하나님 앞에 우리의 고통과 아픔을 호소하지 않으면 누구한테 하겠습니까? 사람들 앞에는 한계성이 있습니다. 3. 부르짖어도 대답 없는 고통이 무엇입니까? 축복의 은혜를 베푸셨던 하나님이 왜 하루아침에 급작스러운 태도의 변화를 보여 욥에게 큰 고통을 안겨주시는 하나님이 되신 것인지가 욥으로는 알 수 없었습니다. 우리야 그렇게 된 것이, 욥의 신앙이 사탄조차 시기하는 신실한 믿음이었기 때문임을 알지만(1-2장), 욥 자신으로서는 영문을 알 수 없는 사건이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욥의 하소연에도 하나님께서 침묵하신 이유였습니다. “내가 주께 부르짖으나 주께서 대답하지 아니하시오며, 내가 섰사오나 주께서 나를 돌아보지 아니하시나이다.”(30:20)라고 자신의 답답함을 호소했던 욥은, 자신의 감정을 감추지 않고 하나님 앞에 솔직하게 자신이 느끼는 마음을 어떻게 표현합니까? 자신이 겪는 사건이 친구들이 말한 인과응보적인 사건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의 특별한 주권적인 섭리 때문임을 알면서도, 자신이 당하는 고통이 너무 크고 왜 하나님이 돌변한 것인지를 모른다는 점에서, “주께서 돌이켜 내게 잔혹하게 하시고, 힘 있는 손으로 나를 대적하시나이다. 나를 바람 위에 들어 불려가게 하시며, 무서운 힘으로 나를 던져 버리시나이다.”(30:21-23)라고 탄식합니다. 이 비유는, 욥이 아무런 이유 없이 비참한 고난의 처지로 떨어진 것과, 축복된 생활에서 갑자기 비참한 상황으로 전락한 것을 나타냅니다. 그러면서 욥은 자신이 달려가는 결말에 대한 두려움을 “내가 아나이다. 주께서 나를 죽게 하사, 모든 생물을 위하여 정한 집으로 돌려보내시리이다.”(30:23) 곧 “나는 잘 알고 있습니다. 주님께서는 나를 죽음으로 몰아넣고 계십니다. 끝내 나를 살아 있는 모든 사람들이 다 함께 만나는 그 죽음의 집으로 돌아가게 하십니다.”(새번역)라고 토로합니다. 욥은 지금 자신의 상황에 하나님이 개입하시지 않고 끝까지 침묵하신다면, 자신은 고통 가운데 모든 사람이 가야하는 죽음의 길 밖에 남아있지 않다는 간곡한 구원의 호소였습니다. 과연 이것이 하나님께서 욥에게 원하시는 길인가를 묻는 탄원이었습니다. 따라서 이러한 상황에서 욥이 할 수 있는 것은 “그러나 사람이 넘어질 때에 어찌 손을 펴지 아니하며, 재앙을 당할 때에 어찌 도움을 부르짖지 아니하리이까?”(30:24) 곧 “이렇게 빠져 들어가면서 그 누가 살려달라고 손을 내뻗지 않으며, 절망에 빠져서 도움을 청하지 않으랴!”(공동번역)라며, 하나님을 향해 구원을 갈망하는 기도밖에 할 수 있는 것이 없지 않느냐는 탄원 기도의 당위성을 고백합니다. 욥은 쉽게 절망하지 않았습니다. 욥은 과거 자신이 어렵고 힘든 자들을 위해서 행했던 일을 회상하며, “고생의 날을 보내는 자를 위하여 내가 울지 아니하였는가? 빈궁한 자를 위하여 내 마음에 근심하지 아니하였는가?”(30:25)라고 반문합니다. 자신도 억울하고 힘없는 자들과 아픔을 같이 나눴는데, 왜 하나님께서는 지금 고통당하고 있는 욥을 외면하고 있느냐는 하소연이었습니다. 이러한 욥을 정죄할 줄 밖에 모르는 친구들을 향해 “내가 복을 바랐더니 화가 왔고, 광명을 기다렸더니 흑암이 왔구나”(30:26)라며, 친구들이 강조하던 인과응보적 논리와 달리 선한 일을 행했던 자기에게 “복”과 “광명”이 아니라 “화”와 “흑암”이 닥친 것을 어떻게 설명할 것이냐고 하는 반론이기도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이는 내 생각이 너희의 생각과 다르며, 내 길은 너희의 길과 다름이니라”(사55:8)고 말씀했던 것처럼, 친구들을 향해 인간의 생각과 판단이 하나님의 섭리와 다르다는 변증이기도 했습니다. 그러면서도 욥이 간절히 도움을 부르짖지만 아무에게도 도움을 받지 못하는 절망적인 마음과 현실의 고통을 “내 마음이 들끓어 고요함이 없구나. 환난 날이 내게 임하였구나. 나는 햇볕에 쬐지 않고도 검어진 피부를 가지고 걸으며, 회중 가운데 서서 도움을 부르짖고 있느니라”(30:27-28) 곧 “근심과 고통으로 마음이 갈기갈기 찢어지고, 하루도 고통스럽지 않은 날이 없이 지금까지 살아왔다. 햇빛도 비치지 않는 그늘진 곳으로만 침울하게 돌아다니다가, 사람들이 모여 있는 곳에 이르면 도와 달라고 애걸이나 하는 신세가 되고 말았다.”(새번역)라고 호소합니다. 욥은 자신의 고독한 절망적인 마음의 고통을 “나는 이리의 형제요, 타조의 벗이로구나. 나를 덮고 있는 피부는 검어졌고, 내 뼈는 열기로 말미암아 탔구나. 내 수금은 통곡이 되었고, 내 피리는 애곡이 되었구나”(30:29-31)라고 탄식합니다. “이리”와 “타조”는, 그 울음소리가 얼마나 애처로운지 슬픔과 고독을 나타내는 상징적 동물이었습니다. 또 “수금”과 “피리”는 기쁨과 흥을 돋우는 악기였지만, “통곡”과 “애곡” 소리가 되었다는 것은 탄식의 소리를 낼 수밖에 없는 욥의 처지에 대한 비유였습니다. 욥은 몸에 생긴 악창으로 인한 극심한 아픔의 고통과 함께 정신적 영적 고통을 호소했습니다. 사랑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욥이 “내가 주께 부르짖으나 주께서 대답하지 아니하시오며, 내가 섰사오나 주께서 나를 돌아보지 아니하시나이다.”(30:20)라고 했던 절규를 어떻게 느끼십니까? 그가 쉽게 원망과 불평을 내뱉는 사람이었기 때문이었을까요? 아니면, 믿음의 깊이가 없는 사람이었기 때문이었을까요? 이 절규의 의미는, 깊은 절망의 터널을 통과해보지 않은 사람들은 이해하지 못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어떤 이들은 이런 절규와 탄식을 하면 불신앙의 사람으로 정죄할 뿐, 그 사람의 아픔과 고통을 공감하고 껴안아주려고 하지 않습니다. 이것이 놀랍게도 원칙론적인 교리만을 내세우는 율법주의나 근본주의적 신앙인들에게서 많이 나타납니다. 성경에 계시된 하나님과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을 품은 이들과는 전혀 상반된 심성을 가진 경우가 많습니다. 이런 율법적인 사람을 우리는 ‘종교인’이라고 부르고, 주님의 마음을 가진 사람을 ‘신앙인’이라고 구별합니다. 신앙인은 하나님의 뜻과 사람을 우선하지만, 종교인은 하나님을 이야기하지만 실제는 하나님의 말씀이나 뜻과 관계없이 종교 교리와 조직의 보호가 언제나 우선하기 때문입니다. 사실 우리는 많은 경우에 무의식적으로 하나님의 뜻과 사람보다 종교 교리와 조직의 보호를 우선하도록 교육받아 왔습니다. 그 결과가 사회 속에서 배타적이고 독선적인 종교인을 양성해낸 이유입니다. 욥과 세 친구의 갈등이 풀리지 않은 것은, 결국 신앙인이었던 욥의 믿음과 종교인이었던 세 친구의 믿음이 충돌한 결과였습니다. 이 미묘한 신앙인과 종교인의 갈등과 차이를 분별하지 않고서는 건강한 신앙인으로 살아갈 수 없습니다. 세상은 자신들의 힘들고 외로운 마음과 몸을 기댈 수 있는 따뜻하고 포근한 신앙인들을 갈망하는데, 교회는 몰인정하고 냉랭한 교리적 원칙론만을 앞세우는 차갑고 냉정한 종교인들을 키워내고 있습니다. 욥이 “내가 주께 부르짖으나…돌아보지 아니하시나이다.”(30:20)라고 호소했던 외롭고 고통스런 절규의 의미를 깨닫고, 주님이 기뻐하시는 생명의 사람들로 거듭나는 복된 믿음의 사람들이기를 축원합니다. 아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