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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년 7월 20일 금요일 [(녹) 연중 제15주간 금요일]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오늘 전례 [녹] 연중 제15주간 금요일 또는 [홍] 성 아폴리나리스 주교 순교자 이사야 예언자는 병이 들어 죽게 된 히즈키야 임금의 기도를 주님께서 들으셨다며 주님의 표징을 보여 준다(제1독서). 예수님께서는 안식일에 제자들이 밀 이삭을 뜯어 먹는다고 비난하는 이들에게, 사람의 아들은 안식일의 주인이라고 하신다(복음). <나는 네 기도를 들었고 네 눈물을 보았다.> ▥ 이사야서의 말씀입니다. 38,1-6.21-22.7-8 1 그 무렵 히즈키야가 병이 들어 죽게 되었는데, 아모츠의 아들 이사야 예언자가 그에게 와서 말하였다. “주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의 집안일을 정리하여라. 너는 회복하지 못하고 죽을 것이다.’” 2 그러자 히즈키야가 얼굴을 벽 쪽으로 돌리고 주님께 기도하면서 3 말씀드렸다. “아, 주님, 제가 당신 앞에서 성실하고 온전한 마음으로 걸어왔고, 당신 보시기에 좋은 일을 해 온 것을 기억해 주십시오.” 그러고 나서 히즈키야는 슬피 통곡하였다. 4 주님의 말씀이 이사야에게 내렸다. 5 “가서 히즈키야에게 말하여라. ‘너의 조상 다윗의 하느님인 주님이 이렇게 말한다. 나는 네 기도를 들었고 네 눈물을 보았다. 자, 내가 너의 수명에다 열다섯 해를 더해 주겠다. 6 그리고 아시리아 임금의 손아귀에서 너와 이 도성을 구해 내고 이 도성을 보호해 주겠다.’” 21 이사야가 “무화과 과자를 가져다가 종기 위에 발라 드리면, 임금님께서 나으실 것이오.” 하고 말하였다. 22 히즈키야가 “내가 주님의 집에 오를 수 있다는 표징은 무엇이오?” 하고 물었다. 7 “이것은 주님이 말한 일을 그대로 이룬다는 표징으로서, 주님이 너에게 보여 주는 것이다. 8 보라, 지는 해를 따라 내려갔던 아하즈의 해시계의 그림자를 내가 열 칸 뒤로 돌리겠다.” 그러자 아하즈의 해시계 위에 드리워졌던 해가 열 칸 뒤로 돌아갔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하느님 감사합니다. <사람의 아들은 안식일의 주인이다.> ✠ 마태오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12,1-8 1 그때에 예수님께서 안식일에 밀밭 사이를 지나가시게 되었다. 그런데 그분의 제자들이 배가 고파서, 밀 이삭을 뜯어 먹기 시작하였다. 2 바리사이들이 그것을 보고 예수님께 말하였다. “보십시오, 선생님의 제자들이 안식일에 해서는 안 되는 일을 하고 있습니다.” 3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다윗과 그 일행이 배가 고팠을 때, 다윗이 어떻게 하였는지 너희는 읽어 본 적이 없느냐? 4 그가 하느님의 집에 들어가, 사제가 아니면 그도 그의 일행도 먹어서는 안 되는 제사 빵을 먹지 않았느냐? 5 또 안식일에 사제들이 성전에서 안식일을 어겨도 죄가 되지 않는다는 것을 율법에서 읽어 본 적이 없느냐? 6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성전보다 더 큰 이가 여기에 있다. 7 ‘내가 바라는 것은 희생 제물이 아니라 자비다.’ 하신 말씀이 무슨 뜻인지 너희가 알았더라면, 죄 없는 이들을 단죄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8 사실 사람의 아들은 안식일의 주인이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주님, 제가 당신 앞에서 성실하고 온전한 마음으로 걸어왔고, 당신 보시기에 좋은 일을 해 온 것을 기억해 주십시오.” 죽음을 앞둔 히즈키야는 하느님께 자신의 인생을 고백합니다. 비록 하느님 앞에서 흠 없는 인생은 아니었지만, “성실하고 온전한 마음”으로 살아온 한 인간의 진실한 고백이기도 합니다. 하느님께서는 그런 그의 눈물 어린 기도를 들으시고, ‘해시계의 그림자를 열 칸 뒤로 돌리는’ 표징을 통해 인간의 논리를 넘어서는 은총을 베푸십니다. 안식일에 밀밭 사이를 지나가면서 예수님의 제자들이 배가 고파서 밀 이삭을 뜯어 먹기 시작한 상황은, 그들이 예수님을 따라다니며 얻은 것이 세속적인 성공이나 부유함이 아님을 알게 해 줍니다. 그들은 단순히 게으르고 가진 것이 없어서 배가 고팠던 것이 아니라, 밥보다 복음을 전하는 데 열중했기에 배가 고팠던 것입니다. 그러나 율법을 충실히 지키는 것이 세속적 행복을 보장해 준다고 생각한 바리사이들의 눈에는, 제자들의 행동이 눈엣가시였을 것입니다. 그런 바리사이들의 위선을 예수님께서는 질책하십니다. 그들이 존경하는 다윗왕도 일행이 배가 고팠을 때 그들에게 음식을 먹이는 일이 율법을 지키는 일보다 더 중요하다는 것을 먼저 깨달았다는 사실을 기억시키십니다. “내가 바라는 것은 희생 제물이 아니라 자비다.”라는 예수님의 말씀은, 종교적 의무에 매달려 의무를 지키는 일 이외에 희생과 자비를 실천하지 않는 우리의 왜곡된 신앙관을 질책하시는 말씀으로 들립니다. 법과 계명은 소중합니다. 그러나 그 법과 계명의 정신을 잃으면 인정과 자비가 사라지고, 형식과 위선만 남게 됩니다.(송용민 사도 요한 신부) |
벼랑 끝에서 바치는 기도 경제적인 어려움으로 홀로 괴로워하다가 극단적 선택을 하는 우리 이웃들이 부지기수로 늘어만 갑니다. 참혹한 뉴스를 접할 때 마다 너무나 안타까워 밤잠을 못 이룰 지경입니다. 죄책감의 눈물을 흘리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OECD 가입 후 ‘이제 우리도 살만하구나.’했었는데, 자살률, 이혼율을 비롯한 대한민국의 부끄러운 수치는 하늘을 찌릅니다.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누군가의 극단적인 선택은 또 다른 비극을 불러옵니다. 그 참혹한 심정 충분히 이해가 되지만 정말이지 하지 말아야 할 선택입니다. 당사자들이야 한 순간의 선택으로 이제 모든 것 끝나버렸겠지만 남은 사람들이 감내해야 할 충격과 고통, 죄책감과 무너져 내리는 가슴은 대체 어찌하란 말입니까? 우리도 모르는 사이에 ‘죽음의 문화’가 버젓이 우리들 사이로 들어와 있음이 분명합니다. 지금 이 시간에도 많은 분들이 삶과 죽음 사이에 걸쳐진 낭떠러지 위에서 아슬아슬하게 서계십니다. 극도의 고통 속에서 외치던 시편작가의 울부짖음이 남의 말 같지 않습니다. “주님 당신 외에 저를 돌보아 주는 이 아무도 없습니다!” 가족이나 친구들도 있으나 마나입니다. 오라는 곳도, 의지 할 곳도 없습니다. 바라볼 대상, 희망할 대상, 기대할 대상도 없습니다.
아무리 그래도 극단적인 선택은 절대 안 됩니다. 삶이 선물이듯 죽음도 선물입니다. 특히 하느님의 모상인 인간의 생명은 축복이고 은총입니다. 나는 내가 원해서 이 세상에 온 것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보내셔서 왔습니다. 당연히 내 삶에 대한 마지막 정리 역시 그분 손에 맡겨야 합니다. 최종적인 선택은 우리가 아니라 주님께서 하시도록 맡겨드리는 것이 목숨 걸고 지켜야할 우리 교회 불변의 교리입니다.
죽고 싶을만큼 힘겨운 분들, 야고보 사도는 권고 말씀을 꼭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여러분 가운데에 고통을 겪는 사람이 있습니까? 그런 사람은 기도하십시오.” 여기서 말하는 기도는 그냥 기도가 아니라 혼신의 힘을 다한 기도, 목숨을 건 기도, 모든 것을 다 바친 기도를 말합니다.
하느님께 충실했던 성왕(聖王)으로 기억되는 히즈키야 왕의 기도가 그랬습니다. 그는 심한 피부질환에 걸려 앞날을 장담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이사야 예언자가 그를 방문하여 이런 말을 건네고 갔습니다.
‹주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의 집안일을 정리하여라. 너는 회복하지 못하고 죽을 것이다.”›(이사야서 38장 1절)
청천벽력같은 통보에 히즈키야 왕은 대들거나 따지지 않고 즉시 기도를 드리기 시작합니다. 그런데 그는 특별한 방식으로 기도를 바쳤습니다. 얼굴을 벽 쪽으로 돌리고 기도를 드렸습니다.
얼굴을 벽 쪽으로 돌리고 바친 히즈키야 왕의 기도는 무엇을 의미합니까? 오로지 하느님만 바라보겠다는 표현입니다. 아무런 분심 없이 하느님과 대화하겠다는 의지의 표명입니다. 모든 것 하느님 손에 맡기겠다는 표시입니다.
히즈키야 왕 기도의 특징은 ‘눈물의 기도’였습니다. 자주 히즈키야 왕은 대성통곡을 터트리며 혼신의 힘을 다해 기도 바쳤습니다. 이런 기도를 어떻게 하느님께서 들어주시지 않겠습니까?
캄캄하고 깊은 구렁 속에서도 계속해서 하느님을 향해 온몸으로 외치고 부르짖다보면, 다시 말해서 간절히 기도하다보면 한 가지 특별한 일을 체험하게 됩니다.
거짓말처럼 하느님께서 슬며시 내 옆으로 다가오십니다. 울먹이며 흔들리는 내 어깨를 부드럽게 두드려주시고 이 세상 그 누구도 줄 수 없는 잔잔한 평화를 선물로 주십니다. 그리고 말씀하십니다. “이렇게 주저앉아있지 말고 빨리 일어나라고, 힘겹겠지만 한걸음만 더 앞으로 나아가보라고.” 하느님 아버지께서는 우리가 더 이상 길이 없다고 말하는 그 길의 끝에서 다시 시작하십니다. 그러니 적당히가 아니라 온몸을 바쳐 기도해보십시오. 사랑의 하느님께서 반드시 다른 문 하나를 열어주실 것입니다.
더 이상 나아갈 수 없다며 주저앉아 계시는 분들, 한 걸음만 더 나아가보시기 바랍니다. 거기 사랑의 하느님께서 기다리고 계실 것입니다. 바로 거기서 새로운 길이 시작될 것입니다. †살레시오회 한국관구 관구장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 |
하느님을 만났다는 증거
맹모삼천지교(孟母三遷之敎)는 맹자의 어머니가 자식의 교육을 위해 세 번 이사를 했다는 말에서 나옵니다.
맹자가 어렸을 때, 어머니와 처음 살았던 곳은 공동묘지 근처입니다.
그는 무덤가에서 친구들과 놀더니 점점 곡하는 것을 따라하고, 장사(葬事)지내는 놀이를 하며 시간을 보냈습니다.
이를 지켜보던 맹모는 공동묘지 인근에서 시장으로 집을 옮겼습니다.
새로운 환경에 놓인 어린 맹자의 눈에 들어온 것은 시장에서 흥정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이제 친구들과 시장에서 물건을 사고파는 흉내를 내며 놀게 되었습니다.
맹모는 다시 이사를 하는데, 이번에는 서당 근처였습니다.
맹자는 새로 만난 친구들과 책을 넘기고 놀거나, 절하기 등의 예법을 따라하며 놀았습니다.
이 예화는 맹모가 주변 환경이 마음에 들지 않아서 교육을 위해서 더 좋은 곳으로 이사를 했다는 것으로 주로 해석됩니다.
그러나 일부는 맹자의 어머니가 삶과 죽음, 그리고 실제 세상이 돌아가는 것에 대한 가르침이라는 큰 의미의 공부(工夫)를 먼저 시작한 후에 책을 읽는 공부에 들어가게 했다고 해석하기도 합니다.
공부에 아이의 의지가 중요할까요, 환경이 중요할까요?
의지가 아무리 약해도 공부해야만 하는 환경이 주어지면 어느 정도는 하게 됩니다.
그래서 도서관에 가는 것입니다.
다 공부하는데 자신만 하지 않으면 뒤처지는 느낌 때문에 집에서보다 공부가 더 잘 되는 것입니다.
자기 인생을 망치고 싶은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우리 자신 안에 공부를 하고 싶은 의지와 하기 싫은 의지가 싸우는데, 하고 싶은 의지를 더 성장시켜 줄 환경이 있고 하기 싫은 의지를 성장시켜주는 환경이 있을 뿐입니다.
맹모삼천지교와 함께 환경의 중요성을 강조한 비슷한 말로는 화북에 심으면 탱자가 되고 화남에 심으면 귤이 된다는 의미의 귤화위지(橘化爲枳)가 있습니다.
좋은 학군이 있는 쪽의 집값이 비싼 이유가 바로 이런 이유 때문일 것입니다.
내가 심겨진 환경이 나를 만듭니다.
그런데 환경 중의 가장 중요한 환경은 무엇일까요?
‘사람’입니다.
사람은 사람과 가까운 것일수록 더 잘 따라합니다.
나무와 개가 함께 있다면 사람은 나무보다 개를 더 따라합니다.
공동묘지나 시장이나 서당에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면 맹자는 그 어떤 놀이도 즐겁게 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공동묘지에서 사람이 장사지내는 것을 보고 시장에서 장사하는 사람들의 모습을 보고 서당에서 선생님과 아이들을 보고 따라하게 된 것입니다.
행복하려면 행복한 사람들 가운데로 가라고 말합니다.
우리를 바꾸는 ‘진짜 환경’은 바로 우리 주의의 ‘사람들’인 것입니다.
그렇다면 내가 누구를 만나기를 선택하느냐가 내가 누가 되기를 선택하느냐와 같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예수님께서 광야에 나가신 것은 홀로 계시려는 이유가 아니었습니다.
다른 신경을 쓰지 않고 하느님 아버지와만 함께 계시기 위해 광야라는 환경을 선택하신 것입니다.
오늘 제1독서에 히즈키야 왕이 나옵니다.
그는 선친과 다르게 이방 민족과 자신의 힘을 믿지 않고 하느님을 신뢰하며 살았던 인물입니다.
그가 병들어 죽게 생긴 것입니다.
하느님은 이사야를 보내시어 죽게 될 것이니 준비를 하라고 시킵니다.
그가 죽게 된 것 때문에 울자 하느님은 불쌍한 마음이 들어 그에게 15년이란 시간을 더 주십니다.
그리고 간단하게 그를 치료해 주십니다.
히즈키야 왕은 자신이 하느님으로부터 은총을 받았는지를 어떻게 알 수 있느냐고 묻습니다.
하느님은 태양을 뒤로 돌려 그의 부친 아하즈의 해시계를 열 칸 뒤로 돌려주겠다고 하십니다.
태양을 뒤로 돌리는 것은 인간이 할 수 있는 행위가 아닙니다.
그런데 열 칸에서 열은 율법을 상징합니다. 율법의 완성은 사랑입니다.
사랑은 인간의 힘으로 할 수 없습니다.
하느님을 만나야 사랑을 할 수 있습니다.
히즈키야 왕이 15년을 더 살게 되는 것도 자신의 힘이 아니었습니다.
하느님을 만나면 하느님만이 해 주실 수 있는 것을 하게 됩니다.
그런데 왜 ‘아하즈의 해시계’일까요?
히즈키야 왕의 선친 아하즈는 아시리아와 동맹을 맺었던 인물입니다.
아시리아는 이방민족입니다.
아하즈가 아시리아와 동맹을 맺었다는 말은 자신의 환경을 하느님이 아니라
사탄의 손에 넘겼다는 말입니다.
그는 사탄과 동맹을 맺어 이웃사랑의 계명을 어겼습니다.
하지만 히즈키야에게는 당신 은총으로 그의 마음 안에서 용서와 사랑의 마음이 솟아나게 해 주시겠다는 뜻입니다.
사랑은 성령의 열매이기 때문에 사람이 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만약 우리도 용서하지 못하는 누군가를 기도를 통해 용서하게 되었다면 그것이 하느님께서 나와 함께 하신다는 가장 큰 징표가 될 것입니다.
내가 사랑을 하고 있다면 누군가에게 그 사랑을 받고 있는 것입니다.
고정원 씨는 자신의 일가족을 죽인 유영철을 용서하였습니다.
이는 사람의 힘으로는 할 수 없는 것입니다.
고정원 씨도 그것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밤새 기도했습니다.
그랬더니 다음 날은 5분 정도 미움이 사라지는 것을 느꼈습니다.
그렇게 기도의 힘을 믿었고 그러면서 하느님의 존재도 더욱 확실히 알게 되었습니다.
내가 1년 전보다 이웃을 더 사랑하고 있다면, 용서하는 것이 더 쉬워졌다면, 아무도 미워지지 않는다면 그건 그런 환경을 조성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 환경이 하느님과의 만남입니다.
하느님이 사랑이십니다.
나의 사랑이 증가하고 있다면 그는 하느님 안에 있는 것입니다.
하느님을 만난다고 하면서 미워하는 사람을 계속 미워한다면 사실 그는 하느님 안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하느님을 만나는 중에 실제로는 악의 세력과 만나고 있는 것입니다.
배를 흐르는 물 위에 띄우면 떠내려가는 것이 당연하듯이 누군가를 진정으로 만나면 변하게 됩니다.
내 변화의 흐름이 내가 만나는 분이 빛이신지 어둠인지 분별하게 해 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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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성인
성 아폴리나리스(Apollinaris)
신분 : 베드로의 제자, 주교,
순교자
활동지역 : 라벤나(Ravenna)
활동연도 : +1/2세기경?
같은이름 : 아뽈리나리스
성 아폴리나리스의 이름은 이탈리아의 라벤나 근교에 있는 산 아폴리나리스 인 클라세(San Apollinaris in Classe) 대성전의 묘비명 때문에 잘 알려져 있는데, 그에 따르면 그는 초대교회의 순교자 중 한 사람이었던 같다.
그러나 그가 언제 순교했는지 정확한 시기는 알 수 없고, 단지 1세기경으로 추정할 뿐이다. 그에 대해 언급한 최초의 문헌은 라벤나의 주교였던 성 베드로 크리솔로구스(Petrus Chrysologus,
7월 30일)의 “설교집” 128장이다.
그는 안티오키아에서 태어난 것으로 여겨지나 그에 대한 기록이 거의 남아 있지 않아 언제 주교가 되었는지는 알 수 없다. 다만 7세기에 기록된 행전에 의하면 사도 베드로(Petrus)에 의해 라벤나의 초대주교로 임명되었다고 한다.
그는 라벤나의 초대주교로서 약 26년 동안 주교직을 수행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전설에 따르면, 그는 여러 기적을 행하였으며 설교로 많은 사람들을 개종시켰고 우상숭배자들에게 엄격했다고 한다. 박해자들로부터 혹독한 폭행을 당해 거의 죽을 뻔 했다가 살아난 뒤에도 계속해서 라벤나 근교에서 복음을 전하던 그는 다시 체포되어 모진 고문을 받고 7월 23일 순교하였다.
그의 축일은 현 로마 가톨릭 전례력에서 7월 20일(이전 7월 23일)로 변경하여 경축하고 있다.
성녀 마르가리타(마리나)Santa Marina (Margherita)
성인의 활동지역 : 안티오키아(Antiochia)
성인의 활동연도 : 연대 미상
성인과 같은이름 : 마가렛, 마르가리따, 말가리다, 말가리따
그녀는 원래 피시디아의 안티오키아에 살던 어느 이교 사제의 딸이었으나,
어느 크리스챤 유모 밑에서 자라났다.
이리하여 크리스챤이 된 그녀는 자유롭게 신앙생활을 할 수 없었기 때문에,
집을 나와서 자기 유모와 함께
양을 치며 살았다.
그러나 그 지방의 장관인
올리브리우스가 우연히
그녀의 아름다운 용모와
높은 지식을 보고는,
자기 아내와 이혼하여 결혼코자 하였다.
그녀는 한발자욱도 움직이지 않자,
이윽고 크리스챤이란
죄목으로 투옥되었다.
그런데 여기서 용으로 변한 사탄의 공격을 받아 곤경에 몰렸을 때,
항상 품고 다니던 십자가로써
극적으로 퇴치하였다.
그 후 그녀는 수많은 방법으로
고문을 당하였으나,
오히려 그녀의 용덕을 지켜보던
관중들이 마음으로
크리스챤이 될 각오를 새롭게 하는데 도움이 되었을 따름이었다.
그녀는 참수치명하였는데,
실제로 그녀의 죽음은
그 지방에 수많은 개종자를
낳았던 것이다.
로마 순교록에는 "위대한 순교자 마리나"라고 기술한 뒤에
마르가리따의 행적이 나온다.
그러나 마르가리따가 보편적으로
알려진 이름이며,
쟌다크에게 계시를 준 성녀이다
확실한 연대는 모르나 이는 아마도 디오클레시아노 황제 때인
307년 경이었으리라.많은 시인과 문인들이 박해의 광풍에 휩쓸려
사라진 꽃 마르가리타의 장렬한
최후를 아름다운 말로 그려냈으며,
각 지방에는 그녀에게 봉헌된
성당이 많이 건립되었고,
많은 부인들은 그녀를 수호 성녀로
삼아 영구히 그녀의 아름다운
이름을 부르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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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성녀 마르가리타 (Margaret) - 안티오키아
오늘은 굳건한 신앙으로 사탄을 물리치는 성녀!! 안티오키아의 마르가리타 성녀에 대해 성인들에 관한 방대한 내용을 담고 있는 ‘황금전설’에 근거해 주요 일화를 소개하고자 합니다.
마르가리타는 안티오키아에서 출생했으며 부친의 이름은 테오도시오로서 이교도의 제사장이었습니다. 그녀는 신앙심이 깊은 유모에 의해 그리스도인으로 교육받으며 자라났습니다.
마르가리타가 15살쯤 되었을 때의 일입니다. 하루는 양떼를 돌보고 있는 유모와 함께 초원에서 아이들과 함께 놀고 있었는데 올리브리오라는 그 지방의 총독이 그곳을 지나다가 곱디 고운 마르가리타를 보고는 부하들에게 말했다고 합니다.
“저 처녀가 귀족이면 내 신부로 맞아들일 것이고, 그렇지 않으면 내 정부(情婦)가 되게 할 것이다.”
사령관에게 불려간 마르가리타는 이름과 자신이 귀족 출신이라는 사실, 그리고 그리스도 교인임을 당당히 밝혔다고 해요.
이교도인 총독은 소녀가 귀족 처녀라는 사실과 이름에 버금가는 아름다움을 지녔음을 놀라워하면서 그런 여인이 그리스도인이라는 것이 당치 않다고 했습니다. 그러자 마르가리타는 총독에게 그리스도의 죽음과 그의 영광에 대해서 읽었으면서도 그리스도를 믿지 않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라고 용기있게 말하면서, 그리스도는 우리 인간을 위해 고난을 받으셨고, 영원한 삶을 위해 부활하셨음을 당당하게 밝혔습니다. 이처럼 당당한 처녀의 답변에 화가 난 총독은 마르가리타를 감옥에 투옥시키라 명했으며 다음날 그녀를 관청으로 불러 심문했지요.
“어리석은 소녀여, 네 아름다움이 아깝도다. 우리들의 신을 믿으면 너에게 좋은 일이 있을 것인데 그리 함이 어떠한가?”
마르가리타가 대답했습니다.
“저는 땅과 바다와 모든 창조물을 떨게 하시는 하느님을 믿습니다. 그리스도는 저희를 위해 희생 제물이 되셨습니다. 저 역시 그분을 위해 죽기를 희망합니다.”
올리브리오 총독은 그녀를 형틀에 묵어서 몸을 쇠스랑으로 찍는 등 모진 고문을 가했고, 마르가리타는 살점이 떨어져 나가 형체를 알아볼 수 없을 지경이 될 때까지 고문을 당했다고 합니다.
마르가리타는 하느님께 자신이 싸우고 있는 적, 즉 사탄의 모습을 보여 달라고 기도했습니다. 그러자 거대하고 흉악한 용이 나타났는데 마르가리타가 성호를 긋자 곧바로 사라졌다고 합니다. 마르가리타를 그린 그림에서 용이 등장하는 것은 바로 이 때문이지요.
이 그림은 라파엘로가 그린 작품으로 성호경을 긋자 용이 사라졌다는 일화를 암시하기 위함인 듯 십자고상을 들고 있는 모습으로 그려졌습니다.
<출처 : 가톨릭굿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