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르상티망(ressentiment)”은 약한 입장에 있는 사람이 강자에게 품는 질투, 원한, 증오, 열등감 등이 뒤섞인 감정을 뜻하는 말이라고 합니다.
분노에 의한 원한, 복수심 이런 의미지만, 통상적으로 “가진 자에 대한, 힘 있는 자에 대한 원망, 질투, 증오 같은 심리”를 뜻하는 말로 많이 이해합니다. 자기합리화, 정신승리와는 다소 다른 것이, 자기가 우월하다고 느끼는 대상을 향해, 동경과 질투 차원을 넘어, 비난하고 조롱하는 자세를 견지하는 것입니다.
요즘 더민당의 이재명 대표를 보면서 이 ‘르상티망’을 생각하는 분들이 많을 것 같습니다. 자기 당의 현역 국회의원에 대해 동료들의 정성평가가 ‘0’으로 나왔다고 조롱하는 모습이나, 컷오프된 후보가 재심을 요구하는 것을 모멸감을 주는 말로 비웃는 듯한 태도 때문에 그럴 겁니다.
그런데 정말 이재명 대표의 의식세계가 ‘원한’으로 가득 찼다는 얘기가 나왔습니다. 그것도 문재인 전 대통령의 친문 세력에 대해 그렇다는 진단을 해서 놀랐습니다.
<더불어민주당 이재명 대표의 의식세계는 ‘원한’으로 가득 찼다. 그의 마음 한가운데엔 문재인 전 대통령을 정점으로 하는 친문 진영에 대한 르상티망, 즉 원한과 분노와 불안이 중층적으로 쌓여 있다. 이 같은 의식은 과거로부터 현재로 이어져 왔고, 미래에까지 통시적으로 연결됐다.
문 전 대통령과 친문에 대한 뿌리 깊고 회복 불가능한 르상티망, 이것이야말로 이 대표가 오는 4월 22대 총선을 앞두고 왜 그렇게 ‘친문학살’ 공천에 열을 올리는지, 왜 그렇게 ‘비명횡사’에 열중하는지를 말해준다.
◇과거 : 원한
이재명 대표는 2017년 문재인 대통령 집권 후 유례없는 검경 수사에 시달렸다. 친형 정신병원 강제입원과 관련된 직권남용권리행사방해, 이로부터 파생된 선거법 위반, 배우 김부선과의 스캔들에서 비롯된 허위사실공표 등 혐의에 대한 수사가 쉴 새 없이 그를 괴롭혔다.
2018년 지방선거에서 경기지사에 당선된 이후 이 대표에 대한 수사는 정점에 달했다. 이재명 사법 리스크의 원형이 이때 만들어졌다.
문재인과 이재명, 두 사람을 결정적으로 갈라놓은 것은 이 대표의 부인 김혜경을 겨냥한 이른바 ‘혜경궁 김씨’ 관련 수사였다. 2017년 대선과 2018년 지방선거 등에서 문 대통령과 친문 인사들을 명예훼손했다는 혐의로 아내에 대한 검찰 수사가 옥죄어오자, 이 대표는 비슷한 시기 논란이 됐던 문 대통령 아들 준용 씨 특혜 채용 허위 여부를 먼저 가려야 한다고 맞불을 놨다.
이후 ‘ 혜경궁 김씨 ’ 사건은 검찰에서 무혐의 종결됐지만, 문재인에게 이재명은 대통령 아들의 신변까지 거론하며 위협한 괘씸한 정적이었고, 이재명에게 문재인은 아내를 사법처리 상황으로 몰고 가며 자신을 정치적으로 매장하려 한 비정한 권력자였다.
수사에 몸서리쳤던 이 대표와 기자가 만난 건 2019년 6월 중순, 신촌세브란스병원에 차려진 고 이희호 여사의 빈소에서였다. 조문을 마친 이 대표가 기자 앞에 자리를 잡고 앉자마자 말했다. “기자님, ‘저들’이 말이죠. 나를 죽이려고 마구 폭탄을 퍼붓습니다. 내가 서 있던 자리가 완전히 폐허가 됐습니다. 저들이 낄낄거리고 웃으며 돌아서는데, 그 폐허 속에 제가 훌훌 털고 살아서 걸어 나옵니다. 저 이재명, 안 죽습니다.”
이 대표는 ‘저들’(문재인 정권)의 수사가 문 대통령의 대선후보 경쟁자였고 미래의 정적인 자신에 대한 탄압과 보복이라고 여겼다. 친문 진영에 대한 뿌리 깊은 원한이 이때 배태됐다.
◇현재 : 분노
이 대표에게 친문 진영의 ‘이재명 죽이기’는 현재 진행형이 됐다. 지난해 9월 체포동의안 국회 본회의 표결 때 이를 확인했다.
동의안 처리 하루 전 이 대표는 “검찰 독재의 폭주기관차를 국회 앞에서 멈춰 달라”고 의원들에게 부결을 호소했지만, 동의안은 가결 처리됐다. 야당 대표에 대한 체포안이 가결된 건 헌정 사상 초유의 일이었다. ‘윤석열 정권의 정치 탄압’에 항의하며 22일째 단식투쟁 중이었던 그는 단단히 충격을 받았다.
당시 본회의장 표결 참석 의원은 295명. ‘과반 출석에 과반 찬성’ 정족수에 따라 148명만 되면 가결되는데, 찬성이 149명으로 집계됐다. 국민의힘 소속 의원 110명+찬성 당론을 정한 정의당 6명+조정훈 시대전환 의원 1명+양향자 한국의희망 의원 1명+여권 성향 무소속 하영제·황보승희 의원 2명을 포함하면 120명. 민주당에서 최소 29명의 반란표가 일어났다.
이때부터 반년여밖에 남지 않은 22대 총선을 겨냥한 반란분자 색출작업과 분노의 복수혈전(설훈 의원 표현)이 시작됐다. ‘청년 이재명’ 시절부터 30년 이상 오랜 멘토였던 이한주 전 경기연구원장이 국회와 가까운 여의도에 사무실을 내고 ‘친명 인증’을 하기 시작했던 것도 그 무렵이었다.
이 대표의 복수혈전이 단순 추측에 의한 레토릭만은 아니었다. 이 대표 측근 김성환 의원이 최근 커밍아웃 한 데서도 잘 드러난다. 의원 평가 하위 20%에 비명 의원이 대거 포함된 것에 대해, 당 인재위원회 간사인 김 의원은 라디오에 나와 “이재명 대표 체포동의안에 찬성표를 던진 게 영향을 미쳤을 것”이라고 말했다. 수도권의 비명 중진 A 의원은 “이재명은 멈출 생각이 없는 사람”이라며 “끝까지 복수해야 한다는 생각을 갖고 있지 않다면 지금의 공천을 설명하기 어렵다”고 말했다.
◇미래 : 불안
원한과 분노로 가득 한 과거와 현재의 경험은 이 대표에게 잿빛 미래에 대한 극도의 불안을 가져다줬다. 대권을 노리는 그로서는 측근들을 대거 국회로 진출시켜 친명 강철대오를 구축하는 작업이 절실했다. 사법 리스크를 효과적으로 방탄하기 위해서라도 22대 총선은 절호의 기회다.
오랫동안 거대 정당을 지배해온 김영삼·김대중 양김을 제외하면 양당이 배출한 당 대표나 대통령은 평생 한 번, 많아야 두 번 국회의원 공천에 영향을 미친다. 노무현·이명박 전 대통령은 현직 때인 17대(2004년)와 18대(2008년)에 각 한 번씩, 박근혜 전 대통령은 여당 비상대책위원장 시절인 19대(2012년)와 집권 당시인 20대(2016년) 등 두 번 공천권을 행사했다. 윤석열 대통령처럼 공천권을 단 한 번 제대로 행사하지 못한 권력도 있다.
반면 문 전 대통령은 3번이나 공천에 막대한 영향력을 행사했다. 2012년 대선 유력 주자 시절에 한 번, 당 대표를 지냈던 2016년 총선에 또 한 번, 그리고 대통령직에 있던 2020년에 다시 한 번. 4년 전 21대 총선으로 초거대 정당이 된 민주당 초선에서 다선까지 대부분의 현역 의원이 그의 손을 탔다.
이 대표는 2년 전 보궐선거로 여의도 중앙무대에 입성한 0.5선의 정치 신인이다. 현역 의원 중에 자기 손으로 배지를 달아준 사람이 단 한 명도 없다. 친명으로 분류되는 대부분의 의원이 생사고락을 함께한 ‘동지’가 아니라 언제든 등을 돌릴지 모를 ‘이해당사자’들이다. 그의 국회의원 공천권 행사는 이번 총선이 처음이다. 2027년을 향한 대선 가도에서 방탄과 대권 두 개를 모두 충족시키려면 국회에 찐명의 참호를 파고 찐명의 진지를 구축하는 수밖에 없다고 판단했을 것으로 보인다.
◇복수혈전
이 대표는 주류교체를 통해 권력 불균형의 역사를 뒤집기로 했다. 원한과 공포와 불안은 과거엔 자기방어의 메커니즘이었지만, 지금은 미래를 향한 공격 기제다. 그의 머릿속엔 문 전 대통령이 요구했던 무지개 통합 대신, ‘이재명당’을 완성하기 위해 모든 걸 녹여버리는 용광로 단결이 있을 뿐이다.>문화일보. 허민 전임기자, 행정학 박사
출처 : 문화일보. 오피니언 허민의 정치카페, 文정권의 수사에 원한 사무쳤던 이재명… ‘친문학살’ 공천으로 복수
2007년 대선 때 정동영 후보를 지지하며 정치권에 입문했던 이 대표는 개인기로 성남시장, 경기도지사 선거에서 계속 당선됐지만 당내에선 여전히 “행정가일 뿐, 중앙정치 경험이 없어서 안 된다”는 박한 평가를 받았습니다.
2017년 문재인 전 대통령과의 대선 경선 때 ‘비문’으로 찍힌 뒤론 완전히 ‘미운 오리 새끼’가 되었고, 원내 측근도 사법연수원 시절부터 함께 한 정성호 의원 등 극히 소수였습니다.
그렇게 음지에서 버티던 이 대표는 2021년 20대 대선 경선 때 이낙연 당시 대표가 삐끗하면서 자신에게 넘어온 기회를 놓치지 않았고, 당 대선 후보가 된 그는 다시는 ‘주류’ 자리를 놓치지 않겠다고 각오를 했는지 이듬해 대선에서 지고도 보궐선거에 나가 기어이 의원 배지를 달았고, 8월 전당대회까지 직행했습니다.
그러고는 민주당의 오랜 체계에 야금야금 손을 대서 ‘이재명 방탄용’이란 비판을 샀던 당헌 80조를 개정했습니다. ‘부정부패로 기소 시 즉시 당직을 정지’하도록 한 당헌 80조에는 ‘정치 탄압 등으로 인정되면 예외로 한다’는 내용이 추가했는데. 이 대표는 실제 지난해 3월 기소 당일 이 예외조항을 이용한 ‘셀프 구제’를 통해 당 대표직을 유지했습니다.
지난해 12월에도 당헌을 개정해 전당대회 때 대의원 투표 비중을 줄이고, 대신 권리당원 비중을 대폭 키워, 자신에게 배타적이던 현역 의원과 지역위원장 등 직업 정치인의 권한을 줄이고 강성 지지층에 힘을 실어주었습니다.
‘개딸’들의 입김이 거세지면서 자연스레 원내에서도 ‘친명 호위무사’ ‘친명 호소인’을 자청하는 ‘신(新)친명’계가 주류가 됐는데 요즘 그의 엄청난 총선 공천을 보면 이것도 차기 전당대회까지 내다본 사전 작업이었습니다.
이재명의 르상티망이 이제 어떻게 변화할지 총선 뒤가 궁금합니다.
時雨